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만 보면 필자가 하려는 소리가 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침략과 전쟁범죄를 옹호하는 얘기로 보일 것이다. 그래도 미리 밝혀두자면 이 글을 통해 난 일본이 전시 쇼와 시대에 저질렀던 악행을 미화하고 A급 전범들을 순국열사로 치켜세울 목적은 전혀 없다. 오히려 내가 도쿄 전범 재판에 대한 글을 써서 말하고 싶은 바는 이 재판이 진짜 전범들을 선별해내지 못한 채 그저 승자들의 입맛에 맞게 정치적으로 역사를 정의한다는 이유로 억울한 이도 무고하게 희생된 이면이 있었음을 말하여 진정으로 전쟁범죄의 책임이 있는 이들을 비판하기 위함이다.
다만 이 글은 전쟁사나 원인이 아닌 전쟁이 끝난 이후의 전후 처리 과정에 대해 다루니 일부러 외전이라는 타이틀을 붙였으며 굳이 말하자면 시리즈를 시작하고 첫번째 외전인 셈이다.
처벌받지 않은 전직 '현인신'
천황은 육해군을 통수한다
- 대일본제국 헌법 제11조 -
일본에서 천황이란 성스러운 존재다. 아마테라스 신의 후손이기에 그야말로 살아있는 신이다. 그랬기에 도막 혁명은 막부의 통치권을 천황에게 반납한 지사들의 유신으로 정의내려졌고 메이지 헌법도 서구식 법 제도를 따르면서 천황의 신성성을 인정하고 주권을 천황에게 주며 다른 근대 헌법과는 사뭇 다른 해석을 내놨다. 1910년 대역사건도 천황을 시해하는 음모를 세웠다는 명분으로 사회주의자들을 잡아들였고 2.26 사건도 존황토간, 즉 천황을 떠받들고 간신을 토벌한다는 발상에서 출발한 사건이었다. 이처럼 천황은 현인신으로서 숭배의 대상이었다.
당연히 미국도 히로히토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물론 맥아더가 위 사진처럼 굴욕을 선사하는 사진을 찍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일본인들처럼 취급할 수도 없었다. 일본인들에게 히로히토란 신으로서 숭배 대상이었던게 불과 1년 전도 안되던 시점이었으며 만약 그를 전범재판대에 세운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몰랐다. 게다가 일본의 황실은 몇천년 동안 지속되어온 것이기에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실시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히로히토를 죽인다면 일본인들이 GHQ(연합국 최고사령부의 일본 군정)에 협력하지 않을 것은 분명히 확실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맥아더는 히로히토를 생명과 지위를 보장해주는 대신 적극적으로 내세운다. 당시 미국 여론은 천황에 대한 처벌 여론, 특히 고통스럽게 죽여한다는 의견이 36%로 매우 높았음에도 말이다. 히로히토는 생존한 대가로 그 유명한 '인간 선언'을 낭독했으며 이로써 만세일계의 천황이 통치자로 군림하여 현인신으로 숭배받던 제국 시기는 완전히 끝났다. 그 후 히로히토는 조용히 살다가 1989년 사망하여 아들 아키히토에게 천황 자리를 물려주며 1926년부터 시작되었던 64년 간의 다사다난했던 쇼와 시대를 끝냈다. 이 시기 주일 대사를 지낸 라이샤워를 비롯한 미국 외교관들은 히로히토와 일본 국민은 평화를 사랑했기에 잘못을 한 것은 군부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히로히토를 처벌하지 않은 미국의 정치적인 판단은 결과론에서 봤을 때 옳았다. 미국은 이를 통해 GHQ부터 미일동맹까지 황실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을 수가 있었다. 비록 더 이상 신은 아니게 되었지만 천황이라는 존재는 오늘날 나루히토에 이르기까지 나름대로 지지를 받고 있으며 물론 2023년 현재 천황의 동생 후미히토 친왕과의 분쟁이나 사실상 남계인 천황직을 계승할 이가 히사히토 밖에 없는 등 문제가 잔존하지만 그럼에도 아키히토와 나루히토는 나름대로 국민의 존경을 받았던 상징적 국가원수로 평가받고 있으며 같은 군주제 국가인 영국에 비해 확실히 황실 폐지의 목소리가 상당히 적은 편이다.
