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국은 근대화에 성공하면서 제국주의적인 행보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청일전쟁을 시작으로 러일전쟁, 산둥반도 점령과 21개조 요구, 황고둔 사건, 만주사변, 러허사변, 중일전쟁, 더 나아가 태평양전쟁까지 일본 제국 시절 동안 일본은 이처럼 팽창 정책을 펼쳐나갔다. 그렇다면 일본은 왜 그랬었을까?
먼저 일본 제국의 팽창주의적 안보관의 기원을 살펴보자면 에도 막부 시절부터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7세기 당시 러시아는 청나라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통해 아무르 강 유역의 경계를 확정했는데 그 후 태평양으로 향하던 러시아는 자연스럽게 일본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그래서 표트르 대제 때부터 러시아는 일본에 관한 정보를 수집해왔었으며 일본어학교도 설립되었다.
그러다가 18세기 말기부터는 아예 일본 부근으로 함선들을 보내기도 했다. 이는 쇄국을 하며 오직 네덜란드 하고만 제한적으로 교류하던 일본과 통상 관계 수립을 하려는 계획을 가진 러시아 정부의 방침 때문이었으며 저렇게 일본에 접근할 수가 있었다는 것은 극동 태평양 지역에서 러시아 해군력이 증강되고 있었다는 얘기기도 하다.
러시아의 위협이 대두되는 와중에 정작 군선 건조 제한으로 인해 막부의 선군은 대응을 잘 하지 못했는데 이때 센다이 번 출신 하야시 시헤이와 사가 번 출신 고가 세이리 등을 중심으로 이른바 '해방론'이라고 불리는 대책들이 거론되었다. 이들의 주장은 각자 차이가 좀 있었지만 대체로 러시아에 대한 위기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1860년에 러시아가 베이징 조약으로 얻은 연해주에 블라디보스토크라는 거점을 만들면서 일본 내 러시아 위협론은 더욱 힘을 얻었다.
막말기 이러한 위기 의식이 나온 배경으로는 우선 약 200년이나 일본은 군사적 위기 상황이 없었다는 것을 꼽을 수 있다. 청은 적어도 18세기 중반까지 대외전쟁을 겪었고 내부 소요들도 많았지만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 수립 이후로 몇차례의 반란을 제외하곤 없었다. 이렇게 되면서 위기 의식을 가진 지식인들은 더 나아가 일본의 안보를 지키기 위해서 에조나 류큐 또는 팽창해서 한반도와 만주를 이익선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이토 히로부미 스승 요시다 쇼인도 이런 맥락에서 정한론을 주장했다.
에조치(훗카이도)를 개간하고 캄차카, 오호츠크를 탈취하고 류큐(오키나와)도 점령해 그 영주들을 에도로 불러들여야 한다. 또 옛날과 마찬가지로 조선이 일본에 공납을 바치도록 하고, 북쪽으로는 만주 땅을 얻고, 남쪽으로는 타이완, 필리핀을 손에 넣어 일본의 진취적인 기상을 보여줘야 한다.
- 요시다 쇼인 -
그러나 이런 주장은 어디까지나 소수파에 머물렀었다. 거기다가 막부는 하야시 시헤이의 저서들을 출판되자 마자 금서 처분했으며 그를 유형에 처했다. 또한 미토번주는 유코쿠의 상서를 경청했으나 그를 좌천시켰고 막부의 간조부교 도야마 가게미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기도 했다.
근년 이적(서양)의 배가 종종 일본에 나타나는데 이들이 전쟁을 일으켜 일본을 병합하려는 뜻을 품고 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 항해술에 능한 이적이라고 해도 수만 리의 큰 파도를 넘어 와 전투할 수 있겠는가. 만에 하나라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지금 사람들이 이선이 오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난학자들이 퍼뜨리는 근거없는 소문 때문이다. 하야시 시헤이 같은 자들은 논할 가치도 없는 이런 해독을 유포한 최악의 인간이다. 지금 일본에 오는 이선은 모두 해적에 지나지 않으며 세계 각지를 두루 다니며 해안 지방을 습격하여 아무것이나 그곳의 물건을 약탈할 정도이니 두려워할 만하지 않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1868년 메이지 신정부가 수립된 이후로는 러시아 위협론이 일본 지도층 사이에서도 논의가 확대되었다. 이 시기에 가라후토(사할린) 섬에 러시아군이 들어오면서 영토분쟁이 생겨났는데 구로다 기요타카 개척차관은 일단은 에조(훗카이도) 개발에 집중해야 한다고 판단, 옛 막부의 관료였던 에노모토 다케아키를 공사로 파견해 러시아 외무성과 교섭으로 지시마-가라후토 교환조약을 체결하게 했다. 이 조약으로 사할린은 러시아에게 넘어갔고 대신에 일본은 쿠릴 열도 일부를 얻어냈다.
