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이슨 Jun 18. 2023

일본은 왜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시작했는가?

실패한 전쟁사-3

https://youtu.be/wEUrovGJSZs?si=TSilrZozSkXwyv7C

1941년 독일군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통해 소련을 침공할 때 이길 것을 상정하고 전쟁을 시작했다. 직전 프랑스 침공 때도 만슈타인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가정하고 낫질 작전을 계획했으며 6.25 전쟁 당시 북한군도 8월 15일 안에 적화통일을 할 것을 상정하고 개시했다. 또 미국이 걸프전에서 이라크군을 처참할 정도로 짓밟은 것도 그만큼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도 7년 전쟁, 나폴레옹 원정, 슐리펜 계획 모두 이기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상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외적인 국가가 있었다. 바로 일본이었다. 일본인들은 미국과의 전쟁을 결단하며 이길 것이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전쟁을 선택했다. 도대체 왜 일본은 이기지도 못할 전쟁을 한 것일까?

가진 나라와 가지지 못한 나라의 사이에서


쇼와 시대 일본 군부의 흐름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황도파로 천황을 중심으로 한 친정 체제 수립을 주장하는 이들이고 하나는 테그노크라트적 독재를 주장하는 통제파였다. 황도파는 농촌 출신 청년장교들이, 통제파는 육군대학교를 졸업한 엘리트 참모들이 중심이었다. 역사 속에서 승리한 것은 결국 통제파였다. 2.26 사건에서 마케이누가 된 황도파는 한직으로 밀려났으며 1940년 대정익찬회가 수립되고 1941년 도조 히데키 내각이 들어서며 통제파들이 정국을 주도하기 시작한다.


통제파들은 가지지 못한 나라가 가진 나라가 되면 총력전에서 이길 수 있다고 봤다. 따라서 당시까지는 통제파였던 이시와라 간지가 상당한 잠재력이 있는 만주를 무력으로 장악한 것이다. 통제파의 전쟁 수행을 보조한 혁신관료들은 자원의 절대량이 부족해도 과학기술로 극복이 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대미개전을 앞두고 통제파의 한 때 리더였던 이시와라 대장은 1960년이 되야 미국과 대등한 총력전을 할 수 있을 거라고 하며 반대했다.


그렇다면 일본 군부는 열세인 국력을 보충할 방법을 어디에서 찾았는가? 바로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황도파의 뿌리 오바타 도시로가 만든 <통수강령>, <전투강요>에서 가져왔다. 1차세계대전의 타넨베르크 전투처럼 정신력으로 무장하면 장비가 열악하고 수가 적어도 포위섬멸이 가능하다는 건데 오바타는 무작정 정신력이 옳다는게 아니라 특수한 조건 하의 상황, 즉 제한적인 단기전쟁에서만 사용이 가능하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러나 그런 앞뒤 맥락을 짜르다 보니 부족한 자원을 정신력으로 무조건 메꿀 수 있다고 하는 해괴한 이론으로써 훗날 옥쇄의 기원이 된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만주사변의 잘못된 교훈


사실 엄밀히 말해 일본이 메이지 유신 이래 이길 거라고 확신하고 일으킨 전쟁은 거의 없다. 청일전쟁 당시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해 조슈파 번벌 정치가들은 개전에 신중했으며 메이지 천황도 "대신들의 전쟁"이라 표현했다. 가장 적극적이었던 것은 무쓰 무네미쓰 외무상이었고 당시 열강들은 청나라가 이길 거라 예상했다. 해군 전력만 하더라도 북양해군이 연합함대를 규모 면에서 압도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결과를 보니 청나라군은 썩어빠진 추태를 보이며 일본에게 시모노셰키 조약이라는 굴욕적인 조약까지 맺고 패했다.


