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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Jun 20. 2023

랜드리스 없었으면 소련이 전쟁에서 패배했을 거라고?

실패한 전쟁사-4

생각보다 한국 사회의 독소전쟁 인식은 단편적이고 냉전 시절 서방 학계의 반공 사관을 무의식적으로 계승하는 듯하다. 2000년대 초반 이른바 '독뽕' 밀덕 열풍도 이에 한 몫했을 것이다. 왜냐면 냉전 시기에 서구 학계의 독소전쟁 연구의 1차 사료는 대부분 만슈타인이나 할더 같은 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 국방군 장성 출신이었던 인사들의 서술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랜드리스'라고 불리는 소련에 대한 미국의 무기대여법에 대한 대안적 고찰을 해보고자 한다. 랜드리스의 역할을 과소평가하거나 소련 혼자 자력갱생으로 모든 업적을 이뤄냈다는 식의 소뽕식 사관을 담습하겠다는 건 아니고 냉전기 서구 학계나 오늘날 일부 밀덕들이 대전기 소련의 역할을 의도적으로 폄하하는 것에 대한 반론이다. 독일의 사정을 다루는 건 아니기에 엄밀히 말해 실패한 전쟁사는 아니지만 정치적 프로파간다로 인해서 승자임에도 평가가 왜곡되었기에 넣어봤다.


참고 문헌과 글에서 독소전쟁사에 대한 논조는 기본적으로 데이비드 M.글랜츠의 <독소전쟁사>와 <8월의 폭풍>을 따른다. 리처드 오버리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제프리 로버츠의 <스탈린의 전쟁>도 일부 참고했으며 가장 중요한 참고자료는 국내 최고의 독소전쟁사 전문가인 류한수 교수가 쓴 각종 논문들과 스탈린 시절에 대해 수정주의적 입장을 견지하는 노경덕 교수의 저술이다.

소련은 공업화가 의외로 잘된 나라였고 전시에 공장 이전도 잘했다


사실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 소련군의 상태는 좋지 못했다. 대숙청의 여파로 투하쳅스키와 로코솝스키를 비롯해 소련군 종심작전교리에 영향을 끼친 제정 러시아군 출신 장교들이 대거 반동으로 몰려 숙청당했으며 겨울전쟁에서 소련군은 정말 심각하게 준비를 못한 상태를 드러내며 추태를 보였다. 그나마 만주에서 있었던 할힌골 전투에서는 주코프의 탁월한 지휘와 관동군의 삽질 덕분에 그래도 승리는 해서 체면을 지킬 수는 있었지만 이미 겨울전쟁의 실패는 독일 국방군 장성들에게 소련군은 무능한 집단이라는 인식을 주기 충분했다.


그러나 대숙청의 여파로 작살난 소련군의 상황과는 달리 의외로 소련의 경제적 상황과 공업생산량은 최고치를 갱신하고 있었다. 1930년대 동안 군비증강과 연계되는 자원개발은 상승세를 탔으며 특히 석탄과 전차 생산량이 급증했다. 1940년대 이후부터 소련의 군수산업은 국가의 최우선 산업으로 자리잡았으며 1940~1944년 사이에 생산량이 2.5배 늘었다. 게다가 민간 트랙터 공장은 얼마든지 전차 공장으로 전환이 가능했으며 전쟁 직전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전차와 군용차량은 7배, 전투기 생산은 4배가 증가했다.


뭣보다 소련의 공업력은 독일의 침공 이후로도 조금 꺾인 감이 있지만 어느정도는 유지되었다. 1941년 7월부터 11월까지 1,523개 공장이 볼가 강 유역, 시베리아, 중앙아시아로 이전되었는데 군수 공장은 이 가운데 1,360개였다. 1942년 상반기에 소련의 전차 생산량은 1만 1,021대였고 IL-2 슈트르모빅, MiG-3 같은 신형 전투기가 본격적으로 투입되었고 T-34 전차는 모스크바 공방전 이후부터 기존 76mm 포를 버리고 85mm로 갈아타 전선에 투입되었는데 이는 독일군의 3호 전차나 4호 전차보다 성능 면에서 우위였다.


