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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Aug 11. 2023

48년 만에 돌아보는 베트남 전쟁사

실패한 전쟁사-외전

https://youtu.be/7yDEtxBrK7Q?si=Wsufw29IFONnb91M

베트남 전쟁이 발발했을 때 한국은 이승만 정부 시절, 그러니까 베트남에서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벌어질 당시부터 파병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당시는 한국전쟁이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 주장은 곧 폐기되었고 한동안 3.15 부정선거, 4.19 혁명 등 각종 국내 문제들이 연이어 터지는 바람에 거론되질 못했다. 그러나 5.16으로 박정희가 집권하며 상황은 반전된다. 박정희 정권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시절부터 "반공은 국시"를 내세우며 자신들이 적화를 의도하고 군사정변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걸 미국에게 항변했었다.


그런 맥락에서 한국군은 베트남에 파병된 거라고 볼 수 있다. 적어도 단면적인 해석으로는. 하지만 그 이면에는 복잡한 정치적 고려가 있었으며 파월 한국군이 베트남에 대해 이해가 없이 반공을 위한 전쟁을 하려고 간다고만 인식하고 무작정 개입한 것은 아니었다. 이 글에서는 당시 극빈하고 북한과 대치 중인 상황임에도 베트남 파병을 결정한 사정과 한국군이 베트남에 대해 얼마나, 또 어떻게 인지하고 있었는지, '중대전술기지'라는 개념은 무엇인지 등 남북한에게로의 영향을 다뤄보고자 한다. 한국측 전쟁 당사자 채명신 사령관과 박경석 재구대대장부터 비판측인 박태균 교수와 마이클 매클리어의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모두를 참고하여 최대한 중립적인 관점에서 다뤄보려고 한다.

한국 입장에서 본 베트남 파병 논의의 배경


앞서 언급했듯이 이미 이승만 시절부터 응오딘지엠 남베트남 대통령이 한국군 파병을 요구해왔다. 당시 정부는 긍정적으로 검토하였는데 결과적으로 국내적 여건상 시행되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1964년 7월, 구엔 칸 정권의 요구로 태권도 교관단이 파견되며 비전투 병력을 개입시켰고 미국의 개입이 확실해지며 한국군의 파병 요구도 늘어났다. 박정희는 처음에는 상당한 우려를 했다. 한국에 주둔 중인 미군의 2개 사단이 베트남으로 이동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한국군까지 전투 병력을 파병한다면 안보에 치명타를 입어 최악의 경우 제2의 6.25가 터질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더욱이 베트남의 지형은 한국과는 달랐다. 베트남 전쟁의 주양상은 게릴라 전이었기에 정규군이 파병되어도 목표나 표적을 찾는게 힘들었다. 특히 호치민에 대한 지지는 남베트남 국민들에게도 압도적인 수준이었다. 2차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베트민, 즉 월맹은 일본군 점령 하에 저항하며 키워온 조직을 바탕으로 전후에 프랑스군이 다시 진주하자 전 국토의 모든 도시와 촌락을 전투기지로 만들어 게릴라 전을 전국 단위로 벌였다. 참고로 한국전쟁 당시 게릴라 전은 주된 양상이 아니었고 지리산의 빨치산이나 이북 지역의 반공 유격대가 전부였다.


그리고 6.25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베트남이 많이 달랐던 것은 남베트남에 여론이 극도로 안좋았기 때문이다. 응오딘지엠은 족벌정치와 부패를 일삼으며 가톨릭 우대 정책을 펼쳐 국민의 대부분인 불교 신자들을 적으로 돌리다가 쿠데타로 무너졌다. 이후 들어선 군사정권은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원조를 받는 상황에서도 군사 쿠데타를 반복해 권력 싸움만을 이어가다가 국민들로부터 더 외면받았다. 결국 베트남인들에게 월맹의 주석 호치민은 단순한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항불, 항미 독립투쟁의 영웅이자 애국적 민족주의자로 뇌리에 새겨지게 되었고 월맹의 투쟁은 반식민지 독립투쟁으로 인식되게 되었다.


당연히 그 상황은 미군도 힘들게 싸울 것이라는 이야기이며 특히 미국은 베트남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는 역량은 있었지만 당연히 여론상 실행은 꿈도 못꿨다. 그러나 그럼에도 한국 정부가 베트남 전쟁에 개입한 것은 사태가 악화되어 미군 부대의 투입에도 공산화의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미국 입장에서는 베트남의 공산화를 방치했다가는 도미노처럼 적화될 것이라는 공포가 높았고 그래서 한국군의 투입을 간곡히 원했다. 박정희는 1965년 1월 담화문에서 명분상 도미노 적화에 맞서는 반공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라 선전했지만 그 이면에는 미군 철수를 막고 국군의 국방력을 강화하는 계기로 삼으며 한미월 3국의 협조로 무역체제를 구축 및 외화 획득과 군수품 수출로 경제적 이득을 챙길 목적이 더 컸다.

베트남의 입장에서 본 배경


일단 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월맹의 최대 후원 세력은 소련이 아니었다. 소련은 핵전쟁을 회피하기 위해 어디까지나 미국과의 대결을 위해 지원했으며 진짜 강력하게 월맹을 후원한 것은 중국이다. 실익적 관점에서는 아시아에서 개발도상국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해 자유진영과 대결에서 고지를 점하는 것이고 정치적 관점에서는 인민전쟁 전략 실현으로 미제국주의의 침략에 저항한다는 프로파간다를 내세울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1964년 흐루시초프의 실각을 계기로 소련의 지원은 적극적으로 변했고 실제로 1960년대 초를 기점으로 월맹군은 25만명의 병력과 보병 40개 연대, 장갑차 1천대 이상을 갖춘 군대로 변화했다.


그리고 월맹이라는 조직은 결코 만만한 조직이 아니었다. 호치민은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항불투쟁을 하다가 일본군이 베트남을 점령하자 다른 이들이 같은 아시아 국가가 우릴 서양으로부터 해방시켜줬다고 환호할 때 그들의 침략성을 깨닫고 월맹을 조직, 세력을 확대하며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에 6개 성을 장악하는 꽤 유능한 전략가의 행보를 보였다. 이어서 공백기 동안 하노이를 접수한 호치민은 9월 2일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수립하여 북부에 정치적 주도권을 갖고 행정기구를 장악했다. 당시에는 북위 16도선을 경계로 북부에 중국군이, 남부에 영국군이 들어오는데 중국군은 월맹을 냅뒀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일본군 무장해제 명목으로 다시 들어온 프랑스는 중국, 영국으로부터 교대하여 전국을 다시 점령하고 월맹과의 전쟁을 벌이는데 이게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다. 프랑스는 베트남을 다시 식민지로 되돌리는 것이 목표였으며 이게 베트남 측한테 민족해방전쟁이라는 명분을 스스로 헌납하는 꼴을 보여주는 행위였다.


