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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Jul 30. 2023

유고 내전, 세르비아만의 책임을 넘어서 근본적인 문제로

실패한 전쟁사-12

https://youtu.be/z2wF6K4wsv0?si=dDYduVDg6fj8T8NH

유고슬라비아 내전(이하 유고 내전)은 20세기 마지막을 장식한 최악의 비극이며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동유럽 내 마지막 대규모 전쟁이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말은 바로 "인종청소"이다. 발칸의 도살자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라는 인간 말종이 세르비아 민족만의 "생활권"을 확립한다는 이유로 보스니아인들과 코소보인들을 짓밟고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를 침공한, 히틀러 이래 최악의 절대악이 약소민족을 짓밟은 사례라는게 유고 내전에 대한 인식이다.


세르비아가 이 전쟁에서 인간으로써 도저히 할 수 없는 쓰레기 같은 짓을 많이 한 건 사실이다.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역시 무고하게 쫓겨난 사람도 아닐 뿐더러 전범 재판대에 세우는게 옳은가, 와는 별개로 그가 악질범임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난 한 가지 의문이 있다. 과연 세르비아만이 이 내전 속 비극에 모든 책임이 있으며 흔히 국제사회에서 유고 내전의 피해자로 취급받는 국가들은 선량했는가 말이다.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기원과 유고슬라비


세르비아의 민족주의의 뿌리는 드라구친 디미트리예비치 대령이다. 그에 대해 짧게 설명하고 가자면 1903년 알렉산더 오브레노비치 왕과 왕비인 드라가 마시나 및 그들의 친인척이 계속 자행한 권력형 부정축재에 맞서 쿠데타를 일으켜 왕과 왕비를 죽이고 카라조르지예 가문의 페타르를 왕으로 옹립한 경력이 있는 인물이다. 디미트리예비치 대령은 쿠데타 이후에도 막후에 비선 실세였고 파시치 수상이 보스니아 문제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타협하자 흑수단(단결 혹은 죽음)이라는 테러 조직을 만들어 각종 공작을 감행한다.


그리고 이 흑수단은 대형 사고를 치는데 그게 바로 그 유명한 1914년 사라예보 사건이었다. 가브릴로 프란치프는 흑수단의 지원을 받아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저격하였고 분노한 오스트리아 측은 사건의 주범 흑수단이라는 조직과 디미트리예비치 대령이 세르비아 정치의 흑막이라는 점을 문제 삼으며 선전포고 했다. 그 후는 다들 알다시피 유럽 각국이 전쟁에 참여하며 1차세계대전으로 확장되었고 사라예보 사건을 일으킨 대가로 세르비아는 말 그대로 국토가 유린당하고 원흉인 디미트리예비치 대령은 페타르 왕에 의해 제거당한다.


1차세계대전으로 베오그라드가 함락당하면서 대세르비아주의를 자처했던 세르비아는 망명 정부긴 되었으며 이 틈에 유고슬라비즘을 부르짖는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가 부상한다. 대세르비아주의는 그동안 카라조르지예 왕조를 중심으로 보스니아 병합을 목표로 삼아왔었으며 정교회를 버팀목으로 세르비아인의 생활권(Lebensraum)을 추구했다. 하지만 이젠 코르푸 섬에서 망명정부를 세우고 하루하루 버티던 세르비아 정부와는 달리 유고슬라비아 위원회는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의 명망가들이 세를 키워가고 있었다.


1차세계대전 후 발칸 대표들은 협상을 하였고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의 연합 왕국을 결성했다. 총리는 세르비아인 스토얀 프로티치, 부총리는 국민회의 의장 코로세츠, 외무장관은 유고위원회 대표 트룸비치가 맡으며 순조롭게 출발하는 듯 했으나 문제는 알렉산더 왕이 군부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야권이 미비해 세르비아 독주 체제였다. 거기에 더해 알렉산더 왕은 크로아티아 농민당을 1925년 해산시켰고 헌법 중단, 정당 해산 등 독재자로써 행보를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보이며 유고슬라비즘을 배신했다.


1934년 알렉산더 왕은 암살되었지만 이후 들어선 스토야디노비치 정권은 즈보르(Zbor)와 녹색 셔츠단이라는 검은 셔츠단을 모방한 조직을 결성하고 독재 정귄의 면모를 보였다. 또 이때 탄압받은 크로아티아 정치 세력은 망명했고 이 중에는 우스타샤의 수장 안테 파벨리치도 있었다.

보론: 흑수단과 대세르비아주의의 조직화


세르비아 지역은 본격적으로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우다가 독립을 쟁취하는 과정에서 민족주의가 커져나갔었다. 이는 오스만으로부터 독립에 성공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는데 20세기 초반에 들어서는 민족주의가 더욱 급진화된 '대세르비아주의' 단체들이 등장했는데 각자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


인민 방위대 (Narodna Odbrana)


- 1908년에 창설된 단체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령 보스니아 지역의 세르비아인들을 돕기 위해 설립. 이들은 세르비아 육군 대위인 밀란 바시치를 영입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인사들에 대한 테러 활동을 펼쳤으며 세르비아 당국의 제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무려 국내에만 220개의 지부를 설치할 만큼 조직력이 있었다고 한다.


