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KR7TnElIG1Q?si=PihD4ODtyL2UpknX
1868년 보신전쟁은 게임 '토탈워 쇼군 2 사무라이의 몰락'으로 유명한 전쟁이다. 일본에게 있어서는 중대한 역사적 전환점으로 이 전쟁에서 에도 막부가 패하여 메이지 신정부 주도 하에 개혁이 개시되게 되었다. 그리고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사이고 다카모리 뿐만 아니라 이토 히로부미 같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일본 총리 및 심지어 이타가키 다이스케 같은 자유민권운동의 대부들도 보신전쟁과 관련되어 있다.
보신전쟁은 일본에서는 드라마가 만들어질 정도로 인기가 높지만 한국에서는 인기가 사실상 없다. 그나마 접한 사람들도 토탈워 하면서 간간히 접해본 정도일 것이다. 이 글에서는 보신전쟁에서 에도 막부가 왜, 그리고 어떻게 무너졌는지 다뤄보고자 한다.
막부와 번
도쿠가와 시대에는 260여 개의 지방마다 영주가 있었고 이 영주를 다이묘로, 그들이 다스리는 봉건 국가를 번(藩)이라고 부른다. 이 번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하며 신번, 후다이번, 도자마번으로 나뉜다. 신번은 도쿠가와의 친척이다. 그들은 도쿠가와라는 성씨를 가지거나 아니면 마쓰다이라라는 성씨를 가졌다. 이들의 번은 규모도 컸고 사회적으로 대우가 좋았다. 그러면서도 막부에 직책을 맡거나 정치에 관여하는게 금지되었다. 왜냐면 종가(막부)의 지위를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며 막말기 정치 변혁의 발단은 이들의 정치 개입이었다.
신번 중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개 가문은 고산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들을 시조로 하는 집안인데 오와리 번, 기이 번, 훗날 존황양이 사상의 기반이 되는 미토 번도 포함된다. 이들은 종가에 가까운 혈연으로 유사시 종가를 보위하는게 임무면서 쇼군가에 후계자가 단절될 때 양자를 내어 대를 잇게 하는 일도 했다. 실제로 이에야스가 막부를 연 지 100년 지났을 때 종가의 후계가 단절되어 기이 번의 다이묘가 쇼군이 되었고 그 이름은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였다.
후다이번은 대대로 도쿠가와 집안에 충성을 다한 곳이다. 특히 이들의 조상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막정의 요직은 전부 얘네가 차지했다. 막부의 수반인 로쥬는 중소 규모의 후다이번 다이묘만이 취임할 수 있었고 후다이번 전국 요소요소에 배치되었는데 후다이번과 신번의 석고(石高)는 합쳐서 930만 석 정도로 전체의 30%를 차지했다. 유서 깊은 후다이번은 7개였고 이들은 쇼군의 견제로 직접 정치에 나서지 않았음에도 막부 정치에 영향을 끼쳤는데 실제로 다이로로써 미일통상조약 체결했다가 1860년 에도 성 밖에서 참살당한 이이 나오스케부터가 후다이번 최고 명문가 히코네 번의 다이묘였다.
마지막은 도자마 번이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들은 도요토미 편에서 서서 도쿠가와와 싸웠다. 다행히 복종을 맹세해 멸문지화는 피했으나 영지는 축소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큰 영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가가 번은 영지 석고가 100만 석을 넘었다. 사쓰마 번은 72만 석, 조슈 번은 40만 석이었는데 신번의 고산케인 오와리 번이 62만 석, 미토 번이 35만 석 밖에 안되던 걸 고려하면 이들의 경제 수준은 높았다. 그래서 막말기에 이들을 웅번(雄藩)이라 불렀다. 도자마번 석고는 다 합쳐서 980만 석 정도로 전체의 30%였고 훗날 이들이 보신전쟁 당시 신정부군의 주역이 된다
에도 막부는 번을 어떻게 대했나?
에도 막부의 통치체제는 생각보다 완성형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전 260여 년간 번들은 막부에 순종적이었는데 이는 막부가 강경하게 반항하는 번들을 없애거나 영지를 삭감하거나 외진 곳에 옮겼기 때문이다. 즉 쉽게 말해 영지 여탈권이 막부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다이묘들에게 보여준 것이다. 또 무가제법제도에 따라 막부의 허가 없이 다이묘 가문간 결혼을 금지했고 쌀 500억 이상을 실을 수 있는 대형 선박 건조를 금지시켰다.
무가제법제도 중에는 참근교대제라는 거미 있었는데 다이묘들이 일정 기간 번을 떠나 에도에 머무르는 것이다. 다이묘의 정처와 적자는 에도 밖으로 나갈 수 없었으니 인질인 셈. 이 때문에 자신의 가족과 가신들을 위해 번저를 짓고 유지해야 했는데 에도의 높은 물가 특성상 부담이었다. 특히 큰 번은 수백 명의 가신들을 이끌고 수십 일에 걸친 행차를 해야 했기에 비용은 막대했고 가신들의 에도 체류 비용도 부담이었다. 이것이 지방 다이묘 재정난의 주원인이었다.
