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세기 이후 자유주의 정치학에 큰 영향을 준 인물 중 한 명을 꼽으라면 벤담이 있다. 벤담은 옳은 것을 기준으로 행복을 제시함으로써 도덕적인 자연법의 내용이 결정되면 사람들이 이를 따를 것이라는 가정을 뒷받침했다. 밴담은 이성의 소리를 통해 사람들이 비 도덕적 정신에서 해방되어 정치적 계몽과 진보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으며 이 확신은 올바른 논리를 통한 옳은 것의 추구는 제대로 된 추론이고 지식의 전파로 조만간 모든 사람들이 문제에 대해 제대로 추론하며 그들은 반드시 올바르게 행동할 것인다는 논리에 기반해 있다.
- 자유주의 질서에 기반한 국제연맹이 창립되었을 때 유감스럽게도 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지주 존 스튜어트 밀이 <자유론>에서 다수의 횡포가 지니는 위험성을 잊었으며 19세기적 가정은 1차세계대전의 폐허 속에서 되살아나 빅토리아 시대의 지적 신조를 부활했다. 공리주의와 자유방임사상은 당시 산업과 상업 발달의 맥과 같이 했는데 그러나 19세기의 자유민주주의가 특정한 국가의 특정한 발전단계에 존재했던 세력 간의 균형에 기반한게 아니라 선험적인 합리주의 원칙에 기반하며 다른 맥락에 적용되도 같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란 이상론에 불과했다. 따라서 세계 곳곳에 이식된 자유민주주의는 추상적인 산물에 불과했다.
- 자유주의, 그 중에서도 자유민주주의는 여론이 이기는 민주사회는 옳으며 여론은 항상 옳다는 신념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 1909년 미국의 윌리엄 태프트 대통령은 미국과 기타 강대국들 간의 모든 국제분쟁을 중재에 붙이도록 의무화하는 조약을 체결하고자 했고 중재법정 결정을 어떻게 집행하느냐가 논란이 되었다. 이에 태프트는 민주국가에서 판결의 집행이 문제가 된 경우는 없었고 일단 문제를 법정으로 가져가서 판결이 내려지면 감히 국제여론을 무시하고 그 판결에 불복할 나라는거의 없을 것이라 했다. 윌슨은 뉴저지 주지사에 당선되었을 때 이성의 목소리가 가진 힘은 확신이며 전지전능한 여론이라는 이성의 힘에 의해 통치할 것이라 하기도 했다.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윌슨은 회의가 인류의 의견을 따르고 인민의 의지를 대표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분열할 것이라 했다.
- 여론이 이긴다는 명제 뿐 아니라 여론은 항상 옳다는 전제도 문제가 많다. 파리강화회의의 경우에도 정치가의 견해가 국민여론보다 온건했다. 국제연맹 운영위원회에서 일본 대표가 인종평등의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는데 이에 윌슨은 이 방을 나가면 시끄러워져서 그 문제 자체로서 다룰 수 없는 문제를 이 조용한 방에서 문제 자체로 어떻게 다루겠냐고 했다. 세계에서 정치가들은 본인이 합리적이고 싶지만 국내여론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식의 핑계를 대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게 자유민주주의 만능론을 반박하는 지점이다.
-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명제는 소수가 왜 그들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대신 최대 다수의 이익에 따라 제정된 규칙에 복종해야 하는지 설명 못한다. 윤리가 정치에 우선한다는 이들은 수적으로 우세한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희생해야 한다고 한다. 개인 이익에 내재되어 있는 선은 충성심과 자기희생에 내재하는 선에 종속한다. 그러한 복종의 의무는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직관 혹은 감에 따른 것이지 달리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반면 정치가 윤리에 우선한다는 이들은 민주주의란 머리를 자르는 대신 머릿수를 셀 뿐인 체제이며 지배자는 강하고 피지배자는 약하다고 하며 개인이 공동체에 복종해야 하는 이유를 의무란 <힘=정의>라는 명제로써 도출되는 허구적 윤리로 평가하며 완벽한 논리적 설명을 한다. 다만 이 두 가지 어느것도 모두 완전하진 못하며 인간 이성의 위대함을 목도한 현대인이 이성과 의무가 때로 갈등의 관계에 선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동시에 의무가 강자의 법 때문에 존재한다는 주장에 안주하지 않는다.
- 이익의 조화, 이것은 애덤 스미스가 창설한 정치경제학의 자유방임에 의해서다. 모든 이익이 근본적으로 조화를 이룬다는 주장은 언뜻 보기에 모순이기 때문에 배경을 알아야 한다. 애덤 스미스의 주장이 잘 받아들여진 것은 18세기 경제구조에 잘 적용될 환경이 있었기 때문인데 당시에는 생산과 교환의 극대화에 주력하고 부의 분배에 관심이 없는 부르주아 계층과 생산자들이 사회를 전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부론>이 출간된 해 제임스 와트가 증기관을 만들었고 생산보다 분배에 관심이 많은 프롤레타리아 등장을 가져올 기계가 발명되어 전제 조건 자체를 잠식했다. 산업자본주의와 계급 체계가 사회구조로 자리잡자 이익의 조화는 중요성을 띠기 시작했다. 곧 사회의 전체 이익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그 우월적 지위를 유지하려는 지배세력의 이데올로기가 된 것이다.
