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이슨 Aug 02. 2023

이탈리아 왕국군은 왜 작살 났는가?

실패한 전쟁사-14

2차세계대전기 이탈리아군은 그저 개그 소재일 뿐이다. 파스타 밈으로 대표되듯이 무솔리니는 조롱거리일 뿐이며 걸즈 앤 판처에서도 이탈리아를 모티브로 한 안치오 고교는 개그로 존재감을 비추는 요소로만 활용된다. 독일군은 만슈타인, 구데리안, 모델로 대표되는 강력하고 뛰어난 국방군 및 무장친위대로 대표되는 비록 전범들이지만 호전적인 게르만 남성성에 부합하는 집단들이 있고 일본군은 자국 내에서도 평이 매우 좋지는 않지만 일본 제국이 당대 아시아의 패권국이었다는 사실까지 부정당하진 않는다.


그러나 이탈리아군은 다른 추축국 국가들에 비해 온갖 추태를 다 보인 국가로 취급받으며 2차세계대전을 파는 사람들 입장에서도 바보캐와 같은 인식이 형성되어 있다. 이탈리아군은 그렇다면 파시즘의 원조 국가임에도 왜 그렇게 추태를 부리며 처절하게 몰락했는가?

1차세계대전 당시까지 이탈리아군은 "평타"는 쳤었다


워낙 이탈리아의 졸전 이미지가 유명한지라 1차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군도 호구였다는 인식이 퍼져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1차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군은 2류 수준이었다는 것과는 별개로 호구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일단 이걸 알아야 하는게 이탈리아 전선은 서부전선과는 달리 험한 산악지대 였다. 여기는 싸우다가 산사태 날 확률이 높은 지형에다가 워낙 험해서 군수물자 보급을 빠르게 할 수 없는 동네인지라 아마 1차대전 주요 전장 중에 가장 최악인 곳을 꼽으라면 바로 캅카스와 이곳을 선택할 수 있을 정도였고.


그런데 1차세계대전 내내 이탈리아군의 방침은 이손초 강을 공격전선으로 삼아서 드라바 강과 사바 강으로 열린 관문을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본토를 공격한다는 전략이었고 실제로 3개월 한번 공세할 정도로 프랑스군이나 영국군보다 공격 빈도도 높았다. 생각해보면 1류 국가였던 영국, 프랑스도 그나마 평지인 서부전선도 참호뚫고 전진하느라 큰 희생을 치렀는데 얘네는 무려 산악지대에서 저짓할 수 밖에 없었으니 피해가 많이 나오는건 당연한 일이다.


또 하나 재미있는건 이탈리아군은 1870년 이탈리아 통일의 핵심인 사르데냐 왕국군 계열 장교단이 잡고 있었는데 그들은 유대인의 입대 허용에 대해서도 관대한 태도를 보였었다. 그리고 참모총장인 루이지 카도르나 장군은 전쟁 중에 후퇴한 장군들을 죄다 면직시키는 굉장히 원칙적이었기에 규율과 군기는 의외로 잘 잡혔었다고 한다. 이걸 보면 당대 이탈리아군은 그래도 드레퓌스 사건으로 대표되는 프랑스군이나 유대인의 장교 입대를 허용해주지 않던 독일 제국군 내 프로이센 장교단에 비하면 상당히 진보적이었던 셈.


거기다가 이탈리아는 통일한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다가 지역 차이도 심한 곳이라서 북부 출신과 남부 출신들의 통학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는데 이 와중에 비록 성과는 전혀 없었지만 산악지대를 열한차례나 공격을 했으며 카포레토 공세 직전 이탈리아군은 드디어 방어선을 뚫는데 성공했다. 이후에 곧바로 이탈리아군 역사상 가장 최악의 참패인 카포레토 전투가 시작되는데 분명히 이 공세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군을 독일제국군이 적극적으로 도왔었는데다가 독가스 공격을 날렸었다. 휴돌턴이라는 장교도 이탈리아군의 방독면이 효과가 없었다고 기록한 걸 보면 이때까지 서부전선과 달리 이탈리아 전선에는 독가스 살포가 거의 없었다보니 당연히 이탈리아군이 제대로 화학전에 맞설 수 있을리가 없었다.