러일전쟁도 일본 가쓰라 내각은 의외로 신중하게 움직였으며 비테 장관과의 교섭이 실패하고 강경파인 베조브라조프가 니콜라이 2세 근처에서 힘을 얻고 러시아 태평양함대가 여순항에 들어온 것에 이어 시베리아 철도 완공, 대한제국의 친러 외교 등 악재가 겹치자 개전한 것에 가깝다. 이때도 일본은 어쩔 수 없이 하는 전쟁으로 생각하며 조마조마했다. 노기 장군이 지휘한 여순 공방전에서 피해는 막심했으며 봉천 전투에서 러시아 육군을 궤멸시키고 쓰시마 해전에서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발틱함대를 수장시키 전까지는 말이다.


만주사변도 일본 입장에서는 황당한 사건이었다. 분명 관동군은 1~2만 밖에 안되었고 장쉐량의 동북군벌은 정규군 30만명에 펑톈 병기창이라는 중국 최대의 군수공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은 이시와라 간지가 독단적으로 류탸오후 사건을 일으켜 동북군벌을 기습했을 때 와카쓰키 내각은 당황함 그 자체였고 미칠 지경이었다. 장쭤린 폭사 시킨 것도 문제가 되었는데 저러면 더 큰일 나니까. 그러나 장징후이를 비롯해 동북군벌 구파 세력들이 관동군에 붙고 장쉐량이 저항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신기하게도 관동군은 마잔산 부대를 제외한 나머지를 제압했다.


군사적으로도 러일전쟁의 경험은 일본군의 방향을 화력주의에서 백병주의로 전환하는 계기였다. 러일전쟁 내내 일본군은 보불전쟁의 교훈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보병조전>대로 몰트케식 화력주의의 입장을 견지했으나 실제 전장에서 일본의 전시 생산력은 절대 소모량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래서 투석으로 싸웠다는 얘기도 나돌 정도이며 여순 공방전에서 노기 마레스케 장군이 무지성으로 일본군을 닥돌시켜 점령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개전 2일 만에 일본군이 3만 발의 포탄을 소모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처럼 일본은 태평양전쟁 이전 전쟁들에서 교훈을 되살리지 못했다. 오히려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에서 결과적으로 이겼었던 것만 생각하며 깊게 성찰과 반성을 할 만큼의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 이는 결전주의로 이어지는데 결전만 이기면 모든지 다 해결될 거라는게 일본의 사고방식이었다. 그리고 그것의 뿌리는 쓰시마 해전 당시의 도고 제독이 이끌던 연합함대의 행보였다.

??: 국력이 부족하다고? 결전에서 이기면 그만이야~


위에서 청일, 러일전쟁에서 일본군이 결전주의라는 잘못된 교훈을 얻었다고 했다. 태평양전쟁 개전 때도 이게 작용했다. 1941년 내각 총리대신실 산하 총력전 연구소는 일본이 반드시 전쟁에서 질 거라는 시뮬레이션 결과를 내놓았다. 당장 미 해군을 깊게 공부해온 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함대 사령장관도 6개월만 버틸 수 있고 그 후는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다고 봤다. 심지어 중일전쟁을 일으켰던 주범인 고노에 후미마로 전 총리조차도 이길 수 없기에 협상해야 한다고 입장을 내놨다. 상징적 국가원수인 쇼와 천황조차도 개전 얘기를 듣고 진짜로 이길 수 있냐고 반문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군부 참모들은 생각이 달랐다. 분명 미국 본토로는 쳐들어가지 못할 거고 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태평양에서 미 해군을 박살낼 수만 있다면 미국은 협상으로 나와 ABCD 포위망을 해제하고 대동아공영권을 인정해줄 수 밖에 없다, 뭐 이런 발상이었다. 동시에 미 해군을 박살내려면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결정적인 전투' 한번으로 가능하다는 거고. 실제로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은 뉴기니, 미드웨이, 과달카날, 레이테 만 등 각종 지역을 찾아다니며 여기서 미군을 한방으로 꺾으면 전쟁이 끝날 거라는 허황된 생각을 했다.


