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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엘리온 Mar 28. 2024

벚꽃 앤딩(And~ing)

사면이 통유리로 지어진 카페는 만개한 벚꽃에 둘러싸여 봄의 설렘을 그대로 품고 있었다.  4월의 꽃샘추위는 여전히 두터운 옷들을 요구했지만, 연인들은 겨울의 시샘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가벼워진 형형색색의 옷차림으로 한껏 멋을 낸 그네들은 행복에 겨운 지금 이 순간을 놓칠세라 테이블 위 음료를 배경 삼아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희정 역시 노란 원피스 위에 청자켓을 걸치고 카페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초조한 눈빛으로 주문카운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희정은 주변의 화사한 웃음소리에 동화되지 못한다.

  쉴 새 없이 밀려드는 손님들의 주문을 받는 것만으로도 벅찰 텐데, 점원은 미소를 잃지 않는다.

‘저 미소에 반한 것일까?’

포니테일로 묶은 머리가 단정하면서도 발랄한 느낌을 준다.  태닝으로 관리한 듯 적당히 까무잡잡한 피부색은 섹시해 보였고, 음료를 건네는 가늘고 긴 손은 여성스러움을 더해주었다.

그 어느 것 하나 희정이 그녀보다 나은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입구 쪽에 서 있는 준호가 보였다. 카페 문이 열리기 전부터 준호의 시선은 점원을 향해 있었다.  얼굴 가득 미소를 담은 점원이 준호를 맞이한다.  다른 손님들에게 보인 상냥함과는 다른 은밀한 느낌을 주는 미소이다.  단순히 주문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는 꽤 긴 시간 카운터에 머문 준호가 표정을 바꾸고 희정을 찾기 시작한다.  그를 향해 가볍게 손을 들어 희정은 자신의 위치를 알려준다.  

“자기가 좋아하는 블루베리 스무디 주문해 놓고 왔어.  괜찮지?!‘

“응...”

“오래 기다렸어?  어제 과장 때문에 또 과음한 거 같아... 과장이 글쎄...”

직장 스트레스를 뿜어내는 준호의 하소연이 들리지 않는다.

준호를 바라보고 있는 점원에게 희정의 온 신경이 가 있는 탓이다.

음료 준비가 완료되었음을 알리는 진동벨이 울리기가 무섭게 준호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음료를 주고받으면서  서로에게 눈짓하는 찰나의 순간을 희정은 놓치지 않고 포착한다.  

역시 그랬다.  준호는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

참담했다.

‘언제부터였을까?’

“뭐 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아... 미안.  잠깐 딴생각 좀 했어.  우리 이제 나갈까?”

준호와 그녀의 관계를 확인했으니 더 이상 그 장소에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잠시라도 그 둘을 한 공간에 두고 싶지 않았다.     


카페에서 나온 두 사람은 만개한 벚꽃 가로수길을 걸으며 여느 연인들과 같이 사진을 찍는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연인의 모습을 희정은 정성껏 카메라에 담는다.

어느덧 해가 지고 사방이 어둑어둑해진다.

화려한 조명의 빛을 받은 벚꽃들이 흐드러지며 밤하늘을 뒤덮는다.

탄성과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축제 속 푸드 트럭에서 두 사람은 간단하게 저녁을 해결한다.  

“이제 집에 갈까?”

“벌써?”

“해가 지니까 날씨도 추워졌고, 요 며칠 무리를 했더니 좀 피곤하네”

“그럼, 모텔에 가서 쉬어.  그러면 되잖아”

최근 부쩍 예민해진 희정과의 다툼을 피하기 위해 준호는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한다.

따뜻한 물에 샤워를 마치고 설핏 잠들려는 준호를 희정이 일으켜 세운다.

“우리 이야기 좀 해”

“무슨 이야기?  나 진짜 피곤해.  좀 자고 일어나서 이야기하자.”

“왜 피곤해?”

“오늘 오전부터 데이트했잖아.”

“그게 그렇게 피곤해?”

“그럼 안 피곤해?  나 요즘 회사 일도 많았던 거 몰라?”

“두 여자를 만나서 피곤한 건 아니고?”

“그게 무슨 말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

“내가 모를 줄 알았니?”

“도대체 또 뭘 가지고 이러는 거야!  이러는 네가 얼마나 질리는 줄 알아?  얼마나 견디기 힘든지 아냐고?!”

“아까, 그 카페 카운터에 있던 여자.  그 애랑 만나고 있잖아!  지금도 나랑 데이트 빨리 끝내고 그 애한테 달려가고 싶은데 못 가고 여기 이러고 있어서 짜증 내는 거잖아!”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다.  어떤 논리적인 설명도 희정을 납득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준호는 차리리 그곳을 벗어나려 한다.

“알겠어.  미안해.  가지 마.  그만할게”

더 이상의 추궁은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준호를 멈춰 세운 희정은 티백을 뜯고 따뜻한 차를 우려낸다.  그리고, TV에 시선을 뺏긴 그를 확인한 후에 수면제를 차에 섞는다.

그가 잘못을 인정하고 앞으로는 희정만을 바라보겠다고 약속을 해 주었더라면 이런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바람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차고도 넘친다.

