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이슨 Jun 21. 2023

독일에게는 1차세계대전이 필요했다

실패한 전쟁사-5

https://youtu.be/30e0KVH8VgI?si=qorCeZOOJXntX8Pi

1차, 2차 세계대전 모두 일으킨 주범으로 주목받는 건 독일이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말한다. 독일이 전쟁을 일으킨 건 단순히 그들이 호전적인 민족이고 침략 야욕으로 가득찬 정치가들 때문이라고. 그 근거가 독일의 노래, 즉 'Das Lied der Deutsche'라고 불리는 독일 국가 1절 속 마스(프랑스 알자스 로렌 포괄), 메멜(리투아니아 클라이베타 시), 에치(이탈리아 쥐트티롤 지방), 벨트(발트 해,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주)를 마치 독일 제국의 영역으로써 묘사하며 제국주의 성향을 드러냈다는 거다. 이 때문에 1945년 종전 이후 독일 국가는 3절을 제외한 1,2절은 전후 독일 연방 공화국에서 금지당했다.


그렇다면 진짜 독일은 악의 화신이며 침략 정신으로 무장했기에 전쟁을 일으켰는가 하면 의문이 남는다. 분명 독일 민족의 호전성에서 전쟁 발발 책임을 묻는 것은 정의의 심판(?)처럼 보이겠고 실제로 이를 바탕으로 베르사유 조약이라는 징벌적 형태의 판결이 내려졌지만 그것만으로는 독일이 왜 전쟁으로 나아갔는지 설명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다른 각도에서 독일이 1차세계대전 발발 당시 침략국에 될 수 밖에 없던 원인을 다루고자 한다.

프로이센과 독일 민족 통일


사실 전근대적인 이유에서 전쟁 원인을 찾는 걸 난 좋아하지 않지만 프랑스와 독일의 적대 관계를 설명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신성 로마 제국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신성 로마 제국이 사실상 힘을 잃고 몰락한 결정적인 계기는 알다시피 30년 전쟁이었다. 30년 전쟁은 구교 세력과 신교 세력 간 유혈이 낭자한 종교 전쟁을 가장한 패권 싸움이었는데 이때 프랑스는 리슐이외 추기경을 중심으로 가톨릭 국가였음에도 분열을 꾀해 제국에서 스페인과 네덜란드를 분리시키고 300개가 넘는 나라로 구 신성 로마 제국 국가들을 쪼개버린다.


종교 전쟁의 결과는 비참했다. 수많은 희생자의 대부분은 독일 지역에서 발생했으며(800만명) 이때 신성 로마 제국의 몰락으로 세계 정세의 주도권은 영국과 프랑스, 스페인에게 넘어갔다. 이 와중에 프랑스는 30년 전쟁 말 전황이 구교에게 유리해지자 그때서야 참전했으니 말이다. 독일의 시인 쉴러는 독일이란 현실 속에서 찾아볼 수 없는 존재라며 한탄했고 그의 친구 괴테는 비엔나 사람에게 독일을 물으면 그건 오스트리아고 베를린에서 물으면 프로이센이라 했는데 이게 당시 통일된 국가를 세울 수 없던 독일의 사정이었다.


독일의 민족주의 발흥은 아이러니하게도 원수 프랑스의 혁명으로 인해 생겼다. 1792년 발미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은 프랑스군에 맞붙었지만 결과는 비참했다. 당대 프로이센군은 전쟁왕 프리드리히 2세의 주도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에서 활약하는 등 유럽 최정예 군대로 꼽히고 있었는데 패한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게도 프랑스군은 혁명 영향으로 국민군이라는 개념을 통해 민족주의라는 개념이 형성되어 사기가 높았기에 산개대형의 경보병 전술도 마음껏 할 수 있었지만 프로이센군은 징병제가 아닌 하층민들로 이루어지고 사실상 노예나 다를 바 없는 군대였기에 사기와 전술 면에서 뒤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1805년 예나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에게 프로이센군은 제정 러시아군의 지원을 받았음에도 참패했고 이후 굴욕적인 조약을 맺는다. 이때 나온 피히테는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책을 쓰며 교육을 통한 독일 민족의 자주성 회복을 주장했다. 프랑스 철학자 에르네스트 르낭이 <민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승리의 역사보단 패배, 억압, 고통의 기억을 공유할 때 민족성이 생겨난다"고 했던 것과 일맥상통한다.