문제는 미국이 전투에서 피해를 입는 것과 일본이 전투에서 피해를 입는게 차원이 다르다는 것. 이시와라식 표현에 따른다면 미국은 가진 나라였고 일본은 가지지 못한 나라였다. 미 해군은 항공모함이 오래 머무를 수 있도록 보급을 유지하는게 가능했지만 일본은 전쟁 기간 중 전쟁 초기를 제외하면 일시적으로라도 재해권을 잡기 어려웠으며 남방 지역 중 싱가포르를 제외하면 드라이독을 쓸 수 있는 지역이 없었다. 게다가 미국은 전쟁 이전부터 잠재적 생산량이 넘쳐나는 국가였고 반면 일본은 단기간에 설비를 확충할 능력이 없었다.

전선 확대와 자원의 부족, ABCD 포위망으로 이어진 딜레마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은 초기에 상하이를 제압하고 내륙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일본의 예상보다 국민정부는 끈질겼다. 국민당 중앙군은 시가지에서 전멸당할 때까지 버텼으며 지방군도 부대가 와해된 상황 속에서 유격대를 창설해 일본군 점령지에서 교란했다. 특히 일본은 넓은 점령지에 비해 병력 밀도가 매우 떨어졌기에 물자 보급에 치명적인 영향이 갔다. 이 때문에 벌어진 게 삼광작전이며 난징을 수많은 희생 끝에 함락시키자 분노한 일본군들은 닥치는대로 살육을 벌이게 된다.


그러나 일본군의 집요한 공세에도 국민정부의 임시수도 충칭은 함락되지 않았으며 대공습을 한 것은 공포보다는 분노를 불러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중국 전선은 1938년 이래 교착 상태에 빠졌고 일본의 전쟁 수행은 슬슬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다. 따라서 전쟁에 필요한 자원을 얻기 위해 독일의 서유럽 함락과 함께 마쓰오카 요스케의 주도로 삼국 방공협정을 맺고 남방으로 진출해 식민지군을 무장해제시켰다.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는 석유부터 고무까지 자원의 황금밭이었다.


근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일본군이 남방으로 진출하자 미국은 위협을 느꼈고 ABCD 포위망을 결성해 대일전략물자 수출을 금지한다. 당시 일본은 대부분의 석유와 자원들을 미국에서 가져오고 있었고 기껏 얻은 남방 지역은 자원은 풍부했지만 정제하여 일본 본토에 완제품으로 보낼 능력이 없었다. 어떻게든 포위망을 풀기 위해 일본은 도고 시게노리 외무상을 중심으로 미국과 협상을 시도해 철군 방안을 마련하고자 했다.


그러나 군부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무책임한 도조 수상과 헐 노트에 분노한 군부


대미교섭파 고노에 후미마로가 사퇴한 이후 총리가 된 사람은 통제파의 리더 도조 히데키였다. 도조 히데키는 고노에 내각 당시 육군상으로써 대미 강경론을 주도하던 이였다. 그런데 의외로 도조 수상은 취임과 함께 대미 협상을 이어가겠다는 방침을 발표한다. 사실 도조 개인이 강경파여서 고노에 내각을 압박했다기보다는 육군의 대표로써 내부 의견에 따라 입장을 내세운 것에 가까웠기에 크게 모순되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군부는 자신들의 편을 들어주던 도조가 총리에 오르니 변절자가 되었다며 거세게 압박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더해 도조가 추진한 대미 교섭도 제대로 풀리지 않았는데 이때 미 국무장관 코델 헐이 일본 외무성에 전달한 '헐 노트'가 큰 문제가 된다. 대충 간단히 내용을 요약하자면 1. 장제스 이외의 중국 정권(왕징웨이 등)을 인정하지 말 것 2. 삼국 방공 협정을 파기하고 추축국에서 탈퇴할 것 3. 남방 지역과 중국 전선에서 병력들을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이게 일본의 분노를 불러온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중국 전선 포기를 중국 이권 포기로 본 것이다. 일본은 "만몽은 생명선"이라는 프로파간다를 내세웠을 만큼 만주 지역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실제로도 만주의 자원은 일본 전쟁 수행의 공신이었다. 그런데 일본은 이 중국 이권 포기 조항은 만주국도 포기하라는 소리로 인식했다. 미국은 그런 의도까지는 아니었다고는 하나 뭐 어쨌든 일본은 제국 식민지들을 해체하라는 소리로 인식했으니 말이다.