1930년대 소련의 정치체제는 단순히 스탈린의 폭정과 전체주의라는 단어로만 설명이 되는데 그리 단순하진 않다. 이 시기 소련은 조직 체계가 기존 통념보다 훨씬 현대화가 되어있었고 그렇기에 같은 전체주의라 평가받는 독일보다도 1942년에 소련이 훨씬 생산량에서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독일은 우랄 산맥 뒤로 공업지대를 겨우 이전시켜 급조한 공장들로 생산량을 채우는 소련과는 달리 체코슬로바키아라는 훌륭한 전차 공급 지대와 루마니아라는 석유 공급 지대까지 갖고 있었는데도 소련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리고 이건 전쟁 동안의 소련군에 대한 스탈린의 통제 부분인데 전쟁 초기까지도 스탈린은 대숙청 때처럼 소련군 장성들을 닥달하며 괴롭히긴 했지만 모스크바 공방전을 기점으로 그들을 믿고 맡기기 시작했다. 가령 로코솝스키는 대숙청에 휘말려 직위를 박탈당하고 수용소에 있던 장성인데 그를 데려와 중책을 맡겼고 할힌골 전투에서 유능함을 보여준 주코프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 1945년 만주 전략 공세 때는 바실렙스키에게 맡겨 상당히 훌륭한 기동전을 보이며 승리를 거둔 것처럼 막판에 국방군조차 신뢰하지 못해 간섭하다가 말아먹은 히틀러와는 달리 스탈린은 어느정도의 유연함을 점점 배워가며 발전해갔다.

애초에 랜드리스는 초반보다 후반에 집중되었다


미국은 1941년 3월부터 1945년 8월까지 전체 군사예산의 13%에 해당하는 군수물자와 지원금을 다른 연합국 국가인 영국, 중국, 소련 등에 지급했다. 소련에 본격적으로 지급하기 시작한 것은 1942년으로 아이슬란드를 통해 무르만스크나 아르한겔스크로 물자를 수송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북해를 장악한 게 독일군이었기에 공격을 받아 제대로 도착하지 못하기 일쑤였고 그 해 5월부터 지중해-페르시아만과 알래스카-북태평양을 통해 소련으로 물자를 수송하기 시작했다.


위의 그래프를 보면 알겠지만 1943년부터 물자 이동 현황은 급증하기 시작하는데 소련의 최악의 위기는 알다시피 1941~1942년 초반부다. 모스크바 공방전 이후로 소련군은 한 숨을 돌렸으며 독일군은 레닌그라드를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러니 실제적으로 소련이라는 나라 자체가 전쟁에서 패배할 여건이 갖춰진 시기는 남부집단군이 우크라이나를 점령하고 북부집단군은 레닌그라드를 포위하며 중부집단군이 모스크바로 점령할 타이밍이었지, 소련에 대한 본격적인 원조가 개시될 타이밍이었던 건 아니다.


그래서 소련군이 랜드리스 덕분에 혜택을 본 건 패망 직전에 구원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반격 작전이 수월하게 진행되는 것에 한 몫했기 때문이다. 사실 소련이 바르바로사 작전이라는 독일군의 침공을 받았던 시절에 미국은 아직 2차세계대전 개입을 조금 망설이고 있던 시기였고 그 해 12월에 독일, 이탈리아와 동맹이었던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하면서 명분을 확보하고 유럽 전선에도 개입하기 시작했다.

4%? 10%? 뭐가 진실인데??(+소련군에 대한 잘못된 인식의 형성)


이 말이 나오게 된 것은 전쟁이 끝난 이후 소련 학계와 서구 학계의 의견 대립 때문이다. 트루먼 대통령이 취임하고 처칠 수상이 '철의 장막' 발언으로 시작된 냉전의 흐름 속에 미국은 소련에게 자신의 물자를 지원했던 것에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이것이 가속화된 것은 국공내전에서 패한 국민당군이 두고 간 랜드리스로 받았던 미국제 장비가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군에게 넘어갔던 것이며 6.25 전쟁 중에는 소련이 2차세계대전 중 미국에게 랜드리스로 받았던 장비들을 북한에게 팔아넘긴다는 얘기가 나돌 정도였다.