특히 카를 슈미트도 <파르티잔>이라는 책에서 말한 1812~1813년 시기 나폴레옹 원정군에 맞선 프로이센 저항군의 유격전은 훗날 전간기 자유군단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고 세워진 건 빈 체제라 불리는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가 주도하는 체제였다. 이렇게 프랑스를 구석에 몰아넣는 것에 성공했지만 메테르니히가 주도한 것은 연방 중심의 대독일주의였기에 독일 민족주의자들은 만족할 리가 없었다. 실제로 빈 체제 하에서 1848년 혁명 이전까지 독일 민족주의는 억눌렸었고 혁명에서 민족주의의 가능성을 본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 재상은 적절히 잘 이용하여 마침내 1871년 독일을 통일시킨다.


그러나 비스마르크 재상은 통일 이후로는 정작 독일 민족주의의 확장 행보를 지지하지 않았다. 메테르니히의 대독일주의에 맞서 프로이센 주도의 소독일주의를 주장해온 비스마르크의 입장에서는 통일된 시점에서 이걸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외부와 잘 지내야 했기 때문. 그래서 "외교란 러시아와 친하게 지내는 것이다"라는 말처럼 비스마르크는 영국으로부터 중립을 보장받고 러시아와 친하게 지내며 보불전쟁에서의 승리와 전후 프랑스의 국제적 고립을 유도했다.

하지만 비스마르크식 외교는 오래갈 수 없었다


독일 제국사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if 역사가 비스마르크가 좀 더 오래 집권했으면 어땠을까 라는 것이다. 워낙 보오전쟁, 보불전쟁에서 천재적인 외교적 지휘를 보여준게 비스마르크라 그런 아쉬움이 남는 것은 이해한다. 빌헬름 2세가 자의식 과잉에 미쳐서 스스로 나라를 말아먹은 것도 사실이고. 그럼에도 비스마르크식 외교의 지속성이 오래갈 수 있었는지 논하자면 솔직한 내 생각으로는 그렇게 길 게는 못갔을 거라고 본다.


19세기는 영국과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이었고 나폴레옹 이후 쩌리가 된 프랑스와 1848년 혁명으로 메테르니히가 쫓겨난 오스트리아는 크게 세계를 주도하진 못했다. 그렇기에 영국과 러시아 어느 한 쪽의 편을 들지 않고서도 비스마르크는 중립을 보장받아 독일 통일에 방해되는 프랑스, 오스트리아를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이며 그 당시 독일은 블루 오션이긴 해도 세계를 주도하는 패권국은 아니었다. 따라서 세계적인 분쟁도 독일을 중심으로 벌어지기 보단 대영제국이라 불린 영국과 부동항을 찾아 남하하던 러시아 사이에서 주로 벌어졌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영일동맹으로 영국의 지원을 받은 일본이 러시아를 격파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100년에 걸쳤던 그레이트 게임은 영국의 승리로 끝났으며 러시아는 확장보단 현상 유지 쪽으로 돌아선 것이다. 그 후 1차세계대전 세력 구도를 결정지은 것은 삼국동맹에 맞서 1907년 삼국협상이 결성된 것이고. 그런 상황 속에서 독일이 취하던 영러 사이에서의 중립 외교란 무의미해졌으며 오히려 영국이나 러시아나 순차적으로 성장하던 독일에게 공세의 방향이 할 것은 누가 봐도 자명했다.


그리고 1890년대 시점부터 독일 사회에서 산업 부르주아 계층의 해외 진출 요구가 급증하기 시작했는데 이를 거부하기란 쉽지가 않다. 당시 독일은 영국에 이어 세계 2위의 교역국으로 부상했으며 더 이상 독일 자국 내 산업 개발 계획으로 지금의 성장세를 이어가기란 무리였다. 이에 따라 독일의 군비 팽창과 식민지 확보를 목적으로 하는 해군 협회가 생겨나고 알프레드 마한의 <역사에 미친 해양력의 영향>이 독일에 소개되어 해양력, 무역, 식민지는 국가의 번영에 꼭 필요한 요소라는 인식이 형성되고 있었다.