또한 알프스 지리에 익숙한 산악부대 '아르디티'는 독일군의 충격 전술 부대 스톰 트루퍼에서 모티브를 따온 산악부대로서 단도 등을 활용한 백병전에 능했다. 이들은 육탄전과 기습 훈련을 비롯한 각종 특수훈련들로 단련된 최정예들이었으며 기관총과 기관단총 같은 자동화기 뿐만 아니라 수류탄도 대량으로 보유했으며 단도도 백병전용으로 자주 사용했다고 한다. 월급과 식사 및 병영의 질도 일반부대보다 좋았는데 덕분에 단결심과 동지애는 뛰어났다고 하고. 이렇듯 이탈리아군은 물론 무능한 면이 있긴 했었긴 해도 의외로 적어도 이때까지는 괜찮은 부분도 없진 않았었는데 무엇보다 산악지대 지형의 특성상 암석에 포격이 맞아서 이게 전장에 떨어져 다수의 사상자가 나오기도 하는 상황과 엄격한 규율 속에서도 불평하지 않고 묵묵하게 싸워온 이탈리아군 장병들은 다른 군대에 밀리지 않을 만큼 정신력이 투철했다는 걸 의미한다.

에티오피아와 스페인 내전에서부터 추태를 보인 이탈리아


사실 에티오피아를 침공할 때부터 이탈리아군은 이기긴 해도 추태를 보였다. 침공군은 21개 사단 50만으로 늘었고 300대의 전차와 500대의 항공기가 동원되었으나 오랫동안 준비를 했는데도 지도 하나 준비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길잡이에게 의존했으나 함정에 걸리기도 했었고. 다만 이탈리아군의 적인 에티오피아군이 230정의 구식 기관총과 50문의 야포가 전부에다가 3만 5천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냉병기를 쓰고 있던 군대였고 왕실과 부족들의 갈등이 심해 패배하게 되었으니 결국 이긴 건 이탈리아였다.


이어서 1936년 11월, 무솔리니는 스페인 공화정부에 저항하는 프랑코 세력에게 군사 원조를 실시하여 의용군을 파병하고 2만정의 소총과 200정의 기관총, 150만 페소의 자금을 지원했다. 이때 프랑코군이 마드리드 주변에서 교착상태에 빠졌고 3만명의 이탈리아군이 진격했지만 1,400명의 전사자와 부상자 4,600명을 내고 장비까지 잃었다. 당시 스페인 공화진영 측 국제여단이 노획한 이탈리아군의 문건을 보면 붕대 외에 약품을 지급받지 못했으며 오죽하면 프랑코 장군마저 비웃을 정도였다.


이후 마드리드 공방전에서 빠진 이탈리아군은 북부 전선에 재배치되었고 그나마 해군의 잠수함 전력은 영국과 소련의 수송선을 격침, 공군은 바르셀로나를 폭격하며 소기의 성과를 거두긴 했다. 이러한 스페인 내전 개입은 군비를 크게 소모시켰으며 전사자 4천여 명과 부상자 1만 1천 여명이라는 인명피해 외에 1천대의 항공기를 제공하고 1,400억 리라의 전비가 들었다. 그럼에도 이탈리아는 프랑코로부터 얻어낸 것이 없었고 이는 1939년,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합병에 발 맞추어 알바니아를 1만 2천명으로 침공해 점령했으나 이때도 작전 수행은 조잡했다.

거대한 대전에 휘말리기 부적합한 이탈리아의 체급


일단 이탈리아는 GDP부터가 동양 후발 국가인 일본에 못미치던 수준이었다. 심지어는 주요 산업생산량도 일본에게 뒤쳐지던 국가였으며 앞서 얘기한 스페인 내전에 개입하여 전사자만 4천여 명에 투입된 전비는 프랑코 진영을 먹여살릴 수준급이었다. 더 치명적인 것은 에티오피아를 얻는 과정에서 이탈리아는 1년치 국가 예산에 해당하는 10억 달러의 전비를 소모해 외화가 바닥났는데다가 그렇게 얻은 식민지 에티오피아는 자국의 수입을 넘어서는 유지비용이 드는 '돈 먹는 하마'와 같은 존재였다.


