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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티즘을 바라보다

아름다움의 심연에 대한 미학적 시론

by abecekonyv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 내가 그를 우연히 알게 된 건 그의 삶에 대한 영상이었고, 이후 그의 책을 만나서였다. 한동안 그의 책들을 읽었다. 일본어 공부를 위해 일본어 원서를 사서 나름대로 독해하고 이해해 보기도 하였다. 그의 모든 책을 읽은 건 아니지만 중요한 작품들은 그래도 읽었기 때문에 그에 대해 어느 정도 말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그는 일본 전후문학의 일본 특유 미학적 소설가, 유미주의, 탐미주의 소설가라고 분류될 수 있을 듯하다. 그가 일생 동안 추구한 것 은 가와바타 야스나리, 다니자키 준이치로 와 같은 전통과 일본적인 미 이전에 조금 더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에로티즘적 미를 추구한 듯 보인다. 물론 그것만을 추구했다고 말한다면 그건 어폐가 있을 테지만, 육체에 대한 고백, 쾌락에 대한 자전적 성찰, 남색, 여색, 육체에 대한 정신 나갈 정도의 치밀한 묘사 등은 그가 어디에 집중하였는지 보여준다.


내가 앞으로 이야기할 내용은 그의 마지막 역작 <풍요의 바다 4부작> 즉, <봄눈>, <달리는 말>, <새벽의 사원>, <천인오쇠>에 대한 독후감이자 이를 넘어서 에로티즘에 대한 약간의 견해를 덧붙이려 한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그의 다른 작품들도 끌어들여 내용을 풍성하게 만들고 싶다.


마쓰가에 기요아키라는 인물이 주인공은 아니지만 주인공 혼다 시게쿠니의 일생에 아주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귀족적 삶, 아름다움, 그리고 아름다운 연인과, 비극적이고 아름다운 죽음 등 혼다 시게쿠니의 일생을 지배하는 아름다움과 질투의 화신이자 유일한 친구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출신과 배경, 그리고 기요아키라는 인물이 가진 모든 것들을 어찌 보면 질투하고 있다. 기요아키와 맺어질 귀족집 규수 사토코를 좋아하지만 태생의 한계로 기요아키를 질투 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다. 그는 이 비극적사랑, 기요아키의 완전성 등을 질투하며 가장 중요한 인생의 초반부에 기요아키라는 신적인 인물에 각인되어 버린다.


이 4부작의 내용은 기요아키를 시작으로 나머지 3명의 불교적 환생의 이미지로 나오는 조연들을 관찰하는 혼다의 삶에 대한 내용이다. 달리는 말에서 이사 오는 청년 남성이 가지는 굳건하고 아름다운 판단력을 말하고, 새벽의 사원에서 잉 찬은 여성이지만 후에 파괴적인 연애를 하게 된다. 천인오쇠에서 도오루는 순수 악동이자 혼다 기요아키의 마지막 여정의 남자로 양자로 들이지만 결국 자신이 기요아키의 환생이 아니라는 자의식에 실명하게 되어 반신불구로 여자친구와 살아가게 된다.


그의 세부적인 내용은 길어지기에 내가 일부만 정리를 하였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나의 견해를 조금 써보려 한다.


절대적 미란 존재하는가?


미시마 유키오의 삶은 일반인의 삶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을 보인다. 보통의 욕구와 관련해서 얼마나 그가 다면적이고도 뒤틀린 인간인지를 보여주는 자료는 꽤나 많다.


오사카에서 구매했던 미시마 유키오의 글들 일본에서는 2025년 현재 그의 100주년을 맞이했다.


