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츠메 소세키론
황홀이라는 말은 이럴 때 써야 할 형용사인가 하는 생각을 한다. 어떤 사람도 숙면하는 동안에는 나를 인지할 수 없다. 정신이 멀쩡할 때 외계外界를 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다만 두 영역 사이에는 실낱같은 환영이 가로놓여 있다. 깨어 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몽롱하고 잠들어 있다고 하기에는 생기가 약간 남아 있다. 깨어 있는 것과 잠들어 있는 두 세계를 같은 병 속에 넣고 시가詩歌의 붓으로 휘저어놓기만 한 것 같은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자연의 색을 꿈 바로 앞까지 바림하고, 있는 그대로의 우주를 일단 안개의 나라로 흘러가게 한다. 수마睡魔의 솜씨를 빌려 온갖 실상實相의 각도를 매끄럽게 하는 동시에 그렇게 해서 부드러워진 건곤乾坤에 스스로 희미하게 둔한 맥을 통하게 한다. 땅을 기는 연기가 날아가려고 해도 날 수 없는 것처럼 내 영혼이 내 껍질을 떠나려고 해도 떠날 수 없는 모습이다. 빠져나가려고 하다가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빠져나가려 하고, 끝내 영혼이라느 개체를 몰인정하게 유지하기 어려워 활기에 찬 영묘한 기운이 흩어지지 않고 온몸에 달라붙어 연연해하는 기분이다. - <풀베개> 나츠메 소세키 송태욱 옮김
타자의 죽음으로서의 죽음은 자아로서의 나의 동일성에 영향을 미친다. 타자의 죽음이 의미를 지니는 것은 그것이 동일자와 단절하는 가운데서고, 나의 자아와 단절하는 가운데서며, 나의 자아 속의 동일자와 단절하는 가운데서다. 타인의 죽음과 나의 관계가 단지 간접적인 앎이 아닌 것은 이 때문이며, 죽음에 대한 특권적 경험이 아닌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무엇을 아는가> 1975.11.14 강의록 에마뉘엘 레비나스 김도형, 문성원, 손영창 옮김
나츠메 소세키를 어떻게 이해해야하나. 나에게 항상 과제로 남아있던 생각이었다. 이해하려하지 않았다. 사실 언젠가 피어오를 번뜩임이 나를 구원해줄 것이라 믿고있었기 때문이다. 실로 나츠메 소세키의 소설들은 평상의 소설이라 부유하지 않는다. 지극히 현상학적인 소설이다. 이념의 색을 띠지 않고 슴슴하게 현실의 세계 위에 감투를 덧씌운다. 화자라는 감투를 말이다. 화자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본다. 모든 소설이 그렇지않냐 물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오로지 유식唯識세계의 현상만을 묘사하는 소설이란 쉽지않다. 관념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은 길이다. 사람이란 으레 술자리에서도 정치 이야기를 한다. 자신의 뭉쳐진 관념의 외투를 벗어던지고 그것을 묘사하여 대상을 탈-은폐한다. 감투에 씌워진 세계는 오로지 현-존재만이 벗겨낼 수 있다. 내가 바라보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건 이제 힘든 일이 되었다. 존재자에 대한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밀어붙여 신에 대한 생각이 결여되어있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일상의 사소한 일들에 치이다 보면 쉽게 말소되는 생각이다. 종교인들만의 영역인건지 주일마다 그들은 죽음을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필자는 어린 시절 죽음과 신에 대한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다. 종교 전통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그렇기 때문에 단지 없다고만 치부했던 것 같다. 그러나 신의 존재를 논하기 이전에 신이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바라봐야한다. 신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내가 무엇을 하든 그곳에서 신의 편재함을 느낄 수 있다. 모든 것은 신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겨울 바람에 몸을 부르르 떠는 순간에도 신의 현존을 느낀다. 존재자에 대한 생각이 없다면 형이상학도 없다. 형이상학이 있다는 건 현-존재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상학이라는건 현실과 정신의 경계의 극한이다. 적어도 형이상학을 어디까지 축소시킬 수 있느냐의 실험인 것 같다. 그러나 형이상학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줄이고 줄여도 0.0001의 형이상학은 존재하게 된다. 완전한 소멸을 말한다면 예술도 없다. 학문도 없다. 자연을 바라보고 재생산할 건덕지가 없어진다. 오로지 그것이 없다고 치부하며 모른척하는지도 모른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존재는 자신의 존재를 그렇기에 규명해야 한다. 인간은 신이 아니다. 오로지 완고하게 존재하는 신이아니다. 신은 가장 탁월하게 존재하는 존재자이다. 우리의 불안이란 존재를 규명하지 못하는 것에서 나온다.
