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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Jul 15. 2023

천황제 파시즘 논쟁 정리

위로부터의 파시즘, 봉건적 군사독재, 테크노 파시즘

https://youtu.be/80cCp4oM4io?si=LbNOnyZdQsWSToeB

파시즘은 애초에 정의가 모호한 상황이다. 밀과 벤담으로부 대표되는 자유주의나 버크의 보수주의,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주의와는 달리 파시즘의 시조가 되는 이론가는 없다. 따라서 파시즘은 실체가 없는 사상으로써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다. 파쇼라는 단어가 정치적 수사로써 자유주의 진영이나 좌파 진영에서 낙인 찍기용으로 많이 사용함에도 학계에서 파시즘은 ○○다라고 정의내린 적은 없었다. 그나마 주류 학계에서 합의된 사항은 이탈리아 무솔리니와 독일의 히틀러는 확실한 파시스트라는 것 정도?


일본의 전전 체제는 그렇다면 어떨까? 흔히 '천황제 파시즘'이라 불리며 교과서 같은데에서는 파시즘 국가로 표기한다. 다만 학계에서는 천황제 파시즘이 진짜 파시즘이냐 아니냐로 논쟁이 갈리는데 이걸 한번 다뤄보고자 한다.

파시즘의 정의


파시즘에 대한 기존 정의는 롱맨(Longman) 사전에서 볼 수 있는데 여기서 사회주의에 적대적이고 독재적 지도자를 수반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정부와 반대세력에 대한 강제억압으로 대표되는 운동, 정권이라 나와있었다. 그러나 사상의 뿌리가 없고 각 국가마다 양상이 전혀 달라서 워낙 논란의 여지가 많기에 객관적으로 의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파시즘 문헌들은 한동안 파시즘 운동의 공통점들만 얘기할 뿐 각 운동의 특징을 파고 들어가지 않았다.


오설리반은 파시즘으로 추정되는 모든 요소들을 공통된 단일 현상으로 몰아넣는 건 왜곡이라고 했다. 그는 1930년대 이탈리아와 독일의 체제가 다르다는 걸 강조하며 일반적인 의미로 파시즘이라는 용어를 적용할 수 없다고 했다. 정치학자들은 파시즘을 개인적인 정치 신조의 관점에서 봤고 누구는 종교 타락, 정서적 박탈과 성적 억압에 대한 반응으로 봤고 1930년대 소련은 '가장 발전된 단계에 있는 자본주의 도구'로 묘사했는데 이게 마루야마 마사오에게 영향을 준다.


S. J 울프는 1969년 파시스트 운동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5가지 이념적 특징을 제시했다.


- 국가에 대한 찬양과 전체주의적 통제 지지

- 단일 정당의 지배, 지도자 찬양, 민주주의 거부

- 전통 가치 회복 장려하는 민족주의

- 전체의 의지를 개인적 의지보다 중요시하는 새로운 파시스트를 양성한다는 목표

- 폭력에 대한 미화


또한 파시즘이라는 주제를 저술한 에른스트 놀테는 부정어구로 구성된 6가지의 파시즘 최소 요건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 반마르크스주의

- 반자유주의

- 반보수주의

- 리더쉽 원칙

- 정당군

- 전체주의라는 목표


군국주의는 파시즘의 한 측면이라는 점에서 파시즘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군국주의는 군사적 미덕과 이상에 대한 찬양, 또는 공격적인 군사적 방어태세이며 군사적 가치를 도모하고 정치적 목표를 이루기 위해 군사적 방법을 활용하는 것이다. 1930년대 파시즘은 좀 더 폭넓은 의미로 해석되어 전체 국가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파급되서 군국주의로는 구현이 불가능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기타 잇키는 아래로부터 파시즘 운동인 국가개조운동의 상징이었다.