막부는 이렇게 보면 과하게 번들을 통제했던 것 같지만 의외로 자율성도 있었다. 각 번이 막부의 종주권을 인정해주는 대신 막부는 행정권, 징세권, 경찰권을 보장해줘 국가 성격을 띄게 되었다. 물론 260여 개의 번 모두가 국가 성격을 보인 건 아니나 규모가 크고 10만 석의 경제력이 있고 한 가문이 계속 지배하고 재정자립을 가능할 때 그 번들은 막부 안의 국가로써 존재가 가능했고 사쓰마 번과 조슈 번, 도사 번 이런 도막파 번 같은 곳들도 해당되었다.
게다가 18세기 후반 이후 대부분이 번이 다이묘 가문이 그대로 고정되고 식산흥업 정책으로 번 단위로 경제가 형성되었다. 번 정부는 앞장서서 농민 특산품 생산을 장려하고 유통을 장악하는가 하면 경제 활성화를 위해 번 내에서만 유통 가능한 번찰(지폐)을 발행했다. 게다가 수출을 강행한 건 덤이고. 이러한 독립적인 번의 존재는 경쟁의식을 낳고 태평시대에는 사치 경쟁, 체면 과정으로써 참근교대를 행렬을 화려하게 꾸몄다. 다이묘들의 에도 번저 생활도 화려해졌고 다이묘들은 더 높은 관위(官位)를 받기 위해 공작하였다.
인정 경쟁은 어느 다이묘가 선정을 베풀었다는 식으로 이뤄졌고 반대는 체면이 깎였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에도 막부 시대 다이묘들이 자기 백성들의 잇키(농민 반란)이 벌어지는 걸 극히 꺼려했기 때문이었다. 이른바 '가이분'에 관계된다는 말로써 우리 식 표현으로는 남이 어떻게 볼 지 무섭다는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내우외환 시기에 접어들자 사치 체면 경쟁이 아닌 부국강병, 개혁 경쟁의 시대가 열렸다.
이때 유력 번들은 중앙의 지시 없이 자기의 생존을 위해 노력했다.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상품작물 등 강력한 식산흥업 정책을 하고 그 이득을 차지하기 위해 전매 정책을 거리낌 없이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상품작물을 생산하는 농민들이 이득 분배를 요구하면 가차없이 진압했고 번 간의 무역도 활발해졌다. 이를 통해 메이지 유신의 주역 서남웅번(조슈 번, 사쓰마 번, 도사 번)들은 재정을 상당히 많이 확보했다. 이처럼 일본 안에 존재하는 번들이 서로 경쟁의식을 갖고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다.
각 세력의 대응: 막부의 군대 개혁
1860년 이후부터 막부는 본격적인 서구식 군대를 만들기로 결정하면서 막부 육군이 창설된다. 막부 육군은 보병대, 기병대, 포병대 중심의 삼각편제를 채택했고 병과는 전열보병과 경보병으로 나누었다. 병력 모집 방식은 하타모토들을 통해 쌀 생산량에 따라 농민병사들을 차출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월급은 1인당 10냥 이상이었고 장교단은 상급무사들이 주도했다. 조슈 정벌 등 실전에도 투입되었는데 이때 막부군은 전장식 소총의 한계와 낮은 사기, 몇몇 번들은 출병 거부 때문에 조슈 번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그 후 새로운 쇼군으로 취임한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다시 한번 군대 개혁에 나선다.
먼저 육군 총재직 신설 등으로 기존 부교 중심의 군 지휘계통을 개혁했고 친위대도 증강시켰다. 1867년에는 징집 대신에 자금 납부를 통한 병력 모집을 채택했는데 이를 통해 막부 측에서 아예 납부된 자금으로 병사들을 고용하는 체계가 막부군에서 자리잡게 된다. 그러면서 보신전쟁 발발 약 1년 쯤에는 2만명이 넘는 병력과 48개 대대를 보유한 서구식 군대로 변하게 된다.
또한 프랑스 군사고문단을 초빙하기도 했는데 이 군사고문단에게 지도를 받을 부대인 '전습대'(덴슈타이)가 생겨나기도 했다. 그리고 전습대에게 지급할 무기로 당시 최신 무기였던 샤스포 소총이 일본에 수입되었다. 전습대는 주로 상급무사들 위주의 인적 구성이었고 연대가 최대 단위였던 다른 막부군 부대와는 달리 전습대는 대대가 최대 단위였다고 한다.
그러나 막부군은 전반적으로 사기와 충성심이 낮았다. 그 이유는 바로 막부군 내부에 있었는데 장교단이 상급무사들이고 사병들은 평민이나 하급무사인 구조 때문이었다. 이러다 보니 통일성과 단결력은 떨어졌으며 충성심도 크게 부족할 수 밖에 없었다.
