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쇼 시대를 배경으로 한 보컬로이드 노래 하츠네미쿠 '천본앵'. 극우 노래라는 평도 있지만 판단은 알아서. (영상 참조: https://youtu.be/shs0rAiwsGQ)
어느나라나 다 있는 문제지만 일본은 정치인 암살 문제가 예전부터 있어왔다. 전국시대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명장 오다 노부나가가 쇼군이 되는 것을 앞두고 암살당했었고 흑선내항 사건 이후인 1862년에는 막부의 개국 정책(미일통상조약 비준 문제)와 양이지사에 대한 과격한 탄압에 반발한 미토 번의 지사들이 사쿠라다 문에서 막부의 로쥬 이이 나오스케를 참살했다. 이 사건이 벌어진 것에는 당시 고메이 천황이 에도 막부의 개항정책에 공개적으로 분노를 표했던 것도 한 몫했다.
메이지 시대 들어서도 암살의 역사는 계속 이어져갔다. 막부 말기 때처럼 메이지 신정부의 군대도 프랑스군식으로 개편하려 한 오무라 마스지로는 사무라이 계급의 특권을 폐지하려다 살해당했다. 그 이전에는 삿초동맹을 주선시키고 대정봉환에 앞장섰던 도사 번의 유신지사 사카모토 료마가 암살당하는 일도 있었다.
1876년 세이난 전쟁에서 사쓰마 반란군이 패하고 사이고 다카모리가 자살했다. 그 와중에 내전 중 기도 타카요시마저 병사했기에 유신 3걸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오쿠보 도시미치에 의해 정계가 주도되어 왔다. 그러나 그 오쿠보도 마차를 타고 가던 중 무사들에게 습격받아 칼에 베여 죽었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하라 다카시 총리는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전성기를 누렸던 총리로 중의원 제1당의 대표로서 취임한 첫 총리이기에 정당 내각의 시작을 열었다고 평가 받는다. 거기에다가 화족 출신이나 유신 지사 출신이 아니었기에 더 상징성이 깊었다. 하지만 그 역시 신성한 황실 문제에 개입했다는 이유로 극우 청년이 찌른 칼에 맞아 숨졌다.
정당 내각의 시초를 열고 다이쇼 시대의 최전성기를 누렸던 하라 다카시 총리. 그가 허무하게 죽은 것은 쇼와의 어둠에 대한 전조였는지도 모른다.
하라 다카시의 사망은 안정적으로 자리잡아가던 민주정치에 대한 과감한 도발이었다. 특히 황고둔 사건 이래 군부의 폭주가 지속되면서 청년장교들과 연관된 테러들도 벌어졌다. 이러한 청년장교들을 통칭 '황도파'라 불리는데 생도 시절 기타 잇키와 오카와 슈메이의 저서를 읽고 천황제 사회주의적 사고관을 가진 자들이다. 이들은 폭력에 의한 유신을 숭상했다.
1930년은 런던 해군군축조약이 있었던 해였다. 여기서 일본의 정당 세력들은 함대를 규제하는데 동의하는데 당연히 이 과정에서 군부와 충돌이 벌어졌다. 이때 조약에 찬성하던 사람들을 조약파, 조약에 반대하던 사람들을 함대파라 불렀다. 그리고 그 함대파 청년장교들에게 영향을 받은 극우 청년이 하마구치 오사치 당시 총리에 총격을 가했고 그는 병원에 옮겨졌지만 얼마 못가 사망했다,
1932년에는 드디어 군부에 의한 첫 테러가 벌어졌다.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가 해군 청년장교들에게 백주대낮에 암살된 사건이었다. 단순히 이 사건은 정치적 암살이 아니라 쿠데타로 이어질 뻔 했는데 특히 민간 우익 단체인 다치바나 고자부로의 애향숙이 농민 결사대를 조직해 발전소 등을 습격했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으로 정당 내각은 막을 내리고 군인 통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5.15 사건과 관련되어 직전에 있었던 혈맹단 테러도 빼놓을 수 없다. 2월 9일 대장대신 이노우에 준스케가 오누마 쇼에게 암살당하고 한달 후인 3월 5일에는 재계 인물이자 민정당 후원자인 미쓰이 그룹 이사장 다쿠마 남작이 은행 현관 앞에서 살해당한 사건이었다. 이는 단순히 우연이 아니었다. 이노우에 닛쇼라는 극우 인사가 주도한 혈맹단의 '일인일살' 계획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천황은 국민을 보살피고 국민은 천황을 현인신으로 떠받드는 군민일체를 주장했는데 특히 이노우에 닛쇼가 보기에 의회제도와 그의 주체인 정당, 재벌은 군민일체를 파괴하고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 의회는 매국노의 무리였고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정치는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당리당략과 자본가를 위한 금권 정치였다.