레비나스는 죽음의 단절을 말한다. 타인의 죽음을 어설픈 눈물로 애도하기 힘든 이유는 죽음이라는게 경험되어지지 않을 뿐더러 경험되지 않기 때문에 적절한 기준이 우리 동일자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슬프지도 않다. 타인에 대한 영원한 안녕이 슬퍼야 될 이유는 없다. 시니컬한 조소인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죽음을 문화화해서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구촌 어느 부족들의 장례문화를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시체를 같이 모시며 산다던지, 풍장을 한다던지,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한다던지 말이다. 장례는 문화이다. 죽음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는 문화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너무 슬픈 영화만 본게 아닐까.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한 방향으로 지향한다는 것이다. 그런 어설픈 지향성은 죽음에 대한 본질을 흐트러뜨리는걸 수도 있다. 사람이 죽어가는데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남편이 죽은 아내를 보고 법륜스님이 항상 하시는 말을 상기해보자. '넌 좋겠다. 결혼 한 번 더해도 되잖아. 불륜하면 남들이 욕하지만, 남편이 가버렸잖아.' 이 말은 죽음의 개념을 전도시킨것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죽음의 가치전도를 시켜버린 것이다. 오로지 나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세상엔 그렇게 따지면 슬퍼할 일이 있을까. 그냥 소세키는 탁월한 화가인 것이다. 터너의 그림처럼 사물을 명징하게 그려낼 뿐이다. 물감을 질료로 자신이 바라보는 유식의 세계를 그려내는 것이다. 사물의 슬픔과 기쁨을 오로지 관조한채 그려내는 것이다. 그것의 도덕적 우위나 세상 일의 잡다함을 오로지 바라봄으로써 붓 끝에 벼려내어 물감으로 덧칠한다. 단지 그것을 바라 볼 뿐이다. 모든 사물의 명석성을 그대로 그려낸다.
드뷔시의 음악은 풍경적인 음악이다. 비 오는 정원, 기쁨의 섬 등. 그의 음악은 그림을 보고 묘사한 풍경 음악에 속한다. 그것이 환상의 섬일지라도 그것의 현상학적인 그림을 담담하게 피아노 건반으로 벼려낸 것에 불과하다. 기쁨의 섬의 도덕을 그리지 않는다. 단지 그 곳의 사람들이 환희에 차있다면 그것을 묘사할 뿐이다. 환희를 묘사한다고 그것이 돌출되는 것은 아니다. 오로지 그 기쁨을 묘사하는데에 그친다. 소세키의 소설도 그렇다. 청년의 좌절, 룸펜의 좌절, 사랑의 단상, 도덕적인 괴로움, 존경과 선망 등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그것을 그려낸다는 것에 최소한의 개입만이 존재한다. 단지 글을 쓰는 연필이 원고지에 옮겨져 쭉쭉 밀어내는 것. 그것만이 소세키에게 허용된 것인지도 모른다.
