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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Aug 05. 2023

일본 자민당 파벌 정치의 이해

자민당이 운영되는 방식

https://youtu.be/Uohovsx_mA4

그동안 일본 정치에 관한 글들을 많이 연재했었다. 특히 작년 참의원 선거를 기점으로 더더욱 많은 일본 정치에 관한 글들을 쓴 것 같은데 한번 다시 이전에 썼던 글들을 검토해봤다. 간간히 오류가 있던 부분은 뒷북이지만 수정했다. 다만 하나 느꼈던 게 내가 쓰는 일본 정치글들을 기본적으로 구조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만 무슨 내용인지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따라서 이번 글은 자민당의 파벌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간단히 정리해보고 가고자 한다.

자민당의 간부진 구성


당 4역이라 불리는 자민당의 주요 간부진은 간사장을 필두로 총무회장, 정무조사회장, 선거대책위원장으로 구성된다. 원칙상 자민당 내 최고 기관은 당 대회인데 1년에 한번 밖에 개최되지 않으므로 실질적인 운영은 양원 의원총회에서 결정된다. 그 외 사항은 사안의 경중에 따라 총무회가 심의한다. 따라서 자민당 내 의사결정은 당대회, 양원 의원총회, 총무회 순으로 이뤄진다.


또 자민당의 실질적 총수는 간사장이다. 규정상 총재는 총리직을 맡기 때문에 그를 대신해 자민당을 총괄하는 것이다. 선거에서 간사장은 지역구 공천을 비롯해 일정 계획, 유세 지원, 자금 등 모든 과정을 총괄하며 얼마든지 자금 인출이 가능하다. 또 의원 운영 위원회와 당내 국회 대책위를 통해 국회를 운영하고 법안 심의를 지휘하는 걸 넘어 다른 정당과의 교섭, 각료 인사 추천 등도 간사장의 권한에 포함된다. 그렇기에 역대 자민당 출신 총리들은 간사장직을 발판으로 총리 자리에 도전하는 경우가 많았었다.


신기한 부분은 간사장은 이때까지 소간분리 원칙으로 임명되어 왔다. 소간분리란 총재와 간사장을 분리하는 것으로 총재를 배출한 파벌은 간사장을 못내게 하여 특정 파벌이 내각과 당을 전부 장악하는 걸 막는거다. 대신 총재를 배출한 파벌은 부간사장 임명권을 얻어 그걸로 간사장을 견제하여 절묘하게 당내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방식이다. 어찌보면 자민당의 파벌 정치가 금권정치라는 평을 받는 와중에도 지금까지 유지된 것은 파벌 간의 균형이 나름대로 기능했던 부분이 있었던 것도 있다.


총무회는 의사결정에서 전원 일치가 원칙으로 회장은 회의를 원할하게 할 수 있는 조정형 선임 의원이 임명되는게 일반적이다. 왜냐하면 총무회는 자민당 운영과 국회 활동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조직이기 때문이다. 한편 정무조사회는 국회의원과 총재가 임명하는 외부 전문가로 구성되며 당의 정책 연구와 입안을 심사한다. 자민당이 제출하는 법안은 모두 정무조사회의 심사가 필요하다. 이처럼 법안이 제출되기 위해서는 자민당 내의 정무조사회와 총무회의 합의를 통과해야 하며 당내 조직을 통한 정부 여당의 관료 조직 조정 방식은 견제와 균형 차원에서는 긍정적이지만 정부와 당을 이원화하고 이익 정치가 집단을 잉태하는 등의 문제가 있다.


무엇보다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우정 사업, 도로 공단 민영화, 공공사업비 삭감 등의 자민당 관행이던 파벌 균형주의와 이해관계를 깨트리는 정책들을 입안하며 총리의 인사권을 강화하여 파벌이 21세기 이후 약체화되긴 했다. 그리고 여기에 수혜를 입은 것은 아베 신조인데 3선만에 고이즈미 내각 시기 자민당 간사장이 되었고 특히 소선거구제로의 개혁과 정치자금법 입법을 거쳐 아베 내각에 3선의 이나다 도모미의 정무조사회장 임명되는 등 파벌 정치의 영향력이 쇠퇴하는 흐름으로 가긴 했었다. 그러나 자민당 내 구심점이던 아베가 2022년 총격 사건으로 사망하고 관료 엘리트들의 입김이 강한 보수 본류 파벌인 '굉지회' 출신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취임하며 앞으로의 흐름은 어떻게 될 지 모른다.