카페에 그녀가 등장한 이후부터 그곳의 단골이 되었다는 점.

카페를 벗어나면 준호의 표정이 어두워진다는 점.

그녀가 희정을 적대적으로 대하는 점.

그녀의 외모가 준호의 이상형이라는 점.

준호를 대하는 그녀의 눈빛이 남다르다는 점.

등등.

그런데도 준호는 끝까지 발뺌했다.  그렇다면, 그의 바람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

수면제를 먹고 잠든 준호를 확인한다.

그리고, 준비해 간 도구들을 가방에서 꺼냈다.

누워 있는 준호에게 다가간 희정은 마음을 굳히는 듯 한 긴 한숨을 내뱉은 후 도구를 사용했다.

...

하얀 베갯잇이 붉게 물들어 갔다.

‘그 여자를 다시 안 만나겠다는 약속만 했더라도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텐데...’

희정은 준호의 대처가 끝까지 원망스럽다.  

   



상담실에 들어선 희정은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건넨 후, 의자에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하면서 가만히 있지 못했다.

정신질환자와 교도소 수용자를 오래 만나온 나는, 이들의 우발적 행동의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으므로 희정의 행동이 불안했다.

특히, 그녀는 책상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었으므로 가만히 앉아 있는 나에게 언제든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희정님!  희정님이 그렇게 서서 계속 움직이시니 제가 불안해요.  자리에 앉아주시겠어요?!”

나는 불안을 감추지 않았다.

“아!  그렇죠!  선생님, 죄송해요.  앉을게요.  잠시만요”

희정은 이렇게 이야기했지만, 여전히 안절부절못하며 자리에 앉지 않았다.

그녀의 말투에서 공격성이 아닌 초조함을 느낀 나는 잠시 그녀가 차분해지기를 기다렸다.

“괜찮다면, 저기 블라인드를 좀 올려주실 수 있나요?  산을 보고 싶어요.”

수분이 흐른 뒤, 그녀가 요구했다,  

블라인드가 걷힌 후에야 안정이 되는 듯, 그녀는 자리에 가만히 앉았고, 창밖 어딘가를 한참 바라보았다.

“죄송해요.  선생님, 제가 답답하고 불안해서 그래요.  이런 제가 견디기 힘드시죠?!”

‘견딘다’라는 표현은 일정기간 버티어 내는 것을 뜻하는 것인데, 희정은 처음 만난 나에게 그 표현을 사용하고 있었다.  살해당하기 직전 남자친구가 그녀에게 했던 말.

나는 희정에게 우리가 만난 시간은 고작 30분도 채 되지 않았다는 것과 자리에 앉아 달라는 나의 부탁에 그녀가 응해줬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그런 그녀를 왜 견디기 힘들어할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불안한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다.

“사건이 일어난 뒤부터 생긴 증상이에요.  그냥 불안해요.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리고, 이렇게 불안해하는 저를 사람들이 잘 못 견디더라고요.”     


무역회사에 다니던 그녀는 깔끔한 업무처리에 배려 깊은 성격으로 동료들에게 좋은 평을 받는 직원이었다.  가정에서도 장녀의 역할을 톡톡히 하는 자랑스러운 딸이고, 언니였다.  

그녀에게 내려진 ‘질투망상’이라는 진단명은 그런 것이었다.

조현병의 망상과 달리 기괴하지 않고, 현실에서 충분히 있을 법한 내용을 가진다.  나름 논리적이고, 지리멸렬하지 않다.  망상이 있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이상해 보이는 면이 없는 만큼 사회생활을 하는 데에도 무리가 없다.     


그런 희정에게 준호의 외도 의심에 대한 논쟁은 불필요했다.  대신, 그 믿음들로 인해 희정이 겪은 힘겨움과 불편함에 집중했다.  애정망상의 대상이 되었던 준호가 사라진 상태에서 이런 작업은 의미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희정은 여전히 전쟁 같았던 마음에 힘겨워했고, 의심으로 고갈된 에너지를 채우지 못하고 있었다.  교도소라는 장소에서 아무에게도 터놓지 못하는 감정들을 쏟아내던 희정은 수시로 나를 찾기 시작했다. 경계를 설정해야 했다.  정해진 날에만 만나는 것을 제안했고, 희정은 동의했다.  

그 약속은 잘 지켜졌다.

준호를 향한 분노와 배신감이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

우리는 이제 희정의 자존감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희정은 자신이 사랑받을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아야 했다.

나는 그녀가 스스로의 강점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돕고 지지했다.

그러던 어느 날 희정이 나에게 물었다.

“오늘은 몇 명을 만나고 가실 거예요?”

“오늘은 저만 상담해 주고 가시면 안 되나요?”

“지난번에 보니깐 23번이랑 선생님이 친해 보이던데, 그 애도 상담 대상자예요?”

“다른 수용자들과 상담 시간은 보통 어느 정도 걸려요?  저처럼 2주에 한 번씩 해요?”

“23번한테는 왜 웃어준 거예요?”

“23번도 사랑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에요?”

...

나는...

준호가 되어 있었다.

희정은 결국 깨닫지 못했다.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준호도, 나도 아닌

희정 자신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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