뭣보다 당시의 독일의 식민지라고 해봐야 산둥 조차지와 서아프리카 지역 일부, 남양군도가 끝이었다. 이들은 아메리카 대륙이나 동남아시아처럼 생산성이 높은 지역이 아니었다. 경제적으로 가치가 있는 지역 대부분은 선발 주자인 영국, 프랑스 등이 가지고 있었고 당시 독일은 인구적인 측면으로나 산업적인 측면으로나 서서히 포화 상태가 와 성장 동력이 지체될 지점이었기에 밖으로 분산시켜 생산성을 높일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독일이 그 시점에서 할 수 있었던 선택지란 공격적인 대외 정책으로 선발 주자들이 가져간 식민지를 빼앗아 와 성장의 동력으로 삼는 것 밖에 없었다.

투키디데스의 함정: 선발 주자와 후발 주자의 예정된 전쟁


2,500년 전 고대 그리스의 두 주요 도시국가를 초토화시킨 펠레폰네소스 전쟁에 대해 역사학자 투키디데스는 전쟁은 필연적이었다고 주장하며 그 근거로 아테네의 부상과 그에 따른 스파르타의 두려움을 들었다. 이 말을 현대적으로 해석해보자면 신흥 패권국, 즉 후발 주자는 성장하여 패권국을 지향할 것이고 기성 패권국, 즉 선발주자는 이에 두려움을 느껴 강하게 나오는 과정에서 두 세력 간의 심각한 충돌이 벌어진다, 대충 이렇게 볼 수 있으며 이 이론은 현대 미중대립에도 적용되는 논제다.


그레이엄 앨리슨은 <예정된 전쟁>이라는 책에서 지난 500년 동안 후발 주자가 선발 주자에 도전한 16가지 사례 중 무려 12가지가 전쟁에 이르었다고 분석했다. 앞 파트에서도 말했듯이 1914년까지 6,500만에 다다른 독일 인구는 영국 인구보다 절반이 많았으며 경제는 1910년에 능가했다. 1913년까지 독일은 세계 제조업 시장의 14.8%를 담당하는 수준이 되어 영국의 13.6%를 앞질렀다. 통일 이전 영국의 절반이었던 강철 생산량도 1914년  배가 되었다.


석탄 생산량도 1890년 영국 석탄 생산은 독일의 2배였는데 1913년이 되면 2억 7,900만 톤으로 영국의 2억 9,200만 톤을 따라잡는다. 1890년도 영국의 선철 생산은 800만 톤으로 410만 톤을 생산한 독일의 두 배였다. 그러나 1914년이 되면 영국은 1,100만 톤으로 독일의 1,470만 톤에 한참 뒤진다. 화학제품의 경우도 1910년도 독일의 수출량은 영국의 2배였고 기계류 수출에서도 독일은 영국을 가볍게 따돌렸다. 그래도 영국이 앞선 분야가 있다면 섬유나 석탄 수출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후발 주자라는 한계 덕분에 독일은 공장이 되어줄 식민지가 부족했으며 영국과 달리 수송 선단과 식민지들을 보호할 강력한 함대도 없었다. 빌헬름 2세가 아득한 양지에 자리잡겠다고 선언한 것처럼 성장하고 있었던 자국의 상업을 보호하고 성장 동력을 강화시킬 함대는 독일에게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이런 말하면 독일의 패권 정책을 옹호한다고 욕할 자도 있겠지만 냉정하게 말해 독일이 세계 정책을 할 수 밖에 없던 것은 생존의 목적도 있으며 막을 수 없던 흐름이었다.


보충 설명을 이어가자면 독일의 산업 경제는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면서 해외 수출량이 증가하고 식량 수입도 늘고 있었다. 그런데도 독일 사용할 수 있는 해로는 북해와 발트해가 전부였다. 거기에 전시에 영국 해군은 이를 봉쇄할 수준의 거대한 함대를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독일로써는 해군 증강이 불가피했다. 실제로 산업화의 심화에 따라 독일의 해외무역 의존도가 높아지는 사정을 역이용하여 영국 실무자들이 해상 봉쇄안을 마련했던 것은 1961년 이래 공개된 사안이다.


영국만 해도 해상 봉쇄를 벗어나기 위해 해군 증강을 통한 자유무역을 구상했다. 1864년 곡물법 폐기 이래 곡물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고 공산품 수출을 경제 기반으로 삼으면서 안정적 수출입이 영국의 생명줄을 쥐었비 때문이다. 이때 이게 순조롭게 잘 이뤄진 건 영국 해군 덕분이었고. 1902년 당시 아직 야당 국회의원이던 훗날 육군장관이 되는 홀데인은 의회에서 "영국의 무역량은 약 10억 파운드에 근접하는데 해군 예산은 그것의 3%에 지나지 않는다. 이 액수는 그렇게 비싼 보험료가 아니다."고 말했다.

