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에 대하여
청소년 시절에는 대부분 건강에 대해 신경쓰지 않는다. 희귀병을 앓거나 선천적인 질병에 시달리지 않는 이상 건강에 신경쓰지 않는다. 아토피나 선천성 희귀병을 겪지 않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 초등학생 시절 한 반에 한 명 정도는 심각해보이는 병이 있는 친구들이 있었다. 아토피가 심하다던지, 정신발달이 느리다던지, 비염이 너무 심해 콧물이 계속 나온다던지, 천식이 심하다던지 등등. 지금 시대가 옛날도 아니지만 병에 시달리는 아이들이야 얼마든지 넘쳐났다. 건강하다는 것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고통이 없는 것이 행복한 것이라는 법륜스님의 말 처럼, '병이 없는 상태가 건강하다'라는 결론을 내려보자. 부정신학적 명제 논증으로 우리는 건강을 바라 볼 수 있지 않을까. 병이 없는 상태가 건강하다는 말은 자연에 귀속 되는 말이다. 나는 여기서 자연을 어쩌면 신의 속성과 결부 시켜 이해하고자 한다. 병리가 없는 상태는 자연의 온전함과 닮아있다. 자연은 기준이 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의 부분집합인 우리가 보았을 때 기준이 생겨나는 것이지, 자연의 내재적인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컨데 표범이 병으로 죽어간다고 쳐도 표범이 병에 대한 인식이 전무하다면 건강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병이라는 것은 우리의 인식과 결부되어 있다. 우리의 병리학적 체계는 의학자들의 규범으로 정해져있을 것이다. 그러나 의학에 대한 전문지식이 전무 하더라도 본질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병리학적인게 존재하는가. 사실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느냐에 따라 맞춰진 병리기준인지도 모른다. 건강하다는 것은 따라서 우리의 논리체계 밖의 도달 할 수 없는 진리와 닮아 있다. 인류가 세운 병리체계를 기준으로 건강을 판단하지만, 그것은 마치 법학의 자연법 같이 설명 할 수는 없지만 그럴만한 것으로 귀속되려하는 성질이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질병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이유는 죽음으로 귀속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생물학적으로 건강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따져보자. 생물이 죽음을 본능적으로 싫어하기 때문에 건강이라는 것은 죽음과 떼어 낼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일까? 그러나 생물학적으로 수명이 짧은 하루살이들을 생각해보자. 일부러 생애주기가 짧은 개체를 고른 것은 하나의 범주로 좁히기 위해서이다. 건강의 척도로 따지는 여러 범주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을 하나로 좁혀내야 한다. 그것은 유전자 전달이다. 사실 생명은 유전자 전달 이후에는 할 일이 없는지도 모른다. 생물이 태어나면 그 목적을 다한 것이다. 그렇기에 하루살이가 해야하는 일은 번식이라는 유전자 전달의 메커니즘이다. 건강하다는 것은 아마 생식에 결부 되어 있는 것일 것이다. 죽지 않는 것이 아닌 유전자를 전달하는 행위말이다. 그러나 유전자를 전달하지 않더라도 이미 유전자는 목적에 도달 했다. 따라서 건강하다는 것은 죽음으로 치닫지 않는 어떤 상태가 아니라, 생식이 가능한 것에 결부되어야 한다.
따라서 질병은 죽음으로 달려가게 만들지만, 적어도 죽음 때문에 건강이 설명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죽음은 우리의 삶의 밖에 존재하기에 논의 할 수 없는 대상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숙고하게 만드는 내재성인지도 모른다. 여하튼 건강하다는 것은 질병이 없는 상태이지만, 건강하다는 것은 생식이 가능하다는 것으로 설명 할 수 있다. 나는 생식의 범위를 조금 확장하고자 한다. 성행위 뿐만아니라 유전자를 후대에 남기는 일은 어떻게 확장 될 수 있을까. 내 생각에는 예술과 학문, 사업, 일 같은 유무형의 인간이 할 수 있는 작업물을 잉태해 낼 수 있는가이다.