이 와중에 전시에 국가계획위원회를 이끌며 소련 경제를 주도했던 보즈네센스키는 대전기 소련 정부의 생산량에 비해 랜드리스의 비중은 4%라고 발언한다. 이 말은 즉 자력으로 이겼다는 소리고 서방은 도움을 별로 안주었다는 말이다. 이에 미국 쪽에서 여론조사 결과 55%가 소련의 군수물자 대부분은 미국이 랜드리스로 준 것이라 생각한다는 결과가 나왔으며 루즈벨트 조언자였던 버나드 바루크는 1948년 한 언론에서 소련은 미국이 아니었으면 러시아 땅에서 쫓겨났을 거라 주장했다.


하지만 스탈린 사후 소련에서는 랜드리스를 두고 의견 차이가 벌어졌다. 흐루시초프는 1943년 스탈린이 테헤란 회담에서 미국의 기계 없으면 전쟁을 이길 수 없었을 것이라 말한 것을 공개했다. 그리고 그는 또 주코프 원수도 미국 원조 없이 전쟁을 계속하기 어려웠을 거라 말했다고 밝혔다. 다만 이는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사후 입지 다지기 위한 전임자 폄하의 의도가 있으며 스탈린의 저 발언은 완곡어법이라는 주장이 있으며 실제로 당시에 미국 고위 관료들도 우리의 지원은 부차적인 요인이고 주요 요인은 소련 인민들의 영웅적 투쟁 덕분이라는 식의 발언을 하며 미국 보수세력 반발을 잠재우려는 행보를 했기에 정치가의 발언을 당시의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보기란 무리다.


그럼에도 정치적 발언을 넘어 뼈 있게 랜드리스의 의의를 주장한 소련 정치가도 있다. 바로 연방 각료회의 부의장이었던 미코얀이라는 사람인데 미국이 지원한 차량이 소련군의 기동성에 큰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소련 군인 출신 트레버 드퓨이는 1941년 8개월 동안 항공 장비 개선은 미국과 영국의 기술 제공 덕이라 했다. 그러나 이런 의견은 소련 사회에서 주류가 되지 못했다. 1980년대 중반에 나온 군사대백과 사전에서 랜드리스 파트에는 미국의 랜드리스 지원이 당시 소련 산업생산량의 4%에 해당하는 98억 달러로 책정되었다.


그렇다면 서구 세계는 이에 어떻게 대응했는가? 그들은 4%가 아닌 10%라 주장하며 소련은 랜드리스 없었으면 버티지 못했을 거라 주장한다. 그러나 랜드리스를 너무 과소평가하며 의도적으로 깎아내린 소련 지도부의 정치적 행위 만큼이나 서방 학계의 소련군 역할 폄하도 그에 못지 않았다. 특히나 서방 학계는 냉전기 소련의 문서 수집에 제한적이었던 한계 탓에 소련군과 싸웠었던 만슈타인, 할더, 구데리안 같은 독일 국방군 장성 출신들의 회고나 저술에 의존했다.


이때 만들어진 게 독일 국방군 신화이며 여기서 가장 극단적인 부류는 전쟁범죄는 죄다 무장친위대나 아인자츠그루펜이 저질렀으며 국방군은 나라를 위해 열심히 싸웠지만 지도자를 잘못 만난 비운의 군대라는 식의 헛소리를 하기도 한다. 잘못은 전부 히틀러 탓이고 군대는 무죄라는 거다. 어쨌든 국방군 장성들이 나토 창설 과정에서 조언자로 활동하며 군사 저술을 남긴 것이 그나마 서구 입장에서 보자면 유일하게 독소전쟁에 대해 접근할 수 있는 자료였고 그들이 반공주의자였기 때문에 믿을 만하다 사료되었다.