그러나 지시마-가라후토 교환조약 때문에 일본 일각에선 러시아의 팽창주의에 대한 반감이 더욱 고조되기 시작했고 이러면서 러시아가 만주를 침략하고 한반도까지도 진출할 것이라는 얘기도 나왔었다. 또한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일본의 주권 유지도 힘들어 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므로 메이지 신정부의 지도층들 사이에선 러시아가 남하하기 전에 한반도를 이익선으로 먼저 확보해놔야 한다는 의견들이 많이 나왔다.
실제로 지시마-가라후토 교환조약을 체결한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데라시마 무네노리 외무경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러시아는 조선 국경부터 만주 해안의 신영지에 이르는 곳을 주목하고 있으며 만약 러시아가 조선에 먼저 진출한다면 일본의 해안이 위험해지니 미리 조선을 이익선으로 확보하자고 주장했다. 한편 이때 메이지 신정부가 수립 직후에 조선에 보낸 국서에 '황', '칙' 등 청나라만 사용할 수 있는 용어가 들어가 있다면서 조선 조정이 일본 측의 국서를 거부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면서 일본 내에선 사이고 다카모리와 에토 신페이를 비롯한 정한론자들의 주장이 힘을 얻었지만 오쿠보 도시미치와 기도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 같은 온건파들과의 경쟁에서 밀려났고 그래서 일본의 대조선정책 방향은 무력보단 외교적인 방법으로 내부에 영향력을 확대하는 방침으로 정해진다. 강화도조약으로 조선이 개항한 후 일본은 지속적으로 조선 내부에 침투를 강화하는 한편 청나라의 영향력을 어떻게든 감소시킬려고 하면서 러시아 위협론으로 인해 시작된 조선 진출은 곧 일본과 청나라의 경쟁으로 번졌다.
한편 일본에서도 청일전쟁 이전인 1890년 12월 6일, 야마가타 아리토모 수상의 제국의회 시정 방침 연설이 있었다. 이 15분 간의 연설 동안 '주권선'과 '이익선'이라는 특이한 용어가 등장했다. 여기서 주권선은 국경을 뜻하는데 야마가타 수상은 이러한 주권선을 지키기 위해선 '주권선의 안위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구역'인 이익선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두 개념은 1889년 6월, 빈 대학 교수 슈타인이 내세운 '권세 강역', '이익 강역'을 알기 쉽게 바꿔놓은 것이다.
1894년 무쓰 무네미쓰 외무상 등 대외강경파의 주도로 일본은 경복궁 쿠데타를 일으키고 청나라와 결전을 준비하기 시작했었다. 그러자 기르스 러시아 외무상은 히트로보 주일 공사를 통해서 일청 양국의 동시 철군을 요구하는 공문을 보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쟁은 결국 벌어졌고 전쟁의 전리품으로 일본이 랴오닝을 얻어내자 프랑스, 독일과 함께 반환하라고 압박했다. 이에 무쓰 무네미쓰 외무상은 뤼순과 다롄 외에는 전부 포기하고 포기한 영토는 추가배상금을 받겠다고 답했지만 러시아 정부의 태도는 단호했고 결국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어쨌든 청일전쟁으로 일본의 이익선은 북쪽으로는 조선, 남쪽으로는 대만으로 까지 확대되었다. 하지만 러시아에서는 그나마 극동 정세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었고 나름 일본과 타협을 시도하기도 했었던 세르게이 비테 재무상과 람스도르프 외무상이 밀려나고 대신에 1903년 베조브라조프라는 강경한 야심가가 극동총독으로 오게 되며 일본의 이익선은 위협받게 되었다.
특히 뤼순 항을 획득한 이후로 러시아는 더욱 강경해졌다. 왜냐면 뤼순 항은 협소한 탓에 선박을 수용하기에 좋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정박지 밖에 주둔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여기에 불만이 많던 태평양함대 사령관 두바소프는 해군장관에게 조선에 군항을 마련해야 한다며 마산항이 해군기지로서 가장 적합하다고 주장했고 1899년 5월, 러시아 정부는 대한제국 정부에 압력을 넣어 마산의 토지를 매입하려 했지만 일본의 방해로 실패했다. 하지만 이 일은 러시아가 조선에 거점을 원한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게 되었는지라 일본 정부는 초조함을 느끼게 되었다.