1914년 6월 28일에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암살 사건이 벌어지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암살범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배후로 인민 방위대를 지목했었는데 이때 대 세르비아 선전포고 직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발표한 암살 사건 최종 보고서에도 암살 배후에 인민방위대가 있다는 내용이 나와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이 시기에 인민 방위대의 지도자 밀란 바시치는 사망한 뒤였으며 조직은 사실상 와해 후 흑수단에게 통제되고 있는 중이었다.. 즉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여기까지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여담이지만 설령 제대로 파악했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는게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내부 사정을 살펴보면 예전부터 세르비아를 무력으로 손보자고 한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를 비롯한 군부 세력 뿐만 아니라 베르히톨트 외무상 같은 민간 정치가들과 여론도 세르비아를 작정하고 공격할 생각이었다. 그러니 세르비아 정부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최후통첩안 내용의 상당부분을 수용했음에도 몇개가 거부되었답시고 전쟁을 일으킨거였고.


흑수단 (Crna ruka)


- 드라구친 디미트리예비치 대령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비밀 결사 단체로 구호는 '단결 아니면 죽음'이었다고 한다. 이들의 창설자인 디미트리예비치 대령은 1903년 알렉산더 오브레노비치 왕과 왕비인 드라가 마시나 및 그들의 친인척이 계속 자행한 권력형 부정축재에 맞서 쿠데타를 일으켜 왕과 왕비를 죽이고 카라조르지예 가문의 페타르를 왕으로 옹립한 경력이 있는 인물이다.


그러한 행보를 보였던 그가 전면적으로 나오게 된 파시치 수상 같은 민간 정치가들이 현실과 타협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압력에 굴복하는 모습에 국민들과 각 군부대의 장병들이 시위를 비롯해 격렬하게 나오는 여론에 발맞춰 자신의 신념을 실현하기 위함이었다. 흑수단은 청년장교들과 하사관들을 중심으로 한 비밀 조직으로서 처음 구축되었는데 꼴에 단체라고 행동 강령도 있었다고 한다.


- 1조 우리 조직은 세르비아 인만의 국가 건설이라는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 2조 우리 조직은 문화적인 행동보단 혁명적인 행동을 선택한다. 그러므로 일반 대중으로부터 비밀을 유지한다,


- 3조 우리 조직의 명칭은 '단결 아니면 죽음'이라고 한다. 암호명은 블랙 핸드(Black hand)


- 4조:


ㄴ 1항 우리 조직은 강령에 발맞춰 공적인 수준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 계급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ㄴ 2항 세르비아 인이 거주하는 모든 지역에서 혁명적인 조직을 창건한다.


ㄴ 3항 국경 밖에서도 우리의 목표에 반대하는 적(특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들과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이용해 싸운다.


ㄴ 4항 세르비아와 세르비아 인에 대래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는 모든 국가, 조직, 그리고 개인들과 접촉을 계속 유지한다.


결론을 요약하자면 폭력적인 방법으로 대세르비아를 건설하자는 것인데 하필이면 디미트리예비치는 뒷공작에 매우 능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흑수단을 보호할 목적으로 변호사 출신이자 광적인 민족주의자인 요바노비치가 이끄는 그룹과 외교 전문가인 라텐코비치가 이끄는 그룹을 영입해 민간인들까지 끌어들이는 치밀함을 보여줬다.


이렇게 흑수단에 영입된 민간인들은 흑수단의 세포 조직을 활성화 시키는 역할을 했다. 동시에 '피예몽'이라는 민족주의 신문을 발간해서 대중들이 민족주의 감정에 고취할 수 있게 했으며 그 뿐만 아니라 앞서 언급한 인민 방위대도 하부 조직으로서 흡수했다.

크로아티아의 복수: 우스타샤


유고슬라비아가 2차세계대전으로 추축국에 지배받게 되자 유고 정부는 미하일로비치 대령을 앞세워 체트니크를 조직했다. 체트니크의 본래 뜻은 오스만 지배 시절 무장 저항하던 게릴라 단원의 의미였다. 체트니크들은 카라조르지예 왕조에 충성을 당하는 조직으로 흑수단의 정신적 후계자였다. 세르비아인들은 1차세계대전에서 인구의 20%를 잃었고 이번 대전에서도 추축국의 지원을 받는 크로아티아인들에게 보복당할 걸 두려워했다. 그들은 티토의 파르티잔과는 달리 독일군보다 크로아티아인들의 더 원수였다.


