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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반게리온과 일본 버블 경제 붕괴

애니 <신세기 에반게리온>

by 제이슨

나는 최근에 보는 애니들은 잘 기억에 안남는다. 왜냐하면 깊이가 얕고 재미 위주라 볼 때는 재밌게 보지만 보고 나면 남는 기억이 그다지 없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느낌은 요즘들어 심해지고 있는데 이 때문에 애니를 몇달 간 끊었었던 경험도 있다. 이는 봐야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보게 되는 작품들도 정작 보면 막상 몰입이 안될 때가 있어서 더 그렇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애니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알게 모르게 철학적인 논쟁이 가능한 작품들도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그 중 내가 대표로 꼽는 작품은 진격의 거인(증오의 연쇄 및 인종차별), 기생수(인간비판과 인간찬가), 데스노트(사적제재), 바람의 검심(메이지유신의 공과), 혁명기 발브레이브(혁명), 그리고 성경적인 해석과 사회 비판을 주로 담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있다.


에반게리온의 세계관을 보려면 당시 일본의 상황을 봐야 한다. 1990년대 당시 일본은 호황으로 누렸던 버블경제가 무너지며 대위기를 맞이 한다. 그러면서 이 시기 청소년들과 청년들은 가족들로부터 안정적인 유대감을 얻지 못하는 동시에 사회적으로도 취업난을 겪는 등 내외적으로 어려움에 빠져있었다.


결국 그들은 그리하여 가상현실로 빠지게 된 것이고 일본 오타쿠 문화는 폐쇄적으로 변해갔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이러한 버블경제 붕괴 이후의 사회적 배경을 가진 만큼 작품 속 등장인물들 또한 가족의 해체로 인한 정서적 불안을 겪는데 특히 작품 초반부에서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이 에반게리온 초호기 파일럿 이키라 신지다.


하지만 에반게리온은 이러한 이들에게 현실도피는 그만하라고 꾸짖는다. 그래서 에반게리온은 대안으로 대인 관계를 허물고 모든 사람이 하나 되어 살아가는 것과 각자의 대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모색하는 것중 하나를 택하라고 작중 내내 시청자들에게 말한다.


즉 증오의 뿌리를 없애기 위한 대안은 우리가 개인을 인정하면서도 타인과의 대인 관계 형성을 통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이러한 에반게리온의 메세지들은 아이러니 하게도 에반게리온 시청층인 오타쿠들에게도 포함된다. 그들에게 하는 말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그만 방구석에 쳐박혀서 애니 보고 밖에 나가서 사람과 사귀라"는 것이다.


동시에 재밌는 것은 에반게리온의 세계관이 성경에 기반해있다는 것이다. 성경 중에서도 특히나 구약을 많이 참고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중에서도 창세기의 "우리는 모두 죄인"이라는 구절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작중 운석을 통해 지구에 떨어진 아담은 자신의 자손인 사도들을 잉태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도중에 어긋나고 릴리스가 지구에 와 사도를 봉인시키고 아담 이후 역사를 이어가는 존재, 인간을 만든다.


이것이 에반게리온이 재해석하고 있는 성경의 창세기, 그리고 인간의 기원이다. 그래서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설정상 인간은 부당하게 사도들을 밀어내고 지구를 차지한 원죄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불완전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며 작중 등장인물들도 원죄 때문에 고뇌하고 고통받는 것이다.


이에 신지의 아버지 이카리 겐도는 인간의 불완전성을 극복할 계획을 세운다. 지금의 불완전한 인간을 넘어 신적인 존재가 되어 고독으로부터 벗어나자는 것이었다. 끊임없는 고독에 시달리는 인간으로부터 벗어나 새시대의 새로운 인간으로 나아가는 것, 그 중심에 에반게리온이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의 제목은 신세기를 열어갈 에반게리온이라는 뜻의 신세기 에반게리온인 것이다.


에반게리온은 이후 일본 애니 시장에 큰 영향을 끼쳤다. 에반게리온 감독 안노 히데아키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아라키 테츠로 감독 또한 인간의 원죄와 구원을 모티브로 삼아 길티 크라운을 연출하기도 하였으니 말이다. 진격의 거인 또한 에반게리온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그와는 대비되게 귀멸의 칼날은 에반게리온의 안티태제라고 볼 수 있는게 내면 갈등이나 인간의 심리와 개개인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서사의 구조는 거의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귀멸의 칼날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작품은 죠죠 시리즈다.


이처럼 최근 대히트작인 귀멸의 칼날이 에반게리온의 방식에서 벗어나며 에반게리온이 절대적으로 영향을 끼쳤던 시기 또한 지났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에반게리온은 일본 애니 시장에서 아주 오랫동안 기억될 명작으로 남을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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