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이슨 Jul 18. 2023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를 근간으로 건국되었나

해방 후 족청과 이범석이 정부에 끼친 영향력

https://youtu.be/igGQLdHGIKw?si=N8B5u-wV3EXeBOiQ

뉴라이트를 자처하는 이들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바탕으로 건국되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이영훈은 1912년에 공표된 <조선민사령>이 한국의 민법이 된 것을 강조하며 시장경제와 자연법의 원리에 근간하여 국부 우남 이승만 박사가 건국, 이 민족에게 자유의 정신을 불어넣었다고 한다. 그들은 마치 초창기 대한민국이 뉴라이트들이 주장하는 자유시장 원리에 부합한다고 보는 듯하다.


그러나 제헌헌법만 봐도 이러한 것들을 반박할 수 있다. 제헌헌법 경제 조항 중 제86조는 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할 것을 얘기하며 85조와 87조는 각각 운수, 통신, 지하자원, 금융, 보험, 전기, 수도, 수리, 가스, 수산자원 등의 공공성을 가진 기업들은 국유 또는 공영으로 한다고 정해놓는다. 특히 대외무역도 국가의 통제 하에 둘 것을 명시하고 있다. 무엇보다 제헌헌법 제84조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있는 국민경제 발전을 위한 국가개입주의’가 제헌헌법의 경제이념임을 표방하고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성격은 무엇일까? 미소 양국에 의해 분할된 분단국가와 식민지 상태에서 갓 해방되어 독립한 탈식민국가라는 두 얼굴을 가졌다. 그렇기에 대한민국의 초기 모습은 냉전 논리에 따라 절대적으로 규정되었다기 보단 유동적이었다. 미국의 어느 법률가는 "국가사회주의"(state-socialism)적이라 평했고 헌법의 사상적 배경은 자유민주주의보다 민족주의였다. 이승만은 한민당과 결별하며 민족주의는 내세웠고 그 과정에서 국시로서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반공주의, 반자본주의, 반제국주의를 주장하는 이념인 일민주의가 제창되었다.


이승만은 취임 연설에서 새 헌법과 새 정부는 새 국민보다 중요하지 않으며 부패한 국민으로는 신성한 국가를 이룰 수 없다고 했다. 이는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보단 쑨원의 삼민주의에 더 가까운 표현이다. "일민"은 한국 국민으로 족청의 이범석과 마찬가지로 이승만도 국민과 민족을 같은 의미로 사용했고 "우리 민족은 한 민족이며, 우리 국토와 정신과 경제적 계급도 늘 하나였다"는 표현은 계급 차별 철폐, 파벌주의 타파, 남녀평등, 국가적 통일이라는 하위 원칙으로써 국가는 유기적 통일체이자 육체를 가진 인간과 비슷한 정치적 통일체였다.


이승만 정권의 이론가들은 유기체 이론을 가족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확대하여 국가를 확대된 가정으로, 국민은 확대된 가족으로 보며 국민은 한 가족이라는 정신 안에서 살아야 한다고 보았다. 문교부 장관 안호상은 1949년 3월, 학도호국단을 창설해 학교 조직 내 청년 단체를 도입하여 좌익을 통제했다. 학도호국단 1주년 기념식에서 그는 자본주의 냉풍과 공산주의 태풍 속에서 민족을 하나로 뭉쳐야 한다고 했다.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이자 파시즘 사상에 호의적이었던 정치가 이범석

파시즘을 반제국주의로 사용하는 걸 오늘날 우리는 이해 못하겠으나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E.H카는 민족주의의 제3기는 사회적 민족주의나 민족적 사회주의, 또는 경제적 민족주의라는 형식으로 나타나 정치 영역에서 작동한 민족주의를 경제와 결합시킨다고 했다. 그리하여 계급투쟁이 지닌 적대성을 민족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운동들이 벌어졌는데 1910년대 초 민족주의자 코라디나가 이탈리아를 하나의 프롤레타리아 민족으로 제시한 것은 무솔리니에게도 활용되어 국내적 계급 관계를 민족 관계로 치환했다. 나치당 내 좌파 그레고르 슈트라서(Gregor Sttrasser)는 노동자 계급 해방을 위해 민족적 자유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반제국주의적 수사로 나치즘을 선전했다.