그리고 서구 사회의 독소전쟁에 대한 무지의 끝판왕으로 나온 작품이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였다. 바실리 자이체프라는 소련군 영웅을 다룬 작품은 스탈린그라드에서 정치장교들이 소련군 병사들에게 장비도 안주고 돌격시키는 것처럼 묘사되며 강재규 감독의 한국 영화 <마이웨이>에서도 똑같이 묘사되었다. 심지어는 게임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2'는 이러한 묘사는 물론이고 독일 국방군이 피해자고 소련군은 야만적인 가해자라는 식으로 악의적으로 묘사한 것도 모자라 ROA, 즉 자유 러시아 군단이라는 블라소프 장군이 만든 독일측 괴뢰 무장단체를 넣는 참사를 저질렀다.

최종합의점인 7%


그러다가 탈냉전 시기가 오며 서방의 최대 위협인 소련이 붕괴되고 소련 측 기밀문서들이 풀리면서 학계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러시아 역사학계도 이전보다는 전향적이 되어 랜드리스는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결정적이지 않았다(내 입장도 그렇다)라는 결론에 다다랐고 <독소전쟁사>와 <8월의 폭풍>의 저자 데이비드 M.글랜츠는 무기대여법 없으면 소련이 졌을 거라는 인식은 망령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스탈린의 전쟁> 저자 제프리 로버츠는 대부분의 군사물자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에 도착했기에 랜드리스는 패배를 막는 역할보다 승리를 촉진시킨 역할을 했다고 평했다.


그래서 서방 학계의 전통주의와 수정주의의 교집합이 서서히 생기기 시작했다. 그 이후부터는 대체적으로 4%도 10%도 아닌 7%로 잡으며 랜드리스를 평가할 때 세부적인 품목을 따지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크리스 벨라미는 랜드리스는 7% 밖에 되지 않았지만 소련은 이를 효율적으로 사용했으며 단순히 군사 장비 뿐만 아니라 산업 설비, 원료, 식량 등 소련 인민경제에 필요한 물자들도 많았기에 군수생산에만 집중이 가능했던 배경이 있다고 보는데 그 말마따나 랜드리스는 확실히 소련이 지고 있는 부담을 조금이나마 지워줬다.

그럼에도 랜드리스는 중요했다


이 글 제목이나 본문에서 랜드리스 없었으면 패배했을 거라는 주장을 반박했던 것 때문에 내가 랜드리스 자체를 부정하는 소련뽕 밀덕으로 보일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랜드리스가 소련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소련이 랜드리스가 없었어도 지는 일은 없을 거다. 다만 미코얀의 말처럼 만약 미국이 랜드리스를 주지 않았다면 소련은 한 해 반 이상은 더 싸워야 했을지도 모른다. 랜드리스의 물자가 본격적으로 써먹혔을 때는 천왕성 작전 이후로써 반격이 대대적으로 성과를 낼 시점이라 확실히 랜드리스는 소련군의 베를린 점령 때까지 매우 큰 역할을 했다.


미코얀 주장대로 차량 지원은 군사적으로 의미가 깊다. 미국산 자동차는 소련군을 수송하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소련군 차량 보유고의 미국산 차량 비율이 1944년 19%에서 1945년 32%로 치솟았다. BM-13 카츄사 다연장 로켓포의 기원도 기본 차대부터가 미국산 화물차였으며 미국제 P-39 전투기는 훗날 냉전기 소련군 전투기 개발의 근간이 되었다. 랜드리스로 받은 식량과 군수물자를 나르는 미국제 화물차는 15,000대였다.


무엇보다 소련군에 있어서 랜드리스의 가장 긍정적인 결정적 역할은 통신이다. 소련군의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 패퇴 원인 중 하나는 무선 통신의 공백이었는데 랜드리스로 미국제 통신장비들이 들어왔고 이는 1943~1944년 시절 반격 작전에서 핵심이 된다. 그리고 이때를 기점으로 무선 통신 설비를 확충한 소련군은 전간기 투하쳅스키의 종심 작전 이론을 더욱 더 발전시켜갔으며 오늘날 러시아와 CIS권 국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줬다.


