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와 문화의 공간론
이 사람아, 이거 하나만 인정하시지. 눈가리개를 착용한 자와 그것을 벗어버린 자 둘 중에서 진짜 장님은 엄연히 전자라는 사실 말일세. 자네는 자꾸만 무얼 세우고, 만들어내고, 불려나가려 하지만, 나는 무너뜨리고, 단순화하고 있지. 자네는 오류에 오류를 더하는거고, 나는 그 오류들을 때려 부수는 것이네. 그러니 우리 둘 중 누가 장님인가? - D. A. F. de Sade Dialogue entre un pretre et un moribond (사드, 사제와 죽어가는 자의 대화) 성귀수 역(譯)
도시는 비어있다. 우리가 걷는 도심의 즐비한 빌딩들 속에서 우리는 문화를 향유한다. 거대하고 우람한 빌딩이 주는 압도감, 깔끔하게 정렬된 도심의 쾌적함, 여름철 카페 안의 쾌적함과 북적거림. 삶의 권태의 공간이기도 한 도심은 누군가에겐 문화를 누릴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우린 사실 취미가 독특하지 않을 수 도 있다. 브런치를 즐기고, 카페를 탐방하고, 새로운 장소를 가는 것으로도 우리의 취미 생활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은가? 특히 요즘 시대는 이런 공간을 취미화 하였다. 딱히 무언가를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공간을 소비한다. 이 신시대의 취미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취미를 향유한다. 강남어디에 뭐가 맛있데, 성수동 가봤어? 핫하다던데, 우리는 어디를 감으로써 취미를 향유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도시의 허무를 음울하게 표현한다. 그의 소설의 연애성을 빼놓고도, 울적함의 도시, 살풍경한 도시, 인간의 감정이 수단화 된 디스토피아적 세계, 단기적이고 사드적인 방종, 즉 섹스. 이것들이 그의 소설에 넘쳐난다. 그의 소설은 도시의 음울함. 비어있음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현상학적으로, 도시의 리얼리즘이다. 정형화 된 깔끔한 도시는 우리의 향유를 줄이는 것인지, 아무것도 하지 않게 함으로써 우리를 단순화 시키는건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인간은 문명을 세우지만, 문명을 파괴하기도 한다. 스파르타쿠스가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킨것 처럼 거시적인 혁명이 아닐지라도 인간 역사의 작은 혁명은 우리 삶에도 존재한다. 현대시대는 경계의 시대이다. 들뢰즈, 바타유, 블랑쇼, 데리다 같은 현대 프랑스 철학자의 글들에서 느껴지듯이, 우리는 경계의 시대에 살고 있다. 경계의 시대는 포스트모던적인 시대이다. 파편화된 규칙들은 서로를 견제하고 통합을 저지한다. 파편화 된 규칙들은 본질을 해체한다. 본질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지도모른다. 우리의 변증법은 내부가 아닌 외부에 있다. 외부 대상의 방종은 새로운 것들을 재생산하기 시작한다.
역사의 종결은 존재하지 않는 것 처럼 보인다. 무엇이든 가능하다. 우리는 다양성의 시대에서 외부의 목소리를 견뎌야 한다. 역사의 경계만이 우리는 경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경계를 마주한다.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고 해야하는지, 우리는 모순을 품은 현대사회를 견뎌내야한다.
시마자키 도손의 <파계>를 이야기하고 싶다. 도손의 소설은 우리나라의 채만식을 떠올리게 한다. 리얼리즘적인 문체, 시대를 포착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 같다. 파계는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과 이전의 일본의 경계를 표현하는 작품이다. 서양 문물을 본격적으로 받아들기 시작한 일본의 시기는 계급을 철폐하고, 새로운 삶의 형식을 가지기 시작했다.
세가와 우시마쓰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신평민이다. 1871년 백정 해방령으로 새롭게 평민으로 편입된 사람을 말한다. 일제강점기의 형평운동을 떠올리게 한다. 우시마쓰의 집안은 메이지 유신 이전 백정으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 주인공은 신시대의 초딩학교 선생님이 된다. 그는 숙부로 부터 항상 이런 말을 들으면서 자랐다. 우리의 계급을 밝히는 순간, 우리는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우시마쓰는 신시대의 혜택으로 대학도 진학하고 교사로써 살아가게 된다. 과거 같으면 꿈에도 못꿨을 그런 삶을 살게 된다. 그러나 그는 항상 내면에 백정의 집안이라는 열등감을 품고 살았다. 숙부의 말을 평생을 붙들고 살았다. 그러나 그는 흔들리게 된다. 자신이 백정의 집안의 자식이면 어떤가. 시대는 바뀌었다. 나는 말하고 싶다. 그는 그의 선배이자 그리고 정신적인 지주이기도한 렌타로의 글들을 탐독하며, 같은 구시대의 백정이었던 렌타로의 사상에 심취하게 된다. 그리고 동시에 그에게 나 역시 백정이었음을 고백하고 싶어하지만, 그러지 못한다.
