부끄러운 생애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에우튀프론 : 다른 데서도 그렇지만 특히 법정에서 그런 논쟁이 끊임없이 벌어집니다. 사람들은 별의별 부정의한 행동을 다 하고서는 벌을 받지 않으려고 무슨 짓이든 다 하고 무슨 소리든 다 하지요.
소크라테스 : 그들은 자신들이 부정의한 행동을 했다는 것을 인정하기라도 하는 겁니까, 에우튀프론? 그것을 인정하면서도 자신들이 처벌받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하는 겁니까?
<에우튀프론> 플라톤 강성훈 옮김
첫 문장이 소설의 행복이라지만, 첫 문장을 너무 고심하면 쓰여지지 않는다. 비빔밥에 이것 저것 넣다보면 오히려 불쾌해지는 것 처럼, 그냥 써내려갔던 글들이 나중에 보면 그것이 최선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나친 경험은 아무래도 독일 때도 있는 것 같다. 첫 문장을 고심하는 것은 분명 이전의 경험이 지금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끔은 질러야 할 때가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다른 예를 하나 들자면, JLPT 공부하던 시절 독해 문제집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아마 우리나라 1세대 수필가에 해당하는 피천득 정도 되는 인물이 쓴 글 같았다. 그는 전철에서 아가씨가 눈에 자기 멋대로 안약을 넣는 것을 사도私道를 걷는 길이라고 평한 글이었다. 아마 일본에는 전통적으로 안약 넣는 행동 지침 요령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적어도 그런게 없더라도,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불문율이라는게 존재했던 것 같다. 메이지 유신이 일어난지 30년 정도 되었을 때, 이미 시대는 과거와는 달랐을 것이다. 노인의 눈에는 안약 넣는 아가씨가 얼마나 새롭게 보였을까. 아마 우리나라라면 뭐 그런것 까지 신경쓰냐 이럴지도 모르겠다. 사실 한국인들은 지나치게 담백한면이 있는 것 같다. 나도 그렇다. 처음 이 글을 읽었을 때 느낌이라는건, 글쓴이가 이상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으로 글이 치다를 때 까지, 나는 전혀 이상한 느낌이 내 속에서 일어난게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의 논리 속에 동화되어 잠깐이나마 이세계에 다녀온 것이다. 그들의 안약 넣는 방식이 정도가 있는지는 몰라도, 그것을 아쉽게 바라보는 노인의 시선이란 무엇인가 생각해보자. 나이듬이라는 건 경험의 첨예함을 말한다. 그러나 그런 경험이라는게 오히려 자신들의 이상향을 완전히 무시하고자하는 일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중학생 시절 잠깐 남녀공학에 다닌 적이 있었는데, 그 시절 여학생들에게 선생님들이 하던 말씀이 생각난다. "네 들은 화장 안해도 예쁠 때다." 이런 말들은 도처에 깔려있다. 튜닝의 끝은 순정이라는 것을 나이 든 사람들은 안다. 그러나 젊은 사람들에겐 씨알도 안먹히는 소리라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노인들은 순정을 바란다.
플라톤 <국가>에서 어딘가 이런 내용이 있다. 젊은이들이 오히려 철학을 해야한다고 말이다. 이건 나도 동의하는 생각인데, 지극히 실용주의적인 관점에서 보면 젊은이들이 철학을 해야한다. 그것은 철학의 쓰임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시기가 젊을 때이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서 인문학이 쉬워보이는 것은 경험의 영향이다.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다보니, 어디선가 해당화도 보고, 어디선가 파리잡이 꽃도 본다. 어디선가 본 것들과 그것에 대한 생각들이 많아진 시기가 노년이기에, 학문이 쉬워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들 것 같다. "조금만 빨리 알았더라면 좋았을 걸." 실로 인문학 뿐만 아니라 학문 전체는 젊은 사람들이 더 용이하게 쓸 수 있다. 경험이 미숙하기에 이론들을 접하여 실패를 줄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젊은 사람들에게 실패란 없지만, 시행착오를 줄이는 방법은 존재한다. 극심한 가난을 일부로 겪으러 갈 이유는 없을 수도 있는 것 처럼, 각자마다 가장 빠른 길이라는게 있다. 그것을 탐색하는 방향성을 지도하는게 학문이다. 그렇기에 오히려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글쓰기란 나는 가끔 '순진한 것들을 모조리 피해가는 것' 이라고 생각 할 때가 있다. 내가 순진하다고 느끼는 것은 쓰고 싶지 않다. 따라서 쓰고 싶지 않은 것들을 피해가는 것이 글쓰기라는 것이다. 경험이라는 것도 생각이 익지 않으면 날 것이기 때문에, 섣불리 써버렸다가는 낭패를 본다. 농익는 다는 것은 결국 과실의 화려함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소재가 늙기를 기다림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오히려 화려함이란 늙는다는것이다. 젊은 사람들은 화려함과 거리가 멀다. 많은 곡선들이 관능과 경험을 상징하듯이 노년의 주름은 외려 관능에 속하는지도 모른다. 나이든 여자들의 화장이 더 진한걸 바라보자. 애초에 그것이 더 어울리는 처사인지도 모른다. 젊은 사람들에겐 경험이라는 것이 없기에, 나이듬을 동경한다. 경험의 풍부함을 동경한다. 그러나 반대로 노인들은 젊은 사람들의 순정을 동경한다. 이미 자신들은 겪어내어 그것이 무엇인지 앎에도 말이다. 이런 아이러니를 바라보자면 골이 아파온다. 둘은 사실 잘못생각하는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젊다면 젊은대로, 늙어간다면 늙어가는대로 살아야하지 않을까. 사실 젊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은 단선적으로 흘러가는데 그런 흐름에 따르면 늙어간다는 것이 개념적으로는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젊음은 환상에 불과하다. 오히려나이들어감이 우리에게 익숙하다. 젊음은 가지고 있어도 모른다지만, 애초에 가지고 있던게 아닌지도 모른다.
