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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Jul 22. 2023

2.26 사건: 극우 운동과 제국주의 정부에 대한 저항

황도파 청년장교들의 의의와 한계

쇼와 11년(1936년) 2월 28일, 즉 2.26 사건 발발 3일째 되던 날 근위보병 제1연대 소속의 다케야마 신지 중위는 사건 발생 후 반란군에 가입한 친구들 문제로 번민을 거듭한 끝에 황군끼리 서로 죽여야 하는 상황에 통분, 요츠야구 아오바초에 위치한 자택의 8장짜리 방에서 군도로 할복 자살하였으며 그의 부인 레이코도 남편의 뒤를 따라 칼로 자결하였다. 중위가 남긴 유서에는 "황군의 만세를 기원한다"라는 단 한 구절이 쓰여있을 뿐이었다. 부인의 유서에는 "군인의 아내로서 올 것이 왔습니다"라는 말과 부모보다 앞서가는 불효에 대한 용서를 빌고 있었다. 열녀 열부의 최후, 참으로 혼백마저 울릴 기개 있도다. 중위의 나이 향년 30세, 부인은 23세였다. 화촉을 밝힌 지 아직 반년이 채 안되었을 때였다.

- 미시마 유키오, <우국> 中 -


2.26 사건, 우리나라에서는 극우 청년장교들이 천황 친정 체제로의 복고를 지향하며 일으킨 쿠데타로 유명할 것이다. 당장 위에서 내가 인용한 문구가 들어간 소설의 원작자 미시마 유키오부터가 한국에서 극우 소설가로 유명한 사람이니 말이다. 따라서 2.26 사건의 주체 황도파들은 비록 마케이누들이지만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이라는 침략전쟁을 일으켰던 통제파들 못지 않게 극단적으로 팽창주의적이며 침략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이라는 인식이 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2.26 사건과 일본 침략주의, 제국주의와의 연관성이라는 근본적인 주제를 다뤄보겠다.

황도파의 초대 리더 오바타 도시로

황도파의 기원: 단기결전론과 정신력


황도파의 뿌리는 오바타 도시로(小畑 敏四郎)라는 인물과 연관이 있다. 다이쇼 말기부터 쇼와 초기까지 육군 중추에 있었던 오바타 도시로는 시대적 흐름과 달리 단기섬멸전을 중시했다. 그의 단기섬멸전이란 생산력과 기술력보다 정신력이 우위라는 것이며 병력, 장비, 자원, 생산력, 기술력, 노동력 등 자원의 많고 적음에 의해 총력전으로 승부가 결정된다는 통제파의 의견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오바타가 단기섬멸전에 관심을 쏟아붓게 된 결정적 계기는 러시아 혁명이었다. 상대적이지만 일본보다 가진 나라조차 4년째가 되자 전쟁에서 지지도 않았는데 비축해놓은 것을 토해내고 안에서부터 스스로 붕괴되어버렸다. 이에 오바타는 물음을 갖게 되었다. 갖지 못한 나라 일본이 비슷한 장기전쟁을 하면 얼마나 버틸 것인가, 라고. 그러한 인식에서 황도파는 장기전이 아닌 단기설멸전을 바탕으로 가야 하며 내부적인 단결로 제정 러시아와 같은 최후를 맞지 않기 위해 아마테라스 신의 후소인 천황을 중심으로 한 친정 체제 수립으로 가족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황도파에게 대외관에 있어서 가장 주적은 천황제와 도저히 공존할 수 없는 소련이었으며 이는 오바타 도시로가 러시아 혁명을 직접 눈 앞에서 봤던 것과 연관이 있다. 황도파는 소련을 주적으로 삼아 중국과 우호 관계를 구축하고 미국과 중립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봤다. 이는 소련의 경제 성장을 본받아 고도국방국가에 돌입한 후 미국과 중국을 쳐야 한다는 통제파와는 분명히 인식이 다른 부분이었다. 또한 황도파 영수는 아라키 사다오였는데 그는 소련군을 오합지졸이지만 제정 러시아군처럼 붕괴되지 않는 건 순전히 규율과 정신력 때문이라 보았다.