일본 좌파 청년들과 대담을 시도했던 도쿄대 전공투 사건, 그의 정치적 행보와 할복하기 전 최후의 연설 등 유튜브에서 그의 인터뷰와 많은 일화들을 일본어로 접해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예술로 승화시키려 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의 최후는 전후 일본의 타락에 대한 내용으로 일본 헌법을 뜯어고쳐 예전의 일본으로 천황중심의 사회가 가졌던 일본의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복고주의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에게 할복은 일본적인 최후이자 남자로서의 운명적 결단, 아름다움, 미학적인 모든 것을 망라하는 최후의 아름다움이다. 그의 소설에서 할복은 극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자살이 도대체 어떤 아름다움과 결부된다는 말인가? 그것은 자신을 예술 작품화 함으로써 역사에 새겨지고, 인간 주체가 아닌 감상 대상으로서 절대화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미술 전시회에 가서 보는 그림들은 절대화된 미라고 볼 수도 있다. 이미 과거에 새겨져 예술가가 의도한 모든 것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 그림의 질감과 색감의 시간에 의한 퇴색이 있을지언정 물질적인 퇴보와는 관계없이 예술가의 개념을 품는 작품은 이념적으로 절대화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에게 자살은 이런 장치였는지 모르겠다. 늙어감에 대한 공포가 심했던 걸로 보인다. 늙음의 추함이 자신의 절대적 미에 방해가 되는 요소로 보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새벽의 사원에서 태국 공주를 관음 하는 기요아키의 노망부터 시작해서 천인오쇠에 80이 다 돼 가는 혼다 기요아키가 악동 도오루의 횡포에 잡혀 사는 것은 늙어 감에 대한 작가 본인의 생각을 담고 있는 것 같다. 얼마나 피하고 싶었을지 상상이 되지 않지만, 그가 늙은 육체에 관한 묘사를 보면 생생하게 두려움을 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절대적 아름다움이 존재한다고 전적으로 믿었던 것일까? 내 생각에는 그가 완전한 미를 전적으로 신뢰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비교적 작가의 불안정함을 느끼게 되었다.


아름다움이란, 특히 관념적인 아름다움이 아닐지라도 그가 묘사했던 육체의 아름다움이란 상대적인 것이다. 문화적, 그리고 타인과의 비교 등으로 차별화된 것일 뿐이지, 아름다움 본연의 개념은 비어있다. 상대적인 개념이지 본질적인 구체성을 띠고 있지 않는다.


나는 그가 관념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나는 아름다움에 관해 어떤 한 측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그건 바로 아름다움은 성(性)과 얼마나 결부되어 있느냐이다.


에로티즘은 육체의 예술적 쾌락일 수도 있지만, 관념적인 에로티즘도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얼마나 성적인 것에서 벗어나 있을까? 놀랍게도 이것 역시 그다지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걸 말할 수 있다.


인간에게는 페티시즘(festishism)이란 게 존재한다. 동물도 이런 게 있는지는 모르겠다. 페티시즘은 알다시피, 보편적 성적 대상이 아닌 것에 도착적 반응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여자가 남자의 정장을 보고 홀리듯, 남자가 여자의 구두나 스타킹을 보고 힘들어하는 것 말이다. 페티시의 목록을 보면 이런 게 과연 가능한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말 많은 리스트가 존재한다.


관념적이고 절대적인 미에 대한 하나의 예시로 앞서 이야기한 절대화된 미술 작품을 이야기하자. 우리가 만약 이 미술작품에서 인생에 있어 아주 커다란 희열을 느껴서 한동안 계속 바라본다고 가정해 보자. 미술관의 적막, 지나가는 사람들의 구두 소리, 작품의 색감이 주는 이질감 등등 모든 것들이 우리 뇌에 바로 새겨져 심미적 쾌락을 작용한다. 우리는 여기서 수동적인 주체로서 예술작품에 잠식당한다. 즉 우리는 페티시즘적 복종 관계에 존재한다. 여성향 연애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복종적인 여성 주체가 자주 등장하는 걸 볼 수 있다. 그것은 아마 그런 복종 페티시를 예술로 승화시킨 것일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관념적인 예술조차 추상적인 페티시즘으로 성과 결부되어 반응을 이끌에 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미시마는 아마 이런 것을 직감하고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비록 나의 추측이긴 해도 말이다. 젊은 시절부터 공부를 잘해서 도쿄대 법대까지 간 인간이, 그리고 이런 거대한 소설을 쓸 수 있는 통찰을 가진 인간이 이 정도의 생각을 하지 못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는 왜 자신만의 에로티즘을 포기할 수 없었던 걸까?


"하지만 만약 기요아키가 처음부터 없었다면."...(중략)...."그랬다면, 이사오도 없었습니다, 잉 찬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어쩌면 나조차도..." 천인오쇠 중

그는 아마 자신의 미라는 게 본질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걸 예감하고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 역시 아름다움이란 본질적으로 허무하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풍요의 바다 시리즈가 왜 불교적인 색채를 띠고 환생을 거듭한 인물을 보여주는 걸까? 아마 본질적으로 그것이 허무하다는 것이다.


내가 인용한 대사는 풍요의 바다 마지막권 천인오쇠의 거의 마지막장에 나오는 대사이다. 이 말이 암시하는 것은 무엇일까? 헛되고 헛되다는 이야기이다. 내 생각엔 그렇다. 일생을 바쳐 기요아키의 환생들을 추적했지만, 자신은 늙어버렸고 추해지고, 노망 난 모습으로 죽어가는데, 점점 생각해 보니 그런 건 없다는 것이다. 혼다 시게쿠니의 삶은 자신이 주지하다시피 허무의 삶이었다.


