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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엘리온 Dec 05. 2023

상담실 가는 길

고모: 너, 상담 치료받을래?  애국가 부를래?

유정: 애국가?  무슨 애국가?

고모: 네가 부른 애국가.  그걸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  너 같은 꼴통을 만나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더  라고.   

  

  상습적으로 자살 시도를 하던 유정은 상담치료 대신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사형수를 만나기 위해 교도소로 향한다.   

  수녀님으로 교도소 봉사를 오래 다닌 고모와 교도관은 웃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지만, 그 뒤를 따르는 그녀는 무표정했다.  낯선 곳을 지나고 있건만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둘러보는 일도 잘 없다.  대학가요제에 나왔던 그녀를 알아보며 “만나게 되어 영광”이라는 교도관의 말에 “사실, 제가 마지못해 왔거든요”라는 대답으로 말문을 막아버리는 그녀는 모든 것에 시큰둥해 보인다.

  2006년 개봉한 강동원 · 이나영 주연의《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라는 영화에서 이나영이 교도소 복도를 걷는 장면이다.  




  내 기억과 다르다.  내 기억 속의 이나영은 낯설고 왠지 무서운 그곳을 긴장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며 걷고 있었는데...

  지금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그 장면을 찾아본 나는 잠시 멍해진다.

영화 속의 그곳과 별반 다르지 않은 복도를 걸을 때마다 나는 여전히 이나영의 모습을 떠올리며 내 표정도 그러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사형수를 만나기 위해 왜지 모를 음침함이 존재하는 공간을 지나는 기분.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지나는 이 길이 나는 아직도 낯설다.  그리고 영화 속 긴 복도를 걷고 있는 것 같은 비현실감을 느낀다.

  그 길을 지나야지만, 나는 내가 일하는 사무실에 도착할 수 있다.  도심 속의 횡단보도를 바쁘게 걷는 사람들을 그려 놓은 복도의 액자에서 이질감을 느끼고, 몇 겹의 철문을 지나 자물통으로 굳게 잠겨진 마지막 문까지 열고나면, 열 개 정도의 책상이 놓인 공간이 나온다.  

  히터를 켜고, 티포트에 우려낸 뜨거운 차를 마셔도 추위가 쉬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 중 하나를 우리는 그곳이 ‘담장 안’ 이어서라고 말한다.  과학적 근거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교도소 밖의 세상인 ‘담장 밖’에 비해 ‘담장 안’은 3도가 더 낮다고 한다.  도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지어진 건물, 시멘트벽에서 나오는 냉기, 그리고 뭔지 모를 마음의 추위의 합이 3도 정도 되리라.

  손발이 차가워서 추위에 더 취약한 나는 뜨거운 커피가 담긴 컵을 한 손에 꼭 잡은 채 컴퓨터를 켠다.  업무와 관련된 메일 등을 간단히 확인하고 나면, 수용자 관련 정보가 들어 있는 시스템에 접속한다.  전 날 입소자들 중 상담 대상자가 있는지, 지난밤 동안 소란을 피운 정신질환자들이 있는지, 상담 요청을 한 수용자가 있는지 살피면서 오늘 내가 만나야 할 내담자들의 명단을 정리하고, 필요한 자료들을 준비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줄 따뜻한 믹스 커피를 탄다.  가족마저 포기하고 떠난 경우가 많은 이들에게 이 달콤한 차는 이곳에서 오늘 하루를 더 버티게 하는 힘이 된다.

이것으로 이들의 마음에 다가갈 준비를 끝낸 나는 마스크를 끼고, 상담 장소로 이어진 6개의 문을 통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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