풀베개는 소세키의 미학이론을 소설로 나타낸 듯 하다. 일장춘몽一場春夢의 형식으로 현실과 꿈의 경계를 흐리는 기법을 쓴다. 이발소 아저씨의 착각, 저기 보이는 규방 아가씨가 귀신인지 인간인지, 비 오는 날 흐뜨러진 산의 풍경 등. 모든 경계가 허물어지는 인식과 실재의 단절감을 모호하게 그려낸다. 소세키의 소설은 연옥의 소설이다. 천국과 지옥의 경계가 흐릿하고 양극의 압력이 한 데 섞여 명징하게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이 곳이 지옥인지 천국인지, 단지 건너가는 징검다리인지. 현실은 연옥이 아닐까. 누구도 현실을 천국과 지옥이라고 단언 할 수 없다. 오로지 제3자의 눈으로만 바라 볼 뿐이다. 낮의 기운이 다하고 저 멀리 산능선 아래로 지는 태양이 붉은 빛을 터뜨린다. 그것은 칠흑의 밤을 암시한다. 모든 사물을 공평하게 덮는 검은 밤을 암시한다. 그러나 절묘하게 붉은 구름이 우리의 인식을 스칠 때, 우리는 현실을 그제서야 정확히 보는지도 모른다. 붉은 광선이 명확하게 대상을 드러낸다. 이 짧은 시간만 대상의 온전함이 우리에게 명석하게 보인다. 강렬하게 대상을 지져내어 모든 찌꺼기를 쓸어버린다. 모든 사물의 찌꺼기가 벗겨지고 명석하게 바라 볼 수 있는 유일한 시간대. 그것은 경계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그렇다. 가끔 귀신이 물리쳐지는 영화적 연출을 사찰 뒤에 석양을 지는 것으로 표현하는 때가 있다. 그것은 귀신을 물리치는 상징이기도 한 것이다. 귀신이란 우리가 오해해서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귀신이 아니었다는 것을 진실로 인식하게 될 때가 낮과 밤의 경계가 흐릿 할 때이다. 낮은 밤의 단절이다.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낮이라는 건 항상 밤에 의해 압박 받는다. 언젠가는 밤이 올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해준다. 그러나 그것에는 도덕이 없다. 레비나스의 말마따나 그것은 어설픈 지향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호접지몽胡蝶之夢의 소설은 알기 힘들다.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나는 소세키의 소설을 이렇게 바라본다. 테일러 급수의 본체가 과거의 소설들이었다면, 소세키의 소설은 테일러 급수의 마지막 항이다. 오류에 대한 항. 회귀분석 방정식의 에러 스코어를 나타내는 마지막 부분이다. 현실에 대해 어떻게 묘사할지라도 오차 범위는 존재한다. 그러나 오차가 0일 때만 유물론이 존재하게 된다. 항상 우리는 현실을 근사하게 된다. 0.0001의 형이상학. 초콜릿이 유일한 형이상학이라는 페소아의 말이 떠오른다. 그것이 이런 의미에서 쓰인 것인진 모르겠지만, 일상의 사소한 것도 형이상학이다. 우리는 현실과 정신의 경계에서 예술과 학문을 잉태한다. 그 틈에서 우리의 예술을 바라본다.
"특별한 것은 그렇지 않은 부분들로 구성되어야만 한다." 최소한 두 개의 이질적인 부분들이, 독특성을 규정하는 차이적 관계[미분율] 안으로 들어갈 때, 의식적 지각이 발생한다는 점을 문자 그대로, 말하자면 수학적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이것은 마치 일반적인 원주圓周 방정식 ydy + xdx = 0와도 같은데 여기에서 dy/dx = -x/y는 규정 가능한 어떤 크기를 표현한다. 녹색이 있다고 해보자: 물론 노란색과 파란색은 지각 가능하다. 하지만 만일 이것들의 지각이 작은 지각으로 되면서 사라진다면, 이것들은 녹색을 규정하는 차이적 관계 (db/dj) 안으로 들어간다. -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 이찬웅 옮김
불륜은 단절되어 있다. 그것이 도덕에 관련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극적인 불륜은 아니더라도 <행인>이나 <그 후>에 나오는 주인공이 형수님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면 느껴진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불륜이다. 형은 형수에게 관심없는 척하지만 동생을 의심한다. 동생과 형수가 그렇고 그런 사이가 아닌지 말이다. 혹은 관심이 없을 수도 있다. 단지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일들을 겪어내며 괴로워만 할 뿐이다. 라이프니츠의 말대로 존재는 이런 의미에서 닫혀 있는 것이다. 인생에는 여러 층위가 있지만, 그 층을 넘나들며 설명하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단절은 넘어갈 수 없음을 말한다. 그렇기에 소세키의 소설의 극한은 죽음으로 치닫는다. <마음>의 선생님의 자살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외부의 단절을 온전히 견디기 힘들기 때문에 보통 자살한다. 극단적인 경험을 겪어내는 것은 외압이라고 느낄 수도 있지만, 자살이라는 단어가 암시하듯이 그것은 우리 내면의 유식세계 때문에 죽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세키의 시대 이후 도시가 생겨났을 것이다. 그런 단절을 견디기 힘든 유약함의 상징인지도 모른다. 살풍경한 도시들은 더 이상 과거의 고뇌들을 겪고 싶지 않다는 호소를 하는 것 같다.