결국 미국이 프랑스에 36억 달러의 군사원조를 제공했음에도 1954년 디엔비엔푸 요새에서 패배한 프랑스는 그해 7월 호치민 정권과 제네바에서 휴전을 합의, 1956년 중에 남북 총선거로 통일정부를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남베트남에서 응오딘지엠이 철수한 프랑스를 대신해 들어온 미국의 후원을 받아 대통령이 되었고 그는 남북 총선거를 거부하며 독자 세력의 길을 걸었다. 여기서 남베트남의 정통성 논란이 벌어졌고 동시에 공산주의자들을 극도로 탄압하였는데 이때 등장하는게 바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라 불리는 베트콩이다. 그들은 프랑스군을 일개 게릴라 부대로 격퇴한 호치민의 정신을 이어받겠다고 다짐했다.


베트콩은 1960년 12월에 결성되었고 3년 뒤 무능과 부패로 얼룩졌던 응오딘지엠이 쫓겨나고 두옹 반 민이 집권했다가 또 다시 쿠데타의 악순환이 이어지는, 특히 1964년에만 7번의 정권교체가 있었던 혼란 속에서 베트콩이 전면에 나선다. 이미 1960년에 하노이에서 열린 베트남 노동당 제3차 대회에서 남부월남의 해방을 당원의 임무라고 규정했기에 그런 배경에서 베트콩이 그들의 지원과 남베트남의 반정부 인사의 연합으로 형성되었다. 호치민은 월남 정부의 타도는 남부월남인의 손으로 한다는 전략을 구사했고 때마침 응오딘지엠 정권이 족벌적 독재정치를 하며 반대세력을 힘으로 찍어누름에 따라 반정부 세력들과 베트콩 사이의 통일전선이 가능해졌다.


호치민은 "나는 사회주의도 아니요. 공산당원도 아니다"고 성명을 내며 남베트남에 대한 통일전쟁을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이념전쟁이 아닌 민족해방 세력과 식민주의자들이라는 프레임을 잡는데 성공했다.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선언문에는 남부월남의 각 계층과 민족, 종교, 당파를 초월한 전 인민이 정치적 경향에 불구하고 단결하여 미제국주의자들과 괴뢰 정권을 타도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이러한 발표 이후 민족해방전선은 힘 입어서 남베트남 국토의 58%를 장악했으며 지엠 정권과 이후 쿠데타로 들어선 남베트남 괴뢰 정권들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결과적으로 남베트남이 자력으로 도저히 못버틸 지경에 이르고 월맹이 조직적으로 대량의 무기와 탄약, 각종 군수물자들을 캄보디아와 라오스 국경을 따라 흐르는 '호치민 루트'를 통해 남베트남으로 이송하는 낌새가 보이자 미국은 통킹만 사건으로 개입을 결정했고 이 통킹만 사건은 2005년에야 미국 정부가 조작했음이 확인되었다.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54만명의 투입으로 이어졌지만 북진통일은 커녕 오히려 남베트남마저 잃어버리는 커다란 실책으로 기록되었다.


종합해보면 호치민과 북베트남은 경쟁자이자 타도 대상이었던 남베트남이 프랑스의 재식민지화 시도와 응오딘지엠의 무능, 부패, 족벌정치 및 남북 총선거 제안 거부를 통한 정치적 정당성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바람에 충분히 정통성이라는 측면에서는 통일되는 그 순간까지 남베트남보다 훨씬 우위에 있었음은 부정할 수가 없다. 즉 베트남 전쟁에서 남베트남이야말로 자유월남이라는 우파 일각의 주장은 틀렸다. 하지만 반대로 봐도 호치민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며 베트남 전쟁에서 월남 인민들의 자생적인 봉기로 남베트남이 무너졌다는 68 당시 학생운동가들의 주장 또한 반만 맞고 반은 틀렸다.

호치민은 반미주의자였는가?


미국이 베트남에 개입한 결정적인 이유는 호치민이 공산주의자였고 이 때문에 반미 노선을  취할 것이라고 본 것이었다. 물론 호치민이 공산주의자였다는 것은 빼도 박도 못할 사실이긴 하다. 베트남 노동당은 통일전선 성격의 좌파 민족주의 정당임을 표방하고 있지만 월맹의 적화전략은 분명 마오쩌둥의 인민전쟁 전략론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고 1960년 9월 제3차 노동당 대회에서 부과된 임무의 결의문 이름부터가 "북부월남의 사회주의 혁명의 달성과 남부월남의 해방"이었다. 결정적으로 베트남 노동당의 정강에는 마르크스-엥겔스-레닌-스탈린 및 마오쩌둥 사상을 베트남 혁명과 결합해 실천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애국적인 민족주의자라고 잘 포장하여 남베트남 주민들에게 먹히게 선전했다는 부분에서 그는 나쁘게 말하면 영악한 지도자고, 좋게 보자면 유능한 전략가였던 셈이다.


미국은 처음부터 호치민을 거부하진 않았다. 1945년 4월, CIA의 전신 OSS의 패티 소령은 인도차이나 지역에 정보망을 구축하기 위해 호치민과 접촉했고 그는 호치민을 매우 높게 평가했다. 패티 소령의 임무는 일본군 후방을 교란하고 이 지역에 추락한 미군 조종사를 구출하는 것으로 미국 정부는 호치민이 중국 국민당에 의해 투옥되었을 때 압력을 넣어 석방시키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중국 공산당은 미국에게 호치민의 행적, 활동, 배경, 목표 등의 자료를 넘겨주고 호치민 역시 쿤밍의 OSS 본부에 일본군의 움직임을 지속적으로 정보 제공을 했지만 미국은 끝내 월맹에 대한 무기와 탄약 지원을 거부했다.


돌이켜보면 패티 소령이 이끄는 OSS는 아이러니하게도 베트남에서 2차 1개월 동안 200명을 선발해 미래의 베트남 전쟁을 이끌 리더들을 양성한 셈이었다. 그는 <왜 베트남인가?>라는 책에서 당시 몇 사람은 우리가 제공한 무기와 훈련이 언젠가 프랑스와 싸울 때 사용될 수 있을 것이라 짐작은 했지만 나중에 상대가 미국이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패티 소령의 후배 장교 앨리슨 토머스는 50명의 대원들을 이끌고 낙하산으로 하노이 인근에 투입되어 지압 장군과 함께 작전을 수행하기도 하였는데 정작 지압은 호치민보다 호전적인 인물이라 미국을 속으로는 프랑스와 다를 바 없는 제국주의 국가라고 취급했다.