1930~40년대 일본 파시즘의 양상


일본 파시즘 이해는 위해 4가지 요소를 이해하고 시작하자. 첫번째는 두드러진 특징인 군국주의의 파급력, 둘째는 미숙한 의회민주주의 구조의 취약성, 셋째는 다른 아시아 민족과는 다른 근대화의 속도, 넷째는 세 요소를 주도하는 범아시아주의의 영향력이다. 이러한 요소들을 각기 주의하며 일본 천황제 파시즘의 양상을 해석해야 한다.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사무라이들은 특정 계급을 버리고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고자 했다. 따라서 일본 밖에서 일어나는 전쟁을 계기로 재기하고자 하였으며 1881년 현양사(玄洋社), 1901년에는 흑룡회(黑龍會)와 같은 비밀 조직을 결성했다. 이들은 민족주의적이었고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기점으로 활개치기 시작했다. 이러한 군국주의 분위기는 천황제 파시즘의 근간이 된다.


두번째 의회민주주의는 너무 불안정했다. 군대는 강력한 영향력은 헌정에도 반영되었고 군대에 대한 수요는 무시가 불가능했다. 더욱이 법은 육군과 해군이 의회와 내각으로부터 통제에서 벗어나있으며 종속되지 않을 걸 보장하고 있다. 당연히 어떤 경우에도 내각은 내부 문제에 간섭할 수 없었고. 일본은 독일의 자문을 받아 참모계층을 조성했는데 고바야시 히데오의 설명대로 근대화라는 강력한 추진력 덕분에 국가적 목표를 넘어 자원을 동원하게 되었다. 그런즉 일본의 원칙은 외부로의 팽창주의였으며 따라서 1890년 이전 시기에 일본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신속한 근대화에 우선순위를 뒀다. 이를 위한 노력은 호소력을 얻었고 하향식이었지만 근대화를 위한 노력은 근면성과 의무에 대한 양심이라는 일본 정신과의 조화였다.


이념적으로도 다이쇼 말~쇼와 초 일본의 국가주의 운동은 군부의 지원을 받았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기타 잇키(北一輝)였다. 그는 1918년 중국에서 돌아와 <일본개조법안대강>을 발표했으며 마루야마 마사오는 그에 대해 일본 파시즘의 이념적 아버지라 칭했다. 기타의 책은 일본의 후견 아래 범아시아주의에 헌신하지 않고 많은 일본인들이 재능과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다는 우익 지식인들의 시대정신을 보여준다. 1920년대 일부 파시스트들도 범아시아에 대한 열망을 지지했다.


초창기 천황제 파시즘의 이념은 아시아적 가치에 기반을 두고 사상을 토착 사상을 근간으로 하여 군주의 길, 유교사상, 종교철학이 기반이다. 불교에 강력한 국가적 색채를 띄던 니치렌(1222~1282)의 가르침은 기타 잇키와 이노우에 닛쇼에 사상에 영향을 끼쳤으며 신토와 파시즘이 일본을 지도자 위치에 올려놓을 것이라 봤다. 기타는 또 유교 사상을 연구하며 동양과 서양의 문명을 비교하는 것이 가능한다는 전제 하에 동양 정신이 서양보다 우월하다 확신했다.


이제부터 천황제 파시즘에 관한 입장들을 알아보자.

위로부터의 파시즘이다: 마루야마 마사오


마루야마 마사오는 세 단계에 걸쳐 천황제 파시즘이 발전했다고 주장한다. 첫번째(1919~1931년)은 시민들 사이의 우익단체 운동이었고 두번째 단계는 1931년 9월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며 시작, 군부가 파시즘의 원동력이 되었다. 세번째 단계(1936~1945년)은 마루야마가 말하길 파시즘이 이때 운동에서 국가 개조로 전환되었다 주장한다. 사실상 절정기이며 파시즘을 지지한 군부는 관료와 정당을 포함해 통치연합을 표방했다.


그는 일본 파시즘 운동에서 나타나는 3가지 특징을 가족제도, 토지 균분론, 범아시아주의로 꼽았다. 가족제도는 일본의 국가 체제를 가족의 연장선이라 본 것인데 독일이나 이탈리아와는 약간 양상이 다르다. 토지 균분론은 도시의 산업 확장에 대항해 농촌의 자치를 주장하는 것이며 범아시아주의는 유럽 식민지로부터 아사아인을 해방시키자는 이상이었다.