그러나 히로히토는 살아남는 과정에서 도쿄 전범 재판에 기소된 A급 전범 용의자 그 누구보다도 비겁했으며 꼬리자르기를 한 것이다. 일단 대일본제국 헌법은 천황에게 주권과 군 통수권을 명시했기에 상징적인 국가원수여도 책임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통상적인 입헌 군주국과는 달리 제국 시절 일본은 천황이 중요한 순간에는 나름대로 역할을 할 수가 있었다. 가령 히로히토의 할아버지 메이지 천황은 대정봉환이라는 공무합체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으며 정한론 논쟁 때 격해지면 브레이크를 걸어주거나 유신 3걸 사후 정국 혼란을 수습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참고로 히로히토도 제국 헌법 제1조와 3조, 11조 모두 대놓고 쓴 적이 있었다. 첫번째는 2.26 사건이었다. 이소베 아사이치를 비롯해 청년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조적이라며 천황이 아끼던 신하인 스즈키 간타로 시종장에게 중상을 입혔으며 이에 분노한 히로히토는 자신이 근위사단을 이끌고 진압하겠다며 육군 내 진압을 꺼리는 분위기에 화를 쏟아냈다. 이 일은 천황의 의지가 2.26 사건이 유신이 아닌 반란이라고 확신하는 쪽으로 기울었다는 이유로 육군성 내부 의견은 마사키 대장의 유화적 대응에서 도조 대장의 강경 대응으로 변화해갔다.
731부대 설립, 이건 이시이 시로를 비롯한 연구원들이 대부분 미국 측과의 사법거래로 풀려났기에 한동안 이타가키 세이지로에게 책임을 덮어씌웠으나 사실 천황도 관련이 있다. 11조에 따라 천황의 승인 없이는 부대는 창설될 수 없었다. 방역 급수 부대로 출발한 731부대는 히로히토의 승인 아래 창설되었으며 그는 거기서 온갖 비인도적인 실험이 지속되고 있던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왜냐면 세균 무기 실험 허가를 요청하는 문서에 사인을 했거든. 그는 제국군의 통수권자였고 모든 결정해야 할 사안은 그의 앞에서 서류로 책상에 놓여졌기 때문이다.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모두 히로히토는 보고 받았다. 고노에 총리와의 대화에서 그는 알아서 하라고 했고 태평양전쟁 전에는 진짜로 이길 수 있냐고 반문해보면서도 결국은 승인해줬다. 난징대학살도 아마 밑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황실인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가 주범인 걸 히로히토는 모르지 않았을 것인데 문제는 야스히코에게 항의 한 마디 안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 또한 후술하겠지만 히로히토는 맥아더와의 협상을 통해 전범 혐의가 있는 황실은 기소를 당하지 않게 조치를 취했다.
1억 총옥쇄, 대전기 일본하면 반자이 돌격과 함께 떠오르는 단어일 것이다. 그런데 이 말도 천황이 참석한 어전회의를 통해 결정된 사안이다. 한 마디로 히로히토는 자국민이 아무 쓰잘데기 없는 개죽음을 당하는 것에는 별 다른 동정도 없고 그저 자신의 권력만 지켜준다면 일본인이 다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것 뿐인가? 참모총장 스기야마 하지메를 불러 계속 전황 보고에 대해 얘기를 들었고 삼광작전이라 불리는 중국 전선 내 지나파견군의 공산당 해방구 및 국민당 유격대 점령지에 대한 무차별 살육을 승인했다.
더 놀라운 건 히로히토는 도조 히데키 총리나 스기야마 하지메보다도 더 자세히 전황을 알고 있었다. 일본은 특유의 육해군 대립 탓에 두 집단은 합동작전은 커녕 정보 공유 자체가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육군은 해군이 미드웨이에서 박살난 걸 대전 말에 가야 알았으며 해군 쪽도 상륙작전에 대비한 함포 지원 사격 교리가 미비했다. 그런데 히로히토는 양쪽 모두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고 그 결과 1945년 8월 더 이상 일본이 못버틸 거고 이러다가 자기도 죽을 거라는 판단 하에 옥음방송을 내보내 항복한다.
요약하자면 히로히토는 전쟁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한 국가원수였고 그는 전쟁을 주도한 굳이 A급 전범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방관하고 협조한 것으로 보아 연합국식 기준에 따른다면 C급 전범에는 해당하는 인간이었다. 그런데 연합국은 히로히토를 처벌하는 대신 그의 전쟁 범죄 이력을 다른 이에게 책임을 묻는다.
전범 재판 자체가 과연 옳은건가?