패티는 호치민에 대해 공산주의자인 것은 분명하나 베트남 독립을 위해 미국의 지원도 바라는 독립이 최우선 과제인 민족주의자로써의 면모도 강하다고 증언했다. 그는 월맹군과 연합해 OSS 게릴라 부대를 투입해 보 구엔 지압 장군과 함께 작전을 수행시키게 하기도 했고 월맹군을 훈련시켰다. 월맹군은 기관총, 브라우닝 자동소총, 수류탄, 화염방사기 등 미국제 장비을 갖추고 미군 교관단의 훈련을 받아 일본군 외곽 초소들을 전쟁 말기부터 공격했다. 그러나 이는 재식민지화를 목적으로 베트남에서 첩보임무를 수행하던 프랑스군에게 좋게 보일리가 없었다.


미국은 이처럼 공산주의자들과의 연합도 결코 꺼리지 않았었다. 당장 국공내전 당시만 해도 미국 국무부는 장제스 정권에 대한 반감으로 국민당군을 제대로 지원해주지 않았으며 마셜은 중국 국민당이 도저히 공산당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 보지 않았다. 옌안에서 마오의 화전양면적 온건 방법론에 매료되었던 미국인 관료들과 언론인들도 이걸 바탕으로 군사독재자의 이미지가 강한 장제스보다 마오가 통치하는게 더 민주적이고 미국 입장에서도 좋을 거라 보게 되었다. 그리고 발칸반도에서도 유고슬라비아가 티토의 수정주의 노선 하에 소련 중심의 공산 블록에서 이탈하자 그들을 중립적인 완충지대로 만드는 등 무조건적인 매키시즘 반공 논리만 앞세우진 않았었다.


그러나 냉전의 격화는 미국 입장에서 중립적 공산주의자들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베를린 봉쇄, 마셜플랜, 그리고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중국 공산당으로 인해 점점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물결이 거세져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태평양 지역에서 각종 무장봉기들이 벌어지자 미국에선 공산주의의 확장을 더는 지켜볼 수 없었다. 더욱이 중국 대륙의 정권을 잡은 마오쩌둥이 호치민과 월맹에 대량의 지원을 하는 것은 물론 호치민 입장에서는 베트남에 들어와 자신들을 공격하는 프랑스군에 맞설 수단이 필요했기에 실익적인 관점에서 당연한 것이었지만 이는 월맹에 대한 불신을 키웠고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군이 패한 이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던 미국은 자신들의 주도로 북위 17도선을 기준으로 분단시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즉 북베트남 월맹의 집권은 사실 정확히 보자면 소련식 공산주의라기 보다는 제3세계의 민족공산주의적 흐름에 가까웠는데 이 민족공산주의의 흐름은 소련식 체제보다도 더 유동적이고 때에 따라서 민족독립이라는 목표를 위해 사회주의적 방법론을 순화시킬 수 있는 여지가 존재했었다. 그러나 냉전의 흐름 속 도미노 적화에 대한 공포 분위기가 서방 세계에 만연하게 되며 관계의 단절은 물론, 더 깊숙이 개입하는 발단이 되어버렸다.

북한과 베트남 전쟁


1950년대부터 북-베트남의 관계는 시작된다. 그들은 서로 항불, 한국전쟁을 반침략제국항쟁으로 바라보았으며 양국은 근현대 식민지 경험을 근거로 유대감을 형성했다. 베트남 국방부는 북한군과 중공군의 경험 및 전술을 교육했으며 이때 중공군의 땅굴 전술은 미군의 폭격 속에서도 버틴 뛰어난 장점을 가졌던 걸 바탕으로 훗날 베트콩이 잘 써먹는다. 결정적으로 제네바 협정은 북한과 베트남이 공동의 반미 의식을 가지고 싸우게 되는 배경이 되었으며 6.25와 베트남 전 모두 미국과 상관이 있는 만큼 더더욱 연대가 강화되었다.


북한이 베트남 전에 물자와 공군 지원을 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베트남의 혁명전술을 수용했다는 것에 있다. 베트남이 게릴라 전 개시를 하자 남베트남 혁명 모델을 바탕으로 남조선 혁명론을 수립했다. 베트콩은 마르크스주의가 아닌 민족주의를 압세워 식민정부를 타도한다는 강령을 통해 농민, 노동자, 지식인, 소수민족, 불교도 및 여타 종교단체들을 다 끌여들이면서 실질적으로는 노동당 중앙위원회가 배후에서 주도했다. 이 시기에 북한도 4.19 혁명에 감명을 받았는지 대남정책을 대대적으로 수정해 남조선 혁명론을 공개한다.


남조선 혁명론은 이전의 민주기지론보다 발전된 단계로써 북반부의 사회주의를 강화하고 남조선 내부의 인민 혁명을 통해 조국을 통일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1961년 9월 11일 조선로동당 당대회 보고연설에서 나왔다. 이때 남조선의 혁명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이 혁명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 건설이며 김일성은 '남조선 인민의 반미-민족해방투쟁론'이 남반부 혁명을 북한의 강력한 지원 속에서도 결국은 인민의 손으로 해야 한다는 걸 강조했다. 이는 북한이 4.19 혁명과 5.16 군사정변 당시의 상황이 남베트남과 유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북한의 남조선 혁명론은 월맹의 전략과도 상당히 유사하다. 먼저 통일 전선을 통해 공산주의자들이 민족적, 개혁적 조치를 대표하고 다른 세력과 접촉해 그 다음에 사회, 정치, 경제적 조건이 충분할 때 인민군대를 창설, 게릴라 전을 펼치는 것이었다. 발라즈 살론타이는 북한이 인식하기로는 베트남의 혁명전쟁이란 총력전이 아니라 게릴라 전 형식으로 남베트남을 해방시키는 전락이라 생각했었다고 얘기한 바가 있다.


북한의 남조선 혁명론은 실천에도 옮겨졌다. 1960년대 동안의 지속적으로 벌어진 무장공비 침투 사건이 그 예시이며 이 시기에 베트콩을 모티브로 '남민전'이라 불리는 남조선 민족해방전선이 결성되었다가 발각되어 공안 정국이 발생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통일혁명당 사건, 줄여서 통혁당이라 불리는 사건도 이 같은 배경에서 벌어진 공안 사건이었다. 푸에블로호 납북 사건 같은 대미 도발도 이런 분위기와 상관이 없진 않다. 다만 인혁당 사건 등 정부 차원의 조작으로 인한 사법 살인도 없진 않았었다.