외무상 도고 시게노리는 헐 노트를 받은 이후 내각에 희망이 없다며 외교 교섭 중지를 선언했다. 도고 외무상이 당시 일본 내각에서 가장 대미 교섭에 적극적인 각료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마 이때부터 일본은 개전으로 의견이 통일된 듯하다. 게다가 1941년은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여 승승장구하던 해였다. 특히 일본은 독일과 동맹이었기에 뭐라도 해서 추축국이 재편할 전후 질서 구상에 참가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이렇게 헐 노트가 가져온 파문은 대미교섭파를 싸그리 몰락시키고 군부의 주도 하에 전쟁을 일으키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보론: 미국의 인종차별이 일본의 반미 감정을 불러왔다


이건 여담 겸 보론으로써 전간기에 일본의 반미 감정이 생기게 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만든 파트다. 미국의 동양인 차별은 1882년 중국인 배제법으로 시작되었는데 이때 미국은 중국계 이민자들의 시민권을 허용하지 않았다. 캘리포니아의 일본인 이민자는 저임금으로 일했지만 정작 미국은 1906년 일본인 학생의 공립학교 입학을 거부하고 1907년에는 일본인 이민을 배척하는 조항을 넣은 연방 이민법을 통과시켰다.


당시 일본과 미국은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일본에 호의를 보이고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을 만큼 겉으로는 사이가 좋아보였다. 그러나 미국은 러일전쟁을 기점으로 아시아인에게 세계가 지배당할 것이라는 음모론인 황화론이 생겨나자 일본을 경계하기 시작했고 위의 행보는 그 일환이었다. 따라서 1차세계대전에 일본이 영일동맹을 근거로 참전하려 할 때 영국의 그레이 외무장관은 막아섰는데 미국은 영국측 입장을 지지하며 참전의 조건을 걸며 대놓고 경계를 했다.


일본인들은 메이지 유신 과정에서 서구를 동경했다. 근대 자유주의 지식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탈아입구를 주장하며 서구화에 대한 환상을 보였고 이와쿠라 사절단을 비롯해 일본 엘리트들은 직접 서구, 특히 영국과 미국에 가서 신문물과 제도를 배워왔다. 구한말 조선의 개화파들이 일본을 동경했던 원리와 비슷하다. 탈아입구의 결론은 아시아라는 악우와 손절하고 서구에 들어가자는 것이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러일전쟁의 승전으로 열강들의 모임에 끼게 된 일본에게 서구는 황화론을 통해 그들을 구라파의 일원이 아닌 열등한 아시아인으로써 볼 뿐이었다.


물론 일본의 확장주의적 행보가 옳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어쨌든 러일전쟁 이후 서구 사회 전반에 황화론이 퍼지며 아시아인을 차별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게다가 워싱턴 군축회의에서 일본 쪽이 불리하게 합의가 나오자 일본인들의 반미 감정은 더 커지기 시작했으며 이게 군국주의의 원인으로 자리잡는다. 미국도 일본의 팽창에 맞서 자국 내 일본인의 권리를 제한하는 등의 조치를 서서히 취하기 시작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일본인들도 확장 행보에 대한 책임이 있기에 마냥 피해자는 아니지만 전쟁 발발 이후 미국이 취한 정책은 철저히 인종차별적이었다. 행정명령 9066호는 진주만 공습이 벌어지자 일본계 미국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수용소에 가둔 조치다. 문제는 독일이나 이탈리아에 대해서는 이런 조치를 전혀 하지 않았으면서 일본에게만 했다는 거다. 당연히 개전 책임은 일본에게 있지만 미국의 이런 조치는 괜히 일본 정부와는 상관이 없는 일본계 이민자들에게 화풀이한 것과 다를 바 없으며 이는 전후 미국 행정부도 자신들의 실책이었다고 인정한 사안이다.