제국 농민들의 모습

황도파가 대중의 지지를 얻은 이유


戝閥冨を誇れども, 社稷を思ふ心なし
재벌은 부를 자랑하며 사직의 생각은 없도다

- 쇼와 유신의 노래 중 -


사실 군 행정에서 황도파의 능력은 그렇게 뛰어나지 않았다. 영수였던 아라키 사다오는 무능하다고 평가받았으며 마사키 진자부로 교육총감은 통제파이자 경쟁자였던 나가타 데쓰잔 군무국장에 의해 짤리기도 했었다. 더욱이 다이쇼 시대 우가키 군축의 주도자였던 우가키 가즈시게가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며 군부, 정부 내 권력을 독점하려 하면서 아라키와 마사키는 밀려날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대중에게서 황도파의 지지는 높았다. 정확히는 청년장교 집단에 대한 지지인데 이는 황도파라는 집단의 상당수가 농촌 자제 출신이라는 것에 있다. 일본 제국은 본토의 농민들조차 가난에 허덕일 정도였고 특히 도호쿠 대기근 이후로는 농촌 자체가 붕괴해서 걸핏하면 소작쟁의가 벌어져 1933년 한해에만 4천여건의 소작쟁의가 일어났다. 농가 부채 총액은 1930년이 되자마자 40억 엔을 넘기던 수준이었고.


일본의 근대화에서 누락된 부분이 있다면 바로 농민들이었다. 제국 일본은 외양적으로는 근대화를 이뤘지만 인구의 대부분은 농민이었다. 사실 에도 막부 시절 때부터 일본에서는 '잇키'라고 불리는 농민 반란이 주도적으로 일어났으며 생산량의 50%를 다이묘에게 바쳐야 했던 시기였다. 오죽하면 높은 세율로 인해 영아를 살해하는 풍습도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막장인 농촌 상황은 1920년대가 되어도 나아지지 않아서 1930년에는 기어코 수입이 적자를 기록하기에 이른다.


게다가 당시 정부가 조선 쌀을 거의 꽁으로 일본 본토에 들여왔고 당연히 소비량은 변함이 없는 것에 비해 공급량이 2배 가량으로 너무 많아져서 쌀값이 폭등했다. 이것이 우리에게도 익숙한 산미 증식 계획이었으며 쌀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농민들은 빈곤층으로 내려앉고 심지어 중소지주들마저 몰락해 결국 그들도 소작농이 되어버린다. 1941년 정부의 조사에는 전체 농민의 71%가 소작농이라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황도파 청년장교들은 그런 농촌의 붕괴를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랐고 육사로 진학해 출세하여 어느정도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족, 친구들이 사는 농촌이 곧 국가의 미래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런데도 방치하는 것도 모자라 오히려 무너뜨리려 하는 제국 정부의 행동에 분노했다. 황도파들이 내건 공약 중에는 '국가개조'라는 구호가 있는데 여기에는 농촌의 몰락을 무시한 채 자기들만 잘 먹고 잘 살던 화족들을 직위에서 해제하고 산업을 국유화하며 농지개혁을 단행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그들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자는 바로 기타 잇키(北一輝)와 다치바나 고자부로였다.

보론: 군부는 어떻게 농촌의 지지를 얻었나?


어느날 고마쓰초 공회당 앞을 지나가던 이시도 키요토모라는 청년은 신기한 광경을 봤다. 마을에서 보지 못했던 광경으로 햇볕에 그을린 얼굴의 농민들이 공회당을 가득 메우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입구에는 '시국대강연회'라는 간판이 걸려있었고 육군성에서 파견된 소좌가 연설을 하고 있었다. 단상의 소좌는 가난의 벼랑 끝에 있던 농촌의 모습을 언급한 후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른바 좌익은 대지의 평등 배분을 요구하고 있는데 이는 정당한 주장이지만 설령 일본의 모든 경지를 모든 농가에 평등하게 배분한다 해도 그 양은 5반보에 지나지 않은가, 라며 다음과 같은 선동적인 구절로 연설을 이어갔다.