각 세력의 대응: 사쓰마 번 군대의 근대화
한편 사쓰마 번은 경제적 사정이 좋았다. 막말기 사쓰마 번은 번정 개혁을 통해 채무 정리 및 교역 확대로 재정을 안정시킨 것은 물론이고 쌀 생산량 규모도 나름 좋았었다. 그 와중에 새로운 다이묘로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집권했는데 그는 난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사쓰마 번은 근대화 정책에 나설 수 있었다.
시마즈 가문 주도로 사쓰마 번은 나가사키를 통해 서양식 대포를 도입시키고 서구식 총대를 만들었다. 흑선 내항 사건으로 일본이 완전 개항한 후에는 아예 군수 시설들과 반사로 및 용광로, 정련소, 방직 공장 등을 비롯한 서구식 공장을 세웠다. 거기다가 개혁을 위해 오쿠보 도시미치와 사이고 다카모리 같은 하급 무사 출신들을 적극 등용하는 파격적인 행보도 보였다.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개혁 덕분에 사쓰마 번은 1854년에는 10문의 대포를 갖춘 서구식 해군 군함인 쇼헤이마루를 건조하는 것을 성공했다. 사쓰에이 전쟁 후인 1866년에는 육군과 해군 지휘계통을 개편했고 대대와 소대 개념을 수용했다. 1860년대에는 영국을 통해 엔필드 스나이더 소총을 도입하는 등 프랑스군을 롤모델로 삼은 막부군이나 프로이센군을 롤모델로 삼은 사가 번과는 달리 사쓰마 번은 확실하게 영국식 군대를 지향했다.
각 세력의 대응: 조슈 번 군대의 근대화 개혁
조슈 번도 나가사키 해군 전습소에 보낸 학생들이 돌아오면서 본격적인 근대화 정책에 나섰다. 당시 조슈 번은 무사계급을 중심으로 보병, 포병, 기병 3개 병과를 도입한 서구식 군대를 만들었고 신식 화기와 군함도 도입하기 위해 나름 노력했다. 동시에 군사 관련 책들도 수입해왔고 신식학교에서 군사 교육을 실시시키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다가스키 신사쿠 같은 번 내 소장파들을 중심으로 무사가 아니라도 입대가 가능한 기병대(기헤이타이)를 비롯한 제대들이 생겨났다. 당시 시모노세키 전쟁 패배를 통해 서구열강의 힘을 깨달은 다가스키 신사쿠는 양이를 과감히 내려놓고 존황과 도막을 위해 서구 열강의 우수한 군제와 기술을 수용하기로 결단을 내렸었다.
기병대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군대였었으며 훈련 역시 강도가 높았다. 편제는 보병대와 포병대로 나뉘었었는데 이처럼 신사쿠 주도로 신식군이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조슈 번의 다이묘인 모리 가문이 다가스키 신사쿠에게 믿고 맡겼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거기다가 1866년에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이 '삿초동맹'을 결성하면서 조슈 번은 사쓰마를 통해 서구 열강으로부터 엔필드 스나이더 소총과 암스트롱 포를 수입해올 수 있었다.
이러한 군 개혁 덕분인지 막부의 조슈 정벌에서 조슈 번 군대는 막부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가 있었다. 당시 막부군은 주로 전장식 소총이 상당수 였었고 병사 개개인의 사기도 낮았지만 반면에 조슈 번 군대는 엔필드 스나이더 소총 같은 후장식 소총들을 나름 보유하고 있었는데다가 실전 경험도 조슈 번 내부 분열로 겪어본 상태였다.
이러니 연사속도와 사거리가 딸리는 전장식으로 무장한 막부군이 패배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전투 직전에 조슈 번은 서양 진법을 바탕으로 삼아 전번 일군 체제로 정비했다. 화승총을 교체하기 위학 신식 소총들을 사들였고 150명 단위의 전술부대를 편성시켜서 효율적인 군대 조직을 만들었기도 했다.
막부의 인재, 가쓰 가이슈 물론 에도 막부가 마냥 무능하진 않았다
일본인들이 에도 막부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는 마케이누다. 그도 그럴게 요시노부를 끝으로 막부 체제가 끝났으니 말이다. 실제로 일본 정계에서도 요시노부라는 이름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며 일본 55년 체제의 마지막 총리 미야자와 기이치가 그러한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렇다면 에도 막부는 후반기에 진짜로 무능한 집단이었나?
시실 에도 막부에 유능한 인재들은 많았다. 아베 마사히로(1819~1857)라는 정치가가 대표적인 예인데 비록 페리 제독에 굴복하여 개항을 했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그의 능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23세의 나이에 로쥬에 취임한 마시히로는 15년 동안 막부 개혁을 담당하며 해방괘라는 부서를 중심으로 인재들을 등용했다. 서양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던게 막부의 인재들이었기에 무모한 양이 주장이 안나왔던 것이며 이미 서양과 세계의 정세르를 알던 막부 역인들은 근대화가 숙명임을 받아들인 상태였다.