자민당 파벌 정치의 기원


자민당 파벌 정치의 시작은 요시다 시게루, 하토아먀 이치로, 시게미쓰 마모루 이 셋에게서 출발했다. 요시다 시게루의 파벌은 훗날 이케다 하야토의 굉지회와 사토에이사쿠의 목요연구회로 발전한다. 반면 하토야마 이치로의 후계자들인 기시 노부스케와 고노 이치로는 각각 십일회, 춘추회를 만들고 시게미쓰 마모루의 후계 세력은 미키 다케오의 정책연구회로 이어진다. 이러한 5대 파벌은 오늘날 자민당 파벌 정치의 기반이 된다.


55년 체제 시기 자민당 파벌 정치의 주 흐름은 비둘기파로 불리는 보수 본류와 매파로 불리는 방류의 싸움이었다. 다만 이때까지는 사토-다나카로 이어지는 본류 쪽이 우세하였고 그들은 중선거구제 속에 큰 혜택을 보았다. 하지만 1993년 호소카와 모리히로라는 비 자민 내각이 출범하는 과정에서 큰 공헌을 한 자민당에 이탈한 오자와 이치로와 하토야마 유키오는 사토파의 계보를 잇는 사람이었고 이때 목요연구회는 분열, 이탈한 사람들은 지금 일본 입헌민주당의 뿌리가 된다.


이후 소선거구제로의 개편 등을 다음 정치개혁법들이 통과되어 하나의 선거구에 여러 파벌들이 각기 후보를 내세워 서로 다른 정책을 어필할 필요가 없어졌다. 대신 정당에 대한 투표가 더 중요해졌고 이게 자민당이 정당 내 정당 시스템보단 통일된 담론이 존재하는 정당으로의 변화를 꾀하는 기점이 된다. 그리고 2009년 중의원 선거의 대패와 민주당의 집권은 자민당 내 파벌 정치의 몰락을 크게 불러온 사건으로써 이를 기점으로 아베 신조가 이끄는 세이와 정책연구회가 당권을 점차 장악, 특히 굉지회의 몰락을 통해 성장하여 마침내 2012년 선거를 승리 및 재집권으로 이끌며 주류로 급부상한다.


한국에서 자민당의 파벌 정치하면 떠오르는 인상이 전근대적인 시스템, 정경유착, 부정부패, 밀실 정치들이 떠오를 것이고 55년 체제 당시에 실제로 이러한 일들이 없었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조금 다르게 보자면 파벌 정치는 자민당 내에 여러 개의 정당들이 존재하는 개념이었고 자민당이 수십년 동안 독주하는 상황에서 내부적으로 내각을 견제하는 시스템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55년 체제 동안 헌법 개정과 재무장을 주장하는 보수 방류 계열이 크게 부상하지 못한 것 또한 파벌 정치 덕분이었다.

자민당 파벌의 역할과 구조


일찍부터 자민당에서는 파벌이 의원들을 결속력으로 묶는 역할을 하였다. 55년 체제에서는 신진 의원들이 각 파벌에 들어가서 지원을 받아 당선 횟수를 쌓으며 파벌들의 의향을 정치 활동에 반영하였다. 중선거구제도 하에서 각 선거구에 한 정당이 복수의 후보를 공천하는 것이 가능했으며 각 파벌에서는 선거구 하나에 한 후보를 내어 같은 선거구에서 복수의 같은 파벌 의원이 나오는 것을 방지했다. 그러나 소선거구 제도로 바뀐 이후로 총재의 역할이 파벌의 영수가 아닌 선거에서의 대표 얼굴이 되면서 파벌의 역할이 크게 약화되었지만 여전히 파벌은 자민당의 핵심이다.


