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하기 힘든 이유
이제는 과거 만큼 게임을 하기가 힘들다. 온라인 게임이든, 고전적인 콘솔게임이든 무엇이든 하기가 힘들다. 사실 다른 이유를 찾기보다는 내가 많이 게을러진거고, 취향의 방향이 달라진 것 같다. 그러나 유튜버 침착맨이 옛날에 가끔 했었던 말이 있다. 게임을 안해도 인방(인터넷 방송)을 많이 보게 된다는 것이다. 나도 이런 움직임으로 게임에 대한 욕구가 발현되는게 아닐까. LCK보는 사람 중에 리그오브레전드 안하는 사람도 많을거다. 옛날에 했었지만, 이젠 질려버렸고, 솔직히 애써 컴퓨터 앞에 앉기는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을거다. 나 처럼 말이다. 이미 컴퓨터야 노트북 밖에 없고 팔아버린지 오래다. 노트북은 게임하기에 좋은 컴퓨터는 아니다. 일이나 학업에 치중되기 때문에. 하여튼 게임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은 '울펜슈타인'이라는 게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서이다. 난 이 게임을 플레이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연히 본 스토리 영상에 혼이 팔려서 4시간을 휴일에 쭉 흘려보냈다. 나는 하지 않아도 이렇게 게임 스토리 스포일러를 항상 당하기에 스포일러에 예민한 편은 아니다. 애초에 철칙이 경험하지 않는다면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믿음 때문이다. 스토리를 안다 할지라도 플레이 해본 사람만이 아는 감각은 내가 흉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검은신화 오공', '세키로', '배틀필드' 같은 게임들의 스토리를 조금 씩은 알고있지만 단 하나도 플레이하지 않았다. 내가 이런 대쪽 같은 철칙이 있더라도 먼저 맛을 본다는게 아쉬운건 마찬가지긴 하다. 그러나 사지도 않을 게임을 애써 플레이하자니 귀찮고, 신작 게임들이 출시 될 때마다 관심은 생기니 나도 현실의 욕구에서 갈팡질팡한다. 나의 오랜 고민이다.
하여튼 울펜슈타인은 '세계 2차 대전에서 나치가 승리했다면' 이라는 내용이다. 스토리의 구체적인 설명보다는 게임의 스토리에서 사람들을 어떻게 취급하는지에 집중하겠다. 전체주의 파시즘은 사람을 국수주의나 특정 사상에 종속시키는데, 주체의 말소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 게임에서 눈에 띄는 것은, 병사나 개인이 소모품처럼 취급되는 그 시절의 잔악함이다. 나치들은 정신병자, 장애인, 사회적 약자들을 죽이는데 망설임이 없다. 아리아인들은 그런걸 겪을 일이 없다는 완고한 자부심 때문이다. 솔직히 게임이지만 나치시절 독일도 이것 보다 더 했을거라는 생각이들기에, 보면 볼 수록 털이 쭈뼛쭈볏 서게 되는 스토리이다. 인간의 목숨이 파리 떼와 같아서 전기파리채 한번 싹 휘두르면 타죽는 파리를 보는 것 같다. 퓌러(히틀러)의 눈 밖에 벗어난 사상이나 행동은 즉결 처분된다. 그러나 그것이 당연시 되기에 나치가 강점한 미국의 길거리에서도 나치 찬양적인 부유하는 말들을 내뱉을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묘사한다.
레비나스 철학은 타자의 철학이라 불리운다. 그러나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타자에 대해 생각 할 수 밖에 없는 생애이다. 그는 나치에 의해 수용소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타자와 인간 존재의 무력함을 보면, 타자에 대한 철학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이다. 밤 공원 산책하다 보면 우리는 노란 형광등 스탠드에 몰린 잡벌레들을 보게 된다. 우리는 그것들을 하나 하나 개별적인 벌레 주체로 보지는 않는다. 우리에게 해가 되는 해충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저것들은 다 죽어야한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 나는 파시즘의 모체가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주체는 견디기 힘들다. 시간이 필요한 존재이다. 따라서 요즘의 시대는 공감이라는 말이 넘쳐난다. 그러나 넘쳐나기에 오히려 주체에 대해 생각을 별로 안하는지도 모르겠다. 외부 실적에 치여 타인에 대한 생각이 피로해지기 때문이다. 피로해지면 타인에 대해 별로 생각할 게 없다. 보편적인 기준에 맞춰 생각하지 않고 괴로워하는 타인이 외려 멍청해 보이기 때문이다. 벌레들은 자신들의 스탠드 빛을 추종한다. 그것은 자신들의 태양이자 자신들의 퓌러(지도자)이다. 그들의 태양이 전원이 꺼지는 순간 벌레들은 방황한다. 그것은 자신들의 주체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생각은 퇴근 길 서울 지하철에서도 흔하게 느낄 수 있다. 꽉 껴있는 퇴근시간 지하철은 몹시 불쾌하다. 타인에 대한 생각보다는 자신의 불쾌함이 더 중요해진다. 나는 여기서 가끔 주체의 견디기 힘듬을 느끼는 것 같다. 주체를 견디는 것은 시간을 요하여 인간에게 엄청난 수고를 들이게 한다. 따라서 콩나물 시루같은 전철 안에서 한 칸 안의 사람들을 헤아리는 것은 범인의 일은 아닌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파시즘의 위험성을 알고 있다지만, 이미 망각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공감이라는게 보편적인 기준의 공감이다. 너무 벗어난 내용을 타인에게 전달하기란 힘들다.
