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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Aug 03. 2023

제국의 무덤: 소련의 대(對) 아프간 정책 실패

실패한 전쟁사-15

https://youtu.be/u07gUfwncTE?si=ioq4YudzfdNsXmI-

제국의 무덤의 첫 타자로 소련의 아프간 전쟁을 꺼내왔다. 사실 이전에 내가 2021년까지 있었던 미국의 아프간 전쟁에 대해서 얘기할 때마다 미군의 점령 정책 및 군사 작전의 실패를 집중적으로 비판했는데 이게 아이러하게도 1979년 이래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던 소련군에도 적용되는 비판이라는 것이다. 냉전을 주도했었던 두 제국이 사실상 같은 전철을 밟은 셈이었다. 또 미국이 베트남에서 굴욕을 겪었다면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서 겪었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소련 정부의 대(對) 아프간 정책의 실패를 분석하고 왜 소련이 군사 개입을 하며 목표로 삼았던 아프간 친소 정권의 안정화가 실패했는지도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아프간 문제를 둘러싼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들의 논의(Feat. 그로미코, 안드로포프, 우스티노프)


일단 아프간 전쟁이 발발한 개요부터 살펴보자. 본래 아프간은 왕정 국가였다. 하지만 1973년 7월, 국왕 자히르 샤가 이탈리아로 간 사이 수상 모하메드 다우드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그때까지 아프간은 군주국임에도 이례적으로 친소 국가였는데 1961년 모스크바에서 출간된 한 연구서는 소련이 전통적으로 아프간 군주국을 승인해왔다고 하였다. 실제로 1960년 흐루시초프 서기장은 카불을 방문해 아프가니스탄과 문화협력조약을 맺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후 들어선 다우드 정권은 '탈소친미'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다우드는 1977년 4월, 의례적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했지만 소련으로부터 군사적, 경제적 지원 약속을 받아내지 못했으며 CIA 보고서에 따르면 사실상 소련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다고 한다. 일례로 다우드는 브레즈네프 서기장과의 대화에서 내정간섭을 항의하기도 했었고. 결국 4월 혁명으로 1978년 4월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이 집권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인민민주당 정권의 타라키는 민족민주 혁명을 자처하고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핀란드화하는 걸 지향해야 할 정도로 아프간 공산정권은 중립지대처럼 보였었다.


아프간 공산정권의 초기 내각은 수상에 타라키, 부수상에 카르말과 아민을 앉히며 할크, 파르참 양대 파벌을 모두 기용하는 연립정권 성격이었다. 5월 23일 시모네코를 비롯해 아프간 인민민주당 소련인 고문들이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국제부에 보낸 보고서를 보면 아민은 신정부 내에서 자신이 속한 파벌의 지배를 강조하였다. 이에 카불의 KGB는 아민에 대한 모스크바의 경계심을 촉구하는 보고서를 냈고 반면 외교관인 푸자노프는 아민 쪽으로 기울며 아민의 숙청에 일체 항의하지 않았었다. 결국 1978년 4월부터 10월 동안 카불은 타라키-아민의 독주 무대로 흘러갔고 무자헤딘의 혼란으로 더 엉망이 되어갔다.


그렇다면 당시 소련 공산당은 아민의 폭주에 어떻게 반응했을까?우선 그로미코는 군사 개입 당시 최종적으로 거부 의사를 표하진 않았기에 그 역시 아프간 공산정권을 원조하는 것을 반대하진 않았으며 아프가니스탄이 서방세계의 교두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려하긴 했었다. 실제로 1980년 6월의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군사개입이 만장일치로 사후 승인되었기도 하고. 최종적으로 그의 차관이었던 코르니엔코도 그로미코가 군사개입 외에 대안이 없었다고 생각했다는 걸 암시하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그로미코가 처음부터 개입주의자였다는 것은 아니다. 외무장관으로서 그는 3월 17일 <아프간 민주공화국의 상황의 격화와 우리의 가능한 조치에 관한 정치국 회의> 중에 군대 투입은 곤란하다고 발언하며 소련군이 투입될 경우 아프가니스탄군과의 충돌이 벌어지니 원칙적으로는 좌시할 수 없지만 군 투입의 정치적 파급효과까지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정작 카불에 있던 중앙군사고문단은 반란군에 대해 아직은 수백 명 수준이라 크게 카불을 공략할 만한 위협이라 하지 않았지만 타라키와 아민은 꾸준하게 소련군의 주둔을 요구해왔다. 그들의 목적은 국내 권력 투쟁에서 서로가 고지를 점하기 위해 소련군의 주둔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자 한 것이었으며 소련 측에서 이걸 고심한 건 이란 신정 혁명 이후로 거세진 이슬람 세력화를 우려한 측면도 있었다.