파벌의 조직은 크게 명예 회장, 회장, 대표, 회장대행, 부회장, 좌장, 사무총장, 부간사장 등으로 구성된다. 우선 명예 회장은 예전에 파벌의 영수였던 사람이 임명되며 우리나라의 정당 상임고문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실질적인 우두머리는 회장이며 파벌 내 상당한 지배권을 가지고 있지만 승계 받은 경우에는 힘이 의외로 그렇게 마냥 쎄지만은 않다. 또 선거자금이나 알선 문제에서 유유부단할 경우 파벌 구성원들로부터 지위를 위협받게 된다. 대표는 회장과 함께 또 다른 우두머리이고.


회장대행은 실질적인 포스트 주자로 평가받으며 차기 회장으로 가는 지름길 정도로 평 받는다. 부회장은 명예직이지만 2인자인 만큼 유력 정치인이 맡고 있으며 좌장 역시 명예직이지만 파벌 내 화합을 주도하는 커다란 역할을 맡고 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사무총장으로 그들도 차기 회장주자 중 하나로써 자민당 파벌 정치의 핵심인 자금관리와 실무를 맡고 있다. 마지막으로 부간사장은 각 파벌의 추천으로 임명되는 자리로써 파벌과 당 지도부 사이의 의견 조율을 주도하고 있다.

자민당 내 파벌의 구성: 세이와 정책연구회 (清和政策研究会)


우리에겐 아베 신조가 속한 파벌로 알려져 있으며 창립자는 후쿠다 다케오, 뿌리는 위에서 언급한 기시 노부스케의 십일회다. 아베 신조의 아버지 아베 신타로도 이 곳 출신이었으며 정치적 스승 고이즈미 준이치로, 신의 나라 드립치다가 쫓겨난 총리인 모리 요시로도 세이와 출신이었다. 보수 방류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대부분 세이와 정책연구회에서 기원했으며 2000년대 이후 일본 정치의 전반적인 우경화를 주도하는 것도 이 파벌이다. 특히 일본회의와의 유착 관계이며 아베 사망 이후 통일교와의 연관성 논란도 생겼다.


이들을 대표하는 아젠다는 헌법 개정과 재무장이다. 또 반공주의 성향도 매우 강했었던 탓에 냉전 시기는 한국의 박정희, 대만의 장제스와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세이와 정책연구회의 뿌리 기시 노부스케는 1965년 한일기본조약을 맺는 과정 중 배후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55년 체제 시기에는 기시 노부스케가 안보투쟁으로 사퇴하고 후쿠다 다케오가 각복전쟁에서 다나카 가쿠에이에 의해 짓밟히며 1990년대까지 비주류 파벌이 된다. 그러다가 다시 부활한 건 모리 요시로가 총리에 취임하면서이다.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등장으로 세이와는 다시 한번 부상했고 아베 내각이 출범한 이후로는 자민당 자체를 꽉 잡고 주도하게 된다. 하지만 2022년에 아베가 허무하게 야마가미 데쓰야가 쏜 사제총기에 맞아 사망하고 그 이후로 아베를 대체할 구심점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다카이치 사나에는 일단 중책이나 아직은 아베 만큼의 거물은 아니고 호소다 히로유키도 중의원 의장을 맡으며 아베 내각을 적극적으로 보좌한 인물이었지만 지금 통일교와 유착한 정황이 드러나며 이미지가 많이 실추되었다. 오죽하면 이미 전직 총리가 된 지 한참된 모리 요시로가 다시 기어나올 정도고. 현재 세이와의 상황은 앞으로의 행보에 따라 전망이 분기점으로 나뉠 중요한 상황이다.


여담으로 세이와 정책연구회의 뿌리 중 하나인 기시 노부스케와 2012년부터 2022년까지 영수 자리를 실질적으로 독점하던 아베 신조 모두 야마구치 현 출신인데 이곳이 그 유명한 에도 막부 시대 조슈 번의 본거지다. 메이지 신정부 이후 조슈 번 출신 유신지사들은 육군에 '조슈 벌'이라는 파벌을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주도로 형성시켰다. 2010년대 이후 일본의 우경화가 진행되며 아베 신조는 유독 메이지 유신의 개혁 정신을 강조하는데 그 메이지 유신을 주도하던 세력의 뿌리가 자신의 고향 야마구치 현임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하다.