한편 1941년 크로아티아 지역에서 독립국이 선포되었고 이걸 주도하던 것은 우스타샤였다. 이 와중에 가톨릭 교회는 유고 왕국의 기득권이었던 세르비아 정교회에 대한 반감으로 민족주의를 적극적으로 조장했고 우스타샤는 발칸 반도에 주둔한 이탈리아군과 독일군 이상으로 광폭했다. 그들의 목표는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인들이었고 우스타샤 체제 하에 35만명의 세르비아인이 목숨을 잃었다. 또 자신의 종교인 가톨릭을 세르비아 정교회 교도들에게 총을 겨누고 개종을 강요했고 20만에서 30만을 개종시켰다.


나는 우스타샤 대원에게 네가 지은 죄를 보건대 하느님이 두렵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 친구가 대답하길 "나는 내가 지은 죄가 무엇인지 완전히 알고 있다. 나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지을 죄까지 생각해보면 나는 분명 지옥의 불길에 태워질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크로아티아를 위해 불길을 받아들일 것이다"라고 했다.

- 크로아티아 농민당 당수 마체크 -


세르비아인 학살을 주도한 우스타샤는 전황이 불리해지자 영국군에 가서 항복했다. 그러나 연합국은 잡은 포로들을 조국 해방을 위해 추축국과 싸운 정부에게 양도하였고 이들은 티토의 파르티잔에게 넘겨져 처리당했다. 공교롭게도 우스타샤의 안티태제인 체트니크 또한 파르티잔에게 생포당했고 미하일로비치는 사형당했다. 대크로아티아주의와 대세르비아주의는 이렇게 멸망했고 주도권은 유고슬라비즘의 진정한 계승자 티토에게로 넘어간다.

위대한 지도자의 사망, 그리고 무너진 꿈


티도는 가히 위대할 만한 자격이 있는 지도자였다. 체트니크와 우스타샤 간 서로의 병림픽 중에도 묵묵히 파르티잔을 이끌어 대세르비아주의와 대크로아티아주의로 분열된 유고슬라비아를 다시 기강을 바로 세웠다. 그는 공산주의자였지만 소련과도 어느정도 선을 그었던 지도자였고 6.25 당시에도 공산주의 지도자임에도 북침설을 전면적으로 부정했다가 스탈린주의자들에게 온갖비난을 당했다. 그리고 무작정 중공업 우선 노선이던 현실사회주의와는 달리 경공업에도 일정 부분 투자하고 노동자 자주 경영을 보장해주는 실험적인 정책을 펼쳤었다.


그러나 티토의 사망과 함께 모든 것이 끝났다. 밀로셰비치는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활용해 '반관료 혁명'을 주도, 스탐볼리치 대통령을 궁지에 몰아넣으며 점차 권력을 장악해갔다. 또 코소보와 보이보디나 자치권을 축소하기 위해 티토가 만든 유고 연방 헌법을 개정시켰다. 그 와중에 유고 연방은 1980년 기준 총 외채가 200억 달러에 달하고 인플레이션이 1986년에 100% 달성, 1989년에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기에 이르었기에 세르비아와 유고 연방 소속국들 내 민족주의의 폭주를 막기 힘들었다.


티토가 창안한 노동자 자주 경영은 관료주의화가 진행되며 의미가 퇴색되었다. 지역의 균형발전을 명분으로 추진된 개발 사업들은 형식적인 균형에 머물렀다. 유고 연방 정부는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해 1981~1982년 슬로베니아 공화국 대표로서 유고 연방 정부의 대통령이었던 세르게이 크레이그헤르를 단장으로 위원회를 구성하여 2년간 경제 개혁안을 만들었으나 실패했고 또 다시 요시프 브르호베츠의 중심의 경제위원회 1985~1986년에 민주화, 시장경제 도입을 위한 체질 개선을 건의했지만 기성 세력의 거부로 처방이 무시당했다.


1985년 3월, 체르넨코를 뒤 이어 고르바초프가 새로운 소련의 서기장이 되었다. 고르바초프는 브레즈네프, 안드로포프, 체르넨코와 같은 구체제 대표 인사와 결이 다름을 강조하며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라는 개혁개방 정책을 펼쳤다. 이에 대소 강경파 레이건 행정부는 전략을 바꿔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칭하는 걸 그만두고, 임기 동안 네 번에 걸친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는 미소 간의 화해 분위기 속에서 중립국인 유고 연방의 전략적 가치 상실로 이어졌으며 미국은 더 이상 변두리 국가인 유고 연방에 관심을 쏟지 않았다.


민족 문제가 터져나온 건 분명 이전부터 내려오던 문제들이 폭발한 경향도 없진 않다. 유고 연방은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웠을 때 처음에 단순한 공화국을 기본 단위로 개발 지역과 저개발 지역으로 양분했는데 세르비아는 개발 지역이었지만 관할 지역 코소보는 투자 보장 정책 특혜를 못받아 극빈한 지역에서 못벗어났다. 이후에 크로아티아 공산당의 지적으로 저개발 지역에 특별 지원이 시도되었지만 제도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공산당 정책 결정자들은 중공업 부문을 저개발 지역에 배치하여 구조적으로 남북 소득 격차를 키웠다.