또한 베트남 전쟁의 지속은 북한 체제의 강화를 불러왔다. 북한은 북베트남 지원에 소극적인 사회주의 진영의 두 핵심국 소련과 중국을 비판하며 이와 관련된 모든 사회주의 국가들의 통일전선 촉진을 호소했다. 1965년 베트남 인민 지원운동을 통해 국내적 단결을 강화하고 <로동신문>은 "베트남 인민의 항미전쟁은 조선의 투쟁이며, 베트남 인민의 승리는 우리의 승리이다"라는 선전 문구를 내놓았다. 한마디로 베트남을 항미에서 생사를 같이하는 운명공동체로 엮은 것. 그러면서 1966년 조선로동당 당대표자회의에서 "병진노선"을 안보위기 의식을 바탕으로 손쉽게 채택할 수 있었다.

베트콩 전술에 대한 대응, '중대전술기지'


우선 베트콩의 부류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주력군으로 비교적 훈련 수준이 높으며 주요 간부진은 대부분 북베트남에서 남파된 정규군 장교들이고 중대, 대대, 연대로 구성된다. 둘째는 지방군으로 향토 출신 베트콩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참모들과 지휘관은 월맹군의 장교가 상당수다. 독립된 지방단위부대로 운용되며 한국군 참전 직전 9개 연대, 30개 대대로 4만 5천명 가량이었다. 마지막은 민병대로 흔히 지방게릴라라고 불린다. 표면상 민간인을 가장하고 주력군과 지방군을 돕기 위한 잡역을 맡는다.


주력군은 연대병력은 1천 2백명부터 2천명으로 구성되고 통상 3백명 내지 6백명 정도의 보병대대가 3개 정도씩 편성된다. 몇 개의 지원중대의 보충도 가능하며 중화기는 81mm 박격포, 75mm 무반동총과 기관총들이 고작이다. 소총병 중대도 1백명 정도이며 3개의 소총병 소대와 1개의 화기소대로 편성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은 밤에만 활동하고 약한 곳만 기습하는 등 매복, 지뢰, 그리고 퇴각은 분산 후 땅굴로의 은폐 등 보 구엔 지압 장군이 마오쩌둥의 인민전쟁 전략을 베트남에 맞게 현지화시킨 작전술에 따르고 있기에 미군조차도 상당히 위협적이다. 베트콩은 "물과 물고기의 관계"라는 게릴라 전에 기본기에 충실한 것이다.


그래서 채명신 사령관은 이에 맞서 중대전술기지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보통 각각 넓은 지역에서 대대단위로 부대가 집결되는 것과는 달리 중대전술기지는 민간인 속에 베트콩이 있고 베트콩 속에 민간인이 있는게 베트남의 상황이었기에 솎아내기 위해 작은 부대 단위로 전술책임지역에서 작전을 전개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소대단위는 지휘능력이 부족하여 기습 대상이 되니 중대단위 기지로 결정된거고. 채명신은 이를 통해 중대라는 최소전술단위로 방어수단과 대책을 갖춘다면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가 가능하다고 인식했다.


먼저 중대기지는 전면방어 형태에서 원으로 둥글게 편성되어 공격시 화력분배가 적절하게 가능했다. 동시에 야간전투에도 최적화되었고. 또한 개인호보단 2인호를 구축, 횡이 아니라 종으로 연결에 분대장 꺼에까지 이르게 하여 소대가 붕괴되는 상황에서 저항을 지속할 수 있었다. 보급품은 48시간 소요량을 항상 확보하고 잠복조를 통해 경계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리고 자체방어 화망에서 더 나아가 크레모아로 적 접근예상지대에 살상지대를 조성하고 포병화력을 평시에도 사정권 안에 두기 위해 포대 단위로 분할해서 대대본부지역까지 재배치하게 한다.


그러나 중대전술기지는 매우 큰 한계가 있었는데 분명 한국군의 작전에는 성공적이었지만 그것이 베트남 전쟁의 향방을 바꿀 만큼의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다는 점이다. 공세를 거부하고 작은 요새를 구축하였기에 전황에 있어서 밀고 나아갈려는 용도로는 부적절했었는지라 미군 장교들도 부정적으로 보았으며 2차세계대전 당시 프랑스군이 거대한 방어선을 구축했음에도 독일군이 낫질 작전으로 한번에 우회 기동하여 돌아가자 단번에 무너졌던 것을 생각하면 위험성 역시 의외로 컸다. 다만 이미 참전 시점에서 남베트남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고 미군이 승리할 가능성이 회의적으로 판단했었던게 채명신이었기에 시간이나 벌고 아군 피해나 최소화할 목적에서 만든 점이라는 건 감안해야 한다.

한국군의 파병과 최신무기 도입 및 교리의 발달 (Feat. 한국군 참전의 이면)


1965년 박정희 정부가 베트남 전에 전투부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했을 당시에 한국군의 주력 소총은 M1 개런드였다. M1 개런드는 국군 창설 이전 남조선 국방경비대 시절부터 한국군의 주요 화기였는지라 자동화기들이 발달하던 1960년대 시기에는 연사력이 딸렸다. 거기다가 M1 개런드는 2차대전 시기의 소총인지라 무겁기까지 했다. 반면에 북베트남 정규군은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AK 소총을 공급받아서 SKS 소총을 대체해가고 있었고 베트콩(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경우에는 여전히 볼트액션식 소총이나 반자동 화기를 많이 썼지만 AK도 일부 보유하고 있었다. 특히 베트남의 정글과 촌락의 교전은 적과 순식간에 조우하는 상황에서 전투가 예상되기에 자동화기의 필요성이 컸던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한국군 측은 주한미군에게 당시 미군의 주력 화기이던 M14 소총을 공급해줄 것을 부탁했지만 미군 측은 조만간 M14를 M16 소총으로 교체할 것이며 한국군의 새로운 주력소총 문제는 파병 후 고려해보겠다고 답변했다. 그래서 일단은 기존 M1 카빈에서 탄창에 들어가는 탄환 수와 자동연사 기능이 추가된 M2 카빈으로 M1 개런드의 연사력 문제를 보완하기로 했다. 한국군 측의 지속되는 설득에 결국 미군은 주한미군과 주일미군, 본토 주방위군의 창고에 남아있는 M2 카빈 재고는 줄 수 있는 만큼 제공해주겠다고 했다. 다만 M2 카빈은 당시 미군에서 폐기 처리 중이었는지라 그다지 많은 양은 아니었는데 그럼에도 각 소총병 분대당 2~3정을 배치할 만큼의 수량은 확보해놨다.