약간 핀트에서 어긋나긴 하는데 전범 재판이라는게 사실 공정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라는 원초적인 질문을 던져본다. GHQ에서 맥아더의 외교 고문을 지낸 W. J 시볼트라는 인물은 <일본 점령 외교의 회상>이라는 책에서 피고들이 행동이 선악이라는 개념에서 혐오감을 주지만 당시 국제법상 범죄가 아닌 전시행동에 대하여 승자가 패자를 재판한다는 사고방식은 찬성할 수 없었다고 했다.
전범 재판이 처음 국제적으로 이렇게 대규모로 실시된 건 최소한 뉘른베르크와 도쿄가 처음이다. 1차세계대전은 흐지부지되었으니 말이다. 승자가 패자에게 정의의 심판을 한다는 논리는 글쎄, 조금 동의하기 어렵다. 연합국도 2차세계대전의 전쟁 범죄에서 크게 자유롭진 않다. 미국만 해도 도쿄 대공습은 그렇다 쳐도 원자폭탄이라는 시험적인 무기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라는 민간인이 사는 도시에 떨어뜨려 한 순간에 수많은 이의 목숨을 앗아갔으니 말이다. 영국은 인도에서 저지른 짓 보면 말할 것도 없고.
실제로 역사 속 전범 재판은 공정하게 진행된 경우가 거의 없다. 일례로 유고슬라비아 내전 전범 재판에서는 이미 죽은 크로아티아의 투지만은 물론이고 보스니아의 이제트베고비치조차도 기소되지 않은채 오로지 밀로셰비치와 세르비아만을 정의의 이름으로 심판하는 자리가 되었다. 동시에 베오그라드 공습으로 수많은 민간인을 죽인 나토군 책임자들도 기소 안당한 건 덤이고. 이라크 전쟁? 사담 후세인이 잘못한 건 괘씸죄 밖에 없었고 부시가 후세인이 숨겨두었다고 주장하는 대량 살상 무기도 못찾았지만 승자의 논리대로 어쨌든 후세인은 교수형을 당했다.
전범재판은 누군가가 누군가를 재판하는 것이고 그 대상은 승자가 패자를 재판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여기에 정치적 논리 없이 진짜 선악만으로 잘못한 사람들을 모두 처벌하는 건 아예 불가능한 그림의 떡이라는 소리다. 그냥 고대나 중세시대에 정복전쟁에서 승리한 쪽이 패배한 부족이나 국가의 군주 목을 잘라서 걸어두었던게 조금 세련되고 있어보이는 식으로 바뀐 거다 라고 보면 된다. 애초에 인류 문명에서 남에게 전범이라는 딱지를 씌워 정의의 판결을 할 만큼의 깨끗한 도덕성을 소유한 국가는 없다.
처벌을 면한 대표적인 A급 전범 용의자 기시 노부스케 처벌을 피한 이들
가장 유명한게 이시와라 간지일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타가키 세이지로는 처벌 받고 그는 처벌받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만주사변은 일으켰지만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시와라가 처벌해야 할 사람인지를 나는 판단하지 않겠다. 그러나 도쿄 전범 재판에서의 죄목 중에는 만주사변도 있었다. 이 때문에 이타가키 세이지로의 혐의가 추가된 거고. 이 원칙대로라면 이시와라 역시 주모자로써 처벌 받았어야 했지만 그는 증인으로만 나왔고 본인조차도 자신을 전범으로 처벌해달라 주장했지만 묵살당했다.
황족들은 당연히 히로히토와 맥아더 사이의 거래로 처벌을 피했다. 대표적인 자가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이다. 그리고 화족인 고노에 후미마로도 본래 처벌을 피할 가능성이 컸지만 중일전쟁 개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이 밝혀져 수사가 진행되자 자살했다. 크게 전쟁 범죄에 책임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본토 결전과 1억 총옥쇄를 주장했던 아나미 고레치카 육군대신도 패전의 책임을 지고 할복 자살했다. 자신의 죽음으로 일본인의 죄가 용서되길 바란다며.
오카와 슈메이도 민간 지식인으로는 유일하게 침략전쟁 선전이라는 죄목으로 전범 재판에 올라왔다. 그러나 재판 도중 잠옷을 입고 와서 도조 히데키의 뒤통수를 때리더니 미친 소리하다가 정신이상 증세로 풀려났다. 사실 오카와의 전범 재판 기소는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되는게 그는 기타 잇키와 함께 역사에서 마케이누인 황도파에게 영향을 줬으면 줬지 통제파에게 준 적은 없다. 5.15 사건으로 구속되어 있다가 풀려난 전시에도 기껏 해봐야 귀축영미에서 맞선 해방 전쟁이라며 선전만 했고 오히려 중일전쟁에 대해서는 여운형과 만난 자리에서 회의적으로 얘기하기도 했다.