소설가들은 보편적인 의미에서 건강해 보이지는 않는다. 아니면 학문하는 자들의 인생도 가끔은 건강해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내가 이야기한 '건강은 생식이다.' 라는 명제를 생각해보면 이들은 건강한 축에 속한다. 이들이 사명이 끝나간다고 느낄 때는 더 이상 학문과 예술이 마음 속에서 우러나지 않을 때이다. 정신적으로 불구가 되어갈 때 극심한 좌절을 느낀다. 실제로 보편적인 의미에서의 건강도 안좋아지기도 한다. 아들고 딸들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수명은 다하는지도 모른다. 예술과 학문의 국한하지 않고 일을 하는 직장인도 일이 없는 노년에 괴로워 하는 경우가 있다. 젊은 시절 실적을 내는 쾌락에 중독되어 인정보다는 안정을 유지해야 하는 노년이 실증나기 시작한다. 시장에 발품을 팔러나가고 소일거리로 육체노동을 한다. 대게 일에 시달린 우리네 아버지의 모습이다.
조금 더 밀어붙여서 순수한 상태까지 나아가자. 생식이라는 것을 어디까지 밀어 붙일 수 있는지 말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삶을 재발견한다. 과거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노년에 접어들어 다시 보이는 그런 것들.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경험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조차 경험이다. 우리가 보편적으로 경험을 그렇게 사용하지 않더라도 경험이라는 것은 그렇게 작용한다. 이것이 언어의 단순한 말장난일까. 그러나 생식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것은 어쩌면 시인의 정취이다. 시인은 자연을 재발견한다. 오로지 관찰과 생각만으로 대상을 위상수학적으로 비틀어내어 입각점을 만들어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생식이다. 따라서 우리는 생식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건강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건강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은 실로 건강이 외부에 존재한 것 처럼 느껴진다. 마치 죽음처럼 말이다. 건강은 사실 죽음의 속성과 비슷하다. 도달하지 못하지만, 경험하지도 못하기에 우리 내부의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경험한 후에 기준을 만들 수 있다. 법 체계를 경험하지 않고 연역으로 만들어 낼 수도 있지만, 대게 법은 문화에 의존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건강과 죽음은 문화에 의존한다. 자연에 귀속되는 건강과 죽음은 우리의 마음 속에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철학적 담론으로 말하자면 바깥을 사유하는 것이다.
모나드의 바깥은 내부를 비춘다. 빛의 층위는 두가지가 있어서 외부의 반사되는 빛과 내부에 무한대로 반사되는 빛이 있다. 우리가 만들어낸 건강의 기준은 내부의 빛에 속한다. 그러나 조금 더 본질적인 건강의 의미는 바깥의 빛이다. 바깥에는 죽음과 건강이 동시에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하여금 외압을 느끼게 한다. 모나드는 창문이 없기에 그것들이 직접적으로 우리를 누르지 않아도, 내부에 존재하는 우리들은 바깥의 공포를 항상 느끼게 된다. 마치 천둥번개치는 밤하늘 집안에서 덜덜 떠는 어린아이의 모습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항상 불안 할 수 밖에 없다. 존재자에 대한 생각으로 존재를 규명해야 하는 것은 불안하기에 그렇다. 우리의 동일자 내에 완전한 기준이 성립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이 성립한다면 우리는 신이 된다. 신은 완전히 건강하다. 따라서 건강은 우리 내부에 침투하지 않는다.
문학을 한다는 것은 병리를 의미하는 것일까. 일본 작가들의 자살은 과거에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우리는 보편적으로 이들을 병리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가 논의한 건강의 측면에서는 이들은 본질적으로 병리적이라고 칭할 기준이 없다. 적어도 자연적인 층위에서 이들은 작품활동을 하며 생식을 해내기에 오히려 건강한지도 모른다. 술이 1급 발암물질임에도 그들은 항상 과음한다. 내가 이야기한 철학적 논의에 따르면 죽음은 병리적인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소설가들은 적어도 생식을 하기에 자연적으로 병리적이지 않은 것이다.