에도 막부의 정치력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1867년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대정봉환(大政奉還)을 단행하자 많은 정치세력들은 막부의 리더쉽을 재평가했다. 사쓰마와 조슈 번에서 왕정복고 쿠데타가 일어난 것은 대정봉환을 협의하기 위해 다이묘들이 교토로 모이는 시점이었다. 따라서 쿠데타는 지지를 얻지 못했고 사쓰마와 조슈는 고립되었다. 신정부에 가담한 오와리 번은 요시노부에게 정권 참여를 촉구했고 그게 뒤집힌게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막부군이 군사 도발을 하면서부터다,
외교에서도 막부의 존재감은 건재했다. 요시노부는 쇼군 취임한 직후 오사카에서 서양 각국의 주일외교 사절을 접견했다. 물론 영국은 물밑에서 사쓰마, 조슈 번에 협조했으나 프랑스는 요시노부를 전적으로 지지했다. 프랑스 공사 레옹 로슈는 은행 차관을 일본에 들여오고 기술자, 군인을 데려와 막부를 도왔으며 요코스카 제철소 설립을 주선했다. 심지어 사쓰마, 조슈 번 군대 진압하는데 프랑스군을 지원하겠다고 요시노부에게 말하기도 했다.
말년에 한 때 막신이었던 가쓰 가이슈는 진짜로 용기있었던 위인은 도쿠가와 요시노부이며 유신지사들은 비겁한 자라는 식으로 평했다.
보론: 일본 해군 뿌리, 막부 해군의 건설
흑선내항 사건 이후, 아베 마사히로 로쥬를 중심으로 막번연합 해군의 창설 정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면서 각 번들은 쇼헤이마루를 시작으로 쇼텐마루, 만넨마루 등 함선을 직접 함선들을 건조했지만 얼마 못가서 기술과 인력의 한계에 부딪혔고 이에 따라 자체 건조에서 서구로부터 구입하자는 쪽으로 방침이 바뀌게 된다. (특히 사가 번과 사쓰마 번)
다만 이때까지만 해도 막부에선 군함 구입과 제한적인 조선 기술자 파견만 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네덜란드와의 군함 구입 교섭에 참석한 나가사키 부교인 미즈노 다다노리도 이런 자세로 협상에 임했다. 그런데 이때 이걸 일본과의 교류 확대의 기회라고 본 네덜란드 상관장 얀 헨드릭 돈케르 쿠르티우스는 아예 이참에 서구 해군체제를 건설하는게 어떻냐고 제안했고 여기에 다다노리도 감명을 받았지만 막부 방침에 따라 함선 8~12척 구입만 합의했다.
하지만 1854년 7월 6일, 쿠르티우스 네덜란드 상관장은 네덜란드 내의 사정으로 함선 판매가 불가하게 되었다고 밝혔고 대신에 보상으로 네덜란드 증기선인 슨빙호가 나가사키에 머무는 동안 조선술, 항해법, 증기기관 이용법 등 군함 운용에 필요한 기술을 전수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미즈노 다다노리 부교의 설득 끝에 막부는 이를 승인했고 이렇게 하여 7월 28일에 슨빙호가 입항하면서 단기전습이 실시되었다.
한편 슨빙호의 선장으로서 나가사키에 온 파비우스는 단순히 전습만 해주는 것을 넘어서 아예 막부에게 해군 건설 관련 의견서까지 써줬는데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 근대 해군 체제가 확산되고 있는 상황이며 특히 영국과 지리적으로 비슷한 일본 특성상 해군 건설은 불가피함.
2. 일본이 해군 증강을 할 생각이면 반드시 증기선을 구입해야 할 것. 범선은 이제 시대에 뒤떨어지고 있는 구시대의 산물이라서 이걸 구입한다는 건 재정 낭비일 뿐임. 그리고 증기선 중에서도 외륜증기선보다 성능이 좋은 내륜증기선을 보유하는게 좋음.
3. 일본 상황상 증기선의 자체 건조는 무리임. 그래서 외부로부터 구입하는 방법 밖에 없는데 건조 장소로는 네덜란드령인 자바가 좋음. 왜냐면 자바에는 건조를 위한 자재들과 인력들이 충분하기 때문.
4. 증기선은 작업을 위해서 드라이 독 같은 수리 시설이 필요함. 이런 자체적인 수리 시설과 조선 시설을 갖출 만한 장소로는 나가사키 항이 적합함.
5. 해군 사관들의 양성을 위해선 외국인 교관들이 필요함. 그래서 네덜란드 해군 사관들을 초빙해서 지리학, 물리학, 천문학, 측량학, 기관학, 항해술, 조선학, 포술학 등 해군 운용에 필요한 지식들을 교육하게 해야 함.
6. 해군 전습에 참여하는 전습원들은 본격적인 전습 이전에 난학교를 통해서 네덜란드어를 미리 학습해둬야 함. 그 이유는 전습을 위해 일본에 오게 되는 교관단은 일본어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
7. 단순 외국인 교관 초빙을 넘어서 아예 유학을 보내는 것을 추천. 서구에서 공부한다면 세부적으로 더 자세하게 배울 수가 있기 때문.
