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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에 대한 수학적 분석

언어 너머의 너머

by abecekonyv

프랑켄슈타인이 우리에게 새로운 이유는 무엇일까.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까지 새롭지 않은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괴물의 연성이라는 것은 원래 있던 것들의 기묘한 조합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은 사실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의 통념에서 벗어난 조합이 있을 뿐이다. 괴물에 대한 수학적인 통찰을 어떻게 이끌어 낼 수 있을까. 나는 사실 통섭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이야기하고 싶다. 통섭이라는 것은 괴물이다. 그것이 현실세계에 존재 할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존재 여부에 따라 그것의 장단점이 명확하다.


학문이라는 형이상학은 실재위에 있으므로, 실재의 차원이 n이라면, 학문의 차원은 n+1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만들어내는 통섭이라는 괴물은 n+2일 것이다. 마이클 인우드의 저서 Hegel에는 메타-언어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분석이 쓰여있던 걸로 기억한다. 헤겔의 관점에서 언어는 이미 추상화 된 것이다. 따라서 언어학 자체가 현실을 초월한 하나의 축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그런데 여기서 언어학 그리고 심지어 '메타'라는 분석이 들어간다면, 그것은 n+2를 넘어서게 된다.(n+3) 내가 단순하게 이해하는지도 모르겠으나, 나의 분석은 여기에서 그친다. 계속 연쇄로 올라갈 수는 있겠으나, 그 이상의 필요성은 추동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는게 나의 생각이다. 괴물은 n+2의 층 부터 생성된다. 그것이 현실에 존재하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n+1 차원에 존재하는 것들 조차도 현실에는 엄밀히 말하면 없는 것이지만, 그것은 실재에 대한 해석의 장이자 분석을 도와주는 학문의 차원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n+1 정도의 차원은 쉽게 허용되는 것 같다.


차원이 올라갈 수록 연쇄적인 수학적 귀납법으로는 만족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보자. 상위의 차원에서 아래의 평면으로 내리꽂는 사영Projection의 측면에서 바라보자. 그것은 현실에서 어떻게 기능하게 될까. 수학에서 역명제란 참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따라서 사영이라는 함수해석학적 연산자는 우리에게 그 자체로 분석의 대상이 된다. 우리가 형이상학적 키메라를 연성할지라도 그것이 참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노버트 위너의 사이버키네틱스는 그런 학문적 통섭의 극한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러나 항상 염두해야 할 것은 그것이 현실에서 어떻게 기능하느냐이다. 우리는 괴물을 무한대로 만들어 낼 수는 있지만, 그것이 현실에서 어떻게 발현되는지도 관찰해야한다.


통섭의 장점은 새로운 입각점이 생겨나서 비선형적인 폭발을 이뤄낸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던 원래의 인식으로 도달 할 수 없었던, 새로운 지평을 넓히는 도구로서 기능한다. 그러나 반대로 통섭이 부정적이진 않더라도, 현실에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아 부유하기만 하는 상상 속의 망령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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