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m08bSIG4wss?si=vVhD-FaPUHw2ce5Q
체첸 전쟁은 아마 러시아 역사상 가장 최악의 졸전일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건 겨울전쟁이나 이번 러우전쟁을 넘어서는 희대의 실책이었다. 그도 그럴게 겨울전쟁은 스탈린의 대숙청 탓에 군 장교단이 박살난게 문제였지, 당시 소련 경제 자체는 급속도로 성장 중이었으며 러우전쟁 또한 미친 졸전을 벌이긴 했어도 어찌저찌 해서 일단 동남부 지역은 러시아군이 장악했긴 했다. 어쨌든 키노(Кино)의 '여름이 끝나간다'라는 노래의 분위기가 체첸 전쟁이 있었던 구 소련 말에서 러시아 연방 초기의 상황을 잘 드러내고 있을 정도였다.
이번 글은 러시아군이 체첸에서 어떤 실책을 저질렀는지 논하고자 한다. 글에선 보리스 옐친 행정부 당시의 군부의 무능과 체첸 반군의 타락을 집중적으로 비판할 것이다. 이건 여담이다만 이 전쟁에 대해서 공부했을 때 느낀 것이지만 당시 러시아도 무능한 집단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체첸 반군 또한 절대 정당한 독립투사가 될 수 없었으며 두다예프는 민족의 비전보다 사익이 먼저인 그저 전형적인 군벌 독재자였다는 걸 아주 잘 느꼈다.
군사적 대책조차 없이 쳐들어간 러시아군
" 1개 공수연대로 단 2시간이면 이 모든 상황을 정리할 수 있다. "
- 파벨 그라초프 당시 러시아 국방장관 -
러시아군이 개전하고 들어간 목표는 이치케리야 체첸의 수도 그로즈니였다. 이때 시가지에 6천명이 진입했는데 곳곳에 숨은 무장 병력들의 대전차 무기에 당했다. 선봉대인 러시아 장갑차량 부대는 시가에 밀려들어갔다가 3일 만에 투입된 BMP 보병 전투차 120대 중 102대를 잃는 커다란 대굴욕을 맞봐야 했다. 더 나아가서 그로즈니에서만 T-80 전차 68대 중 67대가 다 박살나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다.
당시 그로즈니에 투입된 대부분의 러시아군은 급조된 부대였다. 따라서 어중이 떠중이들 끌어모아다가 대충 창설한 부대들이었으며 몇몇은 무기조차도 없었고 명령도 엉뚱하게 들은 상태였다. 전차병들에게는 기관총탄이 지급되지 않았었던 건 덤. 시가지에서 진행한 보병의 하자와 엄호가 없는 전차와 보병수송차는 측면이나 윗면을 향해 발사하는 대전차 사수의 손쉬운 표적이 되었다.
게다가 3년 전 걸프전에서 러시아제 전차의 취약성을 잘 드러났었는데도 본인들이 이라크군과 다르다고 생각하며 무지성으로 기갑부대를 과신하였고 그런 상황 속에서 그로즈니에서 러시아군을 기다리고 있던 건 10,000명의 반군이었다. 131여단의 알파대대는 목표를 향해 가던 중에 T-80과 BMP가 파괴당했고 장비 파괴 전에 탈출한 병사들은 교전을 이어갔다. 그리고 대대장은 공중지원을 요청했지만 오인 사격으로 알파 대대 장병들이 엄폐해있던 건물만 무너뜨리는 참사를 일으키고 말았었다.
그 와중에 항공정찰과 러시아 위성 정찰도 돈 절약 문제로 인해 불가능한 상태였다. 당연히 중요한 군사작전을 수행할려면 현장지휘관들에게 항공사진과 대축척 지도를 제공해줬어야 했는데 그들은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첩보 상황은 매우 불명확했으나 작전입안자들은 체첸인들이 도시를 어떻게 방어할 것인지를 예측하거나 기초적인 대응책을 취하는데 실패했다.
거기다가 당시 러시아군에게는 적절한 예비대의 지원이 필요한 상태였다. 왜냐면 러시아군은 과거 소련군 시절 때부터 시가전에서는 병력 우세를 중심으로 진행하는 것을 원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로즈니 전투에는 약 6만명의 러시아군과 1만 2천명의 체첸군이 참전했음에도 러시아군이 점령한 모든 건물에 수비 병력을 배치하는 사정으로 인해 충분치 않았었다. 그래서 그로즈니 자체는 2달 안에 점령하긴 하지만 소규모 교전들은 6월까지 연달아 터져나왔었다.
