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잘 알 만한 '그 보거스' 얘기다. 국내야구 갤러리의 영원한 갤주이자 코사단의 사단장님, 그리고 다이닛폰테이코쿠 대본영의 홍보대사 윤 모씨가 관동대지진에 대해 한 소리를 다뤄볼 거다.
윤서인의 주장은 이러하다. 일본은 독일처럼 정부 주도로 계획적으로 1만명이라도 학살한 적이 없으며 관동대지진의 경우에는 일본군, 정부가 저지른 짓이 아닌 일부 '이단'인 자경단이 벌인 짓이며 그마저도 피해자 수도 1만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윤서인 같은 일뽕이 아니더라도 한국 사회에서 은근 관동대지진에서 자경단만이 벌인 짓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꽤 있다. 그렇다면 과연 사실일까?
먼저 <극비 부내자료 사법성 조사서>의 제10장 '군대의 행위에 대하여'라는 항목에서는 "재변(災變) 후 경비 임무를 맡은 군대가 조선인 및 기타를 살상했다는 소문이 없지 않다. 특히 고토 방면에서는 군대가 살상 행위를 함부로 자행했기 때문에 민중이 이를 모방하여 살상 행위를 감행했다는 소문이 있다"라고 나와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병졸들이 죽이는 건 "자경단원의 폭력으로부터 조선인을 보호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불가피한 일이며 위수근무령 제12조 1항에 의거해 정당하다"며 궤변을 쓰고 있다.
관동대지진 직후 근위사단과 제1사단에 무장 대기토록 지시가 내려왔는데 이는 실질적으로 계엄 상태라는 것이었다. 이에 구호를 목적으로 각 부대가 출발했는데 나라시노 기노 기병 제15연대는 출동 목적이 폭동을 일으킨 조선인 진압이었으며 50연대는 실탄 30발 휴대 등을 명했다. 이는 조선인이 방화했다는 유언비어가 떠돌던 당시 상황과도 관련이 있었는데 문제는 일본군의 출병은 진위 여부 확인도 안해보고 그저 공식적으로 계엄령을 강행하기 위한 구실로 사용할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일본은 정부와 각 자치제가 간행한 방대한 자료에서 조선인 학살은 민간단체나 자경단만이 벌인 일이며 관헌은 자경단의 폭력으로부터 조선인을 구제했다고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군도 학살의 책임에선 자유롭지 못했다. 9월 2일 고마쓰가와에 도착한 이와나미 기요사다 소위는 출동 목적이 다리 확보, 연소 방지, 피난민 유도, 식량 공급 등이 목적이었으나 구보노 시게지라는 6중대 병사의 일기에서는 이와나미 부대의 행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모치즈키 상등병과 이와나미 소위는 재해지 경비 임무를 띠고 고마쓰가와에 가서 병사들을 지휘하여 아무런 저항 없이 온순하게 복종하는 조선인 노동자 200명을 참살했다. 부인들은 발을 잡아당겨 가랑이를 찢었으며 혹은 철사줄로 묶어 연못에 던졌다. 고통스럽게 죽이거나 수없이 학살한 것에 대해 너무나도 비상식적인 처사라며 다른 사람들도 나쁘게 평가했다.
훗날 중일전쟁에 참전한 장군이 된 엔도 사부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와 같이 육군대학을 졸업한 이시모토 도라조는 나라시노 기병대에 있었고 나는 고노다이 연대에 있었지. 그 지진 때 그 녀석이 찾아온 거야. 그렇게 우수하고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게다가 군도(軍刀)까지 받은 사람이 말이야... 그런 인물이 '엔도 군, 협공을 하려 하니 자네도 협력해 주게'라고 말하는 거야. 기병대만으로는 빠져나갈 염려가 있으니까 내 쪽에서 퇴로를 차단하고 기병대가 고토 방면의 조선인을 모두 죽이겠다는 말이었어... 결국 나는 반대했지만 '그러나 아무래도 분위기가 그래. 죽이지 않으면 주민들이 납득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이었어.