1차세계대전의 원인은 과연 해군 증강 탓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향을 줬을지는 몰라도 직접적으로 벌어지게 된 원인은 아니다. 1912년 3월, 빌헬름 2세는 전함 3척 추가 건조 계획을 승인한다. 그리고 일주일 뒤 영국 해군 장관 처칠은 2국 표준주의 정책 폐지를 선언한다. 대신 드레드노트 전함 비율을 16 대 10 비율로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또 수정 해군법 전함 건조 계획이 한 척 추가될 때 두 척을 만들겠으나 독일이 일시적으로라도 중단하면 영국도 중단하겠다고 했다. 이 제안은 놀랍게도 해군 증강 계획의 설계자 티르피츠가 16  대 10 비율을 받아들이며 끝났다.


영-독 해군 경쟁은 이로써 전쟁 발발 이전부터 끝난 상태였다. 1815년 이후 90년 동안 이어진 프랑스와 영국 간 해군 경쟁도 전쟁이 아닌 평화 협정으로 끝난 것처럼 말이다. 물론 독일의 해군 증강 계획은 영국인들에게 공포를 불러온게 사실이고 이게 삼국협상이 체결의 원인 중 하나다. 어찌 되었건 유럽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영국 해군에 맞설 정도의 능력을 갖춘 강력한 해군력을 보유한 군대는 독일 해군 뿐이었으니 말이다.


세계 정책, 해군 증강보다 더 큰 전쟁 발발 원인에 악영향을 끼친 건 따로 있다. 바로 중부 유럽 정책과 육군 증강이다. 1차 발칸전쟁에서 오스만이 패하고 세르비아 지위가 부상하자 오스트리아는 러시아 국경에서 세르비아 국경으로 병력을 이동시켜 이에 독일은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결국 해군 증강을 통한 영국과의 대결보단 중부유럽 문제에 끼어들어 해군 중시 정책을 보류했다. 이어서 1912년과 1913년에 육군법을 통과시키며 해군 중시에서 육군 중시로 돌아선다.


그 이유는 독일의 국력이 식민지 시장에 참여할 만큼의 수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독일의 해외 사업은 프랑스 지원을 받았는데 모로코 위기 덕분에 파기되었다. 3B 정책의 일환 바그다드 철도 건설 중단도 프랑스 자본 철수 때문이었고 특히나 산업 수출이 영국, 프랑스, 러시아에 집중되었던게 세계 정책이 지속되지 못한 이유였다. 결국 독일의 목표는 세계의 식민지가 아닌 중부유럽에서의 지배적 지위 확보에 올인하는 쪽으로 방향이 바뀐게 1912년 이후라는 것이다.

보론: 벨 에포크 시대의 평화는 환상이었다


20세기의 시작은 겉으로 평화로워 보였다. 각국별로 의회 정치가 자리잡고 민주주의가 시대를 대표하는 사상으로써 자리잡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기가 재미있는 건 사회주의도 이때 본격적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독일에서 사민당이 주류로써 완전히 안착한 것은 비스마르크 이후이며 이때부터 노조도 활성화되고 여성 참정권 운동도 조금씩 수면 위로 오르기 시작한다.


산업 발전도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수세식 화장실은 유럽은 더러웠던 거리와 전염병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전화와 무선통신은 지역 간의 거리를 줄였으며 철도와 자가용 자동차는 이동의 편리성을 극대화했다. 사실상 관광업도 이때 만들어졌다. 사람들은 생각했다. 이때 산업혁명으로 도입된 기술은 인류를 지난 기원후 몇천년 간의 끔찍했던 야만의 시대로부터 해방시켜 진정으로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만 사용될 것이며 이로써 모두가 풍요로운 삶을 살 거라고 말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예측은 100% 빗나갔다. 오히려 칼 마르크스가 예견했던 대로 제국주의와 자본주의가 낳은 각종 모순과 과잉생산은 끔찍한 대전쟁과 공황을 불러왔다. 백년 평화라 불리던 19세기도 나폴레옹 전쟁으로 시작했던 것처럼 20세기라고 안 그러다는 보장이 없었다. 혁명적으로 발전한 과학 기술은 같은 인간을 이전보다 더 잔인하고 체계적으로 죽였으며 독가스의 발명으로 절정에 달해 아틸라도 칭기스 칸도 하물며 나폴레옹도 이루지 못한 대량살상무기의 시대가 열렸다.