수정주의 학자들도 랜드리스가 없었다면 설령 소련이 이기더라도 피해가 매우 심각했을 것이라 진단한다. 승리를 하더라도 깔끔하지 못했을 것이며 독일군을 몰아내기 위해 최소 12~18개월을 더 싸웠을 확률이 높다. 그 과정에서 민간인 희생은 매우 커졌을 것이고 소련 혼자 전쟁을 부담해야 했기에 더 힘들어졌을 것이다. 소련의 최고 곡창지대는 우크라이나 지역인데 전쟁 초기 남부집단군이 점령해버렸으니 식량 공급도 문제가 있었고 특히 돈바스는 소련 공업지대 중 중요한 지역이었기에 뼈아팠다.


랜드리스의 역할을 과대평가하는 걸 반박하는 글로써 이 글을 썼지만 그래도 중요한 역할을 한 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고 오늘날 러시아 학계도 마냥 부정하진 못한다. 그렇지만 랜드리스를 지원받았기에 소련군은 혼자서 못싸우는 무능한 집단이라는 주장은 동의하기 어렵다. 랜드리스를 받은 건 영국과 중국도 있었는데 중국 국민정부도 그럼 과연 랜드리스만 받아쳐먹고 일본하고 싸우지 않았는가? 국민정부나 소련이나 각각 동유럽과 동아시아에서 추축국 세력의 발목을 잡고 출혈을 강요해 서부전선과 태평양전선에서 승리하는 것의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보론: 소련군은 단순히 물량빨로 이겼을까?


6.25 전쟁에서의 중공군 인해전술처럼 오랫동안 깨지지 않았던 통념이다. 일단 소련군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에너미 앳 더 게이트'와 같은 우라 돌격으로 대표되는 인명을 경시하고 진격시키는 군대다. 물론 체첸 전쟁 때처럼 누가봐도 인명 경시적 풍조로 보인 전쟁도 있었다. 하지만 이걸 생각해봐야 하는게 나폴레옹 전쟁 시절 때부터 찰스 스튜어트 경 장군이나 로버트 윌슨 경 같은 영국군 측 장성들도 러시아의 포병과 화력 집중 전략을 높게 평가하고 1차세계대전 당시 오스만군의 캅카스 원정 당시에도 여전히 러시아군은 화력에서 밀리지 않는 등 이처럼 제정 러시아 시절부터 러시아의 상징은 포병이었다.


소련군도 마찬가지로 적백내전 이후 악조건 속에서 라팔로 조약을 통해 독일군과 교류해오며 기갑전력을 확충하고 투하쳅스키 등의 이론가들이 종심 작전 교리를 만들었다. 다만 전쟁 이전 소련군의 기계화 부대는 여러 정치적인 문제로 그렇게 완편에 가깝게 조직되진 못했다. 군단 체계는 경직되어 비교적 유연한 독일군 차령화 군단이랑 차이가 있었고 서부 전선군의 제4군은 불과 520대의 구식 T-26 전차만 보유할 정도였다. 사단 병력도 8,000명 가량에 불과했으며 1941년 상당수의 야전군은 불과 6~10개 소총병 사단으로 구성된 2개 소총병 군단만으로 구성되어 있던게 실상이다. 거기에 전력 유지에 필요한 지원 병력도 사실상 없다시피 했고.


그래도 막상 전쟁이 발발하니 조직 체계가 재정비 되게 된다. 그리고 소련군이 대규모 군단을 굴린 것은 엥겔스의 징병제를 통해 혁명이 쉬워진다는 이론을 따른 것이고 반면 독일은 한스 폰 젝트 장군의 소규모 정예군 이론을 따르니 당연히 차이가 나는거다. 게다가 소련의 영토는 매우 넓었으니 말이다. 독일군 참전장병들은 소련군에 비해 1:17 비율로 자신들이 열세였다고 회고하는데 사실 이건 소련군이 대규모라기 보다는 소련 자체가 공세작전에 앞서 부차적 축선의 전력을 주공 축선으로 전력이 빠져나간 지역에 아직도 병력들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위장했기 때문이다.