수상 코시긴은 경제적 지원을 강조하며 수입하는 가스 가격을 인상하고 무기를 무상공급으로 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7만 5천톤으로 예정된 식량 10만톤의 원조를 제안했고 아프간 지도부와 손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코시긴은 무력은 최후의 수단이며 세계의 이목을 신경써야 한다고 했다. 코시긴은 1960년대 후반 미국과의 전략무기 제한협상 당시 소련 정부의 외교의 주역이었으며 1973년 욤 키푸르 전쟁 당시 소련 지도자들의 데탕트에 대한 태도를 분석한 한 논문은 그와 그로미코가 데탕트 지지자였기에 브레즈네프가 정치국 내에서 이와 같은 외교 정책 지지를 강화하는 수단으로서 그들을 승격했다고 한다.


국방상 우스티노프는 두 가지 안을 제시했는데 첫째는 24시간 이내에 제105공정사단을 파견하고 카불로 기계화보병 부대 1개 연대를 파견한다는 것이다. 특히 제68기계화사단을 국경에 결집시키고 제5자동화저격사단을 국경 부근에 주둔시키는데 이는 정치적 결정이 필요하다. 나머지 대안은 2개 사단 병력을 직접 투입하는 것이고. 여기서 우스티노프가 1개 공정사단과 보병 1개 연대의 특수부대 병력 결합, 또는 2개 사단이면 상황이 정리가 된다고 자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군대의 투입이 몰고 정치적 효과는 우려하지 않았다.


안드로포프 역시 어떠한 경우에도 아프가니스탄을 잃을 수 없다며 강경론의 선두 주자였는데 코시긴이 타라키와의 통화를 끝내고 정치국 회의가 열렸을 때 안드로포프는 '혁명을 위한 지원'이라는 무력개입은 상황을 고려했을 때 성공의 전망이 매우 희박하다고 입장을 전환했다. 여기서 1차적으로 그로미코의 주장이 힘을 얻는다. 1970년대 소련 외교관들을 자주 상대했었던 헨리 키신저는 소련 외교관들이 국제무대에서의 상황 평가보다는 국내적인 입장 제약에 더 민감하다 얘기했는데 실제로 외무상 그로미코가 1973년 정치국원의 반열에 오른 것은 16년 간의 외무상을 거친 후였던 것만 봐도 근거 없는 소리는 아니다.

과연 아민은 반소주의자였나?


소련은 타라키-아민이 주도하는 할크파를 끝까지 불신했다. 그나마 아프간 주재 대사 푸자노프는 할크파를 상당히 신뢰했었는데 반대파인 파르참을 지원하는 카불 KGB와는 반대되는 행보였다. 6월 11일 아민의 반대파 중 한 사람인 내무상 누르 아흐마드 누르가 아민이 타라키의 자리까지 찬탈하려고 한다고 하소연 했으며 기획청 장관 알리 케슈트만드도 푸자노프에게 아민의 공세로부터 카르말을 지켜달라 부탁했다. 그러나 푸자노프가 기껏해야 한 일은 타라키를 만나 그냥 얘기를 듣다 오는게 끝이었다.


심지어는 7월 20일 한 밤중에 카르말, 바리알레, 라테브자드가 푸자노프에게 면담을 요청했는데 단칼에 거절당한 건 물론 아예 아민에게 밀고 해버렸다. 1978년까지 모스크바는 푸자노프에게 맡겨놓고 있었으며 덕분에 1987년 4월부터 10월 동안 타라키-아민의 독주 체제가 형성되었다. 헤라트 봉기 당시에는 정치국 회의 결과 아프가니스탄으로 BMP-1 보병전투차, Mi-24, Mi-8T, BTR-60PB 장갑차, BMDM-2 도로정찰 장갑차, 대공 로켓탄 스트렐러-2M 등을 소련은 지원했는데 직접 개입은 꺼렸었다.


그러나 쿠데타가 벌어지고 타라키가 사망하며 상황이 달라진다. 그로미코는 이 와중에 아민의 의도를 알아내려는 목적에서 그와 관계 및 접촉을 유지했고 푸자노프도 그러했으나 정작 아프간 위원회는 안드로포프와 우스티노프를 중심으로 정책 재검토에 착수한다. 쿠데타 당시 푸자노프를 비롯한 소련 대표들은 그로미코의 이니셔티브에 의해 아민을 사실상 지도자로 간주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으나 카불 중앙군사고문단 쪽의 고렐코프 장군과 KGB 대표 이바노프 장군이 모스크바로 소환되며 관계가 서먹서먹해진다.