유럽 파시즘과 일본 파시즘을 구별하는 특징은 단계적 변화라고 마루야마는 말한다. 천황제 파시즘은 아래에서부터 나오지 않으며 대학생들의 대중 운동으로 출발한 이탈리아와 독일과는 달리 그렇지 않았다. 천황제 파시즘은 군대 및 관료 엘리트들의 지위를 강하는 방향으로 이뤄졌으며 정계 주변에서 민족주의의 가르침을 받은 극단주의 조직들이 활동했지만 의견이 달라 협력하지 못하고 제한되었다. 그러나 이와는 성격이 다르지만 자본주의와 서양 이념에 반발하는 지위가 있는 젊은 장교들 사이의 조직이 있었는데 이들이 만주사변 이후 영향력이 커진다.


1936년 2월 26일, 청년장교들이 일으킨 2.26 사건은 하층계급에서부터 파시즘에 영향력을 미친 극점인 사건이었다. 마루야마는 이를 전환점으로 봤으며 파시스트 폭동의 마지막이었다. 이후 청년 장교와 민간 우익이 주도한 아래로부터의 파시스트 운동을 후퇴했고 대신 1936년 이후 천황제 파시즘은 상층부, 즉 통제파들이 주도했다. 따라서 2.26 사건은 하층에서 급진적인 파시즘 운동을 종결시켜 천황제 파시즘이 독일과 이탈리아 파시스트 혁명과 다른 형태를 취하게 한 사건이었다.

파시즘이 아닌 봉건적 군사독재다: 로버트 팩스턴


로버트 팩스턴과 같은 사람들은 아예 천황제 파시즘을 파시즘이 아닌 봉건적 군사독재라고 보기도 한다. 약간 루마니아 안토네스쿠 정권이 철위대를 몰아낸 이후 평범한 반동적 군사독재 체제가 되었던 것이나 리베라가 죽고 프랑코 정권이 들어서 팔랑헤가 통합 팔랑헤가 된 후 국민생디칼리슴 원리에 따른 애국적 노동자가 주도하는 정치가 아닌 카톨릭 교회와 군부, 상인들이 주도하는 반동주의 정치 1이 되어버린 프랑코 치하 스페인처럼 일본의 천황제 파시즘도 약간 그렇게 보는 것.


어쨌든 로버트 팩스턴은 양차 대전 사이 일본의 파시즘에는 두가지 방법으로 접근한다. 하나는 지식인과 국가개조운동 주도자들이 일으킨 아래로부터의 영향에 초점을 맞추는 것인데 이들은 파시즘과 매우 유사한 성격의 강령을 지지하며 운동을 시작했으나 정권의 탄압으로 궤멸되었다. 또 하나의 접근은 국가 기관들에 의한 위로부터의 영향인데 이 접근 방식은 흔히 '천황제 파시즘'이라고 불린다.

그렇다면 지식인들과 국가개조운동 주도자들이 일으킨 아래로부터의 영향을 먼저 살펴보자. 정당 정치의 부패로 다나카 기이치 내각 이후 민주주의가 흔들리자 나라를 걱정하던 청년장교들은 기타 잇키와 오카와 슈메이 등의 국가개조론자들의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벚꽃회나 혈맹단이라는 이름의 비밀결사를 조직해 싸웠던 그들은 1936년 2월 26일 도쿄 시내를 점령하고 대장상을 비롯한 정부 요인들을 살해하며 국가개조의 꿈에 다가가는 듯 했으나 혁명이 진압되면서 주동자 뿐만 아니라 이들에게 사상적으로 영향을 준 기타 잇키까지 처형당했다. 이로써 아래로부터의 파시즘은 끝났다고 팩스턴이나 마루야마 모두 인정한다.