또한 소련군은 대전기에 완편되지 못한 사단들도 많았다. 1944년에 소총병 사단 정원이 전쟁 전보다 오히려 적은 5,000~6,000명에 불과했으며 1945년에는 2,000명으로 줄은 사단도 있었다. 이는 인력 손실 탓도 있지만 부대가 피해를 입으면 아예 새로운 부대를 편성하는 소련의 특성 탓이다. 의외로 바그라티온 작전 이후인 1945년에도 소련군은 독일군에게 두 번의 공세로 인해 일시적으로 후퇴한 적이 있었는데 이걸 보면 소련군이 과연 물량이 썩어넘쳐서 병사들을 무지성으로 돌격시켜 깃발 꽂게 할 만큼이었는지 의문이 든다.

결론: 소련군은 승전에 매우 큰 기여를 했다

“나는 외치고 싶었다. 러시아, 벨라루스,폴란드의 땅 속에 누워 있는 이들. 우리가 거쳐온 땅에서 영원히 잠든 이들에게 소리치고 싶었다. "동무들, 우리가 해 냈소!"

- 모스크바 공방전부터 바그라티온 작전을 거쳐 베를린 공방전에 참여한 어느 소련군 병사의 말 -


한국인들이 2차세계대전에서의 승리하면 가장 많이 떠올리는 국가는 미국이고 영화 <덩케르크>가 한창 개봉했을 때는 영국에 이목이 잠깐 가기도 했다. 물론 미국도 영국도 큰 역할을 했다. 특히 아시아 지역에서 일본이 패망하고 한국이 비록 분단의 원인이지만 어쨌든 광복을 맞이한 것은 미국의 공이 매우 크며 그들은 다른 연합국의 전쟁 수행에 물적으로 큰 도움을 줬다. 영국 역시 처음에는 고생했지만 본토 항공전에서, 북아프리카에서 훌륭한 기량을 선보였다.


그래서 2차세계대전의 민주주의의 승리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 단편적인 시각으로만 볼 수 있을까? 미국과 영국이 서부전선에서 그리고 태평양전선에서 마음 놓고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소련이 막대한 희생을 하면서 독일군 절반의 발목을 붙들어놨기 때문이다. 즉 민주주의가 승리하기 위해 밟고 간 계단 중에는 수많은 소련군 병사들의 피로 이루어진 것도 있다. 그들이 아니었으면 그 많던 독일군은 서부전선으로 향했을 것이며 어쩌면 바다사자 작전이 개시되어 영국 본토 공략이 시작되었을 가능성도 아예 없진 않겠다.


2차세계대전의 끝에 있던 것은 평화가 아닌 냉전이었다. 그렇지만 최악 속에서 차악까지 끌어올리게 된 건 수많은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 문헌:


데이비드 M. 글랜츠, <독소전쟁사 1941~1945: 붉은 군대는 어떻게 히틀러를 막았는가>, 열린책들, 2007

리처드 오버리,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지식의풍경, 2003

제프리 로버츠, <스탈린의 전쟁>, 열린책들, 2022

안토니 비버, <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 전투>, 다른세상, 2012

한설, <레닌의 전쟁관 연구: 러일전쟁부터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까지>, 고려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2004

류한수ㆍ유승현, <'진흙발의 거상'인가? '붉은' 스팀롤러인가?: 러시아/소련 군대에 관한 서방 세계의 편견과 실상>, '중소연구' 제41권 1호, 한양대학교 아태지역연구센터, 2017

이정하, <러시아 내전기 적군 기병의 형성과 운용>,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6

류한수, <제2차 세계대전의 "잊힌 전선": 한국 사회와 학계의 독소전쟁 인식>, 러시아연구 제27권 제1호,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 연구소, 2017

류한수,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붉은 군대 전투 역량의 실상과 허상>,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 연구소, 2017

류한수, <무기대여법은 소비에트 연방의 승리에 얼마나 이바지했는가? -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미국의 대(對)소련 군수물자 원조를 둘러싼 쟁점과 역사서술의 동향>,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 연구소, 2023

이강경 외, <1941~1945년 독소전쟁시 소련의 승전요인 고찰: 무기체계 획득 및 전시생산체제를 중심으로>, '한국군사학논총' 제11집 제3권, 미래군사학회, 2022

비만 아자드, <영웅적 투쟁 쓰라린 패배>, 노사과연(노동사회과학연구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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