보스니아는 북부 평균 소득에 53%였고 코소보는 28%, 몬테네그로는 58%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63년 공화국 기금(FREDUD)가 설립되었고 이에 발 맞춰 연방 의회는 코소보 주 개발 촉진 기금(FADURK)를 창설했다. 그러나 이 FADURK는 각 공화국들이 기금을 받기 위해 각축전을 벌이면서 민족주의만 부추켰고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는 기금이 세르비아인들의 자의로 쓰이며 그들이 FADURK를 통해 합법적으로 착취한다고 비난했다. 이러한 티토가 감추고 싶어한 민족 감정은 유고 공산당 제8차 전당대회에서 "유고에서의 민족들이 사회주의화 단계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견해는 오류"라고 인정하며 체제를 위협하기 위한 변수가 되었다. 이때부터 조짐은 있던 셈.


그리고 유고 연방의 붕괴는 거대한 참극을 불러온 전조이자 서막이었다.

보론: 유고 연방군은 왜 밀로셰비치와 발 맞추었는가?


우선 유고 연방군의 인적 구성을 보면 장교가 세르비아인이 70%가 넘는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세르비아에 친화적일 수 밖에 없었으며 연방군은 사회주의를 수호하는 기관으로써 1990년 이후로도 사회주의 체제 유지를 밀고 나간 세르비와와 잘 맞을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연방군이 해체될 경우 군 조직이 유지가 안되고 특권도 사라지며 방위 산업체 통제권도 끝나기에 연방군 수뇌부는 1990년 12월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에서 연방 존속을 주장하는 공산당이 승리하자 환영했다. 국방장관 벨리코 카디예비치는 아예 성명까지 냈다.


결국에는 연방군은 1990년 4월부터 시작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두 지역 방위군 무장 해제 작업을 하며 전쟁 계획을 수립했고 이에 크로아티아는 취약한 민병대와 예비대의 무장을 서둘렀다. 1991년 1월 말 발간된 연방군 정치 강령집은 연방군은 사회주의를 기본 원리로 하는 유고슬라비아를 유지시키는데 최대 가치를 부여하고 같은 노선을 걷는 세르비아를 도울 것을 천명했다. 특히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의 독립 시 응징할 것이라 했는데 정작 연방 대통령 위원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연방군은 독자적으로 가겠다고 발표했으며 군부 내 온건 그룹인 국방 장관 카디예비치가 강경파 아지치 참모총장에게 패했다.

우스타샤의 망령, 프라뇨 투지만


일각에서는 말할 거다. 유고 내전에서 크로아티아를 비난하는 건 마치 2차세계대전에서 추축국을 옹호하기 위해 연합국을 비판하는 것과 같지 않냐고 말이다. 그러나 추축국이 악에 가깝다 해도 그것이 원자폭탄 투하, 드레스덴 공습, 베를린 강간, 행정명령 9066호, 벵골 대기근 같은 연합국의 만행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 없는 것은 너무 당연한 사실이다. 마친가지로 밀로셰비치가 도저히 상종 못할 인간 쓰레기라 할 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투지만이 피해자거나 세르비아 침략자들로부터 국민을 지켜낸 영웅이라고 절대 말할 수 없다.


투지만의 정당은 크로아티아 민주연합당이었다. 그는 파르티잔 출신으로 전후 유고 연방군에서 장성에 올랐지만 세르비아 출신 장교들의 오만함에 질렸었다. 마침내 유고 연방의 붕괴로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고 투지만은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은 물론이고 외국에 망명 중인 나치 부역자 우스타샤 대원들을 포함한 극우파를 지지 기반으로 삼아 자금을 마련했다. 실제로도 투지만의 정치노선은 순혈 크로아티아 공화국으로 총 인구 중 12%에 해당하는 세르비아계 주민들을 축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역사적 진실의 혼란>이라는 책에서 홀로코스트 과장설도 주장했었고.


총선에서 45%의 국민의 지지를 얻은 투지만과 민주연합당은 언론을 장악하고 반 옐라치치 장군의 동상을 복원했다. 길거리에서는 검은 제복을 입고 우스타샤 깃발을 든 국수주의자들이 활보했으며 헌법도 수정하였다. 가장 큰 문제는 크로아티아 공화국의 국기였는데 민주연합당 당기가 곧 국기였으며 이 당기는 우스타샤를 상징하는 적색, 백색, 청색으로 된 체크무늬 기였다. 헌법 수정은 크로아티아 공화국을 크로아티아 민족 국가라 규정했으며 60만명의 세르비아인들을 비국민으로 취급받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내전 중에도 투지만 대통령은 여론 선전을 위해 고의적으로 부코바르 폭격을 방치하였고 오죽하면 현지에서는 대통령은 부코바르에 폭탄 떨어진게 TV에 보도되는 것만 관심 있다는 불만이 나왔을 정도였다. 그리고 세르비아가 보스니아 내전에 개입했을 때 크로아티아도 덩달아 개입했었다. 아예 1992년 7월, 마테 보반이 투지만의 지원으로 헤르체그-보스나 크로아티아 공동체라는 국가를 수립했는데 이건 보스니아와 동맹을 맺으면서도 정작 뒤로는 세르비아가 스릅스카 공화국 세운 것과 다를 바 없는 짓을 벌였다는 걸 방증한다.