기병 제15연대는 조선인 폭도 진압을 위해 교도쿠에 파견되었다. 당시 나라시노 기병연대 병사였던 에츄우야 리이치는 <관동대지진의 회상>에서 말하기 당시 가메이도에 도착한 후에 연대가 열차 검색을 했지만 초만원 상태라 기관차에 석탄 위에까지 파리처럼 떼 지어 있었다고 한다. 결국 조선인들을 색출해 모두 끌어내렸고 칼날과 총검으로 닥치는 대로 '피의 잔치를 하였다. 일본인 피난민들은 '원수 조선인은 모두 죽여라!'라고 하며 환호했다고 한다.
미나미시노자키의 스가 후쿠타로(당시 18세)는 군대가 살인청부인이었다며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이마이바시(시모에도가와바시)에는 나라시노의 기병연대가 계엄령으로 와있었다. 당시 후지 제지에는 히라타구미처럼 펄프를 운반하거나 둥글게 마는 기노시타구미라는 운송 하청 조직이 있어서 합숙소에 조선인도 일하고 있었다. 9월 4일경 세 사람인가 끌려가 군대에 넘겨져 저녁이 된 후 총살당하는 걸 보았다. 뒤로 손이 묶인 채 강물에 던져졌다...
또 아사오카 주조는 옛 요쓰기바시 아래 쪽의 스미다 구 강변에서 조선인 10명을 묶어 세우고 기관총으로 쏴죽였으며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을 광차(鑛車) 선로 위에 눕히고 석유를 끼얹어 불태웠다고 말했다. 스미다 구의 이이는 이런 짓을 한 것은 나라시노에서 온 기병대이며 시체를 묻을 구덩이를 팠다고 했다. 하세가와는 2일인가 3일경에 군대가 아라카와 갈대밭에서 기관총을 쏘아대었던 걸 보았다고 증언했다.
소부센 북쪽 기병 제13연대 대위 이와타 분조 외 52명의 <공훈조서>에는 9월 2일 오후 7시 반 이후 가메이도 부근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걸 보면 당시 군대가 사실상 전투태세였음을 알 수 있다.
이때 불령선인들이 습격해온다는 유언비어가 일어나 혼란이 더 심해짐. 여기저기서 함성이 들려오고 불온한 형세가 시시각각 더해짐. 이에 예비대인 기관총대의 일부로 정류장을 경비토록 하고 주력은 함성이 들리는 곳으로 진군해서 치안 유지에 적극 노력함. 극도로 흥분한 주민들은 무차별로 조선인을 폭행할 뿐 아니라 종을 난타하기도 하고 소총을 발사하기도 함. 이런 혼란으로 밤에도 기관총 사수들은 동분서주하여 잠을 못잔 채 날이 밝아옴.
국회의원이었던 육군소장 출신 쓰노다 고레시게는 조선인 색출 움직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집 부근에서도 매우 소란스러워 밖에 나가보니 무장한 군대가 있었다. 그리고 대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적은 지금 하타가야 방면에 나타났다"라고 호령하고 있어 그 장교를 붙잡고 "적이 누구인가"라고 질문했더니 "조선인이다"라고 답했다. 내가 다시 "조선인이 어째서 적인가"라고 묻자 "상관의 명령일 뿐 알지 못한다"라고 대답했다.
조선인의 저항은 거의 없었으며 그들은 자신이 왜 죽는지도 몰랐다. 정확히 군대에 의한 희생자 수는 알 수 없으나 당시 군의 기록에는 총성, 실탄, 진압, 소탕 등의 문자가 사용되어 있었으며 언론에서도 군의 학살이 묘사되었다. 9월 3일자 <가호쿠 신문>은 불령선인을 군부가 부득이하게 사살했다고 했으며 <후쿠시마민우>는 군대가 오모리나 시나가와 등지에서 기관총을 설치하고 조선인들에게 난사했다고 보도되어 있었다. 또 <기타야마 타임즈>는 시나가와에 사는 학생의 목격담을 인용하며 제3연대가 와서 조선인들은 거의 죽임을 당했으며 모래톱 위에서 300~400명을 포위 섬멸했다고 했는데 이런 대량살육 기록은 조선인 소탕이라는 군 문서 속 기록과 일치한다.