 여러분은 5반보의 토지를 가지고 아들을 중학교에 보내겠는가, 딸을 여학교에 다니게 할 것인가. 불가능할 것이다. (중략) 일본은 토지가 좁고 인구는 과잉이다. 이것을 좌익은 잊고 있다. 따라서 국내의 토지 소유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것으로는 개혁이 불가능하다. 여기서 우리는 외부로 눈을 돌려야 한다. 만몽의 옥토를 보라. 타인의 것을 실례하는 것은 칭찬받을 일이 아니지만 죽느냐 사느냐 하는 마당에 비본질적인적인 것이 본질적인 것을 대체할 수는 없다. 계산해보면 여러분은 5반보가 아니라 일약 10정보의 지주가 될 수 있다


연설 속의 좌익은 노농당을 가르킨다. 일찍이 소작인이 소작료 감면 요구가 중심이었던 소작 쟁의는 소좌의 연설이 이뤄진 쇼와 공황기가 되며 지주 주도에 대한 소작지 철수, 소작료 체납 일소 요구로 쟁의 발생 이유가 변화하고 있었다. 특히나 소좌의 연설 속 만몽의 옥토를 나져야 한다는 부분은 육군성이 추진하던 국방사상 보급운동의 일환이었다. 1929년 세계대공황으로 일본의 농촌이 피폐해지고 정우회와 민정당 모두 농민의 부채에 냉담했었을 때 농산어촌의 피폐 구제를 슬로건으로 내건 집단이 바로 육군성이었다. 이 슬로건은 육군의 통제파가 1934년 10월 발행한 <국방의 본의와 그 강화의 제창>이라는 팸플릿에 실렸었다.

농촌은 일본군 징병의 가장 중요한 공급원이었다. 당시에는 징집유예라는 제도가 있어서 국공립 중등학교, 고등학교, 대학 등에 다니는 사람들은 징병검사는 받아도 끌려가진 않았다. 또 중화학공업 공장에서 일하는 숙련 노동자도 군대에 가지 않었다. 그래서 징병 대상자는 주로 농촌에 사는 청년들이었다. 그래서 농촌의 위기는 곧 국가의 위기였다. 당시 일본 육군에서는 통제파와 황도파가 있었는데 황도파 중에서는 야전에 근무하는 장교들 많았고 그들은 농민 출신 병사들과 함께 생활했다. 통제파는 비록 참모본부 쪽에서 일했지만 그래도 이들 또한 황도파 만큼은 아니더라도 농촌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농산어촌의 피폐 구제가 가장 중요한 정책이다>라는 육군 팸플릿은 통제파 군인 나가타 데쓰잔이 육군성 군무국장에 있을 때 작성했다. 이 팸플릿은 전쟁을 창조의 아버지, 문화의 어머니라 소개한다. 또 국방은 군비 증강 뿐 아니라 국가의 생성과 발전의 기본 활력이 된다고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 국민의 생활을 꼽으면서 '국민 생활의 안정을 도모해야 하고 그 중에서도 근로자의 생활 보장, 농산어촌의 피폐 구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적었다. 정우회의 선거 슬로건에는 농민 구제, 국민 보건, 노동 정책 항목이 없던 것에 비해 육군의 정책은 굉장했다. 1934년 1월 <정치적 비상사태 발발에 대처하는 대책 요강>에서 농민의 구제 항목에는 의무교육기 국고 부담, 비료 판매 국영화, 농산물 가격 유지, 경작권 보호 등이 있었다. 노동 문제에 관해서는 노동조합법 제정, 적정한 노동쟁의 조정기구 설치 등이 있었다.


물론 실제로 군부가 집권한 일본, 그것도 통제파가 집권한 일본에서 이러한 공약들이 시행되는 경우는 없었다. 오히려 군부는 미쓰비시 같은 대규모 생산력을 가진 재벌들과 연합해 총력전 체제를 돌리며 다이쇼 말~쇼와 초기의 입헌 자유주의 정치가들 못지 않은 정경유착을 했고 총력전 체제 하에 농촌의 장정들은 대부분 군대에 끌려가 오지에서 죽거나 포로가 되어버려 농촌의 상황은 쇼와 공황 때 이상으로 피폐해졌다.