아베 신조의 외조부이자 훗날 총리가 되는 기시 노부스케도 A급 전범 용의자로서 체포되었다. 그는 만주국의 산업개발 5개년 계획을 주도했고 도조 히데키 내각에서 상공대신으로 있었다. GHQ 입장에서는 일본이 폭주하던 시대에 산업 정책으로 뒷바라지 했다는 것. 다만 기시 노부스케라는 인물이 스가모 형무소에서도 냉전을 예측하는 등 요긴히 전후 일본의 통치에 써먹을 만한 가능성이 보이고 솔직히 말해 군부에 부역하는 관료였을지언정 전쟁범죄에 해당하는 행위를 하진 않았는지라 계속 가둬놓은 명분이 없어서 풀어줬다. 그 후 기시는 자민당 창당과 55년 체제의 주역이 되어 마침내 총리직에 오르나 미일안보조약 개정 문제로 사퇴한다.
억울한 희생자들: 난징대학살과 마쓰이 이와네
이러한 잔혹행위는 황군의 불명예다!
- 난징대학살 소식을 들은 마쓰이 이와네 장군이 한 말 -
도쿄 전범 재판의 억울한 희생자들도 이제 다뤄보겠다. 첫번째는 마쓰이 이와네다. 난징대학살의 책임을 지고 그는 교수형을 당했다. 2차세계대전의 승전국 중 하나는 중국이었기에 그들은 난징대학살을 저지른 일본군이 그 대가를 반드시 치러야 한다고 벼르고 있었다. 그래서 찾아낸 인물이 중지나방면군 사령관으로써 중국 동남부 전역의 일본군을 지휘한 마쓰이 이와네였다.
그러나 난징대학살의 실제 주범은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였다. 정작 마쓰이 이와네는 난징에서 대학살이 벌어질 당시 결핵으로 인해 병원에 누워있었고 뒤늦게서야 소식을 들었다. 그가 병상에 있는 동안 대리인으로써 난징에 있던 것은 마쓰이의 부하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였다. 즉 마쓰이 이와네는 막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막아야 할 위치였던 아사카노미야는 마쓰이가 한 난징 입성할 때 소규모 정예부대만 안에 들여보내고 나머지는 근교에 주둔시키게 하라는 명령을 어긴 채 부하들이 광기어린 대살육전을 벌이는 건 방관했고 더 나아가 부추켰다.
마쓰이 이와네는 그 후 군대에서 전역한 뒤 종종 난징에서 죽은 중국인과 일본군 병사들을 추모하기도 하였고 찬드라 보스 같은 아시아 지역에서의 영미에 맞서 싸우는 민족해방주의자들을 후원하며 보냈다. 그 후 전쟁은 끝났고 히로히토와 맥아더의 합의로 황족 불기소 방침이 정해진다.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는 이로써 처벌을 피하며 책임을 지지 않게 되었고 연합국은 난징대학살의 책임을 대신 물을 전범이 필요해졌고 그렇게 마쓰이 이와네를 골랐다.
당시 판결을 앞두고 일부 연합국 검사마저도 진짜로 과연 그가 사형을 받을 만큼의 최악의 전범인가에 의문을 표했다. 그리고 그는 군복 입고 총살형을 당하지 않고 죄수복으로 교수형을 당함으로써 마지막 명예마저 무너졌다.
억울한 희생자들: 태평양 전쟁을 막으려 한 도고 시게노리
도고 시게노리, 그는 놀랍게도 일본인 혈통이 아니다. 본명은 박무덕으로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도공의 후손이다. 어찌보면 조선인 중에 가장 일제에서 고위직까지 올라간 사람인데 도고는 태평양 전쟁 직전까지 외무상이었다. 이렇게 신기한 이력이 있는 사람이다 보니 1999년 KBS에서 <태평양전쟁 최후의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라는 다큐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가 실제로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자각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밑에서 일했던 조선인들에게 도고는 친절히 대했다는 증언이 있다.