결론 1: 전후에도 교훈을 얻지 못하고 같은 비극을 반복하다


앞서 쭉 나열했던 내용들을 정리하자면 결국 독일은 외부 확장을 할 수 밖에 없는 환경에 마주한 것이었고 그것은 곧 전쟁을 할 수 밖에 없는 필연적인 운명이었던 것이다. 대전은 예정된 전쟁 이었으며 독일이 잘못한 건 투기디데스의 함정을 극복하지 못하고 대전에 참여한 것이었다. 이는 제국주의 시대가 낳은 비극이며 모순이 벌어진 건 독일이 특별히 호전적인 민족이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국제 질서 자체의 문제였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빈 체제가 수립되는 과정에서도 프랑스를 1790년 이전의 국경 상태로 되돌려 놓거나 1871년 보불전쟁이 끝난 이후 독일이 프랑스에 취한 조치도 물론 군대가 주둔하고 배상금을 받아내는 등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에도 분명 징벌적 배상이라는게 있었다. 당장 아시아에서도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요동반도와 대만이라는 전리품을 가져가기도 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이후 독일에게 연합국이 선사한 조치는 이때까지의 제국주의 열강들 간의 전후 처리는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가혹했고 감정적인 보복 성격이 짙었다. 일단 독일군이라는 것을 해체시켰으며 징병제도 참모제도도 공군도 전차 제작도 잠수함 생산 및 보유도 다 금지당했다. 또 1923년에는 루르 지방에 프랑스군이 주둔하기도 할 정도였다. 베르사유 조약을 주도한 국가는 프랑스였는데 사실상 그들은 보불전쟁의 복수를 할 생각으로만 가득차 있었기에 그 보불전쟁 때의 독일조차도 하지 않았던 조치를 하며 몇배로 갚아주게 된 배경이다.


경제 면에서도 살펴보자면 일단 독일이 베르사유 조약에서 내기로 결정된 금액은 밑 사진의 통계와 같다. 근데 여기다가 연금과 수당을 더해야 하는데 그러면 대략 독일에 대한 연합국의 청구액은 400억 달러 가까이 될 거다. 조약의 또 다른 내용인 294조에는 휴전 이후 점령군의 비용 10억 달러도 독일이 부담하는 걸로 나와있으며 이건 주요 연합국이 독일의 배상 의무를 완수시키기 위해 식량과 원료 공급에 대한 대금도 앞의 금액에 제시된다고 보는 게 맞다.

또 현금이나 현물로 50억 달러를 지급하는 거 이외에도 추가로 100억 달러의 무기명 채권을 양도해야만 했으며 이 채권은 1921년부터 4년 간은 이자가 2.5%고 이후는 5%억 상환 1%를 더해 6%를 부담해야 했다. 그래서 1921년 이전에 배상금으로 금액을 내놓지 않는다면 1925년까지 3억 7,500만 달러를 내놓아야 하고 그 다음엔 9억 달러를 내놓아야 했고. 그러나 가장 파괴적인 조항은 배상위원회가 독일이 채권에 대한 이자를 감당할 수 있다고 확신하기 전까지 150억 달러를 초과하는 지급액에 해당하는 채권은 발행되지 않지만 1921년 5월 1일부터 현금이나 채권으로 갚지 못한 배상 지급액에 이자가 더해질 거란 것이었다. 요약하자면 초반에 아주 큰 금액을 지불하지 못한다면 배로 늘어나서 1936년에는 650억 달러가 되어있을 거라는 거다.


그런 점에서 1차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는 어쩌면 제국주의 시대보다도 훨씬 퇴보했다고 볼 수 있다. 제국주의 시대의 모순이 쌓여서 벌어진 전쟁으로 수많은 인구가 대량으로 죽어나갔음에도 열강의 정치가들은 여기서 교훈을 얻고 평화를 위해 새로운 비전을 열기 보단 자신들의 실책을 덮고 다시는 경쟁국이 기어오르게 하지 몬하게 하기 위해 짓밟는 것에 열중했다. 감정적 복수에 기반해 실시했던 조치가 불러온 결과는 히틀러의 라인란트 재무장과 주데텐란트 합병으로 돌아왔고 결국 1차세계대전보다 훨씬 더 끔찍하고 비참했던 2차세계대전이라는 최악의 결과를 가져왔다.