그런 상태에서 실전에 투입된 한국군은 남베트남 내에서 게릴라 전을 펼치는 베트콩을 상대로 나름 활약했지만 AK 소총으로 대부분 무장하고 있는 북베트남 정규군을 상대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파월한국군 사령관인 채명신이 M16의 필요성을 계속 요청하자 박정희 정부는 베트남 전쟁 참전 대가로 한국군 현대화 사업을 미군이 지원해줄 것을 합의 보고 이를 통해서 1966년부터 파월한국군 부대원들부터 M16을 조금씩 보급해가기 시작했다.


M16 소총은 초기에는 작동 불량 등의 문제가 있었지만 M1 개런드보다 훨씬 가볍고 연사 속도도 상당히 우수해서 정글전에 꽤나 적합한 화기였다. 1968년부터는 제식으로 지급되었으며 미국 정부도 한국군이 베트콩 소탕전에서 성과를 거두자 M16 소총의 한국 수출을 허가해줬다. 이후 박정희는 맥도널드라는 M16 소총 수출을 원하는 회사의 인사와 직접 만났는데 이때 수표로 받은 100만 달러를 그들에게 되돌려주며 100만 달러 가치만큼의 M16 소총을 더 달라고 한 일화도...있기는 하고 실제로 박정희재단 등에서 많이 우려먹긴 한데 구체적인 증거는 없어서 어디까지나 '설'이고 교차검증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


1974년부터는 대우 정밀에서 M16A1 소총을 라이센스 생산을 하여 무려 약 60만정이 생산되었고 이로써 한국군은 확실하게 모든 소총병들이 자동소총으로 무장할 수가 있었다. M16 소총은 국산 소총 K2가 보급되는 1984년 이전까지 제식 소총이었으며 지금도 예비군에서는 사용된다. 베트남 전쟁 직전까지 한국군의 장비는 6.25 전쟁이 끝난 직후의 상태로 그대로 머물러 있었던 반면 이후의 한국군은 알보병이 전부 자동화기로 무장하게 되었으며 전차 분야에서도 2차세계대전과 냉전 초기의 유물인 M4 셔먼, M26 퍼싱 등을 대체할 M48 전차를 도입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정작 M60전차는 미국의 반대로 인해 도입되지 못했고 이로인해 한동안 북한군 기갑전력의 핵심인 T-62와 이후 개발된 천마호로부터 K1 전차 도입 이전까지 확실한 수적, 질적 우위를 점하진 못했다.


특히 베트남 전쟁 파병으로 인한 국방 분야의 가시적인 성과라면 F-4 팬텀기의 도입이었다. 1969년 8월 4대의 F-4D를 인수하면서 일본이나 이스라엘, 독일보다도 빨리 팬텀 보유국이 되었다. 이 배경에는 베트남 전쟁과 연관이 있다. 위에서 언급한 남조선 혁명론에 따라 북한이 푸에블로호 사건, 삼척-울진 무장공비 사건 등 강경하게 대남 도발을 이어가자 안보 위기가 도래하였고 이에 박정희는 파월 한국군을 철수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미국 다음으로 전투 병력이 많은 한국이 철수하여 공백이 커질 것을 우려한 미국은 국군의 보유 중인 F-5A를 베트남에 보내는 조건으로 임차료 무료, 기간 무한인 조건 하에 18대의 F-4D를 임대했다. 당시 F-4D는 소련 극동군에게도 위협이었고 이후로도 한국군이 현재까지 팬텀기를 우려먹고 있는 것으로 봐서 이러한 F-4 전투기 도입이 국방력 강화에 도움이 된 점이 없진 않다.


교리 측면에서도 헬리콥터에 의한 공중기동작전 등도 익힌 계기가 되는 등의 베트남 전쟁 파병을 통한 발전이 있었다. 3개 예비사단은 전투사단으로 개편되어 미군 철수의 위협 속에도 안보 공백을 메꿨으며 한국군이 시행한 맹호 5호작전이나 맹호 6호작전, 두코 전투, 짜빈동 전투를 비롯한 교전들은 어찌보면 한국군만의 전술교리로 발달되었다. 당시에 파병 직전까지 한국군의 미군의 군사교리, 그것도 6.25 전쟁 당시의 전술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이 전쟁으로 독자적인 한국군만의 전략 전술을 개발, 이것은 지금 오늘날까지도 국방부에서 계승하여 이어져오고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중배상 금지법은 한국군 참전장병들의 대우 개선을 방해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 당시 박정희 정권은 참전장병 혹은 사상자의 유족들이 국가를 대상으로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하는 입법을 진행했고 위헌 판단을 내린 대법관들은 축출당했다. 유신 헌법 실시 이후에는 직무수행 중 입은 손해에 대해 보상을 받을 경우 국가에 잘못이 있어도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고 대신 개정된 연금법 법정 액수만 받았는데 당시에 군인 월급 36개월치가 보상의 전부였고 이는 2004년 참여정부 때 가서야 바뀐다.


더 나아가 2010년대 이후가 되서야 참전장병들을 중심으로 한국 정부가 전투수당을 제대로 주지 않았다는 논란이 터졌다. 한국 군인보수법에 따르면 전시 상황에서만 전투수당을 줄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는데 그 전시상황의 기준이 대한민국 영토 내, 넓게 봐도 한반도였다는 것이다. 베트남은 한반도가 아니고 베트남 전쟁은 한국 정부의 내우외환이 아니었기에 그들은 받지 못했던 것이다. 왜냐면 공식적으로 베트남 파병의 명분은 어디까지나 군사원조였기에 정부가 참전장병들은 한국의 국가비상사태를 위해 싸운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 것인데 그렇기에 베트남에서 싸운 한국군에게 전투수당을 안준 것이다. 베트남 전쟁 뿐만 아니라 연평해전 등에도 전투수당 문제는 여전히 제대로 주지 않고 있다.

논쟁 1: 베트남 전쟁에서의 한국군 학살 진위여부?


" 1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100명의 양민을 보호하라! "

- 파월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의 슬로건. 이 말을 두고 지금까지도 좌우 진영에서 한국군 파병에 대한 논란이 벌어진다. -


이게 아마 2000년대 이후 한번 크게 불판 열렸었던 주제일 것이다. 구수정, 한홍구 등의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여 논란이 생겼던 것으로 당시 한국 대통령이었던 김대중은 베트남 방문했을 때 사죄하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한국군의 정체성과도 관계 있는 문제라 굉장히 민감한 논쟁거리로 받아지는데 일단 이 문제에 대해 중립을 지키려고 하는 입장으로써 이 글에서는 어느 한 쪽의 주장만 일방적으로 옳다 하진 않겠다. 난 채명신의 저서도 재밌게 읽었었고 한국군 학살 논란의 제기자 구수정 박사와도 실제로 만난 적이 있었던 입장이니 말이다.