애초부터 도고 시게노리는 군국주의 폭주에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던게 만주사변 이후 국제연맹 탈퇴 문제에서 마쓰오카 요스케와 적극적으로 부딪혔다. 실제로 그가 당시에 우치다 외상에게 제출한 의견서를 보면 당시 일본군의 가상적국 중 하나인 미국과의 전쟁이 태평양에서 벌어진다면 국제사회 모두 미국을 도울 것이기에 최대한 피해야 한다고 나와있다. 심지어 소련에 대해서도 도고는 그들이 만주사변 이전까지 일본에 타협적이었음을 지적하며 또 적화 시도 문제도 국내 문제라며 선을 그었다. 그래서 내리는 결론은 당분간 일소관계의 변화를 지켜봐야 한다는 것.
그렇기에 도고 시게노리는 독일, 이탈리아와 맺은 삼국 방공협정에도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소련이나 영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킨다는 이유에서였는데 덕분에 자신이 추진하던 모스크바와의 어업협정과 만소 국경 문제 교섭도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또 군축 조약 문제에서도 요시다 군무국장을 비롯한 해군측 인사들이 끝까지 조약파기를 주장하다 그는 건함 경쟁은 곧 전쟁을 불러올 것이며 전쟁은 일본을 위해서도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쓰오카 외상과의 자리에서는 중일전쟁에 대해 일본이 자숙하고 장제스 정권과 신속하게 해결해야 한다고 직언하기도 했었고.
도고는 오히려 전쟁을 막으려 했던 사람이다. ABCD 포위망 이래 군부 강경파가 폭주하던 도조 내각에서 몇 안되는 대미교섭파였으며 외무상으로서 온건한 입장을 내비쳤다. 실제로 도고는 주소 대사 시절 할힌골 전투 등으로 벌어진 소련과의 외교 갈등도 평화적으로 중재했으며 태평양 전쟁을 막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물론 실패했다. 헐 노트로 외교 교섭이 중지되고 군부가 진주만 공습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날 무렵에도 도고 시게노리는 그의 묘비명에 적힌 종전을 이뤄 일본과 일본 국민을 구했다는 말처럼 다시 돌아와 어떻게든 종전 공작을 해내려 애썼다. 이것 때문에 와타나베 쓰네오와 같은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비판하는 반우익 인사들도 도고 시게노리 만큼은 존경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인정한다. 그리고 선전포고문이 늦게 전달된 건 그가 밝히기를 타이프 인쇄가 늦어졌기 때문이며 그 사이에 진주만 공습이 이뤄졌고 자기는 끝까지 전쟁에 부정적이었다 했다.
그러나 그 역시 전범재판의 칼 끝은 못피했다. 기소 이유는 대미교섭이라는 기만 공작으로 시간을 벌어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할 타이밍을 잡았다는 것인데 이건 그냥 진주만 공습에 대한 괘씸죄다. 결국 도고 시게노리는 전쟁을 주도한 사람도 아니고 오히려 당시 내각에서 가장 대화에 의지가 있던 사람임에도 20년 형을 선고받고 옥사했다.
억울한 희생자들: 중일전쟁의 전범이 된 히로타 고키
마지막 억울한 희생자다. 히로타 고키는 사형당한 A급 전범 중 유일한 민간 관료였다. 중일전쟁 이전에 총리였으나 이내 물러났고 그 이후는 다들 알다시피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가 되어 노구교 사건을 중일전쟁으로 확대시켰다. 당시 히로타 전 총리는 고노에 내각의 외무대신이었고 알다시피 대정익찬회 수립 이후부터 일본에서 문관이란 군부에 협력하지 않는다는게 매우 힘들었던 시기다.
그가 중일전쟁에서 저지른 잘못이라면 중국 정부를 말살시켜야 한다고 아가리로 입턴 게 끝이다. 뭐 히로타가 그래서 실제로 행동으로서 중국 정부를 말살시키기 위해 한 것은 크게 없고. 애초에 중일전쟁 이전에 총리였고 고노에 후미마로 밑에서 크게 중요한 일을 하지도 못한 사람이었다. 전쟁 준비를 했다는 연합국 검사단의 주장도 사실과 안맞는게 히로타 고키는 쇼와 시대 개막부터 전후 쇼와 시대 이전 총리 중에 그나마 마지막으로 군부를 억제할려고 시도했던 자다. 그 이후는 다들 알 거고.