재정적자에 시달리는 상황에서도 석유는 물론 석탄, 철, 고무, 구리 같은 전략 물자를 대부분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 독일은 석유는 없어도 석탄은 풍부했지만 이탈리아에게 매장량이 극히 적었고 철광석은 고갈 직전이었다. 따라서 알루미늄만이 자급 가능했는데 수입 항로 80%는 영국이 통제하는 지브롤터 해협이나 수에즈 운하를 통과해야만 했다. 물론 독소 불가침 조약 이후로는 소련을 통해 석유를 수입하긴 했으나 바르바로사 작전의 개시로 사실상 중단되었고 이탈리아에게는 전략물자 비축량은 독일에게만 의존하는 형국이 되었다.


이탈리아는 이처럼 도저히 열강이라 할 수 없는 국력을 가진 나라로 이런 나라가 대전의 흐름을 주도하기란 무리였다. 이탈리아의 당시 식민지였던 리비아는 현재 산유국이나 당시까지 석유가 시추되지 않았었다. 1930년대 중반부터 이탈리아 정부는 시추 계획을 세웠고 1940년에 행동에 나설 생각이었으나 뽑기도 전에 전쟁이 터졌고 전쟁을 뒷받침해줄 자원 획득은 무위로 돌아갔다. 만약 석유가 시추되었다면 분명 북아프리카 전선의 중요성은 연합국이나 추축국이나 양쪽에게 중요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탈리아 육해공군의 노답 상태


1940년 6월 참전 시점에서 이탈리아 육군은 소련, 프랑스, 독일에 이어 세계 4위였고 장비도 거의 대부분이 국산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이탈리아군은 절대다수가 알보병이었고 장비의 현대화도 낙후되어 있었다. 수백만 대군의 기본 화기인 소총도 160만 정이 끝이었고 상당수는 카르카노의 M38이 아닌 초기형이었다. M30 기관총은 성능이 구린 폐기물이었다. 이런 나라가 1912년 오스만과의 리비아를 두고 벌어진 전쟁에서 사상 최초로 장갑차를 실전에 투입한 나라였다,


이탈리아군의 주력 전차 탱켓은 CV.33 경전차로 무솔리니의 대규모 기갑부대 구축 계획으로 2,000대 가까이 생산되었으나 정작 스페인이나 북아프리카는 고사하고 에티오피아에서조차 육탄공격에 당했을 정도였다. 포병은 대부분의 수천 문의 화포가 1930년대 이전 생산된 제품들에다가 심지어 1차세계대전 당시 노획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제가 90%였다. 사단 규모는 타국에 비해 작은데도 불구하고 정원까지 못채웠었다. 완전 정원 채운 부대는 19개 사단에 불과했고 34개 사단은 75%, 20개 사단은 60% 밖에 못채울 지경이었다. 더 큰 문제는 상비 사단의 편제가 2개 보병연대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보통 3~4개 보병연대 사단의 표준이었는데 무솔리니가 사단 수를 대책 없이 늘리다가 저런 상태가 되어버린 것.


이탈리아 해군은 모호한 지리적 위치 때문에 상대적으로 경시되다가 1930년대를 기점으로 이탈리아 왕립 해군은 영국, 미국, 일본, 프랑스와 함께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에 참여할 만큼 세계 TOP 10 안에 드는 해군 전력을 보유할 만큼 성장했다. 1940년 6월 기준으론 전함 4척, 순양함 22척, 구축함 59척, 잠수함 117척이나 보유했는데 거기다가 3만 5천톤급 최신 리토리오급 전함 2척까지 취역 직전이었다.

당시 현역이었던 전함 4척은 1차대전 당시에 건조되었지만 현대화 개장을 한 콩테 디 카부르급 전함 2척과 안드레아 도리아급 2척이었다고 군항으론 나폴리와 타란토가 활용되었다. 이는 무솔리니 집권 후 이탈리아가 야심을 가지고 큰 비용을 들여 건함경쟁에 참여한 결과이며 실제로 이 시기 이탈리아의 군함 설계 기술은 영국에 필적하는 수준이었다. 리토리오급은 영국 해군의 킹 조지 5세급과 비슷한 성능을 보였고 어뢰는 독일이 면허 생산할 정도로 성능이 좋았다.