나는 천천히 걷다가 멈춰 서고, 발길을 되돌려 또다시 걷는다...... 황폐한 아스팔트 보도...... 3호 건물 모퉁이에서 보통 걸음으로 서른 두 발짝...... 고개를 들자, 깜박임을 잊은 인공 눈알 같은 수은등 행렬이 영원히 올 리 없는 축제의 행진을 불러들이는 주술처럼 죽 늘어서 있다. 창마다 밝혀진 옅은 직사각형 빛은 그런 축제 따위는 이미 먼 옛날에 포기해버린 뒷모습...... 젖은 걸레 같은 바람을 뺨에 맞으며 외투 깃을 세우고 또다시 걷는다...... - <불타는 지도> 아베 코보 이영미 옮김
일본은 도시로 그런 단절을 물화物化하였다. 살풍경한 도쿄 도시의 즐비한 모습을 보면 과거의 단절을 물화한 느낌을 받는다. 내면에만 천착하지 말고 외부로 눈을 돌려보라는 듯이 우리에게 손사래 친다. 그러나 현재의 시대에서 우리는 형이상학을 그렇기에 무시하는지도 모른다. 망각해버린 것이다. 우리의 내부의 것들이 도시에 토해내졌다고 완고한 착각을 하는 것이다. 관찰자의 시점에서 우리는 형이상학에서 벗어날 수 없다. 소세키가 말하는 것은 이런 것 같다. 어짜피 벗어날 수 없는 것들을 명징하게 바라보자. 그러나 우리는 도시의 화려함에 의해 그것을 바라보지 못한다. 내면에 한정에서 장님이 되어버렸다. 명석하게 유식세계를 응시하기 보다는 좋은게 좋은거지라는 생각이 횡행한다. 좋은게 좋은거다. 그 말도 맞다. 그러나 가끔은 현실 세계를 자신만의 색으로 굽어보는 정취가 사라져간다. 백년 전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와닿는 것은 그것의 보편성이다. 자폐적인 이야기는 공감하기 힘들다. 오로지 목소리만이 넘쳐나는 시대에서 고귀하게 그려내기란 쉽지않다. 오히려 소세키가 지금 시대에 읽히는 것은 그런 명징함에 있는지도 모른다. 호소가 아니라 그것을 그려내는 것이다.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나츠메 소세키의 소설에 위대함이 없다고 평한적이 있다.
최근의 소설류도 대략 읽었다. 나츠메 소세키, 시마자키 도손씨만 학식 있는 새로운 작가로서 주목할 만하다. 그 외는 전부 부족하다. 나츠메 씨는 놀랄 만큼의 문학적 재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위대함이 부족하다. 시마자키 씨도 충분히 기대할 만하다. <파계>는 확실히 뛰어나다. 그러나 천재는 아니다. - 윤재석 옮김
위대함이란 베토벤 같은 위대함을 말하는 것 같다. 인류사적 과거의 천재말이다. 인류사적 박애를 합창 교향곡 9번에 담아낸 그런 류의 천재말이다. 모든 시대를 통합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방출하는 천재. 그러나 소세키의 천재성은 다른 점에 있는 지도 모른다. 그것을 명석하게 그려내는 것. 드뷔시적인 천재말이다. 지극히 현대적인 천재의 전형이다. 뒤틀림과 왜곡보다는 혹은 강조보다는 그리는 것이다.