이상이 파비우스의 제안서 내용을 요약한 것이었다. 그의 등장 이전에도 근대 해군 건설을 제안하는 외국인들이 있었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구체적으로 제시한 인물은 없었다. 이런 부분에서 파비우스의 제안은 아직 좀 갈팡질팡 하던 막부에게 확실하게 구체적인 방향과 과제들을 알려주는 그런 커다란 역할을 했다고 볼 수가 있다.
실제로 막부 측은 파비우스의 의견을 들은 후 증기선으로 함선을 재주문 했으며 본격적으로 네덜란드로부터 해군 전습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막부가 아예 서구식 해군 체제를 수용하기로 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특히 2차례에 걸친 네덜란드로부터의 해군전습은 근대적 해군 사관의 배출 및 해군 교육이 확대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보론 2: 에도 막부의 초기 해군 정책 (Feat. 아베 마시히로)
1853년 막부의 국서평의에 제출된 의견들은 통상 허용파든 통상 반대파든 상관 없이 다수가 해안방어 강화와 해군 건설을 강조하고 있었다. 이러한 국서평의에서 막부의 관료들과 다이묘들은 군함이 있어야 해안 방어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며 군함의 필요성을 중요하게 여겼는데 그 중에서도 가와타 하치노스케는 병력 3백명까지 탑승 가능한 프리게이트급 20척과 증기선 10척 건조를, 이노우에 사부로에몬은 각 번들의 대선 100척과 소선 50척 그리고 막부 30척 등을 다 합쳐 180척 건조를 주장했다.
또한 국서평의에서는 그 외에도 대규모 군함 획득을 위한 재정 확보 및 확보 수단과 각 번들에 대한 대형 선박 건조 금지 조치에 대한 철폐, 대선 건조 분담, 서구로부터 군함 도입 및 기술자 고용과 관련 교육 실시, 획득 이후의 함선 운용에 관한 구상, 새로운 군사 제도 창출 등의 해군 건설론 관련 얘기들이 오갔다. 그리고 국서평의에 참가했던 막부 관료와 다이묘들은 통상 조약 논쟁과는 상관 없이 함선 건조, 막번연합함대 창설, 네덜란드로부터 기술과 기술자 고용, 그리고 함선 구매 등을 과제로 제시하였다.
그 후 로쥬인 아베 마사히로는 대선 건조 금지 조치 해제 논의를 진행하면서 동시에 막부 주도로 대선과 증기선 건조 작업에 들어갔다. 건조 지시는 우라가 부교와 미토 번, 그리고 에가와 다로자에몬에게 내려졌다. 우라가 부교는 흑선내항 사건 직후에 해안 경비책으로 108척 길이에다가 함포 10문 탑재가 가능한 군함 2척과 슬루프형 범선 2척 총합 4척의 건조 계획을 제출한 바가 있었는데 이 계획이 재조정 되어 그는 군함 1척과 슬루프형 범선 2척 건조를 맡게 되었다. 이 군함은 7~8개월 기간 동안에 건조되어 1854년 5월에 완성되어 호오마루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 호오마루는 120척 길이에 약 600톤 수준의 배수량을 갖췄으며 함포도 여러 문을 무장시킬 수 있었다. 또한 용골을 붙인 선체 구조를 지니고 있었는데 이러한 호오마루는 막부가 자체적으로 건조에 성공한 최초의 서구식 범선이라고 볼 수가 있다.
미토 번의 경우도 대선 건조에 관심이 있었던 만큼 해방어용이자 미토 번의 다이묘인 도쿠가와 나리아키에게 군함 건조 요구가 막부로부터 나오자 곧 바로 난학자들의 도움 아래 모형 제작 후 12월에 이시키와지마에 조선장을 부설했다. 곧 이어서 1854년 1월에 기공식 후 바로 건조 작업에 들어갔는데 건조 과정에서 담당자들은 서구식 함선의 건조 방법과 선박 내부 구조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었다고 한다. 실제로 1854년 11월 이후에 러시아 사관 및 기술자들에 의해 스쿠너 형 범선이 건조될 때에 아예 미토 번 건조 담당자들이 직접 가서 기술을 습득하기도 했었다. 1856년 7월, 함선 제작이 완료되었고 준공식에서 건조된 함선에 아사히마루라는 이름을 붙였다. 다만 아사히마루는 호오마루와는 달리 용골이 없었기에 서구식 함선으로 보는 것이 애매하다고 평가받긴 하지만 그래도 러시아로부터 기증받은 대포로 무장하고 더 나아가서 1860년대 말기, 즉 에도 막부 체제 붕괴 직전까지 막부 해군 소속으로서 군사 임무를 담당하게 된다.
이렇게 미토번과 우라가 부교가 서구식 함선 건조에 매달리고 있을 때 해방괘인 에가와 다로자에몬도 아베 마사히로의 함선 건조 지시를 받았다. 에가와 다로자에몬은 막부 측의 도움으로 미국을 견문한 경력이 있는 나카하마 만지로와 증기선 모형 제작 경험이 있는 히다 시치자에몬을 관할에 넣어서 이들과 함께 증기선 건조를 시도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 근대적인 조선 기술이 부족했었고 에가와 다로자에몬이 사망하면서 증기선 건조는 실패했다. 하지만 훗날 이때 건조에 참여했던 모키츠키 다이조와 스즈후지 유지로 등은 막부 해군 지휘관이 되거나 '치요다가타마루'라는 근대 증기선 건조에도 참여한다.
