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슈미트에게는 사회적 존재 기준보다 정치적 원칙이 우선이었다. 내부 경제 전략과 현대 세계에서 증가하는 압력을 조직하고 미리 결정하는 건 다름 아닌 정치이다. 확고한 역사사회학적 논증으로 이해되는 슈미트가 채택한 정치적인 것의 개념의 의미는 결국 '집단적 역사적 관념론'으로 정의될 수 있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 이론에서 주체는 실체를 발전시키는 개인이나 경제법칙이 아니라 고유한 법률이 부여된 특별하고 역동적인 의지로 다양한 형태와 단계에서 사회 경제적 존재, 질적 통일성, 전통의 유기적 영적 연속성을 유지하는 구체적이고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구별되는 민족으로 슈미트의 이해에서 정치 영역은 법적, 경제적, 사회정치적 수준과 관련된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는 국민의 의지의 구체화를 나타낸다.
정치에 대한 이러한 슈미트의 정의는 계몽주의 이후 서구 법철학 및 법철학을 지배해온 기계론적 사회구조와 상충된다. 슈미트의 정치적 영역은 기계론적 학설이 무시하는 두 가지 요소, 즉 의지의 특별한 성질을 부여받은 역사적 특수성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슈미트의 의견은 정치적 수사에 집중되어 있다. 따라서 슈미트의 정치 수위 주장은 "진보"의 일차원적 도식에는 분명히 포함되지 않는 질적, 유기적 특성을 법철학과 정치학에 도입했다. 즉 정치를 "토양"에 "뿌리 박힌", "유기적" 현상으로 간주한 것이나 다름 없다.
한국과 한국 국민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다스리고 75년 전과 같이 조선반도의 민중의 뜻을 무시하고 반국가적 환원주의 이데올로기에 인질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정치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필요하다.
#2. 항상 적과 동지를 같이 두라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의 개념>이라는 저서에서 자신의 관점이 마르크스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이론의 인본주의적 성격과 일치하지 않지만 마르크스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실제 역사를 포함한 세계사는 슈미트가 옳다는 걸 증명하고 있다. 비록 유토피아적, 계몽주의적 양심이 그걸 인식할 수 없더라도 실제로 "동지"와 "적" 사이의 정치적 구분은 모든 정치 체제와 모든 국가에 존재하며 이 구별 없이는 단일 상태가 아니다.
또 그는 비인간성과 적과 동지를 명확히 구분하며 추상적인 인본주의를 대신하여 행위자가 인간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을 가능한 모든 반대자들에게 부인하고 자신이 인간성과 법을 초월한다고 선언함으로써 가장 무서운 전쟁을 벌일 잠재적으로 위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비인간적인 한계의 경우 미국이 파나마를 침공하고 이라크를 폭격하기 한참 전인 무려 1934년에 슈미트가 지적한 것이다.
이러한 전제조건 하에 슈미트는 총력전이 자연 문화, 역사, 국가를 부정하는 보편주의적 유토피아 이데올로기의 결과라는 소위 "형식의 전쟁"인 "총력전" 및 "제한적 전쟁"이론을 개발했다. 민족 간의 국가적 차이는 인류의 파괴를 위협하는 요소로써 극단주의적 휴머니즘은 오히려 군인 뿐만 아니라 민간인도 전쟁의 참상에 말려들게 한다. 이것은 가장 무서운 진정한 의미의 "악"이다.
그에 비해 형식의 전쟁은 사람들 사이의 차이와 파괴할 수 없는 문화 때문에 불가피하다. "형식의 전쟁"에는 전문 군인의 참여가 포함된다. 한 때 유럽 관습법이었던 정의된 규칙에 따라 규제될 수가 있었고 따라서 그러한 전쟁은 필연성의 이론적 인식이 총체적 갈등과 총체적 전쟁으로부터 사람들을 미리 보호할 차악이다. "절대적 자유에서 나아가 나는 절대 노예에 도달한다"는 도스토옙스키의 말처럼 급진적 휴머니즘 지지자들은 완전한 평화에서 나아가 완전한 총력전에 이르게 된다.
이제 우리는 동지와 적을 구분해야 하는 지점에 이르었다. 슈미트는 국가의 정치적 존재에 대한 쌍의 중심성은 이 선택 내에서 심오한 실존적 문제가 결정되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이 선택에 대해 명확한 인식을 가지고 적과 동지의 개념에서 판단하는 정치가는 잔혹한 현실을 카메라 장식의 전쟁으로 바꾼다. 일례로 미국은 21세기 이후 이라크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 폭탄을 떨어뜨려 수많은 민간인을 죽였지만 미국인들은 컴퓨터 게임을 보듯이 광경을 지켜봤다.
적-동지 개념은 정치적으로 완전한 사회의 존재를 위해냉정하게 수용하고 의식되어야 하며 그렇지 못한다면 모두가 적이 되고 아무도 동지가 되줄 수 없게 될 것이다.
#3. 예외상태의 정치와 결정
예외상태, 그것은 법의 절대화 뒤에는 역사를 닫고 창조적이고 열정적인 패턴, 정치적 내용, 역사적 인물을 박탈하려는 시도가 숨겨져 있다는 전제를 기반으로 한다. 예외상태가 오면 더 이상 기존의 법적 규범을 규제할 수 없으며 이 상황에서 정치적 결정을 내려야 하는 지점이 반드시 온다. 예외상태의 의사결정에는 자발적인 표현, 영웅적 극복, 열정적인 충동, 내면 속 깊은 실존적 에너지의 발현과 유기적인 수용이 포함된다. 예외상태란 단순한 재앙은 아닌게 중대한 문제 앞에 한 민족과 그것의 정치적 유기체를 배치하여 그 민족을 현재의 민족으로 만들고 민족의 역사적 본질, 핵심 및 비밀성에 호소하는 것을 의미한다.