보반은 세르비아계가 사라예보를 포위하고 포격한 것처럼 모스타르 시내를 봉쇄하고 포격했는데 세르비아가 했던 것보다 잔인할 정도로 포격했다. 크로아티아계는 보스니아 내에서 계속 영토를 확장했고 이들의 만행은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가 저지른 짓에 묻혔다. 보스니아 대통령 이제트베고비치는 크로아티아가 반 세르비아를 명분으로 동맹을 자처하면서 뒤로는 이슬람계 지역인 노비 트라브니크, 비테즈, 프로조르를 공격하며 국제사회의 인도지원도 차단시키는 것에 격분하여 항의 서한을 보냈지만 정작 투지만은 TV 방송에서 보스니아 무슬림들은 현실이나 직시하고 이상적인 꿈을 포기하라는 모멸적인 경고를 하며 철면피 행보를 보였다.


결정적으로 크로아티아는 보스니아 내 크닌 지역에 개입하였고 보스니아군과 연합 작전이었지만 그들과 약속했던 비하치 공격에는 소극적으로 나왔다. 크로아티아군은 대신 크라이나 세르비아 공화국의 수도인 크닌 시 점령에 집중하였고 16만명을 동원해 밀로셰비치가 미리 클린턴이 언질을 줘서 세르비아를 압박하던 옐친에게 묶여 세르비아군을 동원하지 했기에 순식간에 점령했다. 세르비아군은 400대의 전차와 4만명의 군인들을 후퇴시켰고 크닌 지역을 점령한 크로아티아군은 인종 청소를 자행했고 결과적으로 전쟁 전 60만명에 달하던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계 주민들을 10만명으로 줄였다. 투지만은 애초부터 밀로셰비치와 다를 바가 전혀 없던 쓰레기였던 셈이다.

이제트베고비치의 이면


옛 유고연방 주재 미국 대사였던 지머만은 1992년 1월, 크로아티아 신문 <다나스>와의 인터뷰에서 "이제트베고비치를 이슬람 근본주의자라 부르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이란에서의 경험을 통해 근본주의자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으며 따라서 이제트베고비치가 일반적으로 국제사회에서 통칭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라고 믿지 않는다. 사실 그는 최악의 상태에 처해있는 상황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온건한 정치인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그의 내면은 마냥 온건하지 않다. 이제트베고비치는 보스니아가 독립을 선언할 경우에 많은 희생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무고한 주민들의 생명을 담보로 도박했으며 국제적인 지원 확보를 위해 1992년 5월, 94년 2월, 95년 8월 사라예보 포격 사건 같은 자해 행위를 일삼던 영악한 정치가였다. 그의 대통령 당선 이후 사무실은 권위주의적이고 이슬람 근본주의적인 반서구, 반미 집단의 소굴이 되어갔으며 경제 사정은 국제사회의 전폭적인 지원에도 호전되지 않은 채 크로아티아계의 분리 움직임도 사라지지 않았다.


스레브레니차 학살, 이 사태 속 인종청소를 주도한 건 분명 세르비아였다. 하지만 이제트베고비치는 책임이 없을까? 세르비아계가 포위하는 와중에 이슬람계는 평화 유지군으로 있던 네덜란드군에게 후퇴를 못하도록 공격을 가해 1명을 사망하게 했으며 이때 스릅스카 공화국군의 믈라디치는 이슬람계 주민들과 네덜란드군에게 탈출 보장할테니 48시간 내에 떠나라고 했었다. 그러나 스레브레니차 시장 오스만 술리치가 이제트베고비치 대통령에게 주민들 피난을 도와달라 했음에도 거부당했고 결국 그대로 수천명이 학살당하는 대참사가 벌어진다.


이제트베고비치가 투지만이나 밀로셰비치처럼 노골적인 학살을 자행하진 않았으나 결국 그도 인명피해는 관심이 없고 언론 플레이만 중요한 정치가였음에 불과했다.