그리고 문관 총리 중에서도 히라누미 기이치로나 조선 총독 출신 고이소 구니아키는 히로타와는 달리 군부에 친화적이었으며 전쟁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고작 징역형을 선고받는다. 오로지 문관 중에서는 유일하게 히로타 고키만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이 때문에 A급 전범 중 가장 많은 탄원서가 판사들 앞에 접수된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연합국에게는 중일전쟁을 책임져줄 사람이 필요했다. 때마침 고노에 후미마로가 자살했기에 이대로 가다간 중일전쟁에 대해선 아무도 책임질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게 생겼다. 결국 고민 끝에 나온 결론은 비록 어거지지만 중일전쟁 직전 총리였고 고노에 후미마로 밑에서 전시에 내각에서 외무상을 한 히로타 고키를 죽이기로 한 것이다. 히로타 고키는 교수형 당하는 순간에도 유일하게 "덴노 헤이카 반자이"를 외치지 않았다.
하지만 고노에 후미마로는 억울한 누명을 쓰지 않았다
사실 어찌보면 지금까지 내가 쓴 내용들이 상당히 추축국 인사들에 대한 변호처럼 보일 것이다. 어차피 후술할 내용에서 일본 군국주의의 책임을 한번 묻고 가겠지만 그래도 이건 하나 확실하게 말하자면 고노에 후미마로만큼은 중일전쟁에 가장 큰 책임이 있기에 동정이 가진 않는다. 친 추축국 성향 사람들 중에 누구는 고노에 후미마로도 시대의 피해자이며 중일전쟁은 군부만의 잘못이라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중국 침략을 두고 군부에서도 이시와라 간지 같이 전쟁을 반대한 인사도 있었다. 여기서 중일전쟁 발발을 요구한 건 관동군 중심의 강경파였는데 이때 전쟁 발발의 키포인트를 쥔 것은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였다. 화족 명문가 출신 고노에는 원로 사이온지 긴모치의 추천을 받아 군부의 폭주를 견제하고 소신껏 국정을 운영할 희망이자 인재였는데 그는 결국 폭주를 막기보다 자기도 같이 흐름에 타기를 선택하였고 이 선택은 파멸로 가는 길의 입구였다.
고노에 후미마로가 군부와 아예 무관하진 않은게 그는 쇼와연구회라는 파시즘을 연구하던 지식인 연구단체 창설에 깊이 관여한 사람이었다. 총리가 된 이후에 신체제 운동을 주도하여 대정익찬회라는 유사 파시즘 기구를 내놓은 것만 봐도 그가 본래는 평화를 사랑했는데 군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전쟁을 한 거라는 소리는 개소리다. 고노에 후미마로는 1938년 "국민정부를 상대하지 않는다"라는 담화를 발표하여 중국 정부를 국가가 아닌 비적으로, 전쟁을 국가 간의 정규전이 아닌 비적에 대한 토벌전 성격의 지나사변으로 해석한 시점에서 전쟁책임은 자유로울 수 없다.
결정적으로 고노에 후미마로는 2차세계대전 패전 이후 궁지에 몰리자 음독 자살을 했다. 나는 기본적으로 정치인의 자살을 리더로써 책임감을 저버리는 도피라고 생각하기에 고노에 후미마로의 자살 또한 동정이 가지 않는다. 최소한 도조 히데키는 비록 패전 직후에 자살 시도를 하고 태평양전쟁 개전을 대동아를 위한 자위전쟁이었다며 변명하긴 했지만 이내 도쿄 전범재판에서 스스로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체념하겠다고 한 걸 보면 죄질은 도조가 더 나쁘지만 고노에의 책임 의식은 이보다 더 못하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아직도 일본이 이 전쟁을 한 것을 두고 국제범죄라고 하여 승자에게서 소추를 당하고 패전국의 합법적인 관리였던 자가 개인적으로 국제법의 범죄인, 또는 조약의 위반자로서 규탄되리라고는 생각조차 한 일이 없다. 두 번째 문제, 즉 패전의 책임에 대해서는 당시 총리대신이었던 내 책임이다. 나는 이런 뜻에서의 책임은 수용할 뿐만 아니라 충심으로 자진해서 이를 짊어질 것을 희망하는 바다. "
- 1947년 12월 14일, 도쿄 이치카야에서 진술자 도조 히데키,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입회인 변호사 기요세 이치로 -
보론 1: 치도리가후치, 야스쿠니, 그리고 순국7사묘
일본의 추도 시설 중 가장 유명한 곳은 아마 야스쿠니 신사일 것이다. 항상 우리나라에서도 일본 총리가 참배한다는 비판이 쏟아지는 그곳 맞다. 실제로도 일본 우익에게 있어서 야스쿠니 신사란 '신의 나라' 일본을 위해 싸우다 죽은 호국 영령들이 돌아가신 곳이다. 그러나 야스쿠니 신사에는 사형당한 A급 전범 7명의 위패가 있기 때문에 한국과 중국에서는 민감하게 받아들여지는 거고 심지어 일본 내에서도 논란이 된 적이 있다.