무엇보다도 넓은 식민지를 관할하기 위해 전세계에 함대를 분산해야 했던 영국 해군이나 지중해와 대서양으로 전력을 양분해야 했던 프랑스 해군과는 달리 이탈리아 해군은 본토가 지중해 한복판에 있어 보급로가 짧아 운용이 편리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리고 영국 지중해 함대는 구식 함정 위주였기 때문에 이탈리아 해군의 상대가 되기 힘들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문제점도 많았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문제점은 전자통신기술의 부족이었는데 이 때문에 1942년이나 되서야 레이더를 도입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탈리아 해군은 1941년 3월 마타판 해전에서 비토리오 베네토 전함을 비롯해 막강한 전력을 가지고 주간에는 대등하게 싸웠지만 정작 야간전에서는 일방적으로 밀리는 행보를 보였다.

두번째 문제점은 항공기 엄호가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 이탈리아 정부는 별도의 해군항공대 없이 육상의 공군 기지면 충분하다고 생각해 항공모함을 건조할 수 있었음에도 하지 않았다. 이는 해상전에 항공전력을 중요했음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세번째 문제점으로는 연료 문제가 있다. 개전 당시 해군의 비축연료는 고작 9개월 정도가 전부였고 무솔리니가 전쟁이 빨리 끝난답시고 일부를 육공군으로 빼버리는 만행을 저지르면서 이 문제는 더 심해졌다.

마지막 문제점으로는 순양함이나 구축함들의 속도가 좋았지만 내구성이 떨어졌기에 악천후를 견디기 힘들었다는 점이다. 나폴리에서 대규모 쇼를 보여줬던 잠수함대는 겉으론 소련 다음 규모였지만 폭뢰 공격을 받아 배관이 파열되면 유독가스를 뿜어대는 등 그런 문제들이 많았다. 이처럼 이탈리아 해군은 겉보기에는 나름 전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문제들이 많았다. 그랬기에 이탈리아 해군은 장병들이 열심히 싸웠지만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독일 해군이나 일본 해군에 비해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


이탈리아는 사실 의외로 항공전력에 있어서 앞서 가는 나라였다. 1912년 오스만과의 전쟁에서 항공기를 최초로 사용했으며 육군항공대에서 벗어나 공군 창설 시점에서 1,700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특히 무솔리니의 측근 아탈리 발보는 1931년 S-55X 비행정대를 데리고 로마에서 시카고까지 19,000km를 비행할 정도. 게다가 발보의 성공으로 이탈리아 공군의 위상은 하늘 높이 치솟아오르던 시점이었다. 주력 복엽전투기 CR.32는 기동성으로 조종사들에게 높이 평가받았는데 소련제 단엽기 I-16과 스페인 내전에서 대등한 전투를 벌일 정도였다.


그러나 이탈리아 측은 기동성을 최우선으로 하였는데 이는 복엽전투기 He 29를 퇴역시키고 단엽전투기 Bf 109를 도입한 독일과는 사뭇 다른 행보였다. 거기에 더해 무솔리니가 도입한 장인정신식 수공업 생산 방식으로 1940년 1월에서 1943년 4월 사이 이탈리아가 생산한 기체는 10,500대에 불과했는데 독일은 못해도 2만대를 넘겼던 것과 비교된다. 그리고 구식기가 태반이었는데 차기 전투기 MC.200이나 G.50조차 무전기 대신 매우 불량한 수신기가 전부여서 조종사 간 소통이 힘들었고 무엇보다 라디오 보급률도 매우 낮았었다.


폭격기도 장갑판이 없고 방어용 무장 또한 없었으며 항속거리마저 짧았다. 음성통신? 모르스 방식의 송신기가 전부였다. 속도마저 겨우 400km로 여타 국가의 550~600km대 전투기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었고 주력 폭격기 BR.20은 폭장량이 800kg이었다. 참고로 영국군의 랭카스터 폭겨키는 10t이었다. 더구나 폭격기들이 교리상 정밀수평폭격에만 집중하고 있어서 전술용 급강하 폭격기도 전무해 항만 폭격으로는 빈약했다. 그나마 이탈리아 공군에서 높게 평가할 무기는 SM.79 뇌격기 정도로 얘는 강력한 어뢰로 영국 해군과 수송 선단에 꽤 은근히 피해를 입혔다.