특히 타라키의 죽음은 브레즈네프의 분노를 불러왔고 소련 지도부에게 이는 모욕 이상의 도전장이었다. KGB 의장 안드로포프는 체코슬로바키아에 있던 카르말을 모스크바로 데려왔으며 이 와중에 아민은 미국과의 접촉을 빈번히 시도하였다. 게다가 푸자노프가 카불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함에 따라 카불의 KGB는 모스크바로 아민의 권좌 축출을 지속적으로 요구해왔었다. 마침내 카불 진공 작전이 결정된 날 모스크바에서는 14인의 정치국원 전원과 포노마료프, 고르바초프, 셰바르드나제 등 정치국원 후보 13인이 참석한 가운데 아프가니스탄어 소련군이 파견되기로 하였음을 선포하였고 곧이어 작전 완료 후인 1979년 12월 28일 사망한 아민을 대신해 카르말이 새 지도자가 되었다.


그렇다면 아민은 소련을 버리고 반소 노선을 취할, 말 그대로 위협이 될 존재였나? 난 아니라고 본다. 아민은 집권한 후에 지속적으로 소련의 지원을 요청하였으며 대통령궁이 스페츠나츠의 기습을 받았을 때도 사살 당하기 직전에야 소련이 칼을 빼들었다는 걸 알 정도로 소련을 신뢰하고 있었다. 아마 유고의 티토나 중국의 마오쩌둥과의 결별에서 소련은 큰 트라우마를 느꼈던 것일텐데 아민은 그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당장 북한의 김일성만 해도 주체노선을 천명하며 소련, 중국 사이에서 왔다갔다 한 와중에도 소련을 거스르지 않았으며 루마니아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도 비 소련 노선이었지만 대놓고 덤벼들진 않은 채 협력관계를 이어갔다. 오죽하면 사건 직전 아프가니스탄에 소련군 공수부대와 GRU 부대가 진입하자 아민은 안이하게 그들이 자신을 도와 반란군을 진압할 거라며 착각하며 오히려 좋아했고 위험 조짐 첩보는 싸그리 무시하였다.


그러나 소련 공산당 정치국 내에서 안드로포프와 우스티노프는 단순히 아민에 대한 반감 외의 다른 이유도 있다 하였다. 만약 아프간이 넘어갈 시 CIA가 소련 남부 공화국들의 독립을 자극하고 대공방위체제가 약한 남부국경을 뚫고 아프간에 배치된다는 가정 하에 미국의 퍼싱형 미사일이 바이코누르를 위협할 거라는 점, 아프간의 우라늄 생산지가 핵개발국 파기스탄과 이라크에게 사용될 거라는 점, 아프간 북부의 반정부 이슬람 세력이 집권하여 파키스탄과 손잡을 것라는 점 등이 작용하여 KGB 스페츠나츠를 움직여 아민을 제거하고 카르말을 옹립한 부분도 있었다. 무엇보다 소련 정부가 아민을 제거하기로 결정한 요소에는 아민 정권이 워낙에 민심이 안좋은데다가 당장은 반란군의 세가 강하진 않지만 너무 민중들을 폭압적으로 대하기에 잠재적인 불안요소가 컸던 것도 있다.


유사시 아민 제거 및 아프간 개입을 위한 준비도 진행되고 있었다. 일례로 GRU 특수부대 '무슬리만스키' 대대는 GRU 사령관 이바슈틴의 명령으로 투르케스탄 군관구 여단장이었던 콜레스니크 대령이 타시켄트에서 투르케스탸 군관구와 중앙아시아 군관구의 병력으로 조직한 스페츠나츠다. 카불 소련 대사관의 KGB 특수부대는 KGB의 통제를 받지만 GRU 특수부대는 국방성 통제 하에 있었는데 '무슬리만스키'라는 이름으로 지어진 스페츠나츠 대대의 구성원은 투르케스탄 군관구와 중앙아시아 군관구의 정찰부대, 자동화 저격부대, 전차부대에서 선발되었다. 이 특수대대는 5개 중대와 2개 특별 그룹으로 이뤄졌고 숫자는 500명, 하비브 할바에프 소령이 훈련을 담당했다. 훗날 1979년 이 부대는 카불 점령 작전에서 선두에 서게 된다.

보론: 소련의 정치체제의 이해


소련 시기에는 소련 공산당의 일당독재체였다. 그랬기에 공산권 국가의 특징상 국가 권력기구와 별도로 당내 권력이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다음은 소련 시절 국가 권력 기구들에 대한 설명이다.