그래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시절에 나온게 치도리가후치 추도 공원을 국립 겸 공식적인 추도 시설로 쓰자는 방안이었다. 하지만 정작 고이즈미 준이치로 본인도 야스쿠니 신사를 결국에는 참배하였고 2009년 일본 민주당 정권기에도 여당 의원 50명이 야스쿠니를 참배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다가 아베 신조 이후로 치도리가후치 국립 추도시설 안은 사실상 폐기 수순을 밟게 되었다.
치도리가후치는 야스쿠니와 달리 일반 병사와 하급 간부들이 묻힌 곳이다. 즉 침략전쟁에 적극적 동조를 한 부역자들보다는 시대적 한계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전선으로 가야 했던 군인들이 묻힌 곳이다. 야스쿠니 참배를 강경하게 비판하는 미국도 일본이랑 회담을 가질 때면 국방장관과 국무장관을 이곳에 보내어 참배하게 한다. 천황제 자체를 혐오하는 일본 공산당이 참배하는 유일한 전몰자 시설인 건 덤이고.
문제는 이 둘에 비해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훨씬 더 위험한 곳이 있다. 바로 순국7사묘라는 곳인데 사형당한 A급 전범 7명을 화장하고 남은 유골로 멋대로 조성한 묘지다. 이곳이 진짜 악질인 건 중일전쟁의 주도자이자 필리핀에서 학살을 벌인 무토 아키라, 태평양전쟁의 범죄자 도조 히데키, 731 부대를 승인하고 중국 침략에 앞장선 이타가키 세이지로 등의 인간 쓰레기들과 마쓰이 이와네, 히로타 고키 같이 억울하게 정치적 이유로 희생당한 사람들을 동시에 합사시킨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추축국에 우호적으로 생각하는 이들은 순국7사묘는 대동아공영권을 위해 싸우다 죽은 이들을 추모하기 위한 공간인데 기껏 순교자로 추앙해줬더니만 왜 난리치냐는 것이냐고 할 거다. 하지만 이러한 류의 같이 묶으려는 시도는 오히려 무고하게 A급 전범이 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자들까지도 다시는 명예가 회복될 수 없게 만드는 길이며 실제로 도고 시게노리 외무상의 손자 도고 가즈히코 교수는 대표적인 반극우 인사로써 외교관 시절 북방영토 4개 섬 중 2개를 우선 반환받고 단계적으로 교섭한다는 방안을 내놓다가 극우들한테 비난을 받았으며 아예 일본 총리들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 사람이다.
그러한 마쓰이와 도고, 히로타의 후손들이 보기에 일본 극우들의 순국7사묘와 같은 행태는 조상을 영웅으로 만드는게 아니라 오히려 더 이미지를 시궁창으로 만들고 일본 군국주의 시대에서 어디까지나 상대적이지만 그나마 최소한의 인간으로서의 양심은 있던 이들의 명예회복조차 못하게 만드는 행위이지 않을까?
보론 2: 기무라 헤이타로도 무고하지 않다
최근 들어 '버마의 도살자'라는 별명으로 악명 높던 기무라 헤이타로가 일본군, 아니 2차세계대전 통틀어 심각했던 포로 학대 및 강제 노동으로 유명한 '죽음의 철도'라 불리는 공사에서 포로들을 학살했던 것이 거짓으로 밝혀졌다. 왜냐면 죽음의 철도는 기무라 헤이타로 부임 전에 있었던 공사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인터넷에서는 기무라 헤이타로가 무슨 100만명 이상을 학살한 것처럼 묘사하는 정보들이 많이 올라와 있었는데 참고로 난징대학살의 사망자 최대 추정치가 30만명이고 엄연히 제노사이드는 아니지만 뱅골 대기근으로 아사한 인구가 200~300만명이다. 진짜로 기무라 헤이타로가 100만명 이상을, 그것도 버마에서만 그렇게 죽였다면 세계사에 기록이 안남을리가 없다.