그렇다면 체첸 반군은 어떤 방식으로 싸웠는가?
체첸 반군은 러시아와 전면적으로 싸워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시가지로 끌여들여 러시아군에게 최대한의 출혈을 강조하는 방법론을 선호했다. 그리하여 도시 건물부터 먼저 방어에 최적화되게 개조했다. 여기서 꼭대기층은 공습 방지를 위해 공백으로 남겼고 지하실과 그 아래에 물자를 보관 및 공습시 피난와 생존했다. 그렇게 하여 체첸은 60,000명의 러시아군 기계화 부대를 끌어들이고 대전차 무기들로 화력을 집중해 러시아군의 출혈을 강요했다.
체첸 반군은 경무장한 25인의 고기동성 부대를 편성하고 시가지 매복의 경우 75명 이상 동원을 삼가했다. 이때 체첸인들은 야간 투시 장비(NVD)를 사용했으며 야간 기동에서 요긴하게 써먹었다. 러시아군은 보통 안개 속에서 움직이지 않았는데 체첸 반군은 그들의 움직임을 가리기 위해 안개를 활용했다. 또 러시아군이 연막탄을 모호하게 사용하자 움직임의 지표로 삼고 이동 중에 연막 속으로 사격했다. 또 각 분대에는 2명의 RPG 사수와 2명의 PK(기관총) 사수가 있었으며 측면 기동보단 체스처럼 기동했다.
체첸 반군의 승리 요인인 첩보활동은 전투와 무관하게 평소에도 습관처럼 이뤄졌으며 러시아군의 이동과 배치, 보급로에 대한 정보를 손바닥 보듯이 들여다본 뒤에야 작전을 구상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는 공격을 삼가했으며 작전 중 목표가 아닌 러시아군과 조우할 경우에는 과감하게 교전을 회피했다. 그로즈니 같은 곳에는 특정한 목표물을 사수하기 위해 방어전을 수행하였으나 보통은 가급적이면 공격 시점과 장소를 정해서 움직였다.
매복은 적은 병력으로 대규모 러시아군을 효과적으로 타격할 수 있기 때문에 체첸군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전술이기에 체첸 반군이 자주 사용힌던 수법이었다. 매복을 수행하기에 앞서 체첸군은 수색조, 견제조, 지연조, 공격 본대, 예비대를 편성하고 만약 공격이 박격포 등의 중화기까지 동원되면 수송조까지 포함시켰다. 매복은 크게 정면 매복, 원형 매복, 평행 매복 이 세 가지로 나뉘었는데 그 중 정면 매복이 가장 기본으로 러시아군 선두 부대를 파괴하여 진격을 지연시키는 용도로 사용했다.
러시아군으로부터 약탈한 무기들은 체첸에게 있어 큰 자산이었고 또한 병력 인적자원들도 소련군 복무 경력자들이 많았는데 이 중에서도 아프가스탄 전에 참전했던 생존 장병들도 꽤 있었다. 거기다가 그들은 러시아군의 교신 내용도 도청할 장비까지 갖추고 있었고 공습을 피하기 위해 근접전투를 전개하는 전술을 사용해 피해를 최소화 했다.
러시아가 졸전 치르게 된 배경
이미 1980년대를 기점으로 몰락하기 시작한 소련은 더 이상 연방 내 공화국들을 통제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자브가예프 서기는 소련에 남으면서도 개혁을 하고자 하였는데 이에 반발한 바이나흐 민주당 세력의 대표 조하르 두다예프가 지역 방송국을 점거하고 KGB와 내무부 건물을 포위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심지어 그로즈니 시 소비에트 의장인 빅토르 쿠첸코가 살해당하고 무기 탈취까지 벌어지는데도 자브가예프가 중앙에 한 도움 요청마저 씹혔다. 그 말은 이미 소련은 저렇게 무장 봉기가 발생해도 최소한의 막을 능력조차 없어진 상태였다는 것.