점점 함선들이 건조되기 시작하면서 아베 마사히로는 함선 건조 업무를 총괄하는 기관의 필요성을 느꼈고 곧 이어서 마츠다이라 지카나오, 호리 도시히로, 다케우치 야스노리 등을 중심으로 대선제조용괘를 창설했다. 이 대선제조용괘는 서구식 범선과 증기선 뿐만 아니라 소형선과 내해 포대에 비치할 선박 건조 및 관리까지 전부 관할하는 기관이었다. 그 후로도 대선제조용괘는 막부 해군 함선 관리와 군함 제조 경비 조달 검토, 그리고 나중에 나가사키 해군 전습소에 파견되는 전습원 선발과 관리까지도 담당했다.
1854년 11월에 러시아 사절단 일행이 방문했을 당시에 그들 일행이 승선했던 함선이 심한 파손을 당하자 귀국용 함선을 급히 제조하게 되었는데 이때 아베 마사히로의 지시로 능력이 뛰어난 장인들을 선발하여 보냈다. 그리하여 러시아 측 기술자들로부터 일본은 서구식 조선 기술을 배워올 수가 있었는데 이는 서적으로 배운 것보다 효과가 좋았다. 막부 해군 관료였던 가쓰 가이슈에 따르면 조선 첫단계에서 용골을 설치하고 앞뒤 자재들을 세우고 나머지 자재들을 연결하여 배의 뼈대를 고착하는 방법은 이때 일본에 처음 들어왔었다고 한다.
자체적인 군함 건조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막부의 아베 마사히로는 페리 제독과 흑선이 돌아간 후부터 바로 네덜란드로부터 증기선을 구매하는 것을 검토 후 결정했다. 나가사키의 부교인 미즈노 다다노리는 막부로부터 지시가 내려오자 나가사키 주재 네덜란드 상관 관장인 쿠르티우스에게 증기 코르벳 선 구입을 요청했고 그 후로 1달 동안 구입 희망 함선과 내부 무장 구조, 심지어는 해군 건설까지도 깊게 논의했다.
논의 결과, 중형 증기선 1척과 증비선 2~3척, 코르벳 선 3~4척, 포함 1~2척, 브릭 선 1~2척 총합 8~12척 규모의 함선단을 나가사키에 회항시킬 것과 함선 값은 물품으로 치르기로 합의했다. 이러한 자체 건조와 대량 구매 정책을 통해 아베 마사히로와 막부는 함선을 증강시키려는 의지가 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기술력의 한계로 증기선 자체 건조 시도는 실패하는 등 해군 정책 과정이 쉽지는 않았지만 막부 해군은 점차 서구식 해군의 틀을 갖춰나갔다.
더 놀라운 것은 아베 마사히로는 단순히 군함이나 제조 기술만 도입하는 선에서 멈추지 않고 인재들을 적극 등용하며 서구의 해군 체계를 구축하려고 했다. 아베 마사히로는 나가사키 전습을 결정했으며 번서조소와 강무소, 군함교수소 등을 창설했고 더 나아가 해군 사관들의 서구 유학 계획까지도 구상하며 장기적인 개혁을 원했다. 그가 등용한 대표적인 관료들로는 미즈노 다다노리, 호리 도시히로, 나가이 나오유키, 아와세 다다나리, 오쿠보 다다히로, 가쓰 가이슈, 무코야마 겐다유 등의 개혁적인 인사들이 상당수였다. 미즈노의 경우에는 위에서 네덜란드 함선 구매에 참가했었던 나가사키의 부교였는데 이때 네덜란드 측에선 해군 건설을 위해서는 함선 뿐만 아니라 함선 운용에 필수적인 지식들을 갖춘 사관들의 양성이 필요하다며 나가사키 해군 전습을 제안했다. 이때 미즈노는 함선 구매 계약 체결 후에도 계속 고민하다가 막부에 해군 전습 제안을 요청했다. 그리고 이 제안을 계기로 1854년에는 3개월 단기 전습이, 1855년에는 네달란드 교관단 파견이 시행되었다.
