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음악
물리학은 시간이 뭔지 아직도 모른다고 한다. 그도 그럴것이 시간은 형이상학적이기 때문이다. 음악은 주로 시간예술로 분류되는데, 형이상학적인 측면과 결부되어 있음을 여실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미술이 우리의 물질로 남겨진다면, 악보라는 매개로 음악 역시 물질로 남겨지지만, 음악 그 자체는 물질이 아니다. 그것은 공중에서 파동의 형태로 외부의 파동과 보강되어 산개한다. 그렇다보니 잡힐듯 말듯 우리의 귀를 괴롭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뭔가 철학이 자리잡기에 가장 좋은 매개가 음악이 아닌가 생각해보지만, 아도르노를 제외하고는 음악이란 것에 대해서 사유한 철학자들이 그렇게 많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철학자들은 미술 평론을 꽤나 많이 천착해 놓았으면서도, 형이상학적인 음악에 대해서는 왜 그리 많은 것을 남기지 못했을까? 나의 생각은 철학자들조차 보이지 않는 것에는 무력하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다루는 형이상학자들이 보이지 않는 대상에 대해서 무력하다는게 뭔 말일까. 그것은 말장난 같이 보이지만, 단순히 이야기 해서 그들도 보통의 인간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눈에 보이는 것들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그게 둘 이상이 되면 애를 둘 키우는 정도의 힘이 드는 것 같다. 음악사에서 헤겔 급의 절대정신을 가진 인물은 베토벤일 것이다. 그의 음악적 실천과 음악의 형이상학적 기능은 아주 잘 수행되어 있는 축에 속한다. 그러나 리스트, 쇼팽, 라흐마니노프 이후의 다른 현대 음악가들에 나아가기 까지 음악의 형이상학적인 면에 주목한 인물은 바그너 정도 밖에 없는 것 같다. 이후의 수학 이론으로 음악을 연결한 이들은 형이상학자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니체의 말마따나 음악에는 디오니소스적인 측면이 강한 것 같다. 상승과 도취가 음악의 본질이라고 본 것이다. 아폴론의 태양은 음악에서 어디까지 허용되는 걸까. 사실 철학자들은 음악에서 니체 정도의 가능성 밖에 보지 못한게 아닐지 모르겠다. 비제Bizet의 음악을 찬미 했던 프랑스 애호가 니체는 음악에서 무엇을 들었는가. 로코코적인 화려함과 바로크적인 장식음만이 음악의 본질이라고 여겼던 것일까.
미술의 형이상학도 있기야 하겠지만, 음악은 반대로 형이상학이 여실히 드러나는 객체이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하게 만드는 강렬함이 음악에 숨어있기 때문에, 우리가 음악을 오해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음악의 본질은 니체가 <비극의 탄생>에서 분류한 예술관에 따르면 지극히 아폴론적인 것에 부합한다. 그러나 그 성질이 디오니소스적인것으로 우리는 그것에 대해 착각하는지도 모른다. 쇼펜하우어는 음악에 대해 가장 상등한 예술이라고 평한적이 있다. 그것은 아마 대상을 초월한 유일한 예술이라는 것에 있는 것 같다. 쇼펜하우어의 의지라는 것은 불교의 공空으로 본다면, 아마 의지로 바라본 세계는 모든게 비어있을 것이다. 따라서 오로지 우리 인식 안에서만 대상을 포착할 수 있다는 유식불교적인 사상이 바라보는 예술이란, 아마 존재하지도 않는 대상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드는 허무한 것이라고 치부될만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오직 음악만이 대상을 가지지 않는다. 따라서 쇼펜하우어는 진정한 의지의 발현이라고 본 것이 아닐까. 미술의 본질이 대상(타자)라면, 음악의 모체는 주체이다. 음악은 타자화 시키기가 불가능하다. 미술품을 내놓는 순간 타자화된다. 그렇다면 악보를 타자화시킬 수 있는가? 악보가 타자화 되는 순간은 그것이 그 자체로 그림으로 보여질 때만 타자화 된다. 음악의 본질이라는 음표와 악상 기호들의 해석에 중점이 있기 때문에 음악은 주체에서 끝나게 된다.
따라서 미술이 과학이라면, 음악은 수학이다. 음악은 주체의 형식 과학인지도 모른다. 음악은 유물론으로 바라보기 힘든 존재이다. 음악학자 후고 리만조차도 자연과학적인 방법론으로 음악을 바라보고자 했지만, 음악안에 내재된 논리로 밖에 그 방법론을 밀어붙이지 못한 것을 생각해보면, 오로지 음악은 형이상학으로 남아야하는게 아닌가 생각이든다. 해석이 존재하는 순간 주체에 귀속된다. 미술품은 오로지 타자로서 기능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타자라고 볼 수 있을까.
그렇기에 철학자들은 음악을 타자라고 보지 않은 것 같다. 현상학자들은 지나친 형이상학을 배제했고, 분석철학자들은 형이상학을 철폐하고자 했다. 그러나 문화라는게 어디까지나 형이상학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음악의 디오니소스적인 측면만을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지금의 시대는 물자체 이후의 시대는 아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영향력은 아직까지도 존재한다. 유물론이 사회주의를 만들어 내었지만, 사회주의를 채택하지 않더라도 그것의 잔향은 자본주의 안에 곳곳이 침투되어 있다. 그것을 나쁘게만 바라보는 것은 이념 싸움의 잔향이지만, 그것을 명확히 응시해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문화 조차 표면적으로 바라보는게 아닐까? 우리나라의 대중문화가 전세계에 퍼진것이 우연은 아닐 수도 있다. 한국인들의 가치관은 전통과는 단절되어 있다. 일본의 귀족 문화처럼 두드러지게 이어지지는 않는다. 중국인들은 문화대혁명으로 모든 전통을 척살했지만, 아직도 그들은 재생산할 과거 문화와 드넓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전쟁으로 일제의 찬탈로 전통을 모른다. 우리의 모습이 미국과 가장 닮아 있는지도 모른다. 실용주의적인 관점이 넘쳐나는 것도 그렇다.
젊은 사람들은 형이상학자가 되기는 힘든 것 같다. 육체가 노쇠해서 정신만이 뚜렷해질 때야 비로소 형이상학자들이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피아노라는 게 생각해보면 엄청난 체력을 요하는 걸 나는 알고 있다. 나를 가르쳐 주신 선생님들은 피아노가 중노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물론 진짜 중노동 보다는 덜 하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렇기에 오히려 젊은 형이상학자가 필요한게 아닐까. 음악은 선전용으로 쓰여질 때 위험하다. 그러나 음악이라는게 강항 감동을 준다면, 왜곡된 형이상학도 주체에게 심어주기 좋다는 말이 된다. 그렇기에 음악의 아폴론적인 측면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