경험한다는 것은 하나의 측면에선 잃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극한의 화려함으로 나타난다. 직장인들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은 경험의 농밀함이 아닌가. 그러나 겪어나갈 수록 그런게 별 의미 없다는걸 깨닫는 것인지 젊어지고만 싶어하는 것 같다.
피아노를 벌써 대략 10년 이상 친 것 같다. 클래식 음악에 대해 십 년 이상을 경험하고 생각해 본 셈이다. 지금 생각하는 음악이랑 처음에 생각했던 음악이랑은 당연히 다를 수 밖에 없다. 독자들은 내가 경험의 역설에 대해 말하는 것을 이 쯤되면 알아차릴 것 같다. 내 글의 소재라는게 항상 뒤죽박죽이니 조금은 양해를 바란다. 하여튼 파아노에서는 기술의 측면만이 보인다. 연주자의 음악에 대한 사상은 연주에서 뭍어나오지만, 대게의 경우 기교만을 관객들은 바라보는 것 같다. 그도 당연한것이, 기술을 넘어선 영역은 고수의 영역이지 대부분에게 허용되는 영역은 아니기 떄문이다. 나는 피아노를 하면서 기교라는게 어쩌면 언젠가는 도달하기에 그렇게 신경쓸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한참 머물러있다. 그러나 피아노 입시라는게 대게 기교를 요구하기 때문에 어려서 부터 스킬에 매진하게 만든다.
나는 음악 교육이 대게 이런 스킬에만 머무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애초에 그 이상을 교육할 수는 있는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곡에 대한 심상이나 배경을 설명해줘도 레스너가 학생에게 이렇게 치라고 강요만이 존재하지 학생을 설득하지는 못하는게 요즘의 교육의 실상인 것 같다. 사실 성적이라는 걸 신경 쓰기 때문에 그런 일이 발생한다. 단기적인 성과를 비춰야하기 때문에 그런 것에 치중하게 된다. 그러나 음악을 바라볼 때는 이젠 그런 것에서 멀어져야 한다. <스크리아빈 에튀드 op.8 no.12>를 예로 하나 들어보겠다. 나는 처음에 누구나 그렇듯이 호로비츠의 연주를 먼저 들었다. 그리고 이 곡은 스크리아빈 본인이 직접 연주한 음원도 존재한다. 그러나 조금은 기상천외한 해석을 내놓은 연주자가 있는데, sultanov의 연주이다. 이 곡은 짧으니 안들어 봤어도 들어 볼 만하다. 2분 정도의 곡이다. 이 사람은 중간 중간마다 멜로디였는지 모를 곳에 강조를 두었다. 새로운 해석이고, 젊은이다운 패기 넘치는 해석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악보에는 내 기억에 그 곳에 강조하는 악상 표시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술타노프의 연주는 나를 설득시켰다. 나이든 심사위원들은 이것을 어떻게 바라볼진 모르겠다. 나이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젊은 색채라는 것은 이런걸 말하는게 아닐까? 미켈란젤리나 폴리니 같은 깔끔함, 지메르만 같은 원숙함이 표준적인 피아노 음악의 교과서 처럼 기능하지만, 젊은이들에게 들어내야 하는 것은 원숙한 기교가 아니라 이런 패기가 아닌지 가끔 생각해보게 된다. 경험이라는 것은 어찌보면 굴곡이기에 화려한 맛이다. 그러나 이런 슴슴하고도 아찔한 연주는 젊은 사람들만이 할 수 있다. 그것을 부러워 하면서도 무언가 나이든 평론가들은 좋게만 바라보지는 않을거라는 예감이 든다. 생각이 열려있기는 노년에 접어들면 힘든 법이다. 그들에게 꼰대라고 욕하기 보다는 그런 힘듬을 조금은 이해하는게 필요하다.