러시아 연방이 세워진 후 보리스 옐친 정권의 경우에는 당시 러시아 경제가 파탄 직전의 상태 였는데다가 국회는 옐친이 추진하는 법안들을 반대하고 있었다. 그러자 인내심이 고갈된 옐친은 1993년 2월 대통령령으로 의회 해산 및 헌법 개정을 밀어붙였다가 의회 내 반 옐친 세력이 의회를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는 헌정 위기가 찾아온다. 이에 옐친 정권도 질 수 없다는 집념으로 아예 전차부대까지 끌고 와서 대놓고 의사당을 포격하여 700명이 넘는 사상사가 발생해버렸는데 이건 당시 러시아의 상황이 막장의 끝을 달릴 만큼 최악이었다는 뜻이었다.
해체되기 직전의 소련군은 정규군은 5백만 명이 넘었고 예비군은 천만 명이 넘었으며 주력 전차, 중거리 로켓포, 대공 전차는 합쳐서 5만 대가 넘는 거대한 조직이었다. 그러나 소련 붕괴 이전 8월 쿠데타를 겪으며 지휘체계가 극도로 혼란스러워 졌고 비록 러시아군이 소련군의 대부분의 유산을 계승했다고 하나 그걸 감당할 능력이 안되서 어마어마한 규모의 군축을 단행한다. 그 과정에서 또 다시 혼란이 벌어졌고 부패마저 심해지며 오히려 아프간 전쟁 당시의 소련군의 병폐보다 심각해졌다.
특히 정치와 군사의 혼란도 문제지만 경제도 파탄나버렸다. 옐친은 고르바초프보다도 무리하게 IMF 말만 따르며 시장화, 민영화 정책을 펼쳤고 그 결과 폭등하는 물가, 빈부격차 심화, 올리가르히의 독점 및 범죄율의 급격한 증가, 저출산 심화 및 평균수명 단축 등 매우 심각한 사회 문제를 야기하였다. 옐친이 망쳐놨던 당대 러시아는 더 이상 미국은 커녕 내일 생존할 수 있을지도 의문인 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그나마 2000년대 이후로 호전되었을 뿐이지 지금까지도 러시아 사회의 심각한 문제로 작용하고 있는 부분이다.
근데 체첸도 정상은 아님 ㅋ
체첸 전쟁은 '덤앤더머'의 싸움이지 체첸 쪽이라고 해서 대단히 정의로운 독립 투사였던 것은 전혀 아니다. 한국 인터넷에서 러시아에 대한 반감 하나로 체첸, 그것도 이치케리야 체첸을 영웅처럼 추앙하는 이들이 몇명 있는데 그 논리면 탈레반도 미군이 아프간에서 오폭으로 민간인 죽이고 친미 정부가 나라를 거덜냈으니까 정당한 민중의 세력인가? 특히 이슬람 근본주의가 그토록 싫다는 분들이 왜 체첸에는 그렇게 관대한 태도를 보이는지도 사실 이해가 안간다.
1992년 5월, 체첸 영내의 러시아군은 철수하면서 체첸과의 협의로 무기들은 남기고 갔는데 이게 체첸 무장세력에게 있어서 커다란 자산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이 무기들은 혼란 속에서 민간에도 흘러가게 되었고 두다예프 정권도 총기소지를 허용해준다. 이러면서 체첸 내 범죄 발생이 급격히 늘어가며 치안은 엉망이 되어버리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경제 역시 문제가 많았다. 두다예프 대통령은 취임 하면서 "석유는 우리를 제2의 쿠웨이트로 만들어줄 것"이라며 당당하고 자신있게 선언했지만 정작 체첸 경제의 중요한 기반인 석유 생산량은 오히려 격감했다. 또한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의 충격으로 인해 실업률은 40% 수준이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중동 국가들과 소규모 월경무역을 했지만 오히려 러시아 연방으로부터 밀수지역이라는 비난의 명분만 갖다주는 꼴이었다. 무엇보다 체첸 경제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러시아인들이 '토박이 민족'이 아닌 지역 거주민을 추방하는 법이 제정되면서 빠져나간게 굉장히 치명적이었다.
두다예프 사후 집권한 마스하도프 자체는 온건파이긴 했다. 문제는 강경파에 휘둘려서지. 얘는 리더쉽이 부족한 탓에 체첸 정규군 외에도 각종 무장세력들이 난립하며 군벌화 되고 특히 살만 라두예프가 이끄는 부대들은 두다예프 전 대통령 경호병들까지 흡수한 상태인데도 크게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거기에 더해 이븐 알 하타브, 이 사람이 아마 가장 큰 문제이자 화근이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하타브는 체첸계가 아니고 아랍에서 온 무자헤딘 용사였는데 같은 처지인 무자헤딘 장병들을 모아 군벌화를 한다.