그는 결국 마지막에 교사를 그만두게 된다. 주변 교사들이 자신의 구시대의 신분을 알아차렸고, 사회적인 망신을 당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구시대에도 귀족이거나 그에 준했을것이다. 메이지유신이 일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 교사가된 이십대 중후반의 사람들이 평생을 귀족으로 살았으면서 신평민의 고뇌를 이해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백정에 대한 경멸이 동료교사를 통해서 나타난다. 백정주제에 선생질을 할 수 있다니 세상 참 많이 변했네!
미야자키 하야오의 최근의 영화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역시 메이지 유신이 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는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일본인에게 그 시대는 구시대와 신시대를 가르는 중요한 분기점일 것이다. 근대와 현대를 가르는 분기점이자 문명의 허위를 극심하게 느끼는 시대이다.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는 추상적인 영화로 평가가 갈리는 듯 하다. 나는 이 영화를 '시대'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주인공의 백부는 구시대의 귀족이자 신문물을 받아들인 사람으로 보인다. 백부는 엄청난 책들을 읽어대고 성안으로 들어가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였다. 그러나 자신은 늙었고, 시대는 변했으나 백부의 생각과는 다른 듯 보인다. 백부가 건설한 시대는 구시대와 닮아있기도 하면서 동시에 새롭다. 자신이 만든 세계가 가진 한계를 동시에 인식하고 있기도 하다. 마히토를 만날 때, 그에게 도형을 건네준다. 도형은 위태롭게 버티고 있다. 백부가 건들 때마다 위태롭게 흔들리지만, 흔들어 볼 때마다 간신히 버틴다. 백부는 한숨을 내쉬며 오늘은 괜찮겠군, 이라며 탄식한다. 그는 자신이 가진 세계의 한계를 명확히 알고 있다. 마히토에게 도형을 건넨다. 이 의미가 무엇일까.
내가 생각하기엔, 이것이 새로운 시대에 단서가 아닐까 싶구나. 이걸 가져가서 나의 시대를 보수해 다오. 마히토는 거부한다. 그러나 영화가 끝날때 즈음, 그의 주머니에서 백부의 도형을 발견한다. 마히토는 구시대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 역시 구시대의 파편이 존재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말들을 보면 이런식이다. 나의 삶은 누군가의 부정적인 것들로 채워져있다. 나의 긍정적인 것들도 누군가에겐 부정이다. 이 말이 가지는 함의를 나는 이렇게 해석한다. 내가 새로운것을 만들고 싶어도 나도 과거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나의 시대는 전시대의 부정이다.
문명은 자연위에 있다. 문명은 자연의 부분집합이다. 따라서 자연의 일부이자 인간의 공간으로 기능한다. 우리는 자연을 추상화 하여 인간이 바라본 자연공간을 재창조 하였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이는 허위에 가깝다. 오로지 믿을 만한 것은 자연법, 자연의 사상이다. 변하지 않는다는 태고로 부터의 믿음. 변하지 않는 연속성.
자연 역시 이산적으로 비어있다. 양자역학적 우주는 우리의 우주가 비어있다는 걸 말한다. 그러나 비어있는 것 속에 비어있는 것. 인간의 공간은 더 비어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시대를 살아간다. 다만 그 시대라는게 허위였다는게 명명백백히 밝혀지는 순간 우리는 극심한 방종에 빠진다.
백정의 슬픔, 과거 귀족이자 재력가였지만 현재는 명예와 부를 잃어버린 몰락 귀족의 고통을 우리는 외면 할 수 없다. 현대의 시대는 이것의 변주이다. 우리는 사실 거대서사가 아니라 미시서사로서 이런 경계에 자주 놓이게 된다.
모든 것이 쪼개진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규칙의 경계에 놓여있다. 이걸 하면 저것에 반하고, 저것을 하면 이것에 반한다. 내가 이 전공에 몰두한다면 다른 가능성은 포기해야한다. 과거의 귀족들이 당연한듯이 과거에 응시한 것 처럼, 우리는 삶에 당위성을 부여 할 수 없다. 우리 역시 잣대가 있지만, 삶의 양식이야 범람하고 있다. 이렇게 살아도 되고 저렇게 살아도 된다. 과거에 얽메이지 않고,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 우리에게 당연히 해야하는건 없다.
우리는 가끔은 문명의 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간 본연의 논리란 자연의 논리다. 문명의 논리가 아니다. 문명의 논리가 문화를 가능하게 한다면, 자연의 논리는 우리의 귀소본능이다. 우리는 무엇을 하면서도 뭔가 놓치는것은 아닌지 항상 돌아본다. 육아에 신경쓰지 못하는 자신의 모순을 보는 워킹맘을 보듯이.
신시대의 삶은 거대서사가 결여 되어있다. 우리 사회는 변동하기 힘들지만, 미시적인 사회자체는 가속하여 빠르게 변한다. 정보의 싸움이 중요해지고, 유행은 SNS로 매우 빠르게 소비된다. 거시 경제보다는 미시 경제에 관심이 많은 시대이다. 우리의 삶이 더 구체적이다.
자연을 망각한 우리는 허례 허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