막연한 추측이지만, 이런 걸 말하고 싶은 게 아닐지 모르겠다. 그래, 내가 추구한 미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 다만 인생에 본질적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게 뭐 얼마나 되겠나? 내가 추구한 것도 그런 거야. 어차피 인생은 공허해, 내가 추구한 것 역시 절대적일 수는 없어.


그러나 미시마 유키오는 이것을 극단으로 끌고 가서 결국 자신의 예술화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허무함에서 멈추지 않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자살을 선택한 것이다. 자신이 예술작품이 된다면, 그것은 영원할 것이므로.


에로티즘의 경계에서



어디까지 에로티즘을 추구할 수 있는가? 이게 내가 가진 의문이다. 포르노와 예술의 경계는 어딘가라는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우리는 도처에서 극단적인 포르노성 작품들을 보기도 한다. 그것들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아마 현대인들은 작가 본인의 생각에 달려있다고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게 나는 한계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위에서 말한 페티시즘의 문제, 그리고 쾌락의 문제는, 아름다움의 비대함을 야기한다. 이 이야기가 추상적으로 들릴지는 몰라도 구체적으로 예시가 드러난 것이 이 미시마의 삶이 된다.


에로티즘을 쓸 수 있는 사람은 그 자신이 방대한 쾌락을 감당할 수 있는 인간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경험해보지 않는 쾌락에 대해 도대체 어떤 글을 쓰겠는가?


우리는 에로티즘에서 쾌락과 즐거움을 얻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그것은 비어있다. 그러나 내가 비판하고 싶다기보다는 두려워하는 것으로, 쾌락의 무서움이 에로티즘과 결부되어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나는 미시마가 성에 대해 얼마나 감당하고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의 작품을 보면, 그가 최소한 많은 쾌락들에 대해 탐구하고 고찰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가 자살을 하든 말든 그의 인생에 대한 선택이다. 그것을 이해할 수는 없어도 그것을 존중하는 마음도 있어야 한다는 게 현대인의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지극히 모호한 경계가 야기하는 문제를 알고 있다. 술을 마시는 게 몸에 좋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을 마신다. 그것은 자신을 해치지만 금지되지 않는 것으로, 모종의 지배적인 쾌락을 띠는 것인지도 모른다. 피학적인 쾌락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방탕으로서 자신을 보여주는 것 말이다.


우리는 보편적인 관점에서 하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만 법이 금지하지 않고, 우리의 자유와 선택이라는 경계에 애매하게 놓여서 우리의 결정을 힘들게 한다.


철학적인 에로티즘을 이런 구체적인 삶의 쾌락이라는 주제와 결부시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항상 나의 논리와 느낌은 이곳을 향한다. 그것을 추구하는 건 선택일지라도, 그것이 나를 어디로 이끄는지는 나도 알 수 없다. 다만, 뭔가 하나의 심연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는 허구한 날 섹스와 도발적인 여자들이 등장한다. 그의 얕게 깔린 음울함과 도회적인 배경은 현대의 방종과 현대적인 연애, 허무 등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번외지만 아직 우리나라에 번역이 안된 교코의 집이 하루키적인 살풍경한 도회적 모습을 그리는 것 같다. 하루키 보다 더 나아간 게 미시마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미시마의 글에는 아름다움의 심연, 아주 어둡고 끝이 안 보이는 동굴이 보인다. 물론 하루키 보다 작가적으로 더 나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아름다움 역시 두 심연이 존재하는 듯하다. 절대적 미라는 건 인간 세계 내에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신과 연합한다. 우리는 완전한 이데아를 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인간은 허무할지라도 항상 추구하는 게 있다. 그것이 인간을 살게 한다. 따라서 우리의 인생에는 정답이 없고, 각자의 길이 있다. 에로티즘 역시 하나의 길에 속한다. 우리는 어떤 길을 걸어가면서 그 길이 가진 속성을 마주하게 된다.


혼다 시게쿠니의 여정은 허무하나, 그럼에도 그 인생이 헛되지는 않다. 자신이 추구하고자 했던 것을 80이 될 때까지 하였기 때문이다. 그가 가진 열정은 그를 살게 하였다. 그가 아름다움의 심연(도오루)을 봤을지라도 그의 인생은 그랬기에 살게 되었고 그랬기에 행복했던 것이다. 자신이 학대당하면서도.


아름다움은 인생을 살게 하기도 하지만 자신을 피폐하게 하기도 한다. 나는 그의 작품을 볼 때마다 이런 무서움을 감지한다. 퇴폐라는 말이 왜 존재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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