그가 이끄는 캠프는 공식적으로는 체첸 정부 기관이었지만 실질적으론 개인 사령부나 다름 없었다. 러시아 정보 당국 자료에 따르면 하타브가 5개를, 그의 친구인 바사예프가 2개를 맡았다고 한다. 또한 여기서도 아부 바카르 캠프는 양동작전과 테러리스트 교육을, 아부 자파르 캠프는 게릴라 전 훈련을, 야쿠브 캠프는 중화기 사용 훈련을, 다우가트 캠프는 이슬람 프로파간다 전문가 양성을 맡았었다. 2개월에서 6개월에 걸친 고된 훈련을 마친 병사들 중 우수한 인원들은 하라초이 마을에 있는 '와합파' 마드라사로 간다. 여기서는 주로 와하비즘을 비롯한 이슬람 원리주의 교육이 행해졌을 거라고 하는데 갈 수록 체첸 내부에 이슬람 원리주의가 확산되어가고 있는 것에는 이 것의 영향도 결코 작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한편 아슬란 마스하도프 대통령은 하타브의 행보의 목표가 이슬람 국가화이며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힘이 커질 수록 분열만 더 심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하타브 본인은 체첸에 내정간섭을 할 생각이 없다고 항변했지만 정작 그는 해외 이슬람 조직들로부터의 자금 지원을 받고 있는데다가 체첸 내 강경파인 샤밀 바사예프와의 우호 관계를 맺고 있었으니 독자세력화 된 상태라고 봐도 무방했다. 따라서 이슬람 원리주의의 득세를 억제 하려는 마스하도프 정권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1998년과 1999년 동안 아르비 바라예프, 람잔 아흐마도프, 살만 라두예프 같은 체첸의 과격주의자들이 러시아를 상대로 자꾸 납치와 테러들을 계속 벌여대자 옐친 정권은 특사로 블라소프를 체첸에 파견했지만 1998년 5월, 납치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체첸 내에서도 마스하도프 정권은 과격주의자들을 통제하는 것에 실패하고 오히려 협력하기 시작하면서 체첸은 서구적 제도 대신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 법을 도입하게 되었고 1990년대 초반부터 활성화 된 지하경제는 이미 통제불능의 상태였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하타브와 바사예프가 벌인 사건이 다케스탄 침공인데 이게 2차 체첸전으로 이치케리야 체첸이 몰락하는 것의 시발점이 된다.
2002년 모스크바 극장 테러 사건과 2004년 베슬란 학교 테러 사건은 체첸 반군이 서방 세계에서도 독립군이 아닌 테러리스트로 취급받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였고 마스하도프마저 죽은 후에는 체첸 독립이라는 목표마저 사실상 사라졌다. 2006년 지도자가 된 도쿠 우마로프는 다음해에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을 캅카스 에미레이트라는 이슬람 근본주의 조직으로 개편하였는데 이는 체첸 반군에게 있어서 민족해방이라는 대의보다 이슬람 국가 수립이 더 중요해졌음을 보여주는 징표였다. 캅카스 에미레이트는 IS 등장 이후에는 얘네한테 충성 의사를 공개적으로 표했는데 이쯤되면 체첸 분리주의자도 아니고 그냥 알카에다나 IS랑 다를 바 없다.
오늘날 체첸인의 '체첸 문제' 인식
체첸이랑 러시아 사이의 역사적 관계가 불구대천 원수 사이니까 당연히 체첸인들도 독립을 바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꽤 있을 거다. 근데 놀랍게도 2003년 여론조사에서 응답자 중 3분의 2에 이르는 사람이 체첸은 러시아의 일부로 남아있어야 한다고 응답했다. 이는 체첸인은 당연히 거의 대부분 분리주의자일 것이라는 러시아인들의 착각과는 다른 부분이었다. 2003년 이후 계속 연구된 바에 따르면 여전히 러시아의 일부로 남길 원하는 응답이 80%를 넘는다.