황도파의 정치 사상


황도파의 사상에 가장 정치적 영향을 끼쳤다고 보여지는 인물은 아마 기타 잇키일 것이다. 20세기 초에 <국체론 및 순정사회주의>로 일본 지식인들을 뒤집어 놓고 또 불경죄 논란까지 불러왔던 기타 잇키는 이후 흑룡회 요원으로써 중국으로 건너가 신해혁명을 지원하는 대륙낭인으로 있다가 중국 혁명세력의 분열, 일본 정부의 21개조 요구 같은 아시아 연대를 해치는 행위를 보고 귀국하여 1921년 <국가개조법안대강>이라는 자신만의 국가개조 논리를 담은 서적을 출판한다.

 

이 책은 너무 급진적이어서 순식간에 금서 처리 당했지만 청년장교들은 천황의 비상대권으로 헌법을 정지하고 귀족원을 폐지하여 친정 체제를 수립한다는 내용에 꽂혔다. 이 당시 청년장교들에게 기타 잇키의 사상을 주입한 것으로 알려진 유명한 이는 니시다 미쓰기라는 사람인데 그는 육사 출신으로 재직 도중 황족인 지치부노미야에게 기타 잇키의 저작들을 선물해준 것으로 유명하다. 또 다치바나 고자부로가 쓴 <신일본건설대강> 역시 혁신적 농본주의 철학으로서 고향이 농촌이었던 청년장교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기타는 혁명의 에너지는 빈곤한 하층계급에 있지만 그들은 혁명의 주체가 아니라 보았다. 그 이유는 새로운 사상과 무관하기 때문. 그래서 하층계급에 혁명 에너지를 폭발시킬 수 있는 엘리트들이 필요하다 인식했다. 이러한 의기와 정열과 신념을 가지고 혁명을 이끌 수 있는 주체 세력은 군부 내 청년장교들이었다. 그리고 역시 혁명을 위해선 암살과 쿠데타가 필수로써 혁명은 암살로 시작해 암살로 끝나고 군대 동원에 의해 이뤄진다고 했는데 기타 잇키의 표현대로라면 "반역의 칼은 통치자의 허리에서 훔친 군대와의 연락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새로운 혁명군을 조직할 필요 없이 통치자의 군대를 혁명 주체 세력으로 삼으면 된다는 말이기도 하고. 이러한 기타 잇키의 혁명론은 청년장교들에게 딱 안성맞춤이었다.


황도파들은 북진론을 주장했기에 전쟁을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들을 과연 기성 세력인 제국주의적 정부와 훗날 권력을 잡고 폭주하는 통제파와 동일 선상에서 제국주의자, 침략주의자라 비판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기타 잇키는 조선인들에게 동등한 참정권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황도파는 아니지만 어쨌든 그들에게 사상적 영향을 주었던 이시와라 간지는 만주를 일본의 속국이 아닌 진정한 완충지대로서의 자주독립국으로 두어야 하며 또 조선과 대만을 독립시켜 대등한 동맹국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통제파나 기성 제국주의적 정부보다 훨씬 시대를 앞서 나가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보론: 2.26 사건의 주체가 밝히는 그들의 신념


2.26 쿠데타가 일어나기 며칠 전부터 "청년장교 운동이란 무엇인가?"라는 좌담 기사가 실린 <일본평론> 3월호가 전국 서점에서 판매되었다. 좌담회 사회자는 <지지신보>의 와다 히데키치였고 참석자 다섯명은 2.26 쿠데타의 주역이었던 구리하라 야스히데, 야마구치 이치타로, 고다 기요사다, 노나카 시로, 안도 데루조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문: 최근 국가개조운동과 함께 청년장교라는 단어가 붙어 있는데 문자적 해석 이외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 답: 그것은 우리가 붙인 이름이 아니다. 국가개조를 지향하는 청년장교 활동을 지칭하기 위하여 여기저기서 필요상 자연발생적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도 그렇게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 문: 청년장교 운동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나?

- 답: 세상에서는 청년장교 운동이 만주사변 또는 5.15 사건(이누카이 쓰요시 총리 살해)이 일어났을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으나 실은 꽤나 오래된 역사와 근거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자본주의가 가장 활발했던 제1차 세계대전과 그 직후부터 일본제국은 자유주의 사상 또는 좌익 사상에 의해 침식당해왔다.