소련 최고회의

- 소련 3대 기관중 하나. 소비에트 연방 최고 소비에트는 1937년에 새로 만들어진 소련의 새 헌법에 따라 창설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입법부이자 의회다. 이전에 존재하였던 소비에트 연방 소비에트 대회와 소비에트 연방 중앙집행위원회를 통합하여 만들어졌다. 소련의 행정부, 사법부, 검찰을 하위에 두고 직접 지도하며, 중화인민공화국의 전국인민대표대회와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소련 공산당의 공산당대회와 유사하였으나, 소련 공산당의 공산당대회는 당 내의 당권 행사와 대변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소비에트 연방 최고 소비에트는 국가 내의 국권 행사와 대변을 목적으로 하였다. 또한 소비에트 연방 최고회의의 의장은 소련 헌법상으로 소련의 국가 원수였다. 소련 최고 집행 기관인 내각도 최고 회의의 휘하기관이고, 내각의 수장은 총리이며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선출한다.


"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국가권력의 최고기관은 소비에트 연방 최고회의 이다. "

- 소련 헌법 제 30조 -


소비에트 연방 최고회의는 현 헌법에 의해 소련의 관할에 관계된 제문제를 해결할 권한이 있다. 소련 헌법의 채택, 개정, 신 공화국의 소련 가입, 산 자치공화국 및 자치주 형성의 승인, 소련의 경제 및 사회 발전의 국가계획과 소련의 국가예산 및 그 집행보고의 승인, 소비에트 연방 최고회의에 보고서 제출 의무가 있는 소련 내 모든 기관의 형성은 오로지 소비에트 연방 최고회의에 의해서 실현된다.


" 소련의 법률은 소비에트 연방 최고회의 혹은 소비에트 연방 최고회의의 결정에 따라 실시되는 전인민투표에 의해서 채택한다. "

- 소련 헌법 제 108조 -


소련 공산당 정치국

- 정식 명칭은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으로, 명목상 정치국원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의해서 선출되지만, 사실상 정치국원의 선출은 그들 스스로 결정하는 등 소련 권력의 핵심중 하나였다. 사실 본래 정치국은 블라디미르 레닌이 혁명을 지도하기 위해 1917년에 수립한 기구였다. 그러다가 그 후 단기간 일시 정지되었다가, 1919년 제8차 당대회에서 차후 소련 정치의 중요한 역할로서 그 기능이 부활하였다. 당초의 정치국원은 5명으로, 블라디미르 레닌, 레프 트로츠키, 이오시프 스탈린, 레프 카메네프, 니콜라이 크레스틴스키였다.

정치국의 멤버에는 정치국원과 후보국원(의결권 없음)의 둘이 있었다. 실제 정치국의 규모는 변해 왔지만, 대개는 14명의 정치국원과 8명의 후보국원로 이루어졌다. 공식적으로 국장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통상적으로 중앙위원회의 우두머리를 맡고 있었던 서기장(소련의 실권자)이 항상 정치국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실제로 가장 권력을 소유하는 정치국의 멤버는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서기장이 주도하는 서기국원의 지위도 소유하고 있었다.

고스플란(소비에트 연방 각료회의 국가계획위원회)

- 옛 소련의 국가 경제를 계획하고 통제하던 핵심 기관이다. 레닌이 중앙집권적 경제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결정했을 때인 1921년에 세워졌고, 이를 통해 국가가 경제성장률 등 주요 지표를 직접 관리하는 소련의 계획경제 모델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역사상 가장 큰 폭의 경제 발전을 이끌었던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29년)도 고스플란이 주도한 계획이다.

고스플란은 소련 공산당과 각료 회의의 결정을 바탕으로 관계 부처와 각 연방 대표 등과 함께 계획을 세웠다. 고스플란이 발표한 계획안에는 한 해 국민 소득의 수준, 자원 이용률, 생산구조 개선 비율, 생산력의 합리적 배치 등에 관한 목표 수치가 제시되어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경제계획기관으로서 소련의 경제발전계획을 입안하고 과정을 지휘·감독하는 일을 수행하였다.
부속 기관으로는 경제개혁문제성청연락회의, 중앙대형계산기센터, 경제연구소, 생산력연구평의회 등이 있었다.


소련 공산당 대회

- 소련 3대 기관중 하나. 공산당의 최고기관이자 소련이라는 공산주의 국가의 권력의 핵심중의 핵심이다. 소련 최고회의나 최고법원, 장관회의와는 달리 헌법기관은 아니지만 소련 공산당 규약에서 공산당의 최고 기관임을 명시하고 있다. 실제로 당의 노선(국가운영방침)을 정하고,중앙위원회 의원을 선출한다는 위엄 때문에 헌법상의 국가권력의 최고기관 소련 최고회의, 공산당 규약상 당권의 최고기관 소련 공산당대회는 소련의 2부에 해당한다.