따라서 일본은 비상시국이며 그렇기에 개혁을 폭력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고 봤다. 혈맹단 테러의 특징은 연속성이 강하지만 그에 비해 차후 대책이 부족했다는 것인데 이는 이노우에 닛쇼의 제자들이 해군 청년장교들이 5.15 사건을 일으킬 때도 똑같았다. 해군 청년장교들은 같은 쇼와 유신 지사인 육군 청년장교들의 리더 니시다 미쓰기까지 죽이려 했었다.
5.15 사건 당시 언론의 보도
이어서 발생한 사건이 나가타 데쓰잔 살해 사건이다. 황도파의 거두이자 청년장교들을 뭍밑에서 지원해주던 마사키 진자부로 육군 교육총감이 좌천되자 청년장교들은 그 배후를 경쟁 관계인 통제파의 리더 나가타 데쓰잔 군무국장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1935년 황도파 청년장교 중 아이자와 사부로 중좌가 백주대낮에 칼을 휘둘러 그를 죽였다.
문제는 이러한 정치적 테러에 대해 일본 사회가 무감각한 것은 물론이오 문민 정치인들마저 두려운 나머지 침묵을 지켰고 사법부는 정상참작을 했다는 것이다. 왜 일본인들이 군부와 민간 우익들의 정치적 테러에 무관심했는가? 이는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겉으로는 화려한 민주주의였지만 그 이면에는 재벌들과 정당 정치가들의 정경유착과 노동권 억압, 농촌경제의 붕괴 등이 항상 따라와었고 결정적으로 쇼와 공황으로 인해 허무하게 종식되면서 민간에 의해 주도되는 정치에 환멸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특히 농촌이 피폐화된 것에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쇼와 유신으로 바뀌는 것에 큰 영향을 줬다. 식민지였던 조선에서 쌀이 수출되어 일본에 유입되면서 쌀 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농산물 가격이 폭락함에 따라 이른바 '쌀 소동'이 벌어졌고 농가의 부채총액은 1930년 기준 40억 엔을 넘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전성기였던 1917년에는 소작쟁의가 85건이었던 반면 정당 내각이 몰락할 시점, 즉 만주사변과 5.15 사건과 비슷한 시기인 1933년에는 4,000건이 넘어섰다.
일본 본토의 농민의 삶도 조선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히나 아직 도시화가 진행 중이었고 산업 불황으로 귀농도 늘었는지라 제국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건 여전히 농민이었다.
결국 쇼와 시대에 이르어 도호쿠 대기근이 발생하고 농민의 고통은 더욱 커졌다. 이때부터 식량을 해결하기 위해 각 가정은 딸을 유곽에 팔아넘겼고 결식하는 아동이 속출했다. 특히나 황도파 청년장교들의 대다수는 농민의 자제들로써 농촌이 피폐해지고 금융공황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재벌과 정당 정치가들은 정경유착에만 신경쓰고 그들이 벌인 시베리아 출병의 실패로 군인의 위상까지 추락하는 것을 보고 분노를 느꼈는데 단순히 군부 내 장교들 뿐만 아니라 전 국민이 공유하던 분노였다.
그리고 그 분노의 절정은 2.26 쿠데타로 향했다. 폭설이 내리던 새벽 긴급히 출병한 청년장교들이 이끄는 장병들은 '존황토간'(천황을 떠받들고 간신을 토벌한다)는 구호 아래 사이토 마코토 전 총리와 여러 정치인들을 죽였다. 더 나아가 오가타 게이스케 현직 총리와 천황의 시종장인 스즈키 간타로 전 연합함대 제4구축대 사령을 비롯한 여러 이른바 비교적 의회 정치에 호의적이던 공직자들을 천황의 눈과 귀를 가리는 간신으로 몰아 죽이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럼에도 이 사건은 오히려 자신들의 측근이 간신으로 취급받은 것에 대해 분노한 쇼와 천황이 자신이 직접 진압하겠다고 나서며 궐기군을 반란군으로 규정하며 원대복귀를 명하자 허무하게 종료되었다. 이 사건으로 그동안 정치적 테러에 정상참작을 해주던 일본 정치권은 큰 위기의식을 느껴 아직 할복하지 않은 주모자들을 사형시켰으며 사건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이들의 사상적 근원이 되었던 기타 잇키까지도 처형했다. 더욱 웃긴 건 기타 잇키는 어디까지나 천황을 국가개조의 도구로만 봤었는지라 죽어가면서도 도련님에게 투구를 빼앗겨 진 싸움이라며 히로히토 천황을 비웃었다고 한다. 그리고 2.26 이후는 알다시피 역설적이게도 군부의 권한 강화를 낳아 두려울 게 없어진 통제파의 폭주가 진주만 공습으로 절정에 달했다.
이러한 일본의 정치적 테러의 역사, 특히 전전 쇼와 시대의 테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정치인의 무능과 그들이 금권과 당리당략을 위해 정치를 하면서도 정작 사회의 어두운 이면에 있는 문제를 무시할 때 얼마든지 괴물은 깨어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