마피아 소굴인 코소보 해방군(KLA)


코소보 해방군은 유고 내전 내내 최대 피해자로 평가받았었다. 그나마 투지만 같은 경우는 악행이 좀 알려지긴 했지만 코소보는 아직도 세르비아한테 맞고 사는 불쌍한 나라로 평가받고 있다. 일례로 2021년 이후 세르비아와 코소보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고 특히 국경에서 무력충돌이 벌어지며 부치치 세르비아 대통령이 아예 대놓고 독립 보장 안한다고 하는 지경에 이른 상황에서 가장 크게 비난받는 건 코소보가 아닌 세르비아였다.


코소보는 건국 과정이 상당히 지저분했다. 코소보 해방군의 지도자 하심 타치는 마약 거래와 연관이 있으며 오죽하면 미국 보스니아 특사 겔버드부터가 코소보 해방군이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학살을 벌인다고 할 정도였다. 특히 그들은 이슬람 근본주의 조직들에서 온 무자헤딘 용병들에게 훈련을 받았으며 알바니아를 통해 지원을 받았다. 그 알바니아는 대량의 헤로인을 아프니가니스탄과 튀르키예를 통해 들여와 유럽에 마약 거래하여 모은 자금으로 코소보 해방군을 지원했던 건 덤이고.


마약밀매로 번 자금의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코소보 해방군은 3만명에 달하는 병력으로 보유하게 되었으며 대공 및 대전차 로켓 같은 정밀무기까지 손에 넣었다. 살리 베르샤 대통령 집권기에는 알바니아 정부 관료들이 마약 밀매나 코소보 내 불법 무기거래에 관여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으며 코소보 마약귀족들은 알바니아에서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은 채 마약을 이탈리아로 유입하며 현지 범죄조직과 유착하고 있다는 내용의 보도가 나올 정도였다. 오죽하면 1997년 이탈리아 정부에서 마피아와의 연관성을 수사할 정도였다.


2010년 12월, 코소보 의회 구성 과정에서 하심 타시의 코소보 민주당이 32%의 득표율을 얻었을 때 유럽평의회에선 타시와 코소보 해방군이 마피아와 유사한 조직으로 마약 및 무기 거래, 인체장기 매매에 관여했다고 하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미 하심 타시는 인터폴과 FBI의 수배목록에 올라와 있으며 이로써 코소보 해방군이 조직범죄 및 마약 거래와 연계된 것은 확실하다고 보여지게 되었다.

나토의 전쟁 범죄


발칸의 도살자 밀로셰비치를 무릎 꿇린 것은 사라예보 포위전에서 항전하던 보스니아의 시민들도, 코소보의 해방군도, 크로아티아의 자칭 국부 투지만도 아닌 나토였다. 당시는 빌 클린턴 정부였었고 소련이 붕괴되어 러시아 연방이 들어서고 보리스 옐친이 지도자로 있었기에 세르비아를 때릴 수 있는 딱 안성맞춤인 환경이었다. 미국은 유고 내전에 지상군과 공군을 투입하였고 신생 국가 보스니아와 코소보를 지원했다.


보스니아 내전 때부터 나토는 1,026발의 폭탄을 투하하고 48개의 표적에 미사일을 발사하며 공습을 감행했는데 이게 코소보 사태에서 정점을 찍는다. 이때 세르비아를 향해 2만 3.600발의 폭탄을 쏟아부어 8,000명의 민간인 사상자가 나오고 대략 2,500명이 사망했다. 1999년 4월, 세르비아의 수도인 베오그라드 공습에서는 방송국이 폭격의 표적이 되었으며 3발이 중국 대사관에 떨어져 중국인 외교관 4명이 사망했다. 12일에는 세르비아 남부 그루데라츠라 크리슈라 철교를 통과 중인 열차가 폭격당해 20명의 민간인이 죽었으며 슬르도차 병원도 미사일에게 공격 받아 17명이 죽었다.


나토의 폭격은 옹호 측에서 부수적인 피해라고 해명한다. 그러나 분명 나토가 유고 내전에 개입하며 사용한 폭탄은 열화우라늄탄으로써 중금속 화학적 독성을 가지고 있어 심각한 사후에도 건강 피해를 조성하는 무기였고 이미 걸프전에서 사용되어 민간인 피해가 나왔음에도 투입한 것이다. 참고로 휴먼라이츠워치는 민간인 사망 사건이 못해도 90건이라 보도했다. 한편 나토 공군이 사용한 2만 3천발 중에 약 8천발만이 정밀 유도무기였는데 수치상 전체에서 불과 34%였다. 그 뜻은 나머지 무기들은 무차별적인 목적에서 사용되었다는 얘기이며 유도병기조차도 민간인 피해를 막지 못했다.

세르비아는...다들 알지?