프랑스 법학계의 슈미트 추종자들은 Entscheidung라는 독일어, 즉 결단주의를 발전시켰다. 결단주의는 예외상태에 중점을 두며 시간의 세 가지 질적 특성이 합쳐지는 현재 순간의 극적인 집중 속에서 과거를 실현하고 미래를 결단한다. 역사에 인민을 낳은 근원의 힘, 영원을 향하는 인민의 의지, 시대를 초월한 ‘나’가 드러난다. 초법적 의미에서의 결단의 개념은 직접 권력과 간접 권력으로 나눠진다. 직접 권력은 군주 혹은 공화정의 수반이며 특정 조건 하에서는 직접 권력 외에도 간접 권력에서도 결단이 이뤄진다. 비록 통치자의 결단 만큼 명확하진 않지만 단지 국민의 의사에 반하는 결정이 그러한 "간접적 권력"의 수단에 의해 채택되고 실행된다는 사실을 암묵적으로 암시한다. 국가에서 이 두 가지 유형의 권위는 기능할 수 있다.
예외 상태 이론과 결단주의 이론에서 중요한 건 이 상황은 국가의 자연스러운 상태로써 정치적 미래 뿐만 아니라 과거의 본질에 대한 이해와 확인이 결단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이 순간 국민의 의지와 국민의 국가적 선택을 확인하고 역사에서 정치적 자기 주장을 철회할 수 있다면 한국의 결단은 한국 국민은 그 자체로 역사적이고 수천년에 걸친 영적 "한국인"에 충성의 도장을 찍을 실존적 결단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계몽주의의 유토피아적 이데올로기인 평등주의, 보편주의 지지자들이 결단을 내린다면 우리의 과거는 의미를 잃을 것이고 한국인이 아닌 그저 완전한 인간으로서 문화적 평준화가 될 것이다.
#4. 공간의 필수 요소
슈미트에게 공간의 개념적 의미는 이 지역에 포함된 특정 민족과 국가의 정치적 자기 표현의 변이가 결합되어 조화롭고 일관된 일반화를 달성할 수 있는 지리적 영역의 묘사에 있다. 위대한 지정학적 연합, 즉 신성로마제국이나 그 이후의 베스트팔렌 체제와 같은 느슨한 연방 제국 형태의 다극체제를 의미한다. 공간에서 유기적으로 조화롭게 조직화하고 이걸 형식 전쟁의 공정한 중재자 또는 규제자로 사용한다.
유감스럽게도 동북아시아에서는 베스트팔렌 체제와 비슷했던 다극 체제가 형성된 적이 없다. 화이질서였거나 식민제국 일본과 병자 중국의 대결 혹은 신흥 강국 중국과 이방인인 기성 강국 미국의 투키디데스 함정 논리에 따른 대립이었을 뿐. 따라서 한 민족의 운명에 있는 영적 상수, 즉 한 민족의 영적 본질을 구현하는 상수의 존재와 병행하여 또한 몇 세기 또는 수천 년의 간격으로 새로운 복원을 향해 끌리게 하는 통합 경로로써 지정학적 거시적 실체를 통합 원리가 경직되고 추상적으로 재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유연하고 유기적이며 민족의 결정에 따라 민족의 의지와 열정적인 에너지가 통일되어 관여할 수 있을 때 안정된다는 걸 전제로 둬야 한다. 즉문화적, 지정학적 이웃 국가와의 블록.
#5. 전투적 평화
슈미트가 말년에 우려한 일은 기어코 현실이 되었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해상 제국의 잠재력을 중심으로 '인류의 가치'는 세계 패권을 달성하고 신세계 독재, 즉 기계적 유토피아 독재라는 이데올로기의 기반이 된다. 결국 그의 예언대로 현대사의 흐름은 필연적으로 총력적을 향해 가고 있다. 전략적, 군사적, 외교적 차원의 관계의 전체주의화 논리는 프랑스 혁명과 미국 독립전쟁으로부터 시작하여 지구상의 유기적 조화를 보장했던 역사적, 사법적, 국가적, 지정학적 상수로부터 최대한 탈피했다.
법적, 지정학적 인지부조화가 전세계에서 확산됨에 따라 지배적인 정치적 이데올로기 개념이 현실에서 이탈하고 점점 환상을 쫓아 궁극적으로 위선이 되었다. 슬로건이 인간적으로 될 수록 비인간적인 현실이 되었다. 전쟁도 없고 평화도 없는 의미에서 우리는 전투적 평화를 지향해야 한다. 파르티잔, 한국식 발음으로 빨치산은 우리 역사에서 우리 정치제제에서 이탈했을 때 정치적 리더쉽과 진로를 바로 잡기 위해 나서 정치적 성격을 보였다. 조선인민유격대라 불리는 실존적 빨치산을 얘기하려는게 아니라 한반도 역사에서 존재했던 저항 세력을얘기하는 것이며 공간의 직관에 의해 움직인다.
현대 우리나라는 국가의 의지(민족 정신)과 체제의 의지(보편주의와 법치주의) 사이의 간극이 크고 미국과 일본이 주도하는 해상 제국 질서에 적극적으로 유착하고 있다. 이럴 때일 수록 국가에 전투적 평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