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smClaZhmoZk?si=ZCuOz5i-DGc4gkEt
북방전쟁은 러시아 북부-스웨덴 남부 사이의 두고 두 나라가 치열하게 벌인 전쟁이었다. 결과는 표트르 대제가 이끄는 제정 러시아의 승리로 끝났으며 이 전쟁으로 러시아는 상트페트르부르크를 확보하고 카렐리야와 발트해 동부로 진출해 부동항에 진출한다는 숙원을 드디어 이뤘다. 또 전쟁의 결과로 러시아는 드디어 유럽으로 향하는 관문을 획득했으며 이는 러시아가 개방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하지만 북방전쟁 전까지 러시아는 그저 변방의 야만인에 불과하다 평가받던 국가였고 모스크바 대공국에서 루스 차르국으로 바뀐 이래 그들은 1370년부터 1895년까지 329 차례의 전쟁을 벌이며 영토를 넓혀왔건만 그 누구도 유럽 열강이라 인정해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러한 인식이 바뀌게 된 분기점이 대북방전쟁이고 결정타를 찍은게 나폴레옹 전쟁인 거고. 그래서 이 글에서는 러시아 역사의 분기점이 된 북방전쟁, 그 중에서도 표트르 대제와 칼 12세의 세기의 명대결이었던 대북방전쟁을 다뤄보고자 한다.
표트르 대제의 칼을 갈고 나온 개혁
러시아는 17세기까지 유라시아 대륙을 잇는 매우 넓은 국가였지만 북극해의 혹한 덕분에 사실상 내륙 국가였고 발트 해로 향하는 길목에는 스웨덴이, 흑해에는 튀르크가 버티고 있었다. 여기는 유럽과 연결이 되는 유일한 해상 루트였는데 이 길을 두 나라가 차단했기에 러시아의 발전은 더뎠다. 심지어 철학자 데카르트조차도 러시아의 중요성에 대해 신성로마제국의 최약체였던 게르만 공국에 미치지 못할 정도라고 했던 만큼이니 안봐도 뻔하다.
러시아 전역에는 수공업 공장이 수십개에 불과했고 인구의 95%인 농노들의 생활은 매우 궁핍했다. 하루 한 끼조차 먹기 힘들 정도였으며 절반이 넘는 아이들은 한 살 넘기기도 전에 죽었다. 40세까지 연명한 이들은 행운아로 여겨졌으며 평민은 커녕 귀족도 교육 수준이 당대 유럽보다 뒤떨어졌다. 수도 모스크바에조차 글을 아는 사람이 100명당 3명 꼴 밖에 되지 않을 정도였고 그나마 노보고르드 공국 시절에 몇 안되게 존재했던 무역 루트는 스웨덴에게 넘어간 상황이었다
그러대가 표트르 대제 시기에 러시아는 프랑스, 영국은 물론 스페인과도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고 이것의 기점은 대북방전쟁이었다. 이때부터 서유럽의 강국들은 러시아를 존중하고 강국임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또한 강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는 러시아와 동맹을 맺기를 희망하는 국가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처럼 러시아가 강대국으로 부상하게 된 것은 표트르 대제의 개혁 결과였다.
경제적으로는 수공업 공장이 240여개로 늘어났으며 수입에만 의존하던 철 역시 1725년에는 해외로 수출하게 되었다. 이로써 1680년대에 150만 루블 정도밖에 안되던 국가 수입이 1725년에는 6배에 달하는 900만 루블까지 증가할 정도로 경제가 크게 발전하였다. 교육 부문 발전도 상당히 많이 이루어졌다. 표트르 대제는 서유럽의 교육을 모델로 삼아 수학과 해양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학교를 설립하였으며 포병을 양성하는 군사학교를 설립하여 러시아군의 포병대의 군사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기술학교도 지역마다 만들었으며 학교에서 서유럽 국가들의 철학, 지리, 역사 등의 책을 번역하여 교과서로 사용하게 하였다. 그 결과 20년 후, 제대로 된 학교 하나 없던 러시아에는 42개의 기술학교가 설립되었으며 학생 수도 2,000명을 넘게 되었다. 관료 기관 역시 1772년 표트르는 14등급으로 이뤄진 관등표를 혈통이나 출생 신분이 아닌 능력에 따른 승급 제도를 마련하여 멘시코프 같은 자도 공작까지 올랐다. 귀족들에 대해서도 강경했는데 표트르는 장자상속령을 실시해 그들의 실무적 노동을 유도하고 군대에서 7년 이상 복무했거나 관료로 10년 동안 근무하거나 15년 동안 상업 활동을 해야만 토지 소유를 가능하게 법을 바꿨다.