나가이 나오유키도 이 시기에 해군 건설 구상에 발 맞춰 제도적, 관리적 차원에서 행동에 나섰다. 그는 1855년 나가사키 해군 전습원들의 대표로 나서게 될 때부터 막부 해군 개혁의 주역으로 떠올랐는데 1차 전습 기간 동안에 전습생들 관리자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사관 및 막부와의 협의를 통해 나가사키 제철소 건설 제안을 올렸고 네덜란드로부터 관련 설비들을 주문했다. 1차 전습이 끝난 후에 그는 신설된 군함조련소의 총독으로 임명되어서 해군 사관 교육과 막부 해군 군함 관리를 담당하며 활약했다. 이렇듯 미즈노 다다노리, 나가이 나오유키 뿐만 아니라 아베 마사히로에게 발탁된 해군 정책 관료들은 각자 자신의 스타일대로 근대적인 해군 건설을 주도해나갔으며 덕분에 미국의 압력에 의한 개국이라는 위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막부 해군 건설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체제 이탈자, 미토 번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막부의 핵심 세력들이 배척하던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아들이다. 그는 미토 번 다이묘 시절 막부를 강하게 비판하며 강력한 국방 정책을 주장했고 나리아키는 고산케임에도 정치에 직접적으로 정치에 관여했다. 그랬기에 나리아키에 대한 반감은 요시노부에게로 이어졌고 1862년 사쓰마 번이 막부 개혁을 촉구하며 요이노부를 쇼군 후견직으로, 마쓰다이라 요시나가를 정사총재직에 임명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요시노부는 고메이 천황의 신임 아래 쇼군에 취임했고 당시는 조슈 정벌전 중 이에모치가 급사하여 위기에 빠졌을 때였다. 막부는 존망의 기로에 섰고 요시노부는 대정봉환을 결국 결정하는데 이 과정에서 막신과의 협의는 없었다. 당시 막부 내에서 나온 얘기 중에는 나리아키의 아들이 막부를 팔아먹었다는 유언비어도 있었으며 요시노부는 유능한 능력자였지만 다른 막신들과의 관계가 너무 좋지 않았다.
게다가 막말기는 도쿠가와 가문을 보위하는 고산케 가문 중 미토 번이라는 세력이 핵심 지배층이 단순한 이탈을 넘어 반체제 세력의 개혁 요구를 대변하던 위기의 시대였다. 정권 바깥에서 구체제에 도전하는 일은 어렵다. 왜냐하면 구체제는 이데올로기의 정통성을 갖고 있기에 그에 대한 도전은 반역으로 낙인찍히기 쉽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배 체제 내 균열자, 이탈자가 발생한다면 직접적인 탄압을 피해 체제를 분열시키기 쉬우며 반체제 세력의 도전에 중요한 계기를 제공한다.
미토 번은 참근교대를 하지 않는 세력으로써 '천의 부쇼군'이라 불리었는데 1830년대부터 막부와 갈등을 빗기 시작했다.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막정 개입으로 시작된 대립은 1844년 막부가 나리아키를 다이묘 자리에서 쫓아내고 1858년 쇼군 후계 문제 분쟁 때 나리아키가 처벌 받으며 정점을 찍었다. 그러다가 1860년 사쿠라다몬 밖의 변으로 불리는 사건에서 백주대낮에 막부의 다이로 이이 나오스케를 참살하는 과정에 미토 번의 가신들이 참여한다.
미토학, 조슈 번의 사상가이자 이토 히로부미의 스승 요시다 쇼인이 영향을 받은 사상이다. 천황의 관점에서 역사를 기록한 <대일본사>도 미토 번에서 편찬되었고 19세기 내우외환에 대한 방비로 천황을 국가의 핵심에 위치시켜 그 존재를 신성시하는 국체(國體)라는 관념도 미토 번에서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물론 미토학의 학자들은 존황이 막부의 안정을 도울 것이라 했지만 한편으로는 쇼군의 권한은 천황에게서 위임 받은 것이며 쇼군은 어디까지나 신하일 뿐이라 결론 내렸다.
이것은 막부 반대 세력에게 큰 무기가 되어 군신관계를 이용해 천황에 대한 쇼군의 불충을 명분 삼아 막부를 공격하게 되었다. 그러면 쇼군의 권력은 분명 동요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핵심 세력이었단 자들이 체제를 비판한 것을 넘어 단순한 체제 균열에 그치지 않고 막부 반대 세력의 목소리를 수용하고 리드한 것이다. 따라서 그동안 막부 비판을 자제할 수 밖에 없던 세력이 미토 번을 앞세워 막부를 비판할 수 있게 되었다.
에도 막부의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 로쥬 권력의 약체화
막부의 쇼군은 조선의 국왕이나 청나라 황제에 비해 훨씬 권력이 약했다. 쇼군은 군사적 패자이기에 만기친람하는 군주라는 이미지가 강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정사는 주로 로쥬나 소바오닌 등이 맡았다. 로쥬는 사실상 정부의 공식 수반이었고 쇼군이 어리거나 무능력한 시기에 정국을 주도했다. 막말기에는 더욱 그러했던게 정국도 혼란스러울 뿐더러 13년 동안 쇼군들이 제대로 정치를 못해서 그들의 역할이 중요했다.
게다가 로쥬들은 다이묘로서 결정적인 결점이 있었다. 로쥬가 되면 권력을 이용해 오지에 있는 영지와 경제성이 있는 좋은 요지를 바꿔 이득을 취한 것. 이 때문에 간토와 기나이 지역은 이들 유녁 후다이번들의 영지가 마구 뒤섞여 있었다. 이렇게 되어 막부의 기둥이어야 할 로쥬를 배출하는 후다이번들이 자기 영지를 일원적으로 지배하지 못하고 자기 영지 내에 다른 번이나 막부의 영지를 갖고 있으며 자기 영지조차 분산된 것이다. 반면 사쓰마 번이나 조슈 번 같은 번들은 짧게는 250년에서 길게는 500년 동안 동일한 지역을 강력하게 일원적으로 지배했는데 이걸 보면 로쥬들의 군사적, 정치적 기반이 취약한 걸 방증한다.