그러나 분명 기무라 헤이타로는 전쟁 범죄 행위를 저질렀다. 그가 1944년 버마 방면군 사령관으로 부임하고 난 뒤 한 조치 중에서는 현지 청년들을 징집하여 보조 병력으로써 버마 전선과 뉴기니 전선에 투입하였고 이 수치는 30만명이 된다. 문제는 이 병력 중 90%는 정글 속에서 제대로 된 보급도 못받으며 비참하게 죽어갔다는 것이다. 게다가 기무라 헤이타로는 어둠의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무다구치 렌야의 임팔 작전이라는 삽질 속에서 혼자 찬드라 보스와 인도 국민군을 내팽겨치고 도주해버렸으며 임팔 작전의 대부분 전사자는 기무라가 자신의 자리에서 이탈한 후에 벌어졌다.
그 뿐인가? 기무라 헤이타로는 중국에 있을 시절부터 산둥 반도에서 학살을 저지르거나 1940년 만주에서는 지역 주민 수만명을 강제 동원해 노역에 투입시켰다. 이때 저항하는 주민 수천명을 대상으로 무자비하게 다 죽였었다. 끌려간 주민들에게는 도망 못치게 감시하였고 그 덕분에 굶주림과 고문으로 또 수천명을 죽였다. 물론 이거 때문에 기무라 헤이타로가 기소된 건 아니다. 중국과 버마에서의 포로 학대가 처음 얘기가 나온 건 전범재판 중 증인의 증언이었으며 정작 판결문에서도 포로 학대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왜 기무라 헤이타로는 사형을 판결받았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침략전쟁의 계획과 과정에서 이 인간이 빠진 적은 손에 꼽을 만큼이었기 때문이다.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 때나 도조 히데키 내각 때 기무라 헤이타로는 육군성의 최상위 간부, 사실상 차관급 위치에 있었다.
결론: 국제법상 범죄가 아닌 전시행위만으로도 단죄의 대상이 되다
도쿄 전범재판에 대해 한국 사회의 인식은 간단하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는 11명이나 사형당했는데 왜 도쿄 전범재판에서는 고작 7명 밖에 안죽냐는 것이다. 뭐 더 많이 죽인다고 해서 단죄를 잘하는 건 아니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일본이 독일에 비해 더 처벌을 덜 받은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건 알아야 하는게 에드가 스노우의 말마따나 미국의 GHQ를 통한 초기 일본 통치는 징벌 위주였으며 이러한 방침이 바뀌어 일본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건 최소한 1950년 한국전쟁 이후이기에 단순히 일본을 봐줄려고 덜 사형시킨 건 아니다. 패전 당시 미국 어느 여론조사에서는 히로히토 천황에 대한 사형 지지 찬성 비율이 33%을 기록할 정도였으니 미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분노가 상당했을 시기다.
따라서 미국은 일본을 봐주려고 히로히토를 살려준게 아니다. 물론 나는 히로히토의 전쟁 책임에는 상당히 강경한 입장이며 그가 군부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 씌우고 혼자만 산 건 지도자로서 자질이 없다는 걸 입증한 꼴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도쿄 전범재판에 비판하는 포인트는 천황과 황실에게 면죄부를 준 걸 넘어 황실과 GHQ의 거래에서 꼬리 자를 대상이 되어 사형에 처해지고 전쟁을 최대한 피해보려고 노력한 자였음에도 단순히 괘씸하거나 이미 죽어버린 누군가의 책임을 받아야 한다는 이유로 A급 전범이라는 지워지지 않는 딱지를 붙여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게 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래서 전범재판이라는 건 상당히 문제가 있는 제도다. 처칠이 괜히 공개적인 전범 재판은 하지 말고 전통적인 방식으로 악질범만 군사법원에서 결정해서 총살형에 처하자 한게 아니다. 전쟁 당사국인 승자가 패자를 재판한다는 논리는 한마디로 정치적 논리에 따라 역사적 정의로 재판한다는 건데 그나마 2차세계대전은 추축국이 저지른 행위가 너무 심각했으니 전범재판 자체에 대한 비판은 안나오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부터 생긴 전범재판에 대한 환상은 곧 세계, 특히 제1세계에 적용되어 유고슬라비아 내전에서도, 이라크 전쟁에서도 승자가 저질렀던 행태는 가리고 패자를 무너뜨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로 사용되었다.
도쿄 전범재판을 통해 전범재판이라는 제도는 국제법에 기반한 자유주의 질서가 과연 그들은 본인들이 그토록 강조하던 패자에 대해 정치적 논리가 아닌 보편적인 정의와 자유, 인권에 입각해 판단하는지 한번 고찰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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