자민당 내 파벌의 구성: 지공회 (志公会)


지공회의 기원은 굉지회에서 갈라져 나온 고노 요헤이의 세력이다. 고노 요헤이는 관방장관 시절 위안부 문제를 일본 정부가 최초로 인정한 '고노 담화'를 발표한 사람으로 그는 보수주의자면서도 나름대로 진보적인 면이 공존하던 정치가였다. 또 고노 요헤이는 헌정 사상 가장 오랫동안 중의원 의장을 맡으며 중재자 포지션도 취해왔고 특히 하시모토 류타로가 굉지회의 지지를 받자 여기서 이탈한 아소 다로 등이 합류하며 오늘날 지공회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로써는 고노 요헤이가 큰 영향력이 없고 아소 다로가 중심이 된 파벌이기에 어느정도 방류적 색채도 보이고 있다. 다만 한편으로는 아소 다로 본인부터가 일본에서 흔치 않은 가톨릭 신자인지라 서방 세계 문화에 상당히 호의적인 스탠스를 취하기도 한다. 사실 이 때문에 지공회 내에서는 고노 다로와 같이 상대적으로 리버럴 성향이 강해 넷우익들의 비토를 받는 정치인들이 일부나마 존재한다. 참고로 고노 다로는 고노 요헤이의 아들로써 동성혼 합법화에 가장 적극적인 자민당 의원이고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탈원전 정책에도 적극적인 자민당 내 비교적 진보파에 속한다.


https://news.yahoo.co.jp/articles/2f197ad50630d7a726d5d8b2824183e1b4a0c880


https://news.yahoo.co.jp/articles/5dabdca82358b3bf4586057a07ec02f00bdc3812


고노 다로는 고이즈미 신지로와 이시바 시게루의 지지를 얻어 2021년 자민당 총재선에 도전했으나 정작 지공회의 영수 아소 다로의 비토를 받는 바람에 낙선한 채 기시다 내각의 출범을 봐야 했다. 현재 고노 다로는 기시다 내각의 디지털상이고 일본판 주민등록증으로 건강보험증과 통합해 마이너 넘버카드를 추진하다가 가족이 아닌 타인의 공금 수령 계좌가 연동된 사례가 940건이 나오며 카드 자진 반납 사례가 대거 발생, 추진 반대 여론이 70%에 달하여 위기에 봉착한 상태이다. 더구나 기시다 총리는 그 와중에도 보험증 폐지 계획을 그대로 유지하겠다고 밝혔고 결과적으로 요미우리 신문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35%라는 출범 이후 최저치 지지를 기록하게 되었다. 워낙 아날로그 방식에 관료주의화가 심한 덕분에 일본의 행정 디지털화는 상당히 아직도 멀었다.

자민당  파벌의 구성: 굉지회 (宏池会)


일본 자민당과 정부의 현 집권 세력이자 기시다 후미오가 영수로 있는 곳이 바로 굉지회라는 파벌이다. 십일회가 뿌리지만 실질적으로 생긴 건 후쿠다 다케오가 창설한 연도인 1979년을 기점으로 하는 세이와 정책연구회나 고노 요헤이가 굉지회에서 나와 형성했기에 탄생이 많이 늦은 지공회에 비하면 굉지회는 경제 우선주의라는 보수 본류의 뿌리를 이어 이케다 하야토가 무려 1957년에 창설한 유서가 깊은 자민당 내 가장 오래된 파벌이기도 하다.


비둘기파인 보수 본류 쪽이고 초창기 멤버인 이케다 하야토가 집권 후 기시의 대미 자주외교를 다 폐기한 채 소득배증계획으로 대표되는 경제 우선, 경무장 노선으로 전환하였기에 호헌파적 성향이 강하였다. 다만 현대에 와서는 더 이상 예전처럼 안보는 주일미군에게 맡기고 무작정 경제 성장을 할 수만 있는 위치가 아닌데다가 고이즈미 내각 수립, 2009년 중의원 선거 참패 이후 방류에게 주도권이 넘어가버려서 마냥 무조건적으로 재무장과 개헌을 반대하는 입장을 내기는 뭣한 입장이다.