실제로도 공산당대회에 참여하지 못하는 인물이 최고회의 의원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련은 1989년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으로 '소련 인민대표대회'가 창설되기 이전까지 당권이 바로 국권이자 정권이었고, 공산당원이 아니라면 국가권력에 다가갈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오히려 헌법에 명기된 헌법기관보다는 당내 권력이 더 중요한 것이 당연하며 공산당대회의 지도자는 초기에는 당수, 후에 가서는 서기장을 맡게 된다.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 소련 공산당 전당대회에 선출되어, 전당대회가 없는 평상시 당의 운영을 책임졌던 기관. 소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뽑힌 당의 지도부였으나 정치국에 밀려서 존재감이 묻힌히기도 했다. 그래도 당의 실무를 담당하고 조율한다는 점에서 영향력이 없지는 않은 기관이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당이나 국가 내 중요한 직책은 전부 정치국출신이 독점하다보니 실질적으로는 당의 실무를 조율하는 기관에 가까웠다.

소련 장관회의(또는 각료평의회)

- 3대 권력기관중 하나로 행정부 및 국무회의에 해당된다. 1946년 인민위원회의 명칭 변경으로 생긴 기관이다. 이 기관이 생기면서 인민위원회들은 부처로 전환되고,. 평의회는 해당되는 법률에 기반하고 의거하는 정책 결정과 지도를 발표했으며, 소련의 모든 공화국들의 영토에 대한 의무적 사법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최고급 중요 안건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이루어지는 합의를 통해 처리되었고, 공산당 중앙위가 사실상 각료평의회보다 권력이 더 강했다.

각료평의회에는 총 일곱 명의 역대 주석이 있었으며, 이 주석이 소련의 정부수반이라고 할 수 있다.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와 알렉세이 코시긴에 의해 니키타 흐루쇼프가 제1서기 및 정부수반직에서 실각하게 되자 이후 공산당 중앙위 총회는 한 사람이 서기장과 정부수반을 겸임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각료평의회 상임간부회는 정부의 집합적 의사결정기구였다. 상임간부회 구성원은 각료평의회 주석, 제1부주석, 부주석, 각료들, 국가위원회 주석, 각 공화국 각료평의회 주석들, 그 외 기타로 이루어져 있었다.


" Совет Министров СССР — Правительство СССР — является высшим исполнительным и распорядительным органом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й власти СССР.

- 소련 장관회의, 즉 소련 정부는 소련 국가권력의 최고 집행 및 처리 기관이다.


Совет Министров СССР образуется Верховным Советом СССР на совместном заседании Совета Союза и Совета Национальностей в составе Председателя Совета Министров СССР, первых заместителей и заместителей Председателя, министров СССР, председателей государственных комитетов СССР.

- 소련 장관회의는 연방회의 및 민족회의의 합동회의에서 소련 장관회의 주석, 제 1부주석 및 부주석, 소련 장관(각료), 소련 국가위원회 주석을 구성원으로 하여 소련 최고회의에 의해 조직된다.


В состав Совета Министров СССР входят по должности председатели Советов Министров союзных республик.
- 연방구성 공화국 장관회의 주석은 그 직무상 소련 각료회의의 구성원이 된다.


По представлению Председателя Совета Министров СССР Верховный Совет СССР может включить в состав Правительства СССР руководителей других органов и организаций СССР.

- 소련 장관회의 주석의 제안에 따라 소련 최고회의는 소련의 다른 기관 및 조직의 총책을 소련 정부의 구성원으로 가입시킬 수 있다.


Совет Министров СССР слагает свои полномочия перед вновь избранным Верховным Советом СССР на его первой сессии.

- 소련 장관회의는 새로 선출된 소련 최고회의의 제일차회기에서 그 전권이 이양된다.


Совет Министров СССР ответствен перед Верховным Советом СССР и ему подотчетен, а в период между сессиями Верховного Совета СССР — перед Президиумом Верховного Совета СССР, которому подотчетен.

- 소련 장관회의는 소련 최고회의에 대하여 책임을 지며 그에게 보고할 의무가 있다. 또한 소련 최고회의의 폐회 중에는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에 대해 책임을 지고 그에게 보고할 의무를 진다.


Совет Министров СССР регулярно отчитывается о своей работе перед Верховным Советом СССР.

- 소련 장관회의는 그 활동에 관해서 소련 최고회의에 정기적으로 보고한다. "


이상이 1977년 소련 헌법(브레즈네프 헌법) 속 128~130조의 내용을 인용한 구절이었다. 아프간에서 소련 정부가 개입하게 된 배경을 이해하려면 소련 정치기구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 생각되어 한번 넣어봤다.