이 얘기에 대해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개전하기로 결정한 것과 무슨 상관이 있냐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미국의 동양인 인종차별이 일본의 반미 감정과 전쟁 개전을 결정했다고 말하려는게 아니다. 그러나 러일전쟁 이래로 미일관계가 악화되어오는 과정에서 서구 사회의 황화론 공포로 인한 인종차별이 일본인, 더 나아가 구라파를 동경하여 미국에 갔던 엘리트들에게 어떤 식으로 다가왔을지, 그리고 그때 느낀 감정이 훗날 미국에 대한 적대정책을 구상하는 밑바탕 정서의 일부가 된 것은 있다고 본다.

결론 1: 자기 객관화가 안된 군대는 실패한다


물론 일본의 결전주의적 도박이 적어도 태평양 전쟁 전까지는 결과론에서는 유효했기에 그들이 자만심을 가진 걸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어쨌거나 윗 문단인 '청일전쟁, 러일전쟁, 만주사변의 잘못된 교훈'에서 다룬 것처럼 무모한 짓으로 유효타를 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하나 확실한 건 1894년 청일전쟁 이후부터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 이전 일본이 싸워온 상대들은 소위 말하는 '병든 국가'나 '잔챙이'들이었으며 그랬기에 무모한 짓이 성공했던 것이다.


청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제정 러시아 역시 상당히 곪을대로 곪은 국가였고 전쟁 중에 피의 일요일 사건이 터져 그대로 전쟁이 끝났다. 게다가 러시아는 병력 대다수가 동유럽 지역에 있기에 극동 지역으로 수송하려면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구조였다. 1914년 칭다오의 독일군은 그냥 일개 조계지를 지키는 수비군에 불과했고 장쉐량의 동북군은 병력은 많았지만 대부분이 비적떼 수준이었으며 옌시산으로부터 톈진 일대를 지켜야 했기에 만주사변이 벌어진 와중에도 정예사단을 투입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중일전쟁도 마찬가지다. 국민당군은 독일 군사고문단 휘하의 중앙군만 빼면 대부분이 군벌군 연합체였으며 오랜 내전으로 힘을 모으는게 어려웠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식민지군과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의 식민지군은 본토가 독일에 점령당한 상태라 저항을 할 수가 없었으며 태평양전쟁 초기 싱가포르와 말레이 반도의 영국군, 하다못해 필리핀에 주둔한 미군조차도 일개 식민지군이라 힘이 없었기에 금방 제압당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이들을 무찌른게 자신이 강해서라고 착각했다.


반자이 돌격이 밈화된 것처럼 나는 일본군이 마냥 무능하고 멍청한 집단이라고 비하하려는 건 아니다. 청일전쟁의 황해해전이나 러일전쟁의 쓰시마 해전에서 그들이 보여준 전술은 각각 충각전술론 논파와 거함거포주의 열풍에 기여했으며 경직화된 시기인 중일전쟁 시기에도 일본군은 이치고 작전이나 태평양 전쟁의 사보섬 해전처럼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담대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쿠리바야시 장군은 이오지마에서 미 해병대에 심각한 수준의 타격을 입혔으며 적어도 아래 하급장교들이나 부사관들은 실전에서 나름 괜찮은 기량을 보여줬다.