나는 경험을 녹여낸 글 보다는 사유의 명징함이 들어있는 글을 좋아한다. 경험이야 소재로 쓰이기 마련이지만, 작가의 천재성은 이런 명징함에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노골적인 전쟁 묘사를 그리지 않고도 전쟁 소설이 위대하다는 평을 받은 작가들을 보면 그것을 명징하게 그려낸다. 오오카 쇼헤이의 <포로기>,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리나> 같은 작품말이다. 읽다보면 참혹한 비극보다는 유식세계를 명징하게 그려낸다.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한 발짝 거리둠으로서 우아하게 그려낸다. 반면 한강의 <소년이 온다> 같은 작품 처럼 정치적이고 폭력적인 시대상을 그려내는 소설도 존재한다. 소년이 온다를 읽다 보면 꽤나 불편할 수 밖에 없다. 한강 역시 그것에서 한 발짝 거리두기를 실천하는 글쓰기를 하는 것 같지만, 그래도 감정적인 동요를 불러일으키는 면이 비교적 큰 것 같다. 사실 이런 소설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경험을 이야기 할 지라도 사유를 쓴다는 것은 한 발 물러서기이다. 그렇기에 감정적 개입이 최소화되어 우리를 편안하게 한다. 나는 나의 일기도 들춰보지 않는다. 오히려 쌓아둔 일기들을 버려버렸다. 그것들을 가지고 있는게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다. 어찌보면 생에 한번도 펴볼까 말까 한 것들을 왜 그리 열심히 썼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버려놓고도 후회가 된다. 그래서 앞으로 쓴 글들은 되도록 삭제하지 않도록 마음을 정해두었다. 하여튼 경험이 녹은 글이라는 것은 불편하다. 애써 불편함을 외면하려는 나의 시도인지도 모르겠으나, 그것이 천재적이지 않다는 생각은 든다. 경험은 천재적이진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로 천재적이라고 평가하는 것들은 내면의 것이다. 상대성이론의 단초가 속속히 나온 시대에서 아인슈타인이 그것을 종합한 것은 경험에 대한 찬사는 아니다. 자신이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조합하여 결론을 내놓았는지에 대한 경험과 실천의 합일에 대한 찬사인 것이다. 따라서 경험만이 위대하지는 않는 법이다. 위대함이 결여된 글은 한 쪽으로 경도된 글이다. 따라서 내면과 외면의 균일함이 중요하다.
나 처럼 글에 여러가지를 살 붙여내는게 유려하지 못한 글쓰기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렇게 쓰는 이유는 앞서 말한대로, 첫 문장의 고뇌를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오로지 떠오르는 대로 써나가기에 나의 글의 초고는 매우 빠른 속도로 써낸다. 그것을 수정하는데 문단 전체를 지우고, 바꾸고, 수정하는지 몰라도 대게 글은 빠르게 쓴다. 나태주 시인이 유퀴즈온더블럭에 나와서 한 이야기를 떠올리자면, 시라는건 오래걸리면 죽을 쑨다는 것이다. 나도 이에 어느정도 동의한다. 전광석화 처럼 써야지 그것이 울림이 있다. 이미 숙성이 끝난 열매가 땅에 떨어질랑 말랑 할 때 우리가 수확하는 것이다. 농익은 후의 일은 썩어감 밖에 없기 때문에, 글이라는 것도 썩어가기 전에 써야한다. 그렇기에 빠르게 나오는지도 모르겠다. 생각이 스쳐서 영감이 떠올라 쓰는 글이라 할지라도 대게의 경우는 과거에 오랜 숙성이 준비되어있었다. 어떤 것을 볼 때 그것이 형식에 맞춰서 군대식 열맞추기로 조율 되는 것이다. 그것이 분산되어 이곳 저곳에 흐트러져 각자의 삶을 살고 있었을지라도, 낙엽을 본 경험 하나가 기준이 되어 오와열을 맞춘다. 경험이란 내면의 형식이지 오히려 구체적인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니가 맞네 내가 맞네 하는 것은 경험에서 나온다. 그렇기에 우리는 싸우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맑디 맑은 정신으로 글을 쓰거나 예술을 하거나 할 수는 없는걸까 생각해본다. 역사학자 임용한박사가 유튜브에서 자신의 일화를 이야기한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자신이 열강을 한 강의의 수강생이 자신에게 그 내용을 어디에서 본거냐고 물은 것이다. 임용한 박사는 역사학이 사실 이전에 학자라면 자신의 주장을 내세울줄 알아야 한다면서 그런 내용을 비판한 영상이었던 것 같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생각이 첨예하다는 것은 학자의 덕목이다. 내가 이것을 글에 끌어 온 것은 경험의 첨예성을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경험이라는 것은 나이듬에 종속되지만, 오히려 타인에게 날카로운 법이다. 날카로운 검이 화려하고 잘 제련되어 그 선이 세련되고 관능적이지만, 그 만큼 사물을 깔끔하게 베어낸다. 젊은이의 미숙함이라는 것은 외려 이런 경험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젊다는 것을 화려하다고 느끼지만, 오히려 전혀 화려하지 않은 것이다. 애초에 외양에만 치중된 반쪽짜리이기 때문이다. 나이들어가면서 끝나는 것도 있기 마련이고 그 만큼 첨예해진다. 그것을 안좋게만 바라보는 것은 우리의 부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