판단 자체를 망치는 무솔리니


프랑스군은 2차세계대전에서 유능한 집단이 절대 아니었다. 분명 프랑스군은 S-35 '소뮈아' 전차와 B전차를 중심으로 47mm 포를 중점적으로 활용하였고 둘이 합치면 800대 였는데 이는 독일 최신전차였던 3호 전차와 4호 전차를 합친 것보다 많은 수치였다. 오히려 프랑스제 전차는 독일군 주력인 1호 전차나 2호 전차보다 우월했다. 하지만 편제상으로 대부분의 전차가 기계화 사단이 아닌 보병사단에 분산배치 되어 전차들을 나눠 투입하는 등 구시대적 방어전에 의존하며 기계화부대를 집단적으로 운용할 교리가 없었고 결국 무기의 특징에 맞게 전술교리와 편제를 만들어서 집단적이고 체계적으로 운용한 독일군에 무너졌던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이탈리아군은 프랑스 항복 날 허겁지겁 모은 27개 사단을 동원해 프랑스 국경에서 진격했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했다. 마르세유를 점령한다던 호언장담과는 달리 이탈리아군은 어떤 도시도 점령하지 못한 채 시골 마을 13개만 정복했다. 이탈리아군의 탱켓 전차는 장갑으로 기관총 방어가 불가능했으며 엔진고장에 시달렸다. 또 눈폭풍이 매우 심하여 병사들은 방독면을 써야 했으며 산악장비 부실 탓에 부상자 2천명 가량의 절반은 동상자였다. 게다가 150mm 포탑을 갖춘 산악요새는 프랑스군 280mm 곡사포에 얻어터져 무력화 되기도 할 정도였다. 또 통신도 열악하고 독일의 지원도 미적지근했고. 결국 이탈리아는 수천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니스, 사보이, 코르시카를 전리품으로 가져갔다.


그리스 침공 당시에는 더 가관이었는데 30만 상비군과 60만 예비군을 집으로 돌려보낸 상태에서 벌였다. 왜 그랬냐고? 불가리아가 발목 잡을 거라 본 거다. 문제는 사태가 벌어지고 나서 이탈리아의 예상과는 달리 그리스가 몇개 사단만 불가리아에 두고 나머지 12만명을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하면서 계산이 꼬였고 그 그리스군은 부족 국가였던 에티오피아군과도 낙후된 약소군대인 알바니아군과도 또 이미 전쟁에서 지기 직전이었던 프랑스군과도 달랐다. 대부분의 그리스군 장교단은 터키로부터 독립하는 과정에서 아타튀르크가 이끄는 터키군과 결전을 치뤘던 베테랑들이었다.


그리고 그리스 북부에는 산맥이 있는데 그리스군은 이걸 거점으로 고지전을 벌였다. 이 곳의 날씨는 비바람과 눈이 쏟아지는 거친 환경이었고 산악 지형도 험난하기에 이탈리아와는 지리적 요건 자체가 달랐다. 덕분에 산맥을 넘어 진군하던 이탈리아군은 익숙하지 못해 개고생을 해야만 했으며 보급 차량 지원도 쉽지 않았다. 오죽하면 이탈리아군은 핀도스 산 전투에서 그리스군에게 포위당해 1개 사단 자체가 전멸당했을 정도였다.


이탈리아의 실책은 그 뿐이 아니다. 독일이 영국 침공하는 것을 돕는답시고 침공하지도 않았는데 5개 사단이 전차 200대를 동원해 이집트를 향해 97km를 진군한 것이다. 영국군은 초반에 당황하였지만 이내 일련의 요새화된 야영지의 방어를 강화하고 3달 뒤쯤에는 넓은 사막을 이용해 진지를 우회한 뒤 기습에 성공해 리비아로 몰아냈다. 1941년 1월, 토브룩이 함락되었고 이탈리아 육군 제10군은 벵가지에서 전투를 이어갔으나 그 사이 장병 2만명과 200문의 야포, 전차 120대가 영국군의 수중에 넘어갔다. 사실상 리비아를 잃게 생긴 뒤에야 이탈리아는 헬프콜을 쳤고 독일이 아프리카 군단을 창설하고 롬멜을 파견한 이후에 상황은 좀 나아졌다.