결론 2: 평화는 찾아오지 않았고 미래는 '예정된 전쟁'으로 향한다.


양차대전 이후 평화는 찾아오지 않았다. 처칠의 '철의 장막' 발언으로 시작되어 6.25 전쟁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진행된 냉전,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이 예견한 것이 9.11 이후 현실화되면서 '역사의 종언'과 같은 의견은 한낱 철부지 이상주의로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벨 에포크 시대의 평화에 취해 잠든 문명 사회가 사라예보의 총성에 깨어났듯이 21세기 현재 우리도 9.11과 중국의 패권국화가 이뤄짐에 따라 깨어나고 있다.


투기디데스의 함정의 16가지 사례 중 12가지는 전쟁으로 이어졌다. 특히 오늘날 미중 패권경쟁의 양상은 갈 수록 1차세계대전 직전 영독관계와 비슷해지고 있다. 호전적인 후발주자, 후발주자의 해군력 증강과 선발주자의 견제, 후발 주자의 빠른 성장 속도와 그들의 선발 주자를 거의 따라잡은 국력, 이미 레드오션이 되어가어 뛰어들기 애매한 국제 시장, 양측 강경파의 커다란 입지까지 정말 닮아있다.


만약 이대로 미중 양국이 국지적으로 충돌을 벌이다가 사라예보 사건 같은 일이 한번 터진다면 그 후는 대참사일 가능성이 높다. 그때는 1차세계대전처럼 유럽만 작살나는 일은 없을 거다. 그래도 이전 전쟁까지는 안전하게 숨을 곳이 있었겠지만 그때부터는 생존 자체가 위협이다. 마치 드미트리 글루홉스키가 쓴 소설 <메트로 2033>에 나오는 것과 같은 세상이 열릴 가능성이 없다고는 못할 것이다. 어찌보면 메트로 내 세계관이 보여주듯이 그런 참극 속에서도 교훈을 얻지 못한 자들도 많을 것이고.


그럼에도 이러한 '예정된 전쟁'을 피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투키디데스의 함정으로 미중 경쟁을 분석한 학자 그레이엄 앨리슨은 분명 16가지 사례 중 12가지가 전쟁으로 이어진 것은 사실이나 그렇지 않은 사례도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고 봤다. 가장 최근 사례인게 냉전인데 그 상황 속에서도 핵전쟁 공포가 나돌고 미소 간에 경쟁이 치열했지만 진짜 위기가 찾아올 때 강대국들은 합의를 통해 해결했다. 일례로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소련만 핵미사일을 철수한 것으로 보도되었지만 사실 미국도 터키에서 핵미사일을 같이 철수했다. 즉 그나마 인류가 양차대전으로 교훈을 얻으며 전진한 사례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차세계대전이 '예정된 전쟁'을 앞두고 있는 국제정세 속에서 유의미한 교훈을 얻을 사례로 기억했으면 좋겠다.


참고 문헌:


박상섭, <1차 세계대전의 기원: 패권 경쟁의 격화와 제국 체제의 해체>, 아카넷, 2014

그레이엄 앨리슨, <예정된 전쟁>, 세종서적, 2018

존 메이너드 케인스, <평화의 경제적 결과>, 부글북스, 2016

A.J.P 테일러, <준비되지 않은 전쟁, 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 페이퍼로드, 2020

존 키건, <1차세계대전사>, 청어람미디어, 2016

E.H 카, <20년의 위기>, 녹문당, 2014

에릭 홉스봄, <혁명의 시대: 시민혁명과 산업혁명>, 한길사, 1998

이내주, <제1차 세계대전 원인 논쟁 - 피셔논쟁 이후 어디까지 왔는가?>, 영국사학회, 2014

조덕현, <독일해군정책의 기원에 관한 연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6

김태산, <독일 빌헬름 제국 시기의 통합적 군국주의 연구>, 육군사관학교 화랑대연구소, 한국군사학논집 71(1), 2015

안세민 외, <독일과 미국의 해군력 증강에 대한 영국의 대응분석>, 육군사관학교 화랑대연구소, 한국군사학논집 78(1), 2022

매거진의 이전글 랜드리스 없었으면 소련이 전쟁에서 패배했을 거라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