일단 현재로써는 구체적인 물증은 없고 베트남 정부도 진상조사에 협조를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다. 일각에서는, 특히 일본 넷우익 진영에서는 이 논란을 가지고 한국군이 일본군을 능가하는 제노사이드를 저지른 집단인냥 묘사하는데 이건 개소리가 맞다. 프랑스가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일으키기 이전 베트남에 진공한 일본군이 저지른 수탈과 학살로 죽은 베트남 주민만 200만이었는데 주 무대가 베트남 전체도 아니고 남베트남이었던 한국군이 이를 능가할 학살을 저지를 수 있다고? 참고로 호치민조차도 일본군의 진공을 환영하는 베트남인들을 향해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는 조선 사람들이 행복해보이던가?"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한국군이 학살을 저지르지 않고 양민을 보호했다는 채명신의 해명이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이 있는데 그의 회고록 <베트남 전쟁과 나>에서 번개작전을 설명하던 내용에 이런 언급이 있다. "이 작전 기간 중 전과는 적 사살 92명, 포로 33명으로 기록되었지만 소총은 불과 4정을 그쳐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한 분석이 요구되었다. 왜냐하면 무기가 너무 없다면 사살자의 일부가 양민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물론 채명신은 빈호아강 북방 평야지대에 산재한 부락은 거의 베트콩의 전략촌이었기에 그들이 민간인일 확률은 없다고 하나 의심이 드는 부분이 생기는 것 자체는 이상하진 않다.


또 퐁니 퐁넛 마을 학살은 비록 완벽한 진상규명은 아닐지라도 학살의 주체가 남베트남군인지 한국군인지 논란이 있는 고자이 학살에 비해 증거도 비교적 명확한 부분이 크다. 미군 감찰부 보고서에 따르면 대충 한국군 청룡부대가 퐁니마을을 지나서 퐁넛마을까지 신속하게 이동하며 작전을 수행하던 중 퐁넛부근에서 1중대가 사격을 받자 마을에 포격을 가하고 자동화기를 난사했는데 이는 미군 분견대의 어느 병사가 증언한 내용이다. 당연히 채명신은 관측 시점에 한국군은 마을을 지났다고 주장했으나 미군은 학살 시점에 한국군 해병중대는 해당 지역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그 일이 있었던 밤동안 퐁니 북쪽 600미터 인근에 배치되었다고 반박한다. 결과적으로 퐁니 퐁넛 학살의 경우는 문재인 정부 시기 국정원이 자료 공개를 결정하고 올해 2월, 법원으로부터 피해자에게 한국 정부가 배상금 3,000만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국방부를 제외한 행정, 사법 기관들이 점점 사실임을 인정하는 추세로 가는 중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의 학살은 어찌보면 '전략촌'으로 주민들을 몰아넣는 방식상 안 나올 수가 없다고 본다. 전략촌의 선조 격인 1933년에 시행된 관동군의 '집단부락'은 치안숙정공작의 일환으로써 항일 유격구와 근거지를 철저하게 토벌하고 불태워버린 뒤 그 주변에 흩어진 농가의 백성들을 집결시켜 하나의 부락에 수용하는 방식이다. 채명신은 "물과 물고기의 분리", "한 명의 베트콩을 놓치더라도 백 명의 양민을 보호하라"라는 슬로건을 내걸었지만 이미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전략촌이라는 관동군의 집단부락 방식으로 주민들을 수용했는데 이러한 '비민분리' 과정에서 민간인 피해는 날 수 밖에 없었다. 즉 그러니 한국군의 민간인 살상은 있을 수 밖에 없는 구조이기에 마냥 대민친화적인 군대는 아니었다는 말.


한국군이 일본군처럼 집단적으로 약탈하거나 마구잡이로 학살을 일삼았다는 것은 가짜뉴스가 맞지만 그렇다고 한국군이 채명신의 슬로건을 무조건적으로 지킬 만큼의 베트남 전쟁에서 모범적인 군대도 아니었다는 말. 정말 한국군이 베트남 전쟁에서 모범적인 군대였다면 라이따이한 같은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퐁니 퐁넛 마을 같은 학살 추정지의 주민들이 한 명도 아니고 여러 명이 집단으로 학살의 주체로 한국군을 꼽으며 소송을 걸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베트남 전쟁을 통해 특수로 경제 성장을 이루고 한국군 현대화의 첫 단추가 된 것은 어디까지나 한국인으로서의 긍정적으로 볼 만한 여지가 있는 입장일 뿐이고 베트남인들 입장에서 보면 그저 부패하고 썩은 남베트남 정부를 도운 외세에 불과할 가능성도 높다.

논쟁 2: 베트남 전쟁의 성격은 무엇인가??


일단 베트남 정부 측과 68 당시 시위대 측의 입장은 "민족해방전쟁"이라는 것이다. 이는 파월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조차도 1차 인도차이나 전쟁만 한정해서 본다면 외세vs반외세의 성격이 존재했다고 인정하는 것과 겹치는 부분이 있다. 어쨌든 베트남 정부는 이 전쟁이 결과적으로 통일로 이어졌기에 호치민과 전 인민이 불굴의 의지로 승리한 민족해방전쟁이라고 인식하며 촘스키 교수 같은 서양의 진보 학자들도 동의한다.


반면 한국의 보수 세력 중 상당수는 베트남 전쟁을 공산 월맹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전쟁이라 인식한다. 19대 대선 당시에 문재인이 과거 리영희의 말을 인용해 "월남 패망에 희열을 느꼈다"고 말했었던게 화제가 되어 안보관 공격을 받았는데 이 지점이 여전히 한국에서는 베트남 전쟁을 반공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와의 싸움이었다며 이념 전쟁이라 인식한다고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미국에서도 UN 주재 대사였던 존 볼턴은 베트남 전쟁의 정당성을 강력하게 주장하였지만 정작 그 상황에서 군 입대는 거부하였었던 적이 있어서 훗날 논란이 되기도 했다.