그래서 기시다 총리는 작년 말 방위비를 기존의 GDP 대비 1%에서 2%까지 증액하겠다고 밝혔으며 개헌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면서도 개헌 추진 속도가 아직은 아베 시절에 비하면 미지근한 것을 보면 기시다가 호헌파라고 보기는 힘들지라도 마냥 개헌에 극단적이고 강박적으로 매달리는 집단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단지 시류에 따를 수 밖에 없기에 개헌 논의를 이어가는 것일 뿐. 오히려 기시다가 현재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일본 내에서도 말이 많은 소재는 일본판 '소득주도성장'이다.


근데 지금 가장 큰 문제는 기시다 후미오의 평가가 전임자 스가 요시히데가 곤두박질쳤던 경로를 그대로 따라걷고 있는 부분이다. 한일관계야 예상보다 잘 풀리고 고노 담화를 이어가는 등 확실히 이전 아베 정권 당시보다는 주변국에게 평가가 나쁘지 않기는 한데 정작 자국에서는 지지율이 급락 중이다. 외교적 사안 때문이 아니고 국내적으로 주민등록증과 공인인증서를 합친 마이넘버 카드 추진 때문인데 여기서 디지털 행정이 원할하지 않은 탓에 개인정보 유출이 무더기로 발생했다. 그 상황에서도 계속 이어간다고 한 건 덤이고. 기시다 내각의 현재 지지율은 20%대로 이는 한국 현 대통령 윤석열의 지지율 30%대보다도 낮은 수치이다.

자민당 내 파벌의 구성: 헤이세이 연구회 (平成研究会)


이 파벌은 한 때 보수 본류의 양대 파벌 중 하나였던 곳이다. 목요연구회, 이게 헤이세이 연구회의 뿌리 중 하나인데 이걸 창설한 사람이 사토 에이사쿠와 다나카 가쿠에이였다. 다나카 총리는 자금과 인맥으로 록히드 사건 후 감옥에 간 이후로도 배후에서 '어둠의 쇼군'으로써 활약했다. 이후 그에게 금권 정치의 방식을 배워서 배신하는데 사용, 다나카를 은퇴시키고 목요연구회를 집어삼켜 경세회를 만든 인물이 바로 다케시타 노보루다.


목요연구회-경세회 계보는 아마 일본 정치사에서 가장 부정부패에 크게 연루된 금권, 파벌 정치의 상징과도 같을 것이다. 리쿠르트 사건, 사가와규빈 스캔들 모두 경세회라는 파벌에서 벌어진 문제였으니 말이다. 어떻게 보면 잃어버린 10년을 함께 보낸 파벌이기도 한 부분이 있는게 이들이 옹립해 바지사장으로 써먹은 총리인 우노 소스케, 가이후 도시키가 부동산 대출 총량규제라는 짓을 벌이다가 부동산 시장 폭발, 주가 폭락을 유도하여 일본 경제 장기 침체의 서막을 열었으니 말이다. 참고로 바지사장 써먹는 방식은 다나카가 70년대 후반~80년대 초반까지 오히라, 스즈키 조종하던 것에 배운 거다.


재미난 건 목요연구회-경세회-헤이세이 연구회는 일본 민주당계와도 배다른 형제(?)다. 1993년 가네마루 신이 사퇴하고  일본 자민당에서 분당이 있었는데 이때 탈당하여 신당을 창당한 그쪽 출신들이 바로 오자와 이치로와 호소카와 모리히로 등이었다. 이 중 오자와 이치로는 미야자와 내각 당시 비선실세 중 하나였으며 그들이 탈당한 것도 결코 부패한 자민당에 희망이 없다고 느껴서가 아니라 사가와규빈 스캔들 이후 궁지에 몰려서 탈당한 것이다. 오자와 계파가 나간 이후로도 경세회는 오부치 게이조, 하시모토 류타로 등을 배출해냈지만 2000년대 이후 등장한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이들의 파벌을 우정민영화 정국 당시 중의원 해산 선거에서 일방적으로 공천 학살하며 밀어내버렸다.


현재는 여전히 세를 유지하고 있고 최근에 영수 모테기 도시미쓰가 자민당 간사장이 되며 버블 붕괴 이후 침체된 파벌을 살리려 하고 있다. 