알하노프에서 람잔 카디로프로 정권이 바뀐 이래 실시된 2008년 여론조사에서는 카디로프를 신임한다는 체첸인들의 응답이 87%에 이르면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나 블라디미르 푸틴을 넘어서기도 했었다. 이때는 아직 카디로프가 권한대행이었기에 만약 지금 당장 대선이 시작된다면 누굴 찍을 거냐는 응답도 전체 응답자 중 68%가 카디로프를 선택했다. 이는 2000년대 들어서 러시아의 경제가 성장세에 접어들면서 나타나는 결과이기도 하고 두 차례나 전쟁의 참화를 겪은 체첸인들 입장에선 독립보단 러시아의 일부로 남는게 안정적인 길이라고 판단한 듯 하다.
카디로프가 물론 지금 시점에서는 꽤나 큰 비판을 받는다. 그가 대통령으로 있는 러시아 연방 내 체첸 공화국에서는 반대파에 대한 인권 탄압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고 카디로프가 푸틴 정권의 권력 상층부까지 올라온 만큼 그 역시 실로비키 집단의 부패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게다가 카디로프 휘하에 있는 체첸군은 2008년 남오세티야 전쟁 당시부터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까지 전쟁 범죄로 악명 높았었던 집단이었다. 그런 부분에서 카디로프가 마냥 좋은 지도자라고는 못볼 듯.
그럼에도 카디로프 정권이 지금까지 유지되는 것은 푸틴이 편의를 봐주고 있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두다예프를 비롯한 분리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았던 1990년대가 너무 혼란과 살육, 부패로 점철된 끔찍한 시기였다고 체첸인들이 느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맺음말: 과연 과오는 반복되는가?
체첸전에서 종합적으로 이긴 건 러시아다. 비록 1차전에선 깨졌지만 2차에선 뉴페이스 푸틴이 강경하게 때려부숴 결과적으로 체첸은 지금까지 러시아 연방에 속해있다. 2차 전쟁 당시 푸틴은 옐친과는 달리 먼저 선제공격을 한 테러리스트를 잡는다는 명분도 취했고 더 나아가 1차전 때보다 조직화된 부대 운용을 보여줬다. 러시아군은 1차 체첸전의 교훈을 바탕으로 보병과 기갑이 합동으로 작전을 펼칠 때에는 체첸군의 대전차 부대를 러시아군 보병이 상대하게 하거나 지상병력 투입 이전에 먼저 대규모 공습을 하는 등 나름 발전된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나 교훈은 잘 새겨지지 않았던 것일까? 2008년 남오세티야 전쟁에서는 공수부대는 그루지야 방공망을 제압하지 못한 덕에 육상에서 아예 처음부터 밀고 들어갔으며 GLONASS 없이 정밀 유도 탄약을 사용할 수 없었을 정도였었다. 그리고 이는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 때도 이어진다. 여기서도 러시아군은 BTG 편제를 너무 과신하였는데 문제가 BTG는 지휘통제와 정비, 의무, 보급 등의 조직이 매우 취약한 덕에 적 지역 종심에 깊이 진출하기가 어려웠고 결과적으로 이번 전쟁에서는 대전차미사일에 전차가 무력화되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아직까지도 러시아군은 구 소련군의 병폐를 여전히 유산으로 간직하고 있는 군대라는 것이다. 그러나 소련군은 겨울전쟁에서의 참패를 겪고 얼마 후 독일군의 침공을 당했지만 이내 승리를 거두었고 만주 전략 공세 작전으로 뼈 아픈 교훈을 통해 훌륭한 단기 기동전 전략을 선보였다. 반면 러시아군은 체첸 전쟁에서의 교훈조차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데 이는 극복해야 할 병폐인 소련군의 유산만도 못하다는 걸 보여준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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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훈, <체첸-러시아 전쟁의 전개 과정과 국가테러>, 한국중동학회, 2011
김태연, <체첸에서의 폭력의 전개와 그 관계적 요인>, 서울대학교 러시아 연구소, 러시아연구 제28권 제2호
현승수, <체첸 전쟁과 국제이슬람 무자헤딘 운동>, 한국이슬람학회, 한국이슬람학회 논총 제17-2집,
전갑기, <제1차 체첸전쟁에서 작전술 요소가 국면별 승패에 미친 영향 연구>, 건양대학교 일반대학원 군사학과 박사학위 논문
이종원, <탈러 분리독립의 선봉 체첸 공화국>, 국제지역대학원 러시아 CIS 학과
박정호, <북 카프카스(North Caucasus) 지역분쟁의 정치•경제적 요인 분석>, 한국외국대학교 러시아연구소, 슬라브연구 제21권 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