한편 일본을 파시즘 체제였다고 주장하는 일부 인사들은 통제파들이 군부의 실세가 된 뒤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이 주도했던 신체제 운동과 쇼와연구회라는 지식인 연구 단체를 통한 대중 동원 및 파시즘적 정책 제시 등을 근거로 든다. 그러나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는 쇼와연구회의 조언을 들었지만 파시즘의 사회연대주의나 반자본주의 요소는 거부했다. 실제로 일본의 천황제 파시즘은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부재라는 '대중 근대성'의 부재가 파시스트라는 딱지를 씌울 수 없다는 근거다.

요컨대 일본 제국 정부는 파시즘의 요소를 부분적으로 취사선택해서 받아들인 셈이라고 팩스턴은 보는 것이다. 국가 행동에 의한 '선택적 혁명'을 통해 조합주의적 경제 조직과 대중 통제의 수단을 일부 취하는 한편 명백하게 파시즘 운동 성격을 띤 대중 행동주의는 억압했던 것으로 생각하면 될려나?실제로 '일본의 히틀러'라고 불린 나카노 세이고가 이끄는 동방회가 1942년 선거에서 3% 득표율을 기록하자 제국 정부는 세이고를 가택 연금 시켰다.

이렇듯 일본 제국이 파시즘을 모방하였으며 파시즘의 특징을 여럿 보이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천황제 파시즘이라고 불리는 정치 체제는 단일 대중 정당이나 대중 운동이 없는 상태에서 통치자들에 의해 실시되었으며 유럽식 파시즘의 영향을 받은 일본 지식인을 무시하거나 억압했다고 이 관점에선 보여진다. 그런 점에서 일본 제국은 파시즘 국가가 아니며 파시스트는 황도파들이 사라지면서 끝장나고 파시스트를 모방한 자들이 권력을 잡은 것이라고 봐야 한다는게 로버트 팩스턴의 지론이다.

혁신관료의 대표적인 인물, 기시 노부스케. 기시는 만주국에서 산업개발 5개년 계획을 주장했다.

테크노-파시즘이라는 시각: 제니스 미무라


이 시각은 제니스 미무라라는 학자가 주장하여 논쟁의 대상에 오른 얘기다. 본질적으로는 위로부터의 파시즘과 비슷하나 이 사람은 통제파 외에도 신흥재벌과 혁신관료라는 계층에 주목하여 이 3개 세력이 연합하여 공장의 톱니바퀴처럼 과학적으로 운영되던 곳이 군국주의 일본이라고 주장한다. 기존의 천황제 파시즘에 댓잔 분석은 일본의 근대성 결핍을 강조하는 해석으로의 방향성에서 극우 세력의 공상적이며, 전근대적이고 비이성적인 시각과 밀접하다 했다. 일본식 파시스트의 길은 자유자본주의적 민주주의를 향한 전통적 서구의 근대화 경로에서 일탈한 것으로 그 원인은 후발 산업화, 허약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권위주의적이고 퇴영적인 지도자들에게 비롯되었다는 해석이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일본의 대중적 파시스트 운동의 실패에 대해 민주적 뿌리와 대중적 기반이 취약했기에 당시의 지도자들은 무법자에 빨려간 로봇으로써 결론적으로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인 성격으로 천황제 파시즘의 한계는 뚜렷했다 지적했다. 그러나 제니스 미무라는 마루야마와 팩스턴의 해석 모두에 반기를 들고 천황제 파시즘을 넘어 일반적인 파시즘 문제도 단순히 광신적이고 비이성적인 극우의 전유물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제니스 미무라는 군국주의 폭주의 원흉으로 지목받는 기존의 통제파가 아닌 혁신관료라는 계층에 주목한다. 이들은 테크노-파시즘의 추종자로써 권위주의적 형태의 기술관료주의자였다. 그들의 계획은 일본 민족의 문화적, 지정학적 우월성에 기반을 둔 생산적, 계층적, 유기적 국민공동체와 공과 사의 융합과 자본과 경영의 분리라는 관리 원칙의 실현이었다. 정치 형태 측면에서 일본의 테크노-파시즘은 군부와 관료 기획기구가 결합하는, 말 그대로 테크노크라트 계층이 통제하는 전체주의 국가 모델이라고 미무라는 해석한다.