표트르의 이러한 적극적인 투자로 러시아는 폐쇄적이었던 국가에서 세계무대에 올라갈 수 있었다.
러시아의 군제 혁명
북방전쟁의 주역 표트르 대제와 칼 12세 모두 정복에 심혈을 기울인 군주였다. 따라서 충돌은 불가피했고 칼 12세는 굉장히 전쟁에 대해 뛰어난 지도력을 가진 지도자였기에 더더욱 위협이었다. 당시 러시아는 오스만 튀르크와 폴란드 사이의 유동적 국경선과 긴장관계를 물려받은 상태였고 스웨덴 때문에 이들과의 전쟁은 불가피하게 지연되었다. 따라서 표트르에게 시급한 과제는 군대를 유럽 표준까지 끌어올리는 것이다.
육군의 근대화는 토지귀족을 설득하는게 우선 시급한 과제였다. 당시 러시아는 모스크바와 몇 군데 촌락에 주둔하는 준정규군 소총병(스트렐치) 외에 토지귀족이 거느린 병사들이 러시아 군사력의 주력이었고 기껏해봐야 그 외에는 신식 보병연대가 전부였다. 당연히 통제력이나 무장은 빈약했으며 전투를 위해 소집되어도 후에 뿔뿔이 흩어지고 외국 용병 지휘관의 통제와 보급에 의존하고 있었다. 결국 1687년과 1689년 오스만 튀르크 및 크림 봉후국들과의 전투에서 러시아는 패했다.
따라서 표트르는 러시아군을 지휘할 상비군 장교 집단을 창설했고 이 개혁으로 중앙지휘 체제, 징세, 징병, 훈련, 보급 등의 체제가 확립되고 조직이 가능해졌다. 이를 계기로 러시아는 귀족 기병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났다. 표트르는 10개의 보병과 기병연대를 새로 편성했으 며 독립적인 기동 포병대, 공병대와 별도와 편성하고 훈련했다. 참모본부 제도도 이 시기 도입되었으며 주요 도시들을 요새화했는데 이후 1695년과 1696년 돈 강 아조프 요새 공성전에서 승리를 거두는 성과로 나타났다.
표트르가 죽은 1725년까지 러시아 육군 장교의 12%가 농민 출신에서 충원되었고 귀족들은 자기 신분 때문에 오히려 국역이라는 의무를 다하게 되었다. 오죽하면 표트르 사후 귀족들이 1762년 의무 국역을 안한다는 선언을 발표했을까. 어쨌든 관등표 개혁은 장교들의 전례 없는 서열화와 하층계급 출신 신분 상승으로 나타났으며 군사 기구들은 통합되어 군무성이 되었다. 군무성 산하 인원은 13만 명으로 여기에는 7만 5천 명에서 8만명에 이르는 유격대와 2만명으로 추산되는 코사크 비정규군은 포함되지 않는다. 오스만과의 아조프 전쟁의 패배는 곧 신식 해군과 협동으로 농성전과 포위작전을 진행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해군 건설도 적극적이었다. 1688년에서 1725년 사이 약 1260척의 배가 러시아 각지의 조선소에서 건조되어 백해, 아조프 해, 발트 해, 카스피 해에 성공적으로 진수된다. 이러한 해군은 북방전쟁에서 스웨덴에 대한 최종적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하며 1714년 핀란드 항괴 곶 승리 외에도 1701년 아르한겔스크 반격, 1720년의 스웨덴 선단 격멸 등의 성과를 거둔다. 발트 함대에서 근무했었던 영국인 장교는 1724년 당시 발트함대는 36문에서 90문까지의 함포를 장착한 29척의 해상 전투선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는 24척의 스웨덴이나 25척의 덴마크를 뛰어넘는 수치였다.
폴타바 전투로 승기를 잡은 러시아
북방전쟁 초기에 유리했던 것은 스웨덴이었다. 칼 12세는 나르바에서 러시아군에게 치욕을 선사해준 명장인 그였지만 전투가 끝나고 갑자기 배후에 있는 폴란드를 쳤다. 하지만 1704년 폴란드 왕 아우구스투스를 폐위시키까지의 과정은 예상보다 길었다. 그 사이는 러시아는 발트해 연안의 스웨덴 영토를 잇달아 침범해 나중에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요새를 건설했다.