제3연대 뿐 아니라 다른 연대들 또한 굉장히 많은 조선인들을 검속한다.
1. 근위사단 치중병 대대: 조선인 8명 체포 후 경찰서에 인계 (9월 2일)
2. 보병 제2연대: 우에노 50명, 미카와지마 700명, 센주 200명 조선인 보호(?)
3. 기병연대: 불령선인 2명 감금 및 12명 보호
4. 포병연대: 제1, 2 중대가 조선인 각각 100명 체포
5. 철도 1연대: 불량선인 수색으로 헌병, 경찰에 인도한 조선인 100명
9월 4일, 제1사단 사령부의 계엄령 3호에 따라 관헌에 인계된 조선인은 나라시노 구 포로수용소에 감금된다. 계엄사령관 후쿠다 마사타로는 나라시노로의 이송을 보호해야 할 자는 보호하고 구속해야 한다며 불량선인의 폭행 단속 및 선량한 조선인의 곤궁을 구할 것을 주문했다. 이어서 저1연대부터 고노다이 주둔지의 중국인, 조선인 400명을 나라시노로 보내며 수용이 시작되었지만...
1907년생 우라베 마사오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나라시노로 보내지는 조선인 행렬을 보았습니다...지바가도로 나오자 1,000명 가까이 되는 조선인들이 4열로 늘어서 있었습니다. 가메이도 경찰서에 일시 수용되어 있던 사람들입니다. 행렬에서 벗어나면 구타하는 등 포로처럼 다루었으며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지금의 니시오시마 역 위에 있었던 라칸지 주변에 있을 때) 여기까지 오니 철사로 묶여 연행된 조선인이 8명씩 16명 있었습니다. 앞서 말한 사람의 일부지요. 헌병은 2명, 병사와 순사가 4, 5명이 동행했습니다. 그 쥐를 사람들이 쫓아다니며 '우리의 원수를 내놔라'라며 흥분하고 있었습니다. 헌병은 군중들을 쫓아내고 조선인들을 목욕탕에 넣었지요...그래서 돌아가려고 하는데 몇 분 지나지 않아 '뒤쪽으로 나온다'며 소란스러워졌습니다. 무슨 일인가 하고 가보니 군중, 자경단이 몰려가고 있었습니다. 군대와 순사는 뒷일은 알아서 하라는 듯이 사라져버렸습니다...자, 이제 그 다음에는 베고, 찌르고, 때리고, 차고....총은 사용되지 않았습니다만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16명을 모두 완전히 죽인 겁니다. 50~60명이 모여 광란의 상태에서.....
난가쓰 노동조합 활동가 전호엄은 당시에 학살에 관한 귀중한 증언을 남겼다.
제 생각으로는 4일 밤까지는 총으로 사살했고 5일부터는 검으로 찔러죽였습니다. 6일 아침 5시경 군대는 500명 가량을 나라시노로 보냈습니다. 그리하여 26일까지 나라시노에 있었고 그 뒤 아오야마 조선인 수용소를 거쳐 29일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후나바시 경찰서 순사였던 와타나베 요시오는 나라시노에서의 행방불명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한다.
나는 통계 담당이었으므로 매일 몇시에 조선인은 몇명이라는 일보를 작성했다. 현지 주재 순사가 현장에 가서 수용소 인원 수를 세어 나한테 보고하면 나는 그것을 현청에 보고했다. 그런데 하루에 2, 3명씩 숫자가 줄어갔다. 어제 몇명, 오늘 수용소에서 나간 자가 몇명, 남은 자가 몇명이라는 식이었는데 숫자가 맞아떨어지지 않았었다. 주재 순사를 추궁하자 그는 수용소 사람에게 들었다면서 오와다 근처의 자경단에서 2명 데려가고 싶다고 할 때 부상이 심하거나 다루기 곤란하거나 말을 듣지 않는 자를 2명 정도씩 자경단에 림겼었다고 힐다.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냐고 물으니 산속에 끌고가 죽이는 듯하다고 하며 누가 했는지는 모르겠다 했다. 생각건대 경찰이 보내온 사람 중 부상자들은 모두 죽여버린 게 아닌가 싶다....