2006년 2월 18일자, AP통신은 미국 역사학자들이 뽑은 역대 미 대통령의 최악의 실책 TOP 10을 발표했는데 1위는 남북전쟁을 방조한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 2위는 흑인 인권 개선에 미온적인 앤드류 존슨 대통령, 3위가 바로 1964년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시작되었던 개입을 본인이 취임한 후부터 전면전으로 확대해 54만명의 지상군을 증원한 린든 존슨 대통령이었다. 더욱이 2005년 말 <뉴욕 타임스>가 통킹만 사건의 정보를 미군 개입의 확대를 위해 전면적으로 과장했다는 것을 보도하고 그나마 베트남 전 개입의 의의를 높게 평하던 공화당 내 네오콘이 트럼프 이후 부상한 고립주의 성향의 대안우파들에게 밀려나며 미국 사회에서도 베트남 전쟁은 사실상 흑역사로 취급받고 있는 실정이다.


베트남 전쟁의 개입이 거대한 실책이었다는 사실이야 널리 알려졌으니 넘어가고 베트남 전쟁의 성격을 논하면 사실 단순 좌우의 논리로 따지기엔 좀 많이 복잡하다. 일단 1차적으로는 베트남인들이 정부를 세우는 걸 방해할 목적에서 프랑스군이 개입해 깽판을 쳐서 북위 17도선을 기준으로 분단되는 상황을 초래한 것이나 응오딘지엠이 남북 총선거 거부하고 베트남 국민 종교인 불교를 억압하는 정책을 취한 것에서 남베트남 측의 정통성이 깎여나간 원인이 생겨났고 뭐 이건 본인들 스스로 자초한 부분도 크니 굳이 변호해주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러나 그와 함께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베트콩이 단순히 베트남 국민들의 지지로 구성된 순수한 민중 조직이었던 것은 아니다. 베트콩은 창설 몇달 전에 있었던 3차 노동당 대회에서의 2개의 당면과제 속 월맹의 사회주의 혁명 달성과 아울러 해방전선이 명시된 사실을 바탕에 뒀으며 베트남 노동당 중앙위원회의 지령을 지속적으로 받고 있었다. 베트남 전쟁 동안 '호치민 루트'를 통해 베트콩의 대량의 무기, 탄약, 군수품을 공급받은 것은 워낙에 유명한 사실이고 그나마 1968년 이전까지는 자생적으로 형성된 비 공산 계열 진보적 민족주의자들도 상당수가 통일전선을 통해 독자적으로 움직였지만 문제는 구정공세에서 패배하여 베트콩의 조직 자체가 와해 직전으로 몰리면서 대부분 월맹에서 파견된 북베트남 출신 노동당 간부들이 내부의 주도권을 잡게 되면서 옛 말이 되었다.


그래서 내가 베트남 전쟁에 대해, 굳이 민감한 사안을 피해 평가를 내리자면 냉전의 진영논리와 제3세계로서의 독립 문제가 섞인 복합 전쟁이라는 것이다. 베트남 전쟁은 분명 이념 전쟁인 측면도 컸고 냉전의 상황 속 진영논리에 깊숙이 말려들어 소련은 1955년부터 1965년까지만 해도 월맹에 미그 17, 19형 전투기 50대와 미그 21 15대, IL-28 폭격기 5대 등을 지원했고 미국은 아예 대규모 지상군을 투입했으니 말이다. 프랑스, 중국 등 2류 군사 국가들이 1차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빠진 이후부터는 냉전의 양대 축인 미소 양국의 싸움으로 커진 국제전이라는 양상도 있었다.


민족해방전쟁이라는 주장에까지는 동조하진 않더라도 외세와 반외세라는 관점도 솔직히 틀린 이야기는 아니라 본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의 프랑스의 삽질 덕분에 호치민 정권의 정당성은 오히려 강화되었으며 실제로 미국, 소련이 베트남 문제에 개입하기 이전까지 상황은 적어도 순수한 민족 독립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호치민과 북베트남은 어쨌든 항일, 항불 투쟁을 하며 베트남인들이 스스로 세운 지도자, 정부였고 반대로 프랑스는 누가봐도 외세가 옛 식민지에 미련을 버리지 못해 들어오는 꼴로 밖에 안 보였을거다.


그런 점에서 베트남 전쟁은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 전쟁을 넘어 신생 독립국가의 탈식민주의화 과정에서의 모순으로 비롯된 측면과 프랑스, 중국 등 2류 강대국의 개입에서 미국, 소련 같은 냉전 양대 축의 강대국들이 주도하는 국제적인 대전쟁이 공존하는 복합 전쟁이라 보는게 맞다.

맺음말: 베트남 전쟁의 '진짜' 교훈


단순 좌우 논리에 따라 베트남 전쟁의 교훈을 정의한다면 남베트남 인민들의 궐기로 이뤄진 순수한 해방전쟁으로서의 교훈 혹은 자유월남의 고정간첩, 반정부운동으로 인한 패망과 적화통일의 경각심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지나치게 단순하게 단면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좌파 진영에서는 베트남 전쟁을 민중사관에 의거하여 남베트남 민중의 승리라는 시각으로만 보며 통일전선에서 결국 주도권을 쥔 것이 자생적 민족주의자가 아닌 북베트남에서 파견된 공산주의자였음을 간과하고 반대로 우파 진영에서는 잘 살고 부유하던 자유월남이 공산당 간첩들로 인해 패망해 적화통일이라는 끔찍한 결과를 가져왔다고 주장하는데 둘다 진영논리적 시각이 너무 다분하다.


먼저 우파 측의 자유월남 패망 운운을 살펴보자. 이걸 알아야 할 게 남베트남이 만약 정상적인 체제였으면 간첩들과 반정부운동이 활개를 쳐도 저렇게 무너지진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남베트남군은 월맹군보다 훨씬 군사력이 우위였다. 그런데 문제가 남베트남의 부정부패는 상상을 초월해서 미국으로부터 받은 무기를 월맹에 돈 받고 넘기는 수준이었다. 남베트남의 국부 응오딘지엠부터가 족벌 정치를 시행하는 사람이었으니 부패를 안하려고 해도 안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토지개혁 말인데 북베트남이 그 과정에서 정치적 보복과 학살이 있었던 것이 실책이라고 해도 남베트남의 토지개혁은 이보다도 못했다. 북베트남이 토지 재분배를 하니까 남베트남도 따라한 것이었는데 지방 공무원들이 이미 농민들에게 분배된 토지를 몰수하여 지주에게 다시 돌려 주는 일이 빈번하여 민심을 잃어버렸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베트콩이 국토를 잠식해갈 수 있었던 것이며 그래도 이것조차도 그나마 자주성과 방향성이라는게 존재하던 응오딘지엠이었으니까 가능했던 일이다. 응오딘지엠이 쫓겨난 이후 집권한 세력들은 권력 싸움만 일삼으며 부패를 더더욱 키웠고 무엇보다 쿠데타가 너무 자주 벌어진 탓에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어 미국에 대한 의존 없이는 못버티는 지경에 이르었다.