자민당 내 파벌의 구성: 지수회 (志帥会)


세이와 정책연구회와 함께 방류를 주도하던 두 파벌 중 하나인 지수회다. 세이와가 기시 노부스케, 후쿠다 다케오를 계승한다면 이곳은 나카소네 야스히로를 계승하는 파벌이다. 나카소네 내각은 전후 총리 중에서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최초로 하고 불침항모 발언 및 P-3 초계기 대량 도입으로 적극적인 반공 정책을 펼친 정권인지라 일본 우경화의 원조로 평가받기도 하지만 동시에 당시 전두환-레이건-나카소네 주도의 한미일 관계가 김대중-오부치 선언 때 한일관계 만큼 좋았었고 또 2차대전에 책임이 있던 히로히토 천황이 과거사를 사과한 것도 이때인 우리에게 있어서 이면이 있던 총리 및 정권이었다.


이들은 한동안은 헌법 개정, 대북강경책, 외국인참정권 반대, 인권옹호법 반대, 우정민영화 반대, 건설 경기 부흥 등 극우적인 면이 다소 강한 입장을 보여왔으며 세이와 정책연구회와는 달리 친미보수적인 성향보다는 탈미 내지는 자주적 경향이 강했다. 이는 나카소네의 집권기 미일동맹 강화와도 상반되는 부분. 다만 2019년에 나카소네가 사망하고 니카이 도시히로가 전면에 나서면서, 또 고령 의원들이 은퇴하고 이 파벌에 들어온 다른 정당 출신 자민당 의원들이 입김을 행사하면 어떻게 될 지 모른다.


문제는 뿌리가 고노 이치로의 춘추회를 근간으로 하는 만큼 소속된 의원들이 너무 고령이라 공천받기 힘들어졌기에 새 물갈이가 필요하기도 하다.


그 외 파벌


1. 수요회


이시바 시게루가 만든 파벌이다. 2015년에 생겼지만 이시바가 아베 정권 내내 비 아베 세력의 대항마로 꼽혔던 걸 보면 인지도 자체는 높은 편이다. 하지만 문제는 당 내 입지인데 이시바라는 인물 자체가 자민당을 탈당했었던 전력이 있는지라 자민당 지지층 사이에서 신뢰가 썩 좋은 편은 아니다. 성향은 본류에 가까우며 확고한 친이민 성향을 보이고 있다.


2. 번촌정책연구소 (해체)


시게미쓰 마모루의 개진당을 뿌리로 하는 이 파벌은 미키 다케오의 독특한 좌파적 성향 때문에 유명했다. 미키는 자민당에 몸 담았지만 경제적, 외교적 성향은 우파 사회당(민사당)에 더 가까웠으며 실제로 미키 다케오 내각 동안 그가 취한 정책들은 다른 자민당 총리들과는 상당히 이질적이었다. 물론 미키 다케오가 정계에서 은퇴한 이후론 여타 파벌들과의 이질감이 확 줄어들었으며 2017년에 아소 다로랑 손잡고 지공회를 출범하며 통합해 소멸된다.


3. 근미래정치연구소


어찌보면 아베와 이시바 이상으로 가장 악연이 깊은 파벌이다. 고이즈미 정권을 지탱하던 한 축인 야마자키 타쿠는 아베와 대립하며 선명하게 반대 노선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웃긴 건 야마자키는 조총련과 커넥션이 있는 자민당 내 친북 인사(?)인데 그런데도 일관되게 헌법 개정이나 보통국가화 만큼은 강력하게 주장해왔었다.

보론: 일본 헌법 개정의 쟁점


현행 일본 헌법은 GHQ(연합국 최고사령부)가 제시한 초안을 바탕으로 절충해서 완성된 것이다. 1947년 5월부터 시행되었고 아직도 한번도 개정되지 않았다. 분명 전후 극우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조차도 일본국 헌법이 기타 잇키가 주장하였던 <국가개조법안대강> 내용 중 70%가 들어갔다고 평하였듯이 굉장히 옛 메이지 헌법보다 발전되었다. 메이지 헌법은 국체라는 관념조차 모호하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는 말한다. 일본국 헌법은 '국가의 권리'는 이루지 못했다고.