의외의 소련군 참모본부


오가르코프가 이끄는 소련군 참모본부는 의외로 마지막까지 군대 투입은 무리라고 보고 있었다. 그로미코의 부하 코르니엔코 역시 회고에서 참모본부의 반대 논거에 대해 베트남에서의 미국의 경험과 문제 해결을 위해 유럽 및 중국과의 국경에 배치된 병력을 끌어냄으로써 안보에 공백이 생기는 걸 우려했다는 것이라 정리하였다. 즉 정치적인 고려가 아닌 군인 다운 전술적인 관점에서 확실하게 나온 논리였다,


소련군 상급대장 바렌니코프는 참모본부가 반대한 이유로 7만 5천명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안정시키기에 무리이며 오히려 소련군의 진주가 적의 움직임을 강화할 거란 판단 때문이라 보았다. 당시 참모본부의 중앙작전총국 부국장 마흐무드 가레에프 장군은 군투입에 대한 결정이 내려지면 4~5개 사단의 한정적 분견대가 아니라 30~40개 사단의 대규모 병력으로 적극적으로 개입할 필요가 있는 지역이 아프가니스탄이라는 것. 바꾸어 말해 아프가니스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련 군사력의 상당한 부분을 쏟아넣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오가르코프는 투입 직전 아프간 내 저항 가능성을 생각했고 고렐로프와 만난 자리에서 아프간 군 부대들의 저항 가능성을 얘기했다. 하지만 후반에 들어와 출병의 가능성이 높아졌고 오가르코프 또한 병력의 재배치, 아프가니스탄 지역 특성에서 기인하는 '베트남화'의 개연성에 신경을 쓰게 된다. 왜냐하면 소련군 참모총장은 정치국의 의향에 거스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군부 출신 정치국원 우스티노프가 참모본부 전문가의 의견을 왜 일축했는지 의문이 남는다. 내 생각에는 아마 참모본부의 의견이 게시된 시점에서 정치국의 방향성이 정해졌을 것이다.


바렌니코프를 보좌한 가레에프 장군은 1979년 당시 참모본부의 간부들 중에는 군투입의 비합리성을 어필해야 한다고 하는 이들이 있었으나 반대로 보자면 이 관점은 적극적으로 몰고 가야 한다는 의견 즉 4~5개 사단의 한정적 분견대가 아니라 30~40개 사단의 병력을 긴지고 행해야 한다는 견해와 다를 바 없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특히나 바렌니코프처럼 부분적 군동원으로 문제 해결이 어렵다고 하는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이 투철한 군부 인사의 경우엔 참모본부 전체 의견으로는 투입에 반대했지만 분명 한다면 내심 대규모 병력에 의한 조기 해결을 바람직하다 생각했을 것이다.

보론: 예측을 조져버린 대가


결과적으로 다들 아는 것처럼 아민은 제거되고 카르말 정권이 들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잘 풀린 것 같으나 문제는 근대화를 도입하는 공산 정권에 싸웠던 종족 기반 무장세력들이 소련의 침공으로 반외세라는 명분을 획득함과 동시에 이교도의 침입을 묵과할 수 없다는 이슬람주의로 무장한 무자헤딘들의 개입으로 그들은 민족해방주의와 이슬람 국가 건설이라는 양쪽의 명분을 동시에 세울 수 있게 되었다. 그에 더해 '소련의 베트남'이라는 별명처럼 미국이 베트남에서 겪은 일을 그대로 당했던 것은 덤이고.


소련의 전면 침공은 미국에게 기회가 되었다. 브레진스키 안보보좌관의 기획 아래 1980년대 내내 반군과 파키스탄에 엄청난 재정, 군사 지원을 퍼부었고 반군에게 스팅어 미사일을 제공해 전세를 역전시켰다. 또한 소련 견제를 위해 파키스탄의 핵개발 여지를 남겨두었는데 핵무장으로 이어졌고 이게 나비효과가 되어 이란, 북한의 핵개발 문제에도 기술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영향을 주게 된다.


소련은 안일하게 개입한 값으로 1만 5천명의 사망자를 낸 상태로 1989년 2월, 아프가니스탄에서 완전히 철수했으며 이 전쟁에 쏟아부었던 엄청난 군비 덕분에 경제가 파탄나서 붕괴로 이어진다. 그리고 아프간에 소련이 기껏 세웠던 카르말 정권은 비록 전임 아민 정권의 공포 정치를 철회하고 이슬람교를 믿을 자유를 보장해주겠다고 선언했지만 대부분의 아프간인들이 보기엔 이교도에 기대어 세워진 위성 정권에 불과했으며 소련군의 주둔은 이슬람교도와 각 부족들에게 "민족해방전쟁"이라는 명분까지 제공했다.