맺음말: 준비 자체가 되어있지 않던 나라


사실 대전기 이탈리아가 개그 소재로 사용되어서 그렇지, 무솔리니라는 사람 자체가 무능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만큼은 사실이다. 적어도 게르니카 폭격으로 대표되는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이나 말할 것도 없는 독일의 히틀러나 홀로코스트에 동조한 루마니아의 안토네스쿠보다도 어쩌면 무솔리니는 매우 온건했던 셈이다. 당장 히틀러는 공산당, 사민당은 물론이고 같은 당의 슈트라서나 룀도 가차없이 죽일 정도로 강압적이었고 프랑코 역시 국민생디칼리슴 정당이던 팔랑헤의 대중주의적 성격을 지우고 어용기관으로 만들었는데 그에 비해 무솔리니는 공산당의 안토니오 그람시 같은 굉장히 자기 체제에 위험한 사람조차 감옥에만 넣고 건들지 않았었다.


또 무솔리니는 국내적으로는 마피아를 가장 잘 때려잡던 이탈리아의 지도자이기도 했으며 오늘날에도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에 대한 평가는 마냥 나쁘지는 않다. 결국 작년에 이탈리아의 형제들이라는 국가 파시스트당 후계 세력이 조르자 멜로니라는 총리를 배출해내기에 이르었고 지금도 독일에서의 히틀러에 대한 평가에 비하면 무솔리니에 대한 이탈리아 사회의 전반적인 인식은 매우 좋은 편이다. 어찌보면 현재 일본인들이 일본 제국에 대해 인식하는 것보다 무솔리니에 대한 이탈리아인들의 인식이 더 괜찮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그런 맥락에서 독일이나 일본에 비해 악행을 덜 저지른 이탈리아가 유머 소재가 될 수 있는 걸지도 모른다. 물론 이탈리아가 마냥 동네 바보형(?)이었던 건 아니다. 그들도 에티오피아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독가스를 살포하였으며 검은 셔츠단을 비롯한 파시스트 행동대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했고 1938년 7월에는 나치의 뉘른베르크 법에서 모티브를 얻어 유대인을 공직에서 배제하는 차별법을 제정하기도 하였다. 히틀러 만큼의 잔혹성을 가진 정권은 아니었다는게 중론이긴 한데 그 정도의 힘이 있었다면 과연 개그캐로 남았을련지는 모르겠다.


저번 태평양전쟁 글에서 나는 일본군은 상층부의 경직성과 답이 없는 짓거리를 빼면 상당히 강력한 파워를 가진 군대였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독일군은 전략적 관점이 부족해도 전술적인 관점에서는 매우 뛰어날 정도의 역량과 기술을 가진 군대였다. 그러나 그에 비해 이탈리아군은 굉장히 초라하기에 어찌보면 아이러니하게도 그 점이 독일군과 일본군 만큼 금기시되지 않는 원인이 아니지 않을까 한다.


참고 문헌:


한종수 외, <2차대전의 마이너 리그>, 길찾기, 2016

장 로페즈 외, <제2차 세계대전 인포그래픽>, 레드리버, 2021

존 키건, <2차세계대전사>, 청아람미디어, 2016

한국일보, <타임라이프 북스-이탈리아 戰線>, 타임라이프사, 1981

한국일보, <타임라이프 북스-빨치산과 게릴라>, 타임라이프사, 1981

찰스 메신저, <롬멜: 신화로 남은 영웅>, 플래닛미디어, 2010

로버트 팩스턴, <파시즘 : 열정과 광기의 정치 혁명>, 교양인, 2005

앤터니 비버, <스페인 내전: 20세기 모든 이념들의 격전장>, 교양인, 2009

제러드 L. 와이버그, <2차세계대전사 2>, 길찾기, 2016

吉川 和篤, <Viva! 知られざるイタリア軍 (單行本(ソフトカバ-))>, イカロス出版, 2012


https://en.m.wikipedia.org/wiki/Military_history_of_Italy_during_World_War_II 

https://www.britannica.com/place/Italy/Economic-policy

https://journals.sagepub.com/doi/full/10.1177/0968344517696526


https://youtu.be/mmV42jOiwnk


매거진의 이전글 러시아는 체첸에서 왜 고전했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