이러한 사회현상 은 일반인 뿐만 아니라 군 내부까지 부패시키고 사상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 수뇌부가 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아 군 위상과 군인정신이 크게 위축되었다. 이에 격분한 당시 중위, 소위 등 청년장교 및 사관후보생은 군 수뇌부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일본을 혁신하기 위하여 결집했다. 이것이 국가개조운동이 발족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므로 청년장교 운동은 시작된지 벌써 15~16년이나 디났고 구체적 현실로 나타난 것이 5.15 사건이다.

- 문: 청년장교는 그 운동을 통해서 무엇을 이루려 하고 있는가?

- 답: 간단히 말해서 일군만민, 군민일체를 이루는 것이다. 대군과 함께 기뻐하고 대군과 함께 슬퍼하는 일본 국민 모두가 천황 아래 진정한 일체가 된다는 건국 이래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다. 진실로 우리는 천황의 적자로서 일본이 세계 최강의 야마토 민족답게 봉건 자본주의 국가 위에 군림하는 일본제국을 건설하고 세계평화를 이끄는 것이다. 우리는 평화로운 세계가 나타나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야마토 민족이 앵글로 색슨이나 슬라브 민족에게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다. 오히려 이들을 정복하기 위해서 감연히 돌진해야만 한다. 청년장교들이 절실히 바라는 것은 안심하고 국방 제일선에서 활동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오늘처럼 병사의 가정이 피폐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어떻게 안심하고 전쟁에 나갈 수 있겠는가?

개조가 필요한 명확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경제 권력은 일부 지배 계급이 독점하고 있고 때때로 그들은 정치와 결탁해 모든 것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고 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오늘의 지배계급이 말할 수 없이 부패해 있다는 것이다.

- 문: 그와 같은 감상은 일반적으로 좌익도 말하고 있다.

- 답: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청년장교 운동은 국체 관념에서부터 출발한다는 점에서 좌익과는 자석의 양극처럼 다르다.

- 문: 그러면 어떻게 한다는 것인가?

- 답: 오늘 일본 국내 사정을 볼 때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일반 국민의 상식이라고 판단된다. 다만 개조 방법에서는 이론이 있디만 이는 일본 건국 이래의 국시를 생각한다면 자연히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문: 그렇다면 개조 전선에서 청년장교의 역할은 무엇인가?

- 답: 건국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천황 폐하의 국시를 방해하는 자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1936년 당시 조선 총독이자 민족 말살 통치를 실행한 미나미 지로

2.26 사건이 그래도 일본 제국주의와 겹치지 않는 부분


한국에서 2.26 사건하면 그냥 일본 제국주의의 폭주가 절정이 달한 사건이었다 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왜냐면 황도파라는 독립된 파벌이었긴 하나 어쨌든 간에 그들도 통제파처럼 군부라는 집단에 소속되어 있었고 여기에서 벗어나기 보단 여기에 소속된 신분을 활용해 체제 개혁의 발판으로 사용하고자 하였다. 게다가 2.26의 구호도 천황 친정 체제를 수립한다는 것이고 한국에서 천황, 그것도 당시 천황 히로히토는 제국주의 침략의 악귀나 다름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앞서 말했듯이 그들의 사상적 지주 기타 잇키와 이시와라 간지는 제국주의 사고 경로에서 이탈하여 한단계 진일보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었고 황도파들이 2.26 사건을 통해 무너뜨리고자 했던 그 정부는 아이러니하게도 일제강점기 최악의 암흑기로 유명한 민족 말살 통치가 실시된 제국주의적 정부였다. 바로 그 해에 민족 말살 통치를 실행하라는 명령을 받고 미나미 지로가 왔는데 이 사람은 초대 총독이자 우리에게는 무단 통치로 유명한 데라우치 마사타케 이상으로 난폭하게 통치한 사람이었다.


또 2.26 사건 당시 오카다 내각에는 사이토 마코토라는  전직 총리 출신 내대신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바로 최장기 조선총독 출신이다. 강우규 의사가 1919년 폭탄을 던져 암살하려 했었기도 한 사람이 바로 사이토. 그리고 이 사이토 마코토가 통치했던 기간이 일제가 유화적으로 나오면서 많은 이들을 식민지배의 협력자로 끌여들였던 문화통치 시기였다. 사이토의 통치가 3.1 운동 이후 터져나온 불만을 누그러뜨리는데 일조했으니 그의 통치로 일제의 식민지배가 오랫동안 지속될 기반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사이토 마코토가 최후를 맞은 것은 2.26 사건이었다.