1708년 전쟁을 끝내기 위해 칼 12세는 폴란드에서 러시아로 군대를 이끌고 진격했다. 그러나 한겨울에 러시아를 침공하는 것은 훗날의 나폴레옹이 증명해주듯이 미친 짓이었다. 스웨덴군은 증원군과 동맹군의 구원을 원했지만 증원군은 막혔고 동맹군은 조기에 패해 개같이 멸망했다. 표트르는 일종의 청야전술을 펼쳐서 스웨덴군의 진격을 방해했다.
그러자 칼 12세는 여전히 강대국이었던 오스만 제국을 전쟁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를 했다. 프루트 강 전역에서 오스만은 승리했으나 그 직후 오스만에 대한 러시아의 작은 양보만을 얻었다. 이어서 벌어진 폴타바 전투는 매우 결정적인 결과를 선사했는데 이 전투에서 스웨덴 원정군은 전멸했고 칼 12세는 오스만 제국으로 도망쳐 5년 동안 머물렀다. 스웨덴에게 침공당했던 탓에 이를 갈고 있었던 폴란드와 덴마크-노르웨이는 이 기간 동안 전쟁에 다시 참전했고 수비에 몰두한 스웨덴에 대해 균형이 매우 크게 흔들렸다. 전쟁은 폴타바 전투 이후 12년 동안 계속되었지만 그럼에도 폴타바는 전황을 확실히 정리한 전투였다.
여담으로 나르바 수복 작전의 경우 러시아군은 과거와는 달리 나르바 바깥 지역을 싸고 있는 요새들을 포위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그 결과 러시아군을 무시하고 있던 스웨덴군은 러시아군의 공격에 사기가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표트르 대제는 여기서 러시아군 부대에게 스웨덴 군복을 입힌 후 지원군이 도착한 것처럼 꾸몄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나르바 성의 스웨덴군은 속임수에 걸려들었고 성을 빠져나와 협공을 펼치다가 러시아군에게 패하였다. 이로써 러시아군은 나르바 성을 장악할 수 있었다.
해전에서도 패한 스웨덴
1709년 폴타바 전투에서 패한 스웨덴은 전황을 뒤집을 만한 여력이 없었지만 그래도 전쟁은 계속되었다. 표트르는 육지 제국을 넘어 해상 제국을 꿈꾸고 있었기에 부동항을 찾아나서야만 했고 하필 1710년 오스만 해군에게 패하여 흑해함대 건설 시도가 무산되었다. 그래서 표트르는 방향을 돌려 스웨덴이 점령 중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눈을 돌렸다. 당시 러시아 해군은 함선이 질이 안좋은 목재로 건조되었고 사수들의 훈련도가 떨어졌지만 표도르 아프락신이라는 뛰어난 제독이 있었다.
스웨덴 해군은 아프락신의 함대를 핀란드 만에 가두었고 러시아 해군은 돌파를 시도한다. 갤리선 100척이었던 러시아 함대보다 스웨덴 함대는 숫적으로 많았기에 러시아는 스웨덴이 분견대를 보내게 만들어 분단시킨 후 파상 공격을 펼쳐 포위망 안쪽에 갇힌 스웨덴 함선들은 집중 공격으로 전멸한다. 이것이 1714년 강구트 해전이었고 제정 러시아부터 러시아 연방에 이르기까지 해군 역사에 있어서 아주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실제로 제국 해군은 1914년 드레드노트인 세바스토폴급 1번함을 강구트 전함이라 명명했다.
스웨덴은 왜 전쟁에서 패했는가?
아무리 표트르가 강하게 개혁을 추진했다지만 당시 러시아는 상당히 취약한 상태였다. 러시아군은 25년 동안 복무해야 하는 사실상 노예제나 다름 없는 체제였다. 농노는 여전히 매년 영혼세를 납부하고 군역에 동원되며 귀족을 위해 금전이나 노동으로 봉사를 했고 표트르의 개혁은 이러한 부담을 줄여주지 않았다. 특히 표트르 시절 러시아군은 탈영률이 절반에 달했는데 아무리 당시의 군대 동원 방식이 서유럽도 노예에 가까웠다지만 러시아는 그 중에서도 상당히 심각한 수준이었다.
일단 칼 12세는 표트르의 강화 조건을 자존심 문제로 거부하며 계속 뻐겨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도 한겨울에 러시아와 들이밀고 싸웠다. 러시아는 시베리아와 캅카스를 정복해오며 이미 아시아 산악 민족들과 악조건에서의 전투에 대한 경험이 많으며 유격전, 청야전술들을 자연스럽게 습득한 상태였다. 아무리 러시아가 당시에 낙후된 국가였긴 하나 그들은 비정규적인 싸움에는 이미 통달해 있는 상태였다. 반면 스웨덴은 러시아에 비해 비교적 포근한 날씨였고 전투 한 번 없이 보급선이 끊기는 일들도 종종 있었다.