오히려 전임자 아민은 패악질로 민심을 잃었을지언정 반군을 집중적으로 때려패서 수세로 몰아넣어 세를 크게 줄일 정도의 능력은 갖췄고 카르말의 후임자이자 아프간 공산정권의 마지막 지도자 나지불라조차도 소련군이 철수한 상황에서도 무자헤딘의 공세를 여러번 격퇴하며 소련 붕괴 이후인 1992년까지 체제를 유지하는 등 기본기는 있었다. 그에 비해 카르말은 그저 말 그대로 자기 권력과 측근 세력만 유지하기 바빴던 어찌보면 베트남 전쟁 속 남베트남의 거울버전에 가까웠던 정권이었다.

소련 관료들의 영역 싸움이 낳은 결과


소련 공산당 정치국의 특징은 다양한 관료적 이해관계와 전문영역, 그리고 퍼스낼리티를 가진 인간들의 집단이며 거기서 내리는 대외정책 결정이 국가안보에 통일된 견해를 반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안보 또는 국익이라는 전제에는 이의가 없지만 무엇이 안보와 국익인지는 관점이 서로가 다르다는 것. 마찬가지로 1978~1979년 동안 카불에서 모스크바로 보고를 보낸 소련 대표들 또한 영역 싸움을 한 셈이다. 친 타라키 성향의 푸자노프 대사와 사프론추크의 반아민적인 보고, 카르말에 동정적인 이바노프와 모로조프 같은 KGB까지 다양한 이해관계가 섞여 파국이 벌어졌다,


중앙에서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을 판단하는 건 아프가니스탄 위원회라 불리는 정치국에서 주도하는 기관이었다. 초기에 소련 지도부가 군사개입 요청에 미온적이었던 건 그로미코에겐 서방과의 관계가, 안드로포프에겐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무력사용 타당성이, 우스티노프는 군사적 대안을 마련하면서도 정치적 결정을 따른다는 입장이었다. 셋 다 각각 애매모호한 적, 아민의 독선, 이슬람 세력 등을 우려했고 결국 안드로포프가 말한 인민민주당의 내홍과 아민의 독주가 문제의 핵심이 되어 안드로포프의 주도 하에 문제가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그 와중에 벌어진 타라키의 암살과 이후의 아민의 탈소적 행보는 "파문"에 이르었고 이 시점에서 그로미코와 포노마료프의 손은 미치기가 어려워진다. 결국 KGB 노선이 채택되서 안드로포프가 주역이 되었고 그는 일관되게 문제의 원인이 아민이라 주장해왔다. 안드로포프는 줄곧 타라키-아민 정권이 반인민적이고 모스크바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고 비난해왔으며 그렇기에 1979년 3월까지는 군대를 투입하여 무자헤딘 토벌 지원하는 걸 반대했던 것이다. 반대로 보자면 인민의 지지를 받는  정권으로 교체하면 정상궤도로 돌아선다는 것이었고.


안드로포프의 잘못은 카르말이라는 아민의 대체품을 과대평가한게 아니다. 바로 아프가니스탄의 반공산주의적인 민족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사실상 소련군 군사 개입의 1차적 목표가 아민이었고 더욱이 두 개 군관구의 3~4개 사단병력으로 작전을 전개한 것은 너무 낙관적으로 본 것이다. 즉 소련 지도부의 출병의 판단 축은 무자헤딘 토벌도 아프간 안정도 아닌 KGB 라인의 아민 제거 이게 하나였다는 것이다. 그 결과 3~4개월 안에 끝날 것이란 예측과는 달리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은 1만 5천명의 병사를 잃었다.

맺음말: 왜 실패했나?