미국의 베트남 개입도 커다란 실책이었다. 프랑스의 식민지 유산에 사실상 기대고 거기에 더해 가톨릭 우대 등으로 대부분의 국민들에게 외세와 야합한 정권이라 비판받던 남베트남은 자력으로 생존이 불가능했었던 구조였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프랑스는 끝까지 뒤끝있게 행동하며 남베트남 지역을 독립시켜 북베트남에 저항한 반공 독립 국가로 두는 안을 거부하고 베트남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웠으며 여기서 베트남 반공 세력도 프랑스 재식민지화 시도에 분열된다. 프랑스가 패배한 이후 응오딘지엠이 권력을 잡았지만 프랑스 괴뢰국 베트남국을 이어받았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었고 반공 세력도 분열된 탓에 지엠 정권은 호치민에 대항할 영도력을 갖춘 체제로 발전하지 못해 족벌에 의존하다가 무너진다.


그런 점에서 미국은 장기적인 생존이 힘든 막장 국가를 위해 막대한 인적, 물적 자원을 낭비했던 것이고 결과적으로 지엠을 축출하는데 관여한 것은 안 그래도 심각한 국가 상태를 더 망쳤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 아민 정권을 무너뜨리고 타라키로 대표되는 친소 괴뢰 정권을 세웠던 것과 유사한데 미국의 오판으로 남베트남은 지엠 만큼의 행정력도 없는 썩어빠지고 비전도 없는 지도자들의 집권하여 파탄으로 몰고 갔다. 미국의 이러한 베트남 개입은 공산 정권을 막겠다고 독재정권을 지원하는 방식이 역효과를 부른 대표적인 사례라 볼 수 있고 미 지상군의 파병은 남베트남의 멸망을 늦췄을 뿐 근본적인 체제 변화가 없었기에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정리하자면 남베트남이 망한 건 간첩이나 반정부 운동은 부차적인 요소에 불과하고 진짜 이유는 집권 세력들이 스스로 말아먹은 것이다. 남베트남은 적어도 초창기 4년은 쌀 생산량은 200만 톤 넘게 늘고 고무농원은 거의 1,000개 가까이 늘어나는 등 성과가 있었지만 가톨릭 우대로 인한 종교단체들의 반정부 세력화, 부정부패로 인한 군 체계의 막장화 속에서 베트콩이 생존하고 세를 넓히기 좋은 요건이 되어갔던 것이다. 단순히 간첩들이 무너뜨렸다기엔 총체적으로 체제가 문제가 심각했다는 말.


하지만 그렇다고 베트남의 통일이 순전히 남베트남 인민의 봉기를 통한, 말 그대로 마르크스-레닌주의식 민중혁명으로 집권한 사례인가 하면 그건 아니다. 베트콩이라는 조직은 노동당 중앙위원회의 지령을 지속적으로 받아왔던 것은 사실로 밝혀진 바 있고 호치민 루트로 군수물자를 지속적으로 보급받았기에 전쟁 수행이 가능했다. 물론 베트콩 결성 초창기에는 종교단체 등 자생적 민족주의자들도 통일전선 하에 조직을 결성해 한 축을 맡았지만 적어도 구정공세의 실패로 베트콩이 몇년 간 작전 수행이 불가능할 정도의 엄청난 피해를 입은 이후부터는 베트콩의 인원 공백을 북베트남에서 파견된 노동당 간부나 월맹군 장교들이 차지하여 조직의 성격이 조금 변화된다.


베트남 통일의 가장 결정적인 것으로 내가 생각하는 건 첫번째는 소련의 군사 지원이다. 이게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인데 소련 지원이 전쟁 수행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S-75 지대공 미사일은 제공권을 거의 웬만하면 잡았던 미군 전투기 상대로도 쓸 만했으며 월맹 정규군이 사용한 AK 소총은 파월 한국군이 초창기에 쓰던 M1 개런드나 M2 카빈보다도 화력에서 우월했다. 미그 17은 F-4 팬텀기보다 성능이 아래지만 당시 미군이 대만해협 전투로 인해 미사일 만능주의에 빠져 기총 제거하고 공대공 미사일로만 싸우다가 은근 피격당하는 사례가 생기기도 했을 정도였다.


두번째는 베트남 내부가 아닌 외부의 반전 여론이다.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한 이유다. 미군이 베트남에서 함부로 북진하지 못한 배경은 68 당시였기에 여론의 눈치로 그래도 주저했던 것이었다. 미군의 전략 폭격과 미라이 학살이 그대로 언론에 노출되며 미군의 최대 적은 베트콩이 아니라 반전 시위대였으며 이때는 미국에서 아직 징병제가 시행되던 시기라 청년들의 거센 반발에 직면했다. 무엇보다 월맹이 군사적으로 크게 실패한 구정공세에서도 '사이공식 처형'이라는 사진이 공개되어 여론이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미군이 서서히 베트남에서 발을 빼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 반전 여론이 안 그래도 미군이 베트남에서 목표를 달성하기 힘든 조건을 더욱 악화시켜 남베트남 패망을 실질적으로 이끈 셈.


우리는 베트남 전쟁을 그동안 한 쪽 입장에서 바라보았다. 2017년에 있었던 19대 대선 당시 문재인이 과거 자서전에서 진보 논객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고 남베트남 패망에 희열을 느꼈다고 적었던게 크게 논쟁으로 벌어졌었는데 여기서 알 수 있는 건 보수 진영은 반공주의적인 색깔론으로 접근하고 운동권 진영은 민족해방전쟁이라는 관점으로만 베트남 전쟁을 대하며 양쪽 모두 복합전쟁이라는 관점으로는 인식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나는 진영논리만 키운다고 보는 입장이기도 하고.


베트남 전쟁에서 1975년 승리한 북베트남은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지금은 과거의 적이었던 미국과 협력하며 남중국해 문제로 계속 갈등 중인 중국 견제하고 있다. 2018년 미 해군의 칼 빈슨호가 베트남에 입항하거나 2016년에는 미국 정부가 베트남에 대한 무기 금수 조치를 해제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베트남인들이 자신들이 미국과 싸웠다는 사실을 잊는 것도 아니고 여전히 호치민을 자랑스러워 한다. 이러한 "용서하되 잊지 않는다"는 베트남 사람들의 역사 인식과 미래지향적 관계 구축은 아직도 베트남 전쟁을 두고 서로 진영논리에 빠져있는 한국 사회의 인식보다도 훨씬 진일보했다는 점에서 그들이 부럽고 씁쓸하기도 하다.


참고 문헌:


채명신, <베트남전쟁과 나>, 팔복원,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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