- 이익의 조화라는 사상이 널리 받아들여진 조건은 국부론이 출간되고 증기기관이 발명된 이래 100년 동안 생산, 인구, 물질적 풍요가 유례 없이 팽창한 것이다. 팽창하는 풍요로 새로운 시장 개척을 통해 시장을 둘러싼 생산자들 간의 경쟁을 완화하고 풍요를 누리지 못하는 계층에게 일부분 부를 순환함으로써 중산층을 창출하여 계급 갈등을 지연, 종국적으로 현재와 미래의 복지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면서 이익의 조화와 마찬가지로 세계질서 자체도 조화롭다는 신념을 심어줬다.
- 여기서 세계자유무역론의 근거가 나오는데 한 나라가 자국의 이익에 따라 한 어떠한 행동도 전체 국제사회의 진정한 이익이나 정의와 배치될 수 없다고 한 것. 18세기에는 나라의 이익이었던 것이 19세기에는 국제사회로 전용되었다. 이탈리아의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자 마치니(1805~1872)는 국가들 사이에 분업이 가능하기에 특수성에 따라 각자의 역할을 하여 인류의 발전에 기여한다고 했다. 만일 모든 나라가 이러한 정신에 따라 움직인다면 국제적 차원에서의 이익 조화가 실현될 것이다.
-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19세기였기에 가능한 이야기였다. 이익의 조화에서 충돌로 넘어가는 전환기인 19세기 후반~20세기 초는 처칠이 회고한 1899년 보어전쟁이었다. 북아프리카와 극동에는 별로 안남은 무주지를 두고 쟁탈전이 벌어졌으며 유럽에서는 뒤레피스 사건을 계기로 반유대주의가 오랜만에 민족주의와 결합해 새롭게 재등장했다. 영국에는 무제한 외국인 이민을 반대하는 폭동이 1890년대에 시작되어 1905년 이민제한법이 통과되었다. 1차세계대전 이후로는 확대된 생산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투쟁을 전개하며 민족의식을 고양했고 경쟁국의 번영은 자국 번영의 위협이 되었다. 일본은 섬유제품과 저가 공산품 순수출국이 되어 세계 시장 내 유럽의 점유율을 잠식했는데 더 이상 값싼 노동력과 높은 이윤율을 보장해줄 새로운 진출 지역이 없어졌다.
- 자유주의자들이 이익의 조화를 내세우면서 무의식 중에 자국의 이익에 보편적 이익 타이틀을 붙이며 전세계에 팔아먹는 건 어제오늘일 아니고 국제연맹 뿐 아니라 국제연합도 해당되는 말이다. 19세기 영국의 저술가들과 오늘날 미국의 지식인들은 각각 영국, 미국이 지배를 유지하는 것이 인류에 대한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라 했다. 공공의 이익에 관한 이론들이 특수한 사적 이익을 포장하는데 지니지 않다. 1885년 <더 타임즈>는 "대영제국이 석탄창고와 대장간으로 바뀐 것은 영국뿐만 이리라 인류를 위한 일이다"고 했으며 윌슨은 1914년 멕시코 베라 크루즈를 폭격했을 때 미국은 인류를 위해 봉사한 것이다는 궤변을, 그리고 영구평화론과 이상주의 정치학의 계승자 루돌프 럼멜 또한 베트남 전쟁과 이라크 전쟁은 미국이 독재자로부터 현지 주민들을 구원하고 자유를 이식해주기 위함이라는 헛소리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무한 루프처럼 반복되고 있다.
- 그리고 이익의 조화라는 표현이 웃긴 이유는 특권집단이 지배적 지위를 정당화하고 유지하기 위해 주장하는 도덕적 장치에 불과하다. 19세기 영국의 상공인들은 번영을 누렸고 이는 영국의 번영으로 보였는데 이 때문에 상공인에 저항하는 노동자 파업은 곧 영국의 번영을 해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익의 조화와 계층 간의 일체감이란 소외된 노동자들에게는 조롱에 불과했는데 그들의 열등한 지위와 영국의 번영 속에서의 미미한 역할은 그러한 신화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면 자유방임을 포기하고 사회보장을 제도화할 수도 있지 않냐고 할텐데 이 경우 이익의 자연적 조화의 실패를 인정하고 인위적 수단에 의한 새로운 조화 질서를 창출함으로써 결국 자신들의 근거 자체를 부정하는 꼴로 자유주의자들의 논리가 틀렸음을 입증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 로마와 가톨릭교회가 제창한 단일 세계국가론은 세계지배에 대한 주장의 상징이었다. 근대 국제주의의 뿌리는 17~18세기 프랑스에서 설리가 <대구상>을, 생피에르가 <영구평화구상>을 내세웠던 시기다. 이 두 가지는 프랑스에 유리한 국제질서를 구축하려는 것으로 계몽시대의 인본주의와 세계주의적 사상의 배경을 이루었다. 19세기 영국으로 주도권이 넘어가고 시인 테니슨 남작은 "인간의 의회, 세계의 연방"을 노래했다. 그러했던 영국은 정작 16세기에 교황청과 신성로마제국에 맞서 초창기식 독자적 국가론이라는 훗날 민족주의의 기반이 되는 논리로 맞섰다.