예술과 학문을 같은 것으로 퉁쳐서 말하겠다. 학문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보편적인 층위에서 병리적인지도 모른다. 온전한 건강이라는게 인간에게 존재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인간의 한계가 곧 개체의 특성이기에 지독하게 뒤틀린 사람만이 학문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한 측면으로만 극한으로 발달하여 자연에 도달하고자 손을 뻗는 학자들은 결국 도달하지 못한다. 완전한 건강을 바라지만, 오히려 보편적인 건강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그들은 괴물이다. 하루살이 주제에 4년을 사는 하루살이와 같다. 어떻게든 많은 생식을 하기 위해 태어난 유전적 돌연변이인지도 모른다.
니체는 건강에 대해 사유를 전개한 흔적이 많다. 기억이 선명하진 않지만 자기가 오히려 건강하다는 말로 아포리즘을 여러개 만든 것으로 기억한다. 니체의 말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오히려 아포리즘을 쏟아내는 니체는 이런 의미에서 건강하다. 40세 정도의 나이에 정신병에 시달리다 요절해도 계속 글을 쏟아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보편적인 기준에서 설명이 되는 글이든, 자신의 자폐적인 글이든 말이다.
니체는 건강했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에게 어떤 불편함을 말해준다. 우리가 설정한 건강의 기준에서 벗어난 층위의 건강을 말할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불편하게 느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레비나스가 이야기한 지향성으로도 설명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건강에 대해서 애초에 생각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비어있는 것을 바라보기란 불쾌한 경험이다. 청소년기 우리가 건강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은 보편적인 의미에서 건강한 것도 있지만, 애초에 그렇기 때문에 건강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청소년기의 건강에 대한 걱정은 더욱 불쾌한 경험이지 않을까? 요절에 대한 두려움. 혹은 아무도 겪지 않는데 나 혼자만 겪는다는 불안 말이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죽음이 불편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위에 말한 나의 수학식에 따라 죽음은 건강이다. 따라서 건강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에 우리는 불편한 것이다. 우리는 성관계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성관계는 본질적으로 아기를 염두해두지만, 쾌락을 위한 성관계는 아기를 염두하지 않는다. 따라서 성교도 두 가지 층위로 나뉘는 것이다. 생식이라는 것은 결과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결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연적인 층위에서 생식이 아닌게 된다.
이런 사유에 대해서 더욱 추상적으로 뽑아 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사실 모든 학문의 도달-불가능성이다. 도달-불가능성은 모든 학문에 내재하여 있다. 시스템에 대한 통제를 넓혀가는 제어공학이론이 어디까지 발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우주를 통제 할 수 없다. 적어도 그렇게 보인다. 카르다쇼프척도가 2단계도 되지 않는 문명에 살면서 우주를 품는다는 막연한 동경을 품는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이다. 이 본질적인 생각을 건강으로 치환한 것이다.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은 신에 대한 사유이다. 신은 우리에게 내재하지 않은 바깥이기에 우리는 불안하다. 신에게 도달하지 못하는 루시퍼의 운명에서 우리는 천국의 반란을 도모한다. 망상으로 말이다. 그 망상이 예술과 학문인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세상을 통제하려는 욕구의 발현이 건강하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건강이란 생식이기에 그런 도구들을 재생산 해낸다. re-pro-duct의 어원을 살펴보면 다시-앞선-행위 로 번역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reproduct가 재생산하다라고 암기하고 있다. 그러나 앞선 행위들을 다시 반복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내가 말한 생식이다. 과거의 것들을 다시 바라보는 것. 이미 모든 것은 주어졌지만 나의 아들 딸로 탄생시키는 것을 말한다. 내가 죽어도 나의 아들 딸들이 신에 도달하려 노력 할 것이다. 건강하다는 것은 이런 무한한 연쇄의 관념에 종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