그러나 일본군은 교조화된 나머지 이전 전쟁의 교훈을 못살렸으며 상층부 중에서 흐름을 제대로 파악한 이는 소수였다. 결국 그러다 보니 자국민들에게 옥쇄를 강요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일본군의 가장 큰 문제는 자기 객관화를 할 수 없는 조직이었다는 것인데 이들이 황군이라는 자부심에 빠져 이전에 써먹힌 위험한 도박을 반복하면 끝에는 아마테라스 신(?)의 가호를 받아 승리할 거라 착각한 거 보면 답이 나온다. 스스로 합리적이라 자처하는 통제파조차도 자원의 절대량은 과학 기술로 극복할 수 있다고 하며 루덴도르프가 만든 총력전 철학을 계승하나 싶었지만 결국은 어쨌든 야마토 정신은 우월하기에 이긴다는 식의 자기당착에 빠진 것만 봐도 그렇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미군은 중일전쟁, 남방 작전 때까지 일본군이 싸워왔던 완전히 성격 자체가 달랐다. 시작부터 둘리틀 공습을 할 만큼 대양을 건너 작전을 펼칠 수 있고 압도적인 항공 전력을 가진 군대였으며 미 해병대는 특히나 상륙시 함포 사격이나 항공 지원에 대한 교리와 상륙장갑차, 상륙부대와 함정 간 통신 교리도 없던 일본군과는 달리 체계적으로 그 힘든 상륙을 할 수 있는 최적의 여건을 다 갖춘 군대였다. 또 아예 외부 지원 없이 생존 자체가 힘들었던 중일전쟁 시기 중화민국 국민정부와는 달리 미국은 일본을 능가하는 압도적인 생산량으로 물량 공세를 찍어내 얼마든지 전쟁에 장비를 대량으로 투입할 수 있는 그야말로 '사기캐'에 가까운 국가였다.


그런 군대와 싸웠으니 뭐 4년이나 버틴 것도 기적이다 싶기는 한데 애초에 총력전 연구소나 고노에 후미마로 전 총리, 야마모토 이소로쿠까지 국내에서 미국을 좀 안다 싶은 사람들은 죄다 이길 수 없다고 말한 시점에서 어떻게든 물러섰어야 한다. 헐 노트는 일본 국내의 인식과는 달리 즉시라는 표현과 최후통첩이었다는 얘기는 일본측의 오독이었으며 만주국을 포기하라는 내용은 없었으니 그냥 중일전쟁 이전 상태로 되돌려 놓으라는 것으로, 제국 해체 요구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근데 그걸 이상하게 해석해서 전쟁으로 끌고 갔으니  시점에서부터 잘못될 게 뻔했다.

결론 2: 개전 81주년을 맞은 현재, 태평양전쟁의 망령은 되살아나는가?


보론 겸 결론이다. 태평양 전쟁에서 패한 일본은 GHQ의 지배를 받았다. 일본국 헌법이 제정되고 자유민주주의가 도입된 일본은 대전기 반전 인사였던 요시다 시게루가 만든 경제 우선 논리에 따라 경제 개발에 집중했다. 자민당의 보수 본류 세력은 오부치 게이조 총리 때까지 아주 큰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모리 요시로 이후부터는 방류에게 주도권이 넘어갔지만 여전히 자민당의 3분의 1 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개헌 지지적 성향이 있긴 하지만 기시다 총리도 본류 출신이니 말이다.


쇼와 시대 런던 해군 군축 조약이 일본 군부의 폭주를 불러왔던 것처럼 2010년 센카쿠 열도 어선 체포 사건 이후 오늘날 일본도 적극적인 재무장을 하고 있다. 아베 신조 내각은 2014년 집단적 자위권을 인정하여 사실상 자위대의 공격 능력을 인정했으며 2019년 트럼프 대통령의 방일 당시 아베는 함께 해상자위대 소속 이즈모급의 2번함 카가에 승선하였다. 카가라는 이름은 진주만 공습에 참여했고 미드웨이 해전 당시 자매함이자 기함이었던 아카기와 함께 기습 공격을 받아 바다에 수장되었던 그 항공모함에서 따온 것으로 역사의 아이러니다.