어떤 작가는 병사들이 조선인들을 표적처럼 나란히 세워놓고 기관총으로 쏴죽인 후 구덩이에 처넣었다고 한다. 결국 나라시노로의 보호라는 명분 하의 연행은 또 다시 자경단에 불하되는 운명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14연대 본부 서기 아이자와 야스시는 자경단 외에 나라시노 내부의 학살도 있었다면서 아래와 같이 증언한다.
구호할 목적으로 데려왔지만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킬 것 같으니 끌어내라고 해서 끌고 왔지요. 저희 연대에서도 16명을 영창에 넣었는데 연대가 4개 있었으니까. 수상한 자들은 모두 연대로 끌고와 조사했습니다. 군대에서 수상한 자는 왜 흔히 하는 말 있잖아요....베어버렸습니다. 저는 안했어요. 30명 정도 있었을 걸요. 그런데 우리 연대만이 아니고 다른 연대도 했어요. 저는 두 번인가 베는 장소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 뒤로 넌더리가 나서 가지 않았습니다. 누가 한 번 불려나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 이상하다고 생각했겠지요?
끝으로 나는 이 글에서 말한 관동대학살의 기억을 지금까지도 증오로써 재생산하여 반일 감정을 확산하는데 써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날 봐온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작년 일본 참의원 선거 당시에도 나는 브런치에 관전평 및 보론을 얘기하며 유신회가 재특회와 같은 류의 극우 정당이라는 인식은 잘못 되었으며 또 한일 무역분쟁 당시에 한국 정부 및 언론의 대응은 매우 한심한 수준이었다 평하기도 하였다. 그런 만큼 난 반일주의자가 아니며 오히려 식근론 못지 않게 기존 수탈론적 관점에도 회의가 상당한 편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일본과의 관계는 그건 그거고 역사적인 것은 다르다. 과거에 잡아먹혀 미래를 잡아먹는 짓이 어리석은 행동인 건 맞지만 '용서하되 잊지 않는다'라는 말처럼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것과 별개로 과거에 있었던 일 또한 기억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일례로 베트남은 냉전 시기 미국과 전쟁을 치뤄 전 국토가 파괴되었고 수많은 인명 손실이 나왔다. 하지만 현재 베트남은 중국 견제를 위해 아시아에서 미국과 안보적, 경제적으로 파트너 관계를 맺고 있다. 그렇다고 베트남이 미국과 싸웠던 것을 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베트남 정부는 여전히 호치민의 항일, 항불, 항미 투쟁을 미래 세대에까지 가르치고 있으며 대부분의 베트남인들은 오늘날 미국에 호감이 있는 것과 별개로 과거 전쟁에서 미국과 싸워서 이겼다는 사실 만큼은 자랑스러워 하고 있다.
이렇게 당연한 걸 왜 설명해야 하는가 라는 현타가 오긴 하는데 뭐 암튼 한일관계도 마찬가지다. 일본과 협력이 한국의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것도 사실이고 과거의 일로 지금 일본에 살고 있는 평범한 일본 국민들까지 혐오하는 건 잘못된 일이지만 그게 과거를 잊으라는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베트남이나 남아프리카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과거를 기억하면서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구축하는데 성공한 사례도 꽤 있는 편이다.
그런데 윤서인은 그저 일본을 옹호하기 위해 과거 일을 다 잊어버리자 이러고 있다. 그것도 역사적으로 있었던 사실까지 왜곡해가며. 아, 그저...
이 사람 '코'가 대단하다!
참고 문헌:
가토 나오키, <구월, 도쿄의 거리에서: 1923년 간토대지진 대량학살의 잔향>, 갈무리, 2015
강덕상,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 역사비평사, 2005
성주현, <관동대지진과 식민지 조선>, 선인, 2020
김광열,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 시 학살된 한인과 중국인에 대한 사후조치>, 동북아역사논총 (48),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