그리고 이전까지의 북방전쟁에서는 적국들이 뭉치지 못했지만 이번 대북방전쟁은 반대 양상이었던 것도 있다. 먼저 스웨덴은 폴란드에 침입했을 때 동프로이센을 직령으로, 서프로이센을 지방으로 만든다는 계획이 있었으며 덴마크와도 전쟁을 했다. 이런 포위된 형국이었으니 만약 칼 12세가 죽지 않고 전쟁을 계속했다면 분명 스웨덴은 그동안 얻어왔던 모든 것을 잃었을 것이다.
북방전쟁에서 패한 후 스웨덴은 거의 2세기 동안 전쟁을 하지 않는다. 기껏 해봐야 나폴레옹 전쟁 때 잠깐 참전했다가 끝나서 되돌아간 것 정도? 왜냐면 칼 12세 사후 대북방 전쟁이 끝난 후 스웨덴은 발트해 연안 지역을 모두 잃었고 재정은 절망적인 상태로 빠져 지도력은 약해해졌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핀란드, 독일과 폴란드의 영토를 잃고 현재 영토로 축소된 것이다.
그러나 스웨덴이 마냥 무능했던 것은 아니다. 칼 12세는 15살의 나이에 유럽 최고 유망 군주로 평가받던 사람이고 그와 싸웠던 표트르는 아예 스웨덴인들은 자신의 스승이라고 하며 그들의 관료제를 칭찬했다. 물론 스웨덴의 전술이 북방전쟁 이후 밀려나서 다소 퇴물이 된 감은 있었지만 그래도 개선된 군사 전술들도 스웨덴의 것을 바탕으로 비판적으로 학습한 것이다.
맺음말: 새로운 제국의 등장
앞서 언급했듯이 러시아는 세계에서 존재감이 없는 나라였었다. 카이사르와 로마의 후계자임을 자처하였지만 왕권 강화 이상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는 일본이 아마테라스 신의 후손이 천황가라고 했지만 실상은 조선과 막부를 통해 교류하던 것과 비슷하다. 기껏 해봐야 당시 서양인들이 기억하는 러시아는 타타르의 멍에로 대표되는 아시아스럽고 야만인들에게 통치당했던 변방의 민족 비스무리한 것이었다.
그러나 북방전쟁의 승리는 전환점이었다. 혹자는 나폴레옹 전쟁의 승리와 영국과의 그레이트 게임이 유럽의 본격적인 맹주로 떠오른 시점이냐 할텐데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북방전쟁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다. 이 전쟁으로 러시아는 상트페트르부르크라는 항구 도시를 획득하여 유럽으로 가는 길목을 마침내 얻을 수 있었으며 여기에 주둔한 발트 함대는 오늘날까지도 러시아 해상 진출의 주요 축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전쟁으로 러시아는 처음으로 서양 열강과의 싸움에서 이겼던 것이다. 기존에도 몽골이나 오스만과 싸워왔지만 서양 열강, 그것도 30년 전쟁과 베스트팔렌 체제의 한 축이었던 국가와 싸워 이긴 것은 상당히 중요한 성과였다. 이 승리에서 나온 자신감은 러시아의 팽창의 근원이 되었으며 우리도 타타르인, 야만인이 아닌 국제정세의 일원이라는 인식을 심어줬다.
참고 문헌:
제임스 크라크라프트, <표트르 대제: 러시아를 일으킨 리더쉽>, 살림, 2008
린지 휴스, <표트르 대제: 그의 삶, 시대, 유산>, 모노크래프트, 2017
크리스터 외르겐젤 외, <근대 전쟁의 탄생: 1500~1763년 유럽 무기>, 미지북스, 2011
김경묵, <이야기 러시아사: 러시아 역사의 태동부터 고르바초프 시대까지>, 청아출판사, 2006
니콜라이 V. 랴쟈놉스키 외, <러시아의 역사 -상>, 까치, 2011
https://ko.topwar.ru/165927-zhestokij-urok-russkaja-i-shvedskaja-armii-v-narvskom-srazhenii.html (잔인한 교훈. 나르바 전투에서 러시아와 스웨덴 군대)
https://en.m.wikipedia.org/wiki/Great_Northern_War (위키피디아 영문판 'Great Northern War' 문서)
https://www.usni.org/magazines/naval-history-magazine/2023/june/great-northern-war-and-rise-russian-sea-power (The Great Northern War and the Rise of Russian Sea Power)
https://www.quora.com/Why-did-the-Great-Northern-War-happen (Why did the Great Northern War happ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