이때까지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코소보 같은 유고 내전에서 반 세르비아 진영에 있던 국가들한테 극딜(?) 박았는지라 이 글을 보는 누군가는 세르비아 어떻게든 쉴드 쳐줄려고 저런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근데 이건 하나 확실하게 하자면 세르비아라고 해서 더했으면 더했지 저들보다 덜하진 않았다. 스릅스카 시절 믈라디치나 아르칸의 의용방위군이나 둘다 끔찍하긴 매한가지였고 아무리 투지만과 이제트베고비치가 유고 연방 분열에 책임이 커도 애초에 밀로셰비치가 스탐볼리치 대통령을 몰아내며 반관료 혁명이란 명분으로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조장해서 연방 내 다른 공화국들이 분리할 명분을 만든 시점에서 그는 사태의 가장 큰 원흉이다.


밀로셰비치는 결코 시대의 분위기에 휩쓸린 사람이 아니라 원래부터 싹수가 노랬다. 1987년 4월 24일, 코소보에 도착한 밀로셰비치는 1,500여 명의 세르비아계 시위대가 담판을 요청하자 연설을 한다. 그곳에서 밀로셰비치는 아무도 감히 당신들(세르비아인)들을 다시는 구타할 수 없을 것이며 유고연방과 세르비아 공화국은 코소보를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연설했다. 이 연설은 밀로셰비치가 세르비아 민족 대표 정치인으로 부상하는 연설이었고 이때 민족 정서의 가능성을 깨달은 그가 정치적으로 활용하고 티토 동안 억눌려있던 체트니크의 망령이 부활하기 시작하며 파국으로 치닫은 것이다. 유고 연방이라는 다민족 공화국에서 밀로셰비치라는 세르비아 민족주의자가 보였던 행보가 모든 일의 시발점인 셈.


세르비아가 저질렀던 짓에 대해선 하나하나 다 열거하면 글이 미친듯이 길어질테니 아래에 만행에 대한 인터뷰 하나를 소개하기만 하겠다.



" 나는 세르비아 인을 부모로 보스니아의 포발리치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다. 그 후 사라예보로 무작정 상경해 노점상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던 중 아는 사람의 부탁으로 1992년 5월부터 사라예보 근교에 주둔하고 있는 세르비아 민병대에 식량을 공급하는 일을 시작했다.

그 일을 시작한 데에는 세르비아 방송의 영향이 컸다. 세르비아 방송은 이슬람 교도들이 보스니아를 회교 공화국으로 독립시켜 세르비아 인들을 말살하려 한다는 것을 되풀이해서 강조하곤 했다. 나는 정말로 큰 충격을 받았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 모두는 이슬람 교로 개종해야 될 것이고 결국 그들의 노예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곳곳에 모인 세르비아 인은 우리가 살기 위해서 저들을 몰아내야 한다고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들을 '인종 청소'하지 않으면 우리 세르비아 인은 결국 처참한 말로를 맞게 될 것이라는 얘기들이었다. 세르비아 민병대에 식량을 공급하면서 만난 대원들은 이 같은 얘기들을 더욱 강조했고 특히 이슬람 교도로부터는 어떤 값진 것이든 탈취해도 좋고 이슬람 여자들은 강간해도 좋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로 인해 태어나는 아이들도 세르비아 인이 되어 결국은 세르비아 인의 수를 늘려가는 것이 궁극적인 인종 청소의 방법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곧 바로 민병대에 자원 입대했다. 6월에 민병대에 들어간 뒤 다른 두 명의 동료와 함께 이슬람 교도 지역인 보스니아 서북부의 아하토비치 마을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한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두 명의 노파가 있었는데 한 노파가 가진 게 없다고 강변했다.

나는 화가 나서 그 노파를 총 개머리판으로 쳐버린 뒤 옷장을 열어보니 여러 종류의 귀금속이 들어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모두 죽이기로 했다. 당시 집 안에는 열명의 이슬람 교도가 있었다. 나는 단 2초 만에 14cm 칼로 한 남자의 목을 베었다. 이미 나는 한 늙은 세르비아 민병대 병사로부터 목을 자르는 방법을 배웠다. 어느날 그는 나와 다른 세 명의 동료를 돼지 우리로 데리고 가더니 돼지 목을 어떻게 따 죽이는지 가르쳐줬다. 그는 자기가 사로잡은 보스니아 이슬람 교도를 모두 그런 식으로 죽였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우리는 나머지 아홉 명을 모두 집 밖으로 끌어냈다. 나는 그들에게 벽에 기대라고 명령했다. 그 가운데에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여자애가 무서웠던지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 우리는 기관단총을 발사했다. 민병대 지휘관들은 이슬람 교도 한 명을 죽이는 대개로 6달러 50센트를 지불했다. 인종 청소가 끝나자마자 마을을 불질러 버렸다.