나츠메 소세키를 근5년간 간헐적으로 읽으면서 무엇을 읽었는지 새롭지가 않았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그것이 지극히 현상학적이라는 것에 영감을 얻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갱부>의 주인공이 도쿄를 벗어나 괜시리 광부 일에 자원한 것, <태풍>의 선생님의 연설에 조롱했던 과거를 선생님께 사죄하는 학생, <우미인초>의 깨발랄 하지만 닫혀있는 규방 아가씨, <그 후>의 룸펜이 겪는 사랑과 현실의 고뇌, <산시로>의 대학생의 그 시절 겪어내야만 하는 그럴듯한 고뇌,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도달하지 못한 동물의 생각과 언어, <도련님>에서의 선생님의 치기어림, <마음>의 선생님의 좌절과 죽음, <명암>의 중년 부부의 고뇌 등. 인생에 있을 법한 이야기들을 그려낸다. 진실로 장자의 호접지몽을 그대로 구현한다. 읽다보면 이 곳이 현실인지 꿈 언저리 어딘가인지 구분이 모호하다. 내가 독서를 시작한 시점이 흐리멍텅하게 지워지고 몰입하게 되어 그 소설이 나의 현실인 것만 같다. 그러나 관찰자라는 형이상학이 얕게 우리의 현실을 가리웠던 것이고, 그 미세한 틈에서 그의 예술이 피어올라온 것이 었다. 이번 년도 초반부터 중반에 이르기 까지 간간히 전집을 독파해 나갔었다. 그것이 현실과 소설의 경계를 흐리는 마법을 내게 부여하였지만, 그 작품들을 어디서 읽었는지 기억나게 한다. 일반적인 강렬함이 아닐지라도 기억에 인이 박혀 남아있다. 왜 그런지는 모른다. 한줄 한줄 마음에 꾹꾹 눌러 담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스타벅스 안에 노란 형광등을 아래로 목조 테이블 위에서 읽었던 기억. 잠실 석촌호수의 풍경을 바라보며 뭔가 아려왔다. 이 화려한 도시 속에도 소세키의 소설 처럼 고뇌하는 인간이야 얼마든지 있겠지. 그들의 닫힌 운명이 안타까웠다. 그리고 그걸 안타까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았다. 내 인생도 그 속에 있기 때문에. 나의 인생은 닫혀있는 것이다. 아무리 설명해봐여 나의 것은 전달 할 수 없다. 그렇기에 예술이 발생한다. 그것을 승화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나를 드러내고 싶어하기 때문에, 그러나 그것은 결코 타인에게 드러나지 않는다. 위에서 주지하다시피 소세키의 소설은 죽음의 소설 일 수도 있다. 삶과 죽음은 완전히 단절 되어 있지만, 그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은 타인의 죽음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의 잣대로 판단할 수는 없다. 예술도 그렇다. 흔히 예술에는 정확한 기준이 없다고 말한다. 진실로 그것이 맞는 말이다. 그것이 오히려 예술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타인에게 도달하지 못하고 존재자를 규정하기 위해 승화된 예술만이 존재한다. 그것을 어떤 지향성으로 내맡길지는 우리의 판단이다. 아무것도 못느낄수도, 인생에서 잊지못할 감각을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가끔은 소세키를 다시 읽게 된다. 그것은 아마 나의 단절을 해소하고 싶은 욕망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소원으로만 남아있다. 인생 내내 소원으로만 남아있을 것이다.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그것을 풀기위한 것이다. 이야기를 할 때만은 어린아이가 된다. 마치 지금까지의 고통이 다른 사람의 일인냥 타자화시킨다. 우리의 인생에서 한 시름 놓을 때가 이럴 때가 아닐까. 고단하지만 그럼에도 쓰는 것이다. 나의 짐을 조금은 내려놓기 위해 말이다.
우리는 도보 여행을 하는 동안,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해서 힘들다, 힘들다, 고 불평을 늘어놓지만 다른 사람에게 예전에 했던 여행을 자랑할 때는 불평스러운 것은 조금도 보여주지 않는다. 재미있었던 일, 유쾌했던 일은 물론이고 옛날 불평했던 일까지 재잘거리며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는다. 여행을 하는 동안에는 보통 사람의 마음이고 지난 여행을 이야기 할 때는 이미 시인의 태도가 되기 때문에 이런 모순이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보면 네모난 세계에서 상식이라는 이름이 붙은 한 모서리를 마멸하여 세모 속에 사는 이를 예술가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 <풀베개> 나츠메 소세키 송태욱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