일각에서는 일본 군국주의 망령의 부활을 우려한다. 특히 한국 정치권에서 자위대 행사에 참석했던 모 국회의원이 10년 넘게 왜구라는 이름으로 조롱하는 것이나 2018년 일본 해상자위대 초계기와 한국 해군 함정 간의 충돌 같은 일본 우경화라고 부르는 흐름에 대한 우려와 상관 있다. 이러한 우려는 일리가 있고 일본이 꾸준히 한국에 대한 은근슬쩍 도발적 행위를 해오는 것도 사실이기에 감정적으로 반감이 생기는 건 당연할 수 밖에 없다고 본다.


일본의 재무장은 군국주의 시절보다는 한 때 적이었던 미국의 이익을 위한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대동아공영권보다 탈아입구에 가까운 모습이다. 따라서 오늘날 일본의 기조는 자유주의적 질서 아래 무역을 통해 성장하는 메이지 세계관에 기초해있다는게 정설이다. 다만 2차세계대전 당시에는 일본을 중심으로 한 대동아공영권 진영이 미국, 영국, 호주, 중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 진영에 맞섰던 걸 생각하면 현재 일본은 옛 적 미국, 영국, 호주와 손잡고 중국을 포위하는데 나서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일본이 만든 구상은 인도-태평양 전략이다. 트럼프 이전부터 아베가 2013년부터 꾸준히 주장해오던 것인데 흡사 대동아공영권과 자유주의적 질서를 합친 듯한 느낌이었다. 한 때 일본 제국에 협력한 동남아 국가들, 그리고 추가로 대서양 질서의 큰 축인 영미 세력이 모였으니 말이다. 그런가 하면 중국이 주장하는 일대일로도 대동아공영권과 비슷한 느낌이 살짝 드는데 어쩌면 대륙 지향인 중국의 일대일로가 해양 질서인 인도-태평양 전략보다 일본 군부가 지향하던 바에 가까울 지도 모르겠다.


현재 쇼와 시대 일본 군부의 이상을 대놓고 계승한 나라는 없다. 그러나 중국이 패권국으로 부상하려 하고 일본이 자유주의적 질서를 기반으로 메이지 세계관을 구축하는데 있어서 두 국가의 엘리트들은 태평양전쟁 직전에서의 일본을 닮아가고 있다. 자기 객관화에 실패한 수뇌부는 강경파가 되어 1인자를 압박하고 1인자는 원치 않을지라도 이들의 기조를 따르고 있다. 과연 이들의 행보가 어떤 결말을 낳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최소한 이들이 자기 객관화를 못하고 책임감이 없는 행동한다면 그건 그들 나라 입장에서도 최악의 지정학적 변화를 가져오리라 예상한다.


마치 81년 전 일본 군부가 질 수 밖에 없는 환경이 보이는데도 정신력과 한 번의 결전만으로 이길 수 있다고 정신승리하며 진주만을 공습한 것처럼.


참고 문헌:


존 톨랜드, <일본제국 패망사: 태평양전쟁 1936~1945>, 글항아리, 2019

가타야마 모리히데, <미완의 파시즘>, 가람기획, 2013

야마다 아키라, <일본, 군비 확장의 역사>, 어문학사, 2019

오타니 다다시, <청일전쟁, 국민의 탄생>, 오월의봄, 2018

에드워드 베르, <히로히토: 신화의 뒤편>, 을유문화사, 2002

가토 요코,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서해문집, 2018

가토 요코,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어문학사, 2012

조너선 파셜 외, <미드웨이 해전: 태평양전쟁을 결정지은 전투의 진실>, 일조각, 2019

도베 료이치, <역설의 군대: 근대 일본군의 기이한 변용>, 소명출판, 2020

노나카 이쿠지로 외, <일본제국은 왜 실패하였는가 - 태평양 전쟁에서 배우는 조직경영>, 주영사, 2009

호사카 마사야스, <쇼와 육군>, 글항아리, 2016

호사카 마사야스, <도조 히데키와 천황의 시대>, 페이퍼로드, 2012


매거진의 이전글 미군은 왜 아프가니스탄에서 패배했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