프랑스어 강사 정일영 선생님이 유튜브에 하는 이야기가 있다. 프랑스의 교육이라는 건 자신이 보편적인 기준의 답을 써놓지 않더라도, 자신의 논리체계에 부합하는 글을 쓰는게 학문하는 자의 태도라고 가르친다는 것이다. 델프 B2 문제집을 가지고 있는데, 문제를 보면 질문에 대한 옳고 그름을 체크하고 자신의 견해를 불어로 쓰라는 란이 있다. 이걸 보면 그들의 교육관이라는게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교육이 익숙한 나로서는 바로 이런 생각이든다. 형평성의 문제가 드러날 것 같다고 말이다.
형평성의 문제라는 것은 기준이 존재 할 때만 드러난다. 보편적인 기준을 세워 놓고 그것에서 벗어나면 감점을 주는 방식이다. 우리는 여기에 익숙하다. 프랑스의 교육 방식은 우리하고 맞지 않는다. 그러나 타자의 도달 불가능성을 말하는 레비나스의 철학에 입각한다면, 프랑스의 교육관이 지지받을만 한 것 같다. 사실 학문이라는건 정답이 없는 행위이긴 한 것 같다. 학자들의 유튜브나 블로그 글들을 보면 그들의 주체성과 그에 따른 날카로움을 엿 볼 수 있다. 논문을 쓰는 자들은 자신의 논리체계를 가진다. 그것이 없다면 학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비교를 많이하는 것은 비슷하기 때문이라는 심리학자의 말이 떠오른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기준점을 타인으로 설정하는지도 모른다. 애초에 개미를 우리의 기준으로 설정하진 않는다.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오히려 비슷하기에 저정도만 하자는 합리적인 생각에 몸을 맡기게 된다. 그렇기에 우리에겐 생각을 하는게 쉽지 않은지도 모르겠다. 너무 다르면 주체는 특출나다. 오히려 혼자 살면은 나 자신에게 밖에 집중할게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자원도 없고 과거 일본이나 영국마냥 제국 통치도 안한 나라라지만, 인력을 내세우면서 주체에 대한 생각을 안하는게 말이 되나 싶은 생각이 있다. 해외 살이를 오래한 사람들은 한국인들이 고평가를 받는다고 인터넷에 글을 올린다. 그러나 우리는 행동으로만 능력을 숙련시킨거지, 주체의 괴로움을 견디면서 나아간 건 아닌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진 않겠지만, 대게의 경우 시키는대로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체나 타인이나 견디기는 힘들다. 그러나 그것에 책임은 부과된다. 생물공학이 발전하여 인간의 감각질을 양화 할 수 있어서 서로 비교할지라도 윤리는 태어난다. 주체의 민감도에 따라 같은 사건이라도 고통이 한 명은 20, 한명은 70이라면(100점 만점), 어떤 법적 판결을 내려야 할까. 기술이 발전하여 주체에 개입되는 상황이 생기더라도 진리에 다다를 때 까지 철학은 종식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우리는 기술에 주체를 내맡기기란 힘들다. 신유물론은 기술이나 신-주체들의 새로운 주체 가능성을 탐구하는 듯 하지만, 그것의 성질이 주체의 기능을 할 지라도 너무 단순한 일반하가 아닌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애초에 내가 내놓은 결론이라는게 이미 답이 정해진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과학이 종식되기 까지 철학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게 나의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뉘앙스의 말일지라도 나는 다르게 비틀고 싶다. "주체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란 꽤나 어려운 문제다." 혹은 "쉽게 버리기 힘든 문제다."라고 말이다. 이 뉘앙스에는 가치판단이 개입된다. 그러나 주체에 대해 생각할 때 가치판단을 버리기란 불가능한지도 모른다. 유물론을 지지하더라도 그것에는 가치판단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학문의 논리에만 종속 될 지라도 그것에는 주체의 판단이 결부되기에 완전히 벗어나기 힘들다.
그러니 전쟁을 겪지 말자면서, 우리는 전쟁에 대해 너무 쉽게 생각하게 된다. 오히려 살기 편해지면 주체에 대해 생각하기가 어려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