동시에 베조브라조프는 한반도를 차지하면 다롄과 뤼순 방어가 수월해지는 것과 더불어 철도 부설 비용도 줄일 수 있다며 경제 및 안전보장 문제 차원에서 황제를 설득했다. 이는 의화단 사건 때 만주 진출을 주도했던 자이자 러시아 내에서 강경파로 분류되던 알렉세이 쿠로파트킨 육군상보다도 더한 태도라고도 볼 수가 있다. 한편 일본에선 반러 정서가 강해지고 있었고 러시아에 맞서 영일동맹을 체결했지만 정작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 같은 원로들은 세간의 인식과는 다르게 당시에 굉장히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고 하는데 왜냐면 아직은 외교 협상에 기대를 걸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일본에선 '만한교환론'이라 해서 러시아의 만주에 대한 이권과 일본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서로 인정하자는 방침으로 협상에 나서려고 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오히려 일본은 만주 문제에 논할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러시아의 한반도 해협 자유 항해권과 북위 39도를 기점으로 서로 한반도를 나누자고 제안했는데다가 만주에 주둔한 병력들을 철군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근데 문제는 이게 한반도를 이익선으로 확보하려는 전략을 가지고 있던 일본 입장에선 도저히 수용이 불가능한 제안이었다는 것.
결국 그렇게 되면서 1904년 러일전쟁이 벌어지게 되었고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이로써 일본은 기존 대만에 더해 조선과 남만주, 사할린까지 이익선으로 확보했고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과도 좋은 관계를 한동안 유지했다. 이러면서 일본은 드디어 그토록 원하던 안전권을 확보했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여전히 러시아가 얼마든지 다시 위협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당시 국제정세는 드레드노트 전함이 등장하고 빌헬름 2세의 주도로 독일이 영국과의 건함경쟁에 뛰어들면서 점점 각국이 군확 추세로 가는 중이었으니 일본 입장에서는 안심이 되진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러일전쟁 종전 이후인 1907년에 공세적인 단기결전을 중심으로 하는 <제국국방방침>을 세웠는데 여기에는 러시아 외에 미국, 독일, 프랑스에 대한 대비도 명시되었다.
그러면서 해외 식민지인 조선에 19사단과 20사단을 주둔시켰다. 보통 사단의 증설 과정에선 보병연대와 기병연대, 포병연대의 편성이 필수인데 이것도 각각 신설되면서 육군 사단 21개, 보병 연대 86개, 기병 연대 29개, 포병연대 30개 연대로 늘어났다. 청일전쟁 직전과 비교해보자면 일본 육군은 병력은 2배 이상으로 늘어났으며 군비도 크게 늘었다.
제1차세계대전이 터졌을 때는 영일동맹을 근거로 내세워서 독일령이었던 산둥반도와 남양 군도를 점령했다. 먼저 산둥반도를 점령했던 이유로는 바로 유사시에 바다와 육지에서 동시에 가상적국 중 하나이던 중국에게 개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독일이 부설한 자오지 철도는 베이핑과 톈진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철로를 따라서 베이핑을 공략할 수가 있는 아주 군사적으로 좋은 것이었기에 만약을 대비해서 확보할려고 했던 것이다.
두번째로 남양군도 점령은 전쟁시 해군거점으로 쓰기에 좋은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일본은 <제국국방방침>에서 러시아를 제1 가상적국으로 규정하면서 동시에 태평양에 식민지를 확장하던 미국에도 대비할 것을 명시했었는데 실제로 이때 획득한 남양군도는 1차대전 종전 후 국제연맹으로부터 일본의 위임통치령으로 인정받은 후 일본 해군에 의해 관리되다가 훗날 태평양전쟁 말기에 사이판 등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이렇듯 일본 제국은 무슨 본질부터가 특별히 제국주의의 광기에 미쳐있었다거나 아니면 서구처럼 무역, 포교, 사회정책적인 이유보단 안전권 및 이익선 확보에 대한 강박과 외부 세력에 대한 위협으로 인해 안전보장을 우선적으로 고려 및 그에 따라 식민지를 확장해갔다고 볼 수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팽창주의적 안보 정책은 결국 일본 제국이 감당할 수 없는 무리한 전쟁을 펼치다가 몰락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결과를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