미시마를 포함해 일본 우익들이 문제를 삼는 부분은 제9조 속 군대를 보유하지 않으며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그렇지만 현재는 이를 우회해 자위(自衛)를 위한 조직으로써 자위대를 운용하고 있긴 하다. 그럼에도 자위대의 목적은 선제 공격이나 자국 이외의 군사 활동을 못하며 상대로부터 공격받았을 때에만 자위력을 행사하는 말 그대로 '전수방위'에 국한되어 있는 상태이다. 말 그대로 무력행사는 금지인 셈이다. 당연히 일본 우익 세력의 입장에선 이는 제9조가 점령군이 강요한 헌법인거다.


그래서 일본은 전후 체제 탈피를 목적으로 많은 노력을 해왔다. 일례로 2014년 아베 정권이 각의에서 "집단적 자위권"을 규정한 것이다. 그동안 자위권이 전수 방위를 기본으로 개별적 자위권 행사에 국한되어 왔음을 부수는 셈. 집단적 자위권 적용의 예시를 들자면 미국이나 한국이 북한의 공격을 받는 상황이 생길 때 일본은 이를 동맹, 우방의 피해로 인해 자국 안보의 위협이라 판단, 바로 군사적인 행동에 나설 수 있는 것이다.


현재 일본은 현재 총리가 '최고지휘감독권'이라는 이름으로 자위대의 통수권을 사실상 보유하고 있다. 만약 일본이 헌법을 개정한다 했을 때 우리는 군국주의 시절로 되돌아가는 것을 우려하지만 그건 분명 기우다. 당장 일본 문민 정치인들이 쇼와 시대 5.15 사건과 2.26 사건을 겪은 경험이 꽤 큰 트라우마라 방위성의 제복 입은 자위관들을 통제할 양복조들을 상층부에 무조건 집어넣고 있으며 이건 미국의 요구도 아닌 본인들이 스스로 한 거다. 무엇보다도 일본인들에게조차 일본 군국주의 시대와 일본제국군에 대한 인식은 시궁창에 깊이 박혀있는 상태다.

맺음말: 일본 정치는 과연 삼류라고 볼 수 있는가?


흔히들 말하길 일본 정치가 삼류라고 한다. 이는 55년 체제 동안 자민당이 독주했기 때문이며 초토화된 산업 기반과 국토 속에서 경제 대국의 일본을 만든 건 정치가들이 아니라 유능한 관료 집단 덕분이라는 인식도 어느정도 있다. 그러나 관료 집단에 휘둘린 총리인 우노 소스케, 가이후 도시키, 노다 요시히코 같은 정치가들은 단명하고 반대로 관료를 휘어잡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 같은 사람들이 오래 집권했으며 더 평가가 좋다. 관료 집단의 병폐의 알고 싶으면 일본 특유의 아날로그식 행정이나 동일본 대지진 대처를 보면 답이 나온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한국에서 후진적인 시스템이라 평가받던 일본 내 파벌 정치가 일정 부분 특정 세력의 독점을 막아서 개헌도 무작정 추진할 수는 없게 된 부분도 있었다. 물론 중대선거구제 폐지, 정치개혁법, 우정 해산 등으로 '정당 내 정당'에서 방류 세력이 아젠다와 담론을 주도한 정당이 되어가며 호헌파의 입지가 크게 줄었지만 그럼에도 자민당의 파벌 정치가 존재하기에 우경화가 늦춰지는 부분도 있는 것이다. 아마 파벌 정치가 없이 일본이 대중민주주의로 돌아가는 국가였다면 다카이치 사나에는 총리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단순히 일본의 정치를 후진적인거라 보기에는 자민당은  1955년 이래 집권 정당의 자리를 내준 시기가 5년 밖에 안되니 집권기간이 70년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분명 자민당의 일당 독주가 정치의 퇴보를 불러온 부분 역시 크지만 어찌 되었건 경제 성장 과정에서 국가정책의 방향과 기틀을 잡아오는 역할을 한 건 부정 못한다. 반면 일본의 야당들은 그만한 설계를 할 능력이 없었고 결국 지금까지 자민당이 여러 실책을 저지르는 상황에서 콩고물 하나 주워먹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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