- 이처럼 지배국가에 대항하는 위치에 서있는 나라들은 지배국가의 국제주의에 민족주의 논리로 싸워왔고 독일도 이 논리에 따라 새로 태동한 민족주의를 내세웠다. 괜히 장관직에 올랐었던 적이 있는 영국 노동당의 어느 정치가는 국제연맹규약 제16조의 효력 정지를 요구하며 그 근거를 전체주의 국가들이 연맹을 장악하고 이 조항을 이용해 무력사용을 정당화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 게 아니다. 물론 현실에선 1930년대 <반코민테른 조약>이라 불리는 독일, 이탈리아, 일본 간의 협정으로 그들은 연맹을 장악하기 보단 독자 노선으로 갔지만 나치의 선전장관 괴벨스가 "국가사회주의의 독일과 파시즘 이탈리아의 지적 리더쉽 아래 전 유럽의 새로운 질서를 갖추고 있다"고 말한 것처럼 국제질서와 국제단결은 늘 강자의 슬로건임이 완전히 드러났다.
- 과거의 제네바의 국제연맹도 오늘날의 국제연합도 국가를 해소하지 못하듯 전쟁의 가능성도 해소하지 못한다. 그것은 전쟁의 새로운 가능성을 도입하고 전쟁을 허용하며 연합으로서의 전쟁을 촉진하고 또 일정한 전쟁을 합법화하고 시인함으로써 전쟁에 대한 일련의 억제를 제거한다. 인류라는 진정한 개념이 더욱 유효성을 발휘하려면 그 본래의 활동이 인도적, 비정치적 영역에 있고 적어도 국가들 간의 관리공동체로서 보편성에로의 경향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보편적이 아닌 국제기구란 물론 그것이 잠재적 내지 현재적인 동맹, 즉 연합을 의미하는 경우에만 정치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정치적이라는 의미는 카를 슈미트의 표현대로 적과 동지의 구별이며 이는 증오 및 혐오 상태로서의 적이 아닌 실존적 의미로써의 적, 또 국가가 형성되기 위해 필요한 전제조건이다. 이로써 교전권은 제거된 것이 아니라 다소간 전면적이든 부분적이든 연맹으로 이양될 것이다. 이에 반하여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보편적인 인류 조직으로서의 국제기구의 경우에는 첫째로 모든 기존 인간집단으로부터 실질적으로 교전권을 빼앗고 둘째로 자신은 교전권을 갖지 않는다는 어려운 작업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보편성, 인류, 탈정치화된 사회 등 본질적인 특징들 모두가 또다시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 물론 국가, 계급 혹은 개인들 사이의 평화와 협력이 이해의 갈등과 정치적 분열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인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얘기 자체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추상적 원칙들을 구체적인 상황에 적용하는 순간 이기적인 기득권의 위장으로 귀결될 게 자명하다. 오늘날의 자유주의 정치학의 조상인 윌슨으로 대표되는 이상주의 정치학이 실패한 것은 원칙을 따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절대적인 기준을 제시하는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독일 역사학자 마이네케는 "서구 자연법 사상의 근본적 약점은 현실에 적용되었을 때 사문(死文)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 말이 자유주의의 이상론에 가장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고 본다.
참고 문헌:
카를 슈미트, <정치적인 것의 개념>, 살림, 2012
오오타게 코지,<정전과 내전: 카를 슈미트의 국제질서사상>, 산지니, 2020
케네스 월츠. <인간 국가 전쟁: 전쟁의 원인에 대한 이론적 고찰>, 아카넷, 2007
E.H 카, <20년의 위기>, 녹문당, 2014
존 J. 미어샤이머, <미국 외교의 거대한 환상>, 김앤김북스, 2020
A. J. P 테일러, <준비되지 않은 전쟁, 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 페이퍼로드, 2020
한스 모겐소, <국가 간의 정치 1: 세계평화의 이론적 접근>, 김영사, 2014
패트릭 J. 드닌, <왜 자유주의는 실패했는가>, 책과함께,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