맺음말: 의의와 한계


이 글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내가 일본 군국주의의 시발점이라 평가받는 2.26 사건을 상당히 후하게 평가하고 있다고 느껴질 것이다. 일단 솔직히 말하자면 난 황도파를 싫어하지 않는다. 극우 작가 미시마 유키오의 좋은 소설 소잿거리(?)가 된 것 뿐만 아니라 전후 일본의 전공투, 적군파 학생들이 기타 잇키, 이사와라 간지의 저작을 읽고 심지어 텔아비브 테러 사건의 범인 일본 적군의 오카모토 고조가 가장 존경한다고 꼽은 인물이 기타 잇키였던 만큼 반대 진영에서도 평가가 나름 좋은 편이다.


2.26 사건의 주체들은 "권문은 위에서 으스대어도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이 없고 재벌은 부를 자랑하여도 사직을 생각하는 마음이 없도다"라는 쇼와 유신의 노래 가사로 대표되는 기성 입헌 자유주의 정치가들, 재벌들과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마구잡이로 침략을 강행한 통제파 참모 장교들보다는 적어도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은 컸다. 그들은 테크노크라트 엘리트주의자인 통제파와는 달리 대중주의적 천황제 사회주의로 민중의 마음을 사로 잡았고 민생 해결과 기득권 청산, 국민의 천황(다만 기타와 청년장교들 사이 인식은 괴리가 있음)이라는 구호는 분명 고도국방국가보다는 더욱 이상적으로 좋아보인다.


다만 이들에게 가장 큰 문제가 있다. 바로 천황을 너무 순수하게 믿고 아무런 플랜이 없던 것이었다. 히로히토는 그들의 순수한 이상에 동조해줄 만큼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고 이들이 영수로 떠받는 아라키 사다오와 마사키 진자부로 대장은 그들의 생각 만큼 청렴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기회주의자로써 청년장교들을 자신의 권력을 잡는 수단으로 쓰고 필요 없어지면 버릴 각오도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결국 분노한 히로히토의 원대복귀 명령 하나에 청년장교들은 하루아침에 궐기군에서 반란군이 되어 무너졌고 이로써 확인된 것은 천황은 절대 청렴결백한 백성들과 같이 어울리며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주고 같이 고민해주는 성군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천황의 실체를 제대로 이해한 황도파는 기타 잇키 밖에 없었고 그 밑의 청년장교들은 너무 순진했다. 그나마 국가를 바꿔볼 의지가 있던 사람들조차도 천황제와 신성성이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고 그들이 그렇게 비난하던 천황기관설 제창자 미노베 다쓰키치처럼 모순으로 무너진 셈이었다.


여러 점들에서 난 황도파가 마냥 극우적인 집단이라거나, 침략주의적이고 호전적인 전쟁광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어떻게 보자면 그들은 자본주의 근대와 전근대적 체제인 천황제 사이의 모순을 극복하지 못하고 몰락해가는 일본 제국을 뿌리부터 개혁하기 위해 혁명을 한 것이었기에 난 그들의 의도 자체는 폄하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결국 그들도 뿌리를 뽑기 위해 움직였지만 뿌리를 이용해서 뿌리를 뽑는다는 모순에 빠져있었기에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참고 문헌:


한상일, <쇼와 유신: 성공한 쿠데타인가 실패한 쿠데타인가>, 까치, 2018

마쓰모토 겐이치, <기타 잇키: 천황과 대결한 카리스마>, 2010

가타야마 모리히데, <미완의 파시즘>, 가람기획, 2013

제니스 미무라, <제국의 기획: 혁신관료와 일본 전시국가>, 소명출판, 2015

미타니 타이치로, <일본 근대는 무엇인가?>, 평사리, 2020

호사카 마사야스, <도조 히데키와 제2차 세계대전>, 페이퍼로드, 2022

가토 요코,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서해문집, 2018

가토 요코,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어문학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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