6월 초순, 나는 들판을 지나가다가 또다른 민병대원들이 1백여 명 가량의 이슬람 교도를 학살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들은 시체를 트럭에 실어 한적한 곳으로 옮긴 뒤 휘발유를 부어 불태워 버렸다. 7월에는 또다른 회교 마을에서 세르비아 민병대가 30명의 이슬람 교도를 죽인 뒤 근처에 있던 용광로에 넣는 것을 보았다. 그때 몇 명은 신음 소리를 내며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7월 초 나는 사라예보 근교에 있는 한 건물에 들어갔다. 이곳은 이슬람 여성들을 수용하는 곳이었는데 미로 부코비치라는 민병대원이 관리하고 있었다. 부코비치는 이슬람 여성을 강간한 뒤에는 반드시 죽이라고 명령했다. 나는 일주일에 서너 번 그 수용소로 갔다. 그곳에서는 매일 수많은 여자들이 강간당하고 죽어 갔다. "

- <뉴욕 타임스>의 존 번스라는 기자가 세르비아 민병대 출신 보리슬라프 헤라크(21)를 사라예보에서 일곱 시간 동안 인터뷰 했을 때 그가 인종 청소에 관해 증언한 내용 -

맺음말: 반복되는 비극


유고 내전이 끝난지 20년이 넘었다. 최악의 전범 밀로셰비치는 감옥에서 옥사했고 세르비아는 범죄에 대한 대가로 받았던 경제제재로 인해 아직도 피해가 남아있으며 유럽연합 가입도 거부당한, 말 그대로 발칸 반도의 왕따인 처지다. 코소보는 여전히 유럽의 최빈국 상태에서 못벗어나고 있으며 세르비아와의 충돌도 아직까지 끝나지 않았다. 심지어는 2021년도 이후부터 몇번이고 세르비아와 코소보의 국경에는 군대가 집결했던 적이 있었으며 코소보 정부가 세르비아계 주민들을 탄압하는 정책을 펼치면서 '유럽의 화약고'로 주목받고 있다.


전후 처리에서 전쟁의 책임은 세르비아에게 몰렸다. 왜냐면 그들이 원인을 제공했으니까. 밀로셰비치와 믈라디치 같은 세르비아의 도살자들은 분명 대가를 치르게 된 반면 투지만과 이제트베고비치 같은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쪽 관계자들은 이미 고인이라는 이유로, 혹은 내전 당시 나토가 도왔었던 대상이라는 이유로 비교적 관대하게 넘어갔다. 세르비아는 전범국이라는 이유로 지금까지도 국제사회의 복귀를 제대로 허가받지 못하고 있으며 이는 세르비아가 서방 세계에 편입되기 보단 러시아나 중국을 가까이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덕분에 세르비아인들은 전쟁 끝난지 한참 지났음에도 여전히 나토를 증오한다. 어느 여론조사에서 세르비아인이 가장 좋아하는 정치인으로 뽑힌 건 62%를 얻은 푸틴이었으며 이는 자국 현직 대통령 알렉산다르 부치치보다도 높은 순위다. 그 외 상위권에 등재된 정치인으로는 중국의 시진핑,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등 반서방 대표 정치인들이 다수였다. 반면 가장 혐오하는 정치인은 당연하게도 코소보, 보스니아, 크로아티아의 정치가들이지만 비 발칸 국가 정치인 중 조 바이든이 유일하게 혐오 정치인 TOP 4에 들었는데 이는 미국이 한 때 서로 인종청소를 벌였던 옛 유고 연방 구성국들 만큼이나 싫다는 걸 방증한다.


개인적인 아쉬움일지도 모르겠으나 세르비아에게 처한 처사가 너무 세르비아인들에게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말고 주변국과 화해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기 보단 징벌적으로 니네가 다 책임지라는 식으로 그것도 지금까지 하고 있는게 씁쓸하다. 결국 세르비아는 전쟁에서 졌을 뿐이지 내부적으로는 반성은 커녕 오히려 서방에 대한 반감만 키웠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 코소보를 두고 상당히 위험하게 줄타기하고 있는 상황인 걸 보면 이상적으로나 실익적으로나 유고 내전의 전후 처리는 당장만 세르비아를 눌러놨을 뿐 잠재적으로 폭발할 수 요소까지 없애진 못했던게 실수였다.


밀로셰비치는 죽었고 세르비아는 강도 높은 대가를 치뤘다. 하지만 오늘날 유럽의 화약고에 화재의 조짐이 생기는 걸 보면 역사는 반복되어 밀로셰비치의 망령이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장담은 못한다. 만화 진격의 거인의 에필로그에서 파라디 섬은 끝내 멸망했지만 어느 소년이 다시 대지의 악마가 깃든 나무를 발견하여 에렌의 망령이 부활하는 걸 암시하는 것처럼 말이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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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스퍼 리들리, <티토: 위대한 지도자의 초상>, 을유문화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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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민, <유고슬라비아 체제 전환의 특징과 국제사적 의미: NATO 전략 개념 변화를 중심으로>, 한국외국어대학교 동유럽발칸연구소, 동유럽발칸연구 45(2), 2021

김철민, <양차 세계대전사이의 유고슬라비아에 관한 연구: 1918년-1940년>, 한국외국어대학교 동유럽발칸연구소, 동유럽발칸연구 10(2),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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