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내 편’이 있나요? 아니면, 없어도 그냥 개의치 않고 살아가는 건가요? 나는 유난히 여기에 집착하는 것 같아요. ‘내 편’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에 늘 외롭지만, 그런 것이 있길 바라는 것 자체
가 어쩌면 비현실적인 기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선생님: 그것은 매우 현실적인 기대이고, 누구나가 그것을 소망해요. 어쩌면 그 소망이 엘엘리온님이 지금과 같은 일을 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신질환자들의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들어주고, 재소자들의 범죄행동이 아닌, 그들의 감정에 귀 기울여 주는 일이요.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했던 그들에게 이것은 ‘내 편’을 발견한 낯선 경험이었을 거예요. 엘엘리온님의 ‘내 편’에 대한 갈급함이 공명이 되어서 ‘그들의 편’이 되어줄 수 있는 에너지를 만들어낸 것이지요.
나의 외로움과 그들의 외로움이 맞닿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선생님의 설명은 이 일에 대한 나의 고집스러움을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깨달음만으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갑갑함이 남는다. 애초에 ‘나’라는 사람은 ‘내 편’이라는 것에 왜 그리도 유난을 떠는 것인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상담을 마친 후, 퇴근 시간 때의 꽉 막힌 도로를 운전하려니 그곳이 내 마음과 같다고 느껴진다. 편도 4차선에서 얽히고설킨 차량들. 목적지를 향해 가려는 시도가 오히려 더 큰 정체를 만들어 버린 도심의 도로. 하지만, 다행히도 그곳에는 수많은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길을 밝히고, 이정표가 방향을 안내하며, 잠시 쉬어갈 수 있게 만드는 신호등이 있다.
그 신호에 따라 나도 잠시 생각을 멈춘다. 그리고, 초록불이 들어왔을 때, 선생님의 이정표를 따라 그들을 만나고 있는 장면을 떠올려 본다. ‘수용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엘엘리온님이 무엇을 느끼는지 잘 들여다보세요.’라는 지시문이 길을 밝혀주는 헤드라이트가 될 수 있길 기대하면서.
집에 도착할 때쯤에서야, 번뜩 떠오르는 한 생각이 머리를 친다.
‘공감’과 ‘수용’이다!
내가 그들에게 제공하고 있는 것은 ‘공감과 수용’이었고, 나도 나를 온전히 공감하고 수용해 줄 누군가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일상적으로 늘 사용하는 이 단어들이 든든한 ‘내 편’이 생기는 느낌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나 자신이 어이없다.
성장 배경을 토대로 현재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좋아하지 않지만, ‘공감과 수용’이라는 단어에 의해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이 소환된다.
부모님에게 나는 늘 불안한 자식이었다. 엄마의 표현을 그대로 가져오자면, ‘물가에 내놓은 아이’와 같았다.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너는 늘 불안해’라는 말 앞에는 ‘둘째라 그런가?’라는 말이 항상 따라붙었다. 나의 어떠함과 상관이 없고, 나로서는 어떻게 해 볼 수도 없는 이유로 ‘불안한 존재’가 되어버린 나는 억울했다. 게다가 형제순위에 의해 자연스럽게 ‘막내스러움’을 담당해야 했던, 내 행동이나 발언은 ‘귀여움’이라는 것으로 쉽게 치환되어 버렸다.
그렇다. 나는 늘 억울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봐 주지 않아서, 철없는 아이 취급하며 내 이야기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 학원비를 다른 곳에 쓰지 않았다는 내 결백에 대한 주장을 ‘재롱’ 취급하며 웃어버려서. 언니처럼 의젓하지 못하다며 나를 부족한 사람 취급해서...
(잠깐, 여기까지만 쓰고 잠시 감정을 가다듬어야 할 것 같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속에서 차오르는지 모르겠다. 나는 단지, ‘나’이고 싶었을 뿐인 것 같은데...)
나는, 생각보다 귀엽지도, 애교가 많지도 않은, 오히려 무뚝뚝한 사람이다. 의젓하게 내 몫을 하며, 사회 구성원으로서 잘 살아가고 있다. 내 이야기는, 내 나름 진지했고 철없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학원비롤 다른 곳에 사용했다는 누명은 너무 억울했고, 진실이 드러났을 때는 사과를 꼭 받고 싶었었다.
‘내 편’이라는 것은, 내가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받아들여 주는 것이다. 자신이 생각한 틀에 나를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관심과 애정으로 바라봐주고, 나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을 갖는 것이다.
내가 ‘나’이어도 웃음거리가 되지 않고, 거부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온전히 ‘나’이고 싶다.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치부되어 버리는 이들의 망상을, ‘죄인이 무슨 할 말이 있느냐’는 이들의 서사를, 이해하려는 내 시도는, 어쩌면 내 이야기도 들어달라는 외침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