로쥬에는 후다이번 중 중급 규모 번 다이묘가 임명된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나오는데 아무리 로쥬가 쇼군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다 해도 고작 5~10만 석 규모의 번 출신 로쥬들이 100만 석 규모의 도자마번 다이묘들이나 수십만석 규모이 신번 다이묘들을 상대로 리더쉽을 발휘하기 쉬울까? 실제로 로쥬의 격도 종4위라 수십만 석 규모의 번 다이묘들보다 낮았기에 실권에 비해 높지 않았다. 안세이 대옥으로 일본 열도 전체를 공포에 몰아넣은 이이 나오스케도 항의하러 온 미토 번 다이묘 도쿠가와 나리아키 앞에 엎드려 예를 표했다.
이처럼 막부 권력의 핵심인 로쥬가 중소 규모의 번 출신으로 임명하는 관례가 있었기에 막부의 개혁은 중앙집권적이지 못했다.
맺음말: 근대 국가로의 전환과 제국주의의 시작
" 하지만 강하면 살고 약하면 죽는다는 '약육강식'의 시대만은 분명히 틀린 거야. 메이지 정부는 서민들을 위한 정부가 아니야 "
- 만화 <바람의 검심> 속 히무라 켄신의 대사. 그러나 켄신의 마음과는 정반대로 이로부터 몇 년 후, '약육강식'의 시대는 '부국강병' 정책 하에 메이지 정부의 손에 의해 실천되어, 일본의 '혼란'은 곧 '폭주'로 뒤바뀌게 된다. -
보신전쟁과 메이지 유신은 분명 막부 체제를 타도하여 몇백년 간 지속되어온 막부를 끝내었다. 하급 무사들이 주축이 된 혁명은 존황양이라는 이름에 시작되었지만 그들의 양이는 단순한 위정척사식 배척이 아닌 서양의 기술로 근대화를 이루고 그들에 맞서자는 현실적인 관점에서의 양이였다. 그 뜻은 조슈 번과 사쓰마 번의 유신지사들은 막부의 관료들 못지 않게 국가의 비전이라는 측면에서는 상당히 대비가 되어 있던 존재들이었다.
또 그들은 운이 좋은건지도 모르겠지만 보신전쟁이라는 내전을 슬기롭게 극복했다. 에도 성을 함락시킬 때 삿초동맹군은 수많은 인명피해가 벌어지고 이게 외국이 내전에 개입하는 근거가 될 것을 우려했다. 따라서 신정부군 지도자 사이고 다카모리는 에도를 지키던 막부의 관료인 가쓰 가이슈를 만나 협상하여 무혈로 입성시켰고 덕분에 100만 명의 에도 인구의 목숨을 지켰다. 그리고 이때 지켜진 에도의 인프라와 시설들은 유신 이후 에도에서 도쿄로 이름이 바뀐 후에도 이어진다.
다만 메이지 유신의 결과는 이면도 있었다. 막부 시절에는 무사 계급에게 특권이 있었다면 메이지 신정부에 들어와서는 화족과 재벌로 옮겨졌고 소작제 유지, 종교 탄압 등 여전히 어떤 면에서는 막부 이상으로 구시대의 잔재를 계승하는 모습을 보였다. 정치의 경우에도 사민평등을 이룩한다는 메이지 유신의 목표와는 달리 정부는 조슈, 사쓰마 같은 번벌 출신들로 구성되어 그저 통치자가 도쿠가와 가문에서 번벌의 하급 무사들로 바뀌었음만 보여줬다.
그리고 무엇보다 페리 제독의 강제 개항에 분개하던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정권을 잡자 그걸 조선 같은 주변국들에게 화풀이했다. 자기들도 20세기 초반까지 불평등 조약 아래에서 살았으며 남에게는 그걸 강요한 것이다. 어찌보면 제국주의가 낳은 무한 루프인건데 이거 때문에 한국인들은 에도 막부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하더라도 메이지 유신에는 적의를 품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우리는 일본의 근현대사를 알 필요가 있다. 그들은 과거 우리 민족을 총칼과 대포를 끌고 와 짓밟았었고 지금은 역사적인 악감정은 남아있지만 활발한 경제 교류를 이어가는 국가다. 일본의 우익 사관에 동의하라는게 아니라 그들과의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어떻게 구축하고 또 과거사 문제를 해결할 지 진지하게 논의가 이어지려면 일본 우익들이 자랑스러워 하던 역사도 알 필요가 있다. 그것이 진정으로 일본을 배우고 알아가는 걸 통해 그들을 이기는 길로 가는 길이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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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막부육군'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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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엽, <조용한 혁명>, 소명출판,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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