이는 군국주의의 부활이나 전통적인 군부-관료 통치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서 오히려 새로운 테크노크라트 지도부가 전시체제의 심장부를 장악하는 것이었다. 급진 청년장교들과 민간 우익들이 내세운 파시스트 구상처럼 테크노-파시즘도 전쟁과 제국주의적 침략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활용된 민족우월적 공동체주의, 권위주의 통치, 국가 통제 경제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미무라는 테크노-파시즘은 다른 파시스트 구상과는 달리 승자 대 패자, 비용 대 이익, 목적 대 수단이라는 문제를 피하면서 우수한 과학 기술과 조직 그리고 국민정신(national spirit)을 통해 생산성과 효율성을 증진 및 번영시킬 것을 약속함으로써 좌우익 전문가 모두에게 호소력을 가졌다고 주장한다.


또한 제니스 미무라는 전시 기획 문건들, 각종 논설문과 연설문, 테크노크라트의 인터뷰에서는 파시즘 이데올로기와 정책 그리고 각종 프로그램을 지지하는 전문가들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고 했다. 파시즘이 자본주의 극복과 산업 사회에서 나타난 계급 갈등을 해결힐 수단을 제공한 것이었다. 더불어 그것은 자유주의와 공산주의를 뛰어넘는 근대의 대안 경로인 제3의 길(third way)로 현대 사회가 직면한 기술적 문제들에 대한 최선의 해결책으로 인식되었다. 가지지 못한 나라의 자원 부족을 과학기술과 국민정신으로 해결하고 아시아의 맹주로써의 운명이 그들을 지탱한 신념이었다. 따라서 혁신관료들의 세계관에서는 미국, 소련, 독일, 일본이 지배하는 네 개의 자급자족적인 초광역권(pan-regions)으로 지정학적 재조직은 필수였다는 것이다.

맺음말: 천황제 파시즘을 넘어 파시즘에 대한 재해석 필요성


사실 우리 사회든 외국이든 파시즘이 정치적 수사로 상대방을 낙인찍는데 사용된다. 가령 파쇼라는 표현이 그러한데 이 표현은 상대방을 자유를 부정하는 파시스트로 몰아감으로써 자신의 도덕성을 지키고 상대방의 주장을 원천 봉쇄시킬 수 있다. '우리 안의 파시즘' 논쟁도 한국인 내면에 미시 파시즘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게 파시즘인지 반동주의인지 구분조차 명확하지도 않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노예의 길>이라는 책에서 파시즘은 사회주의에 기반한 사상이라고 주장하며 라살레의 국가사회주의(state-socialism)와, 파시즘, 마르크스주의를 한 곳에 아예 묶어 분류했다. 그러면서 독일이라는 나라의 철학 전통에 대한 혐오를 드러냈는데 상당히 정치적으로 악감정을 가지고 접근하는 방식으로써 이런 식으로 파시즘은 무조건 낙인부터 찍고 봐야 한다는 사고는 파시즘의 실체를 조명하지 못하게 하며 진짜 파시스트들이 나타났을 때 자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천황제 파시즘 논쟁이 전전 쇼와 시대 일본이 파시즘이었냐, 아니었냐를 따지는 걸 넘어 파시즘의 실체까지도 접근할 수 있기를 바래본다.


참고문헌:


제니스 미무라, <제국의 기획: 혁신관료와 일본 전시국가>, 소명출판, 2015

로버트 팩스턴, <파시즘: 열정과 광기의 정치혁명>, 교양인, 2005

정두음, <장제스와 국민당 엘리티스트(1930년대 남의사)>, 선인, 2013

가타야마 모리히데, <미완의 파시즘>, 가람기획, 2012

한상일, <쇼와 유신: 성공한 쿠데타인가, 실패한 쿠데타인가>, 까치, 2018

마루야마 마사오,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 한길사, 1997

마쓰모토 겐이치, <기타 잇키: 천황과 대결한 카리스마>, 교양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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