우선 첫째는 소련 지도부 내에 아프간 인민민주당 내부에 대한 이해가 제대로 없었고 의견마저 통일이 안되었기 때문이다. 푸자노프는 타라키-아민의 할크파를, KGB는 파르참의 카르말을 각각 지원했는데 이 와중에 아민이 같은 파이면서 경쟁자였던 타라키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 변수로써 떠올랐다. 그러한 아민조차도 분명 소련을 적으로 돌리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설령 미국에 호의적인 시각이었다고 해도 현실적인 특성상 즉각적이고 완전한 제2세계 이탈은 힘들었으며 그가 소련을 믿었다는게 확실하다는 증거로 스페츠나츠가 대통령궁을 습격한 상황 속에서도 소련의 소행이라고 믿지 않았다는 것이 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아민은 그저 중간보스도 안되는 잔챙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소련은 인지하지 못한 채 작전에 돌입했다는 것이었다. 아민은 죽고 카르말 정권이 들어섰음에도 안정은 물 건너갔으며 내전은 커졌다. 쉽게 말해 소련군이 괜히 무력으로 개입했기에 별로 세도 없던 아프간 반군이 명분을 얻고 크게 성장할 발판이 마련되었다는 얘기. 오히려 혼란을 틈 타 무자헤딘 세력이 활개를 쳤으며 CIA는 이를 활용해 각종 무기들을 아프간 반군에 제공했다. 심지어 같은 공산 국가면서도 노선 차이로 대립이 심했던 중국조차도 무자헤딘에 56식 소총(AK)과 69식 화전통(RPG)를 제공하여 소련군에 맞서 그들이 생존하고 또 확장해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군사적으로도 아프가니스탄은 말이 안되는 지형이다. 국토의 대부분은 해발 고도 1~3,000m에 달하며 수도 카불만 해도 한라산보다 조금 낮은 1800m의 높이에 있다. 특히 동북부 지방은 해발 5,000m가 넘는 험준한 산봉우리들이 즐비하며 겨울에는 영하 30도까지 내려가는 아북극 기후이다. 게다가 무자헤딘 병사들은 곳곳에 저항의 근거지로 굴을 팠는데 여기에 있으면 소련군의 폭격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악조건은 몇십년 후 미군이 들어와 지옥을 맛보게 된다.


결정적인 건 이슬람 세계는 공산주의라는 이념을 수용하기 가장 최악인 공간이라는 것이다. 동아시아 같은 농경 사회에 공산주의가 퍼질 수 있었던 것에는 종교주의적인 색채가 강한 동네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슬람 세계는 유물론에 기반한 국가무신론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환경이고 그래서 이슬람 세계의 사회주의 운동의 경우 종교 사회주의나 나세르, 바트당류의 아랍 민족주의 형태로 전개되며 마르크스-레닌주의와는 선을 그었다. 소련은 이를 고려하지 않고 공산주의라는 이념이 이슬람이라는 종교보다 우위에 설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소련군 상급대장 파블로프스키는 훗날 1991년 <즈나미야>와의 인터뷰에서 "1개 여단이라고 하더라도 타국의 영토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매우 심각한 원인이 있어야 한다. 나는 그러한 원인을 발견하지 못했다.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 내분이 종족 간의 반목을 심화시키고 있었지만 그 순간에도 외부로부터 침입의 위협은 전혀 없었다. 사실 소수의 반군 조직은 고려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정말로 공정부대가 진주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들을 배치할 장소조차 없었단 말이다."라고 했는데 그가 중앙군사고문단이나 사프론추크나 카불 KGB 같이 반아민이었던 이들보다 훨씬 더 객관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았기에 소련군 투입이 불필요했다는 결론이 나왔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미국 정보기관이 소련군 철수 후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정보 보고서에서 쓴 분석을 인용하며 마무리하겠다. 이 보고서에서는 낙관적으로 예측하며 소련의 실패를 비웃는데 그 결과는 2021년 탈레반의 재집권으로 미국이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 이슬람주의, 아마도 강력한 근본주의 성향을 띨 것이나 이란 정도로 극단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무자헤딘 군벌이 정부를 세운다 해도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파키스탄의 헤게모니만 존재한다면 미국의 이익에 위협은 되지 않을 것이다. "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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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경규, <이슬람주의 와하비즘에서 탈레반까지>, 벽너머, 2022

정의길, <이슬람 전사의 탄생>, 한겨레출판, 2015

이근욱, <아프가니스탄 전쟁>, 한울아카데미, 2021

박정욱, <중동은 왜 싸우는가?>, 지식프레임, 2018

이웅현, <아프가니스탄, 철군의 정치학>, 인문사회 21, 7 (1), 2016

이웅현, <아프가니스탄 반군(叛軍)의 계보>, 사단법인 한국평화연구학회, 평화학연구 14(1), 2013

조상현 외, <영국과 소련의 대 아프가니스탄 전쟁 - 전쟁의 원인과 지속을 중심으로 ->, 한국이슬람학회, 한국이슬람학회논총 25(3), 2015

신경수, <Irving Janis의 집단사고(Groupthink) 이론을 통해 본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결정>, 한국세계지역학회, 세계지역연구논총 39(1), 2021


https://en.m.wikipedia.org/wiki/Soviet%E2%80%93Afghan_War

https://www.history.com/news/1979-soviet-invasion-afghanist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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