이처럼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 속에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다양한 편차를 내포하며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의의 흐름을 이끌었고 이게 제3세계주의의 근간이 된다. 대체로 좌익적 경향이 강했지만 1960년대 초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는 공개 석상에서 히틀러를 민족주의자라며 높게 평했는데 이는 제3세계에서만 나타난 경향이 아니었다. 바로 한국에서도 족청이라 불리는 조선민족청년단의 핵심 인원, 즉 이범석과 안호상, 강세형, 양우정 같은 이들을 중심으로 나오게 되었다.


이러한 족청은 안호상이 문교부 장관이 되고 이범석이 국무총리와 국방장관을 역임하며 부산정치파동, 사사오입 개헌 이전까지 이승만 정부의 한 축이었다. 그들의 경제관은 남로당 만큼은 아니었지만 한민당보다 왼쪽이었고 족청 훈련소에 좌익 출신 전향자를 대거 등용하거나 사회주의 지식인 출신 양우정이 일민주의 저술에 참여하는 등 좌익 포섭에도 적극적이었다. 양우정은 <이 대통령 건국 정치 이념>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자유의 미명 하에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자본주의의 모든 사회 제도와 경제 조직을 전복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일민주의가 지표하는 "하나인 민족으로써 무엇에고 또 어느 때이고 둘이 있을 수 없다"는 원칙은 착취하는 지주와 착취당하는 소작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며 착취하는 자본가와 착취당하는 노동자의 제도를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현대 물질 문명의 기초를 구축하는 자유주의적 이론을 비판하고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자본주의 제도는 국내적으로나 대외적으로나 이승만 대통령의 일민주의와는 상용할 수 없다.


치근치근한 자본주의의 잔재는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자본주의의 재건을 꿈꾸고 또는 기도(企圖)하고 있는 것이다. 공산주의의 치열한 반동을 분쇄함과 동시에 우리는 꿈틀거리고 일어나려고 하는 이 자본주의 잔재를 제초하고 일민주의 진정 국가를 건설하려는 이 강토(疆土) 위에 조금도 싹들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안호상이 쓴 1947년 6월에 나온 <유물론 비판>이라는 책은 물질에 대한 법칙의 선재성(先在性)을 근거로 물질을 세계의 근본으로 보는 유물론이 틀렸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책에서 다음처럼 말한다.


사실에 있어서 자본주의를 박멸하고 진정히 물질생활을 고루 잘하려면, 사람의 머리로부터 유물주의를 근본적으로 없애버려야 할 것이다. 소박적(素朴的) 유물론이고 과학적 유물론이고 간에 유물론은 언제나 자본주의 맹아요 모태이다.


1948년 족청에서 발행한 <민족학생운동의 이념>은 김철이 썼는데 그는 전후 세계사는 양대 승리자인 미, 소에 의한 세력권의 획정 과정 및 상호 대치 태세의 정비, 강화 과정이라고 보았으며 그런 상황 속에서 남북을 막론하고 반민족적 사대주의 세력이 성장하여 대중과의 괴리를 불러왔다고 평했다. 그렇기에 북조선 민중 사이에 미국을 기망(冀望)하는 어떤 경향이 있고 남조선 민중 사이에는 좌익에 쏠리는 어떤 경향이 있다고 봤다. 따라서 족청 1기생인 김철은 다음과 같이 이 책자에서 말했다.


지금 양 세력권 세력자인 미소 양국의 국가 권력의 성격을 표시하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와 전제주의적 공산주의는 전자가 인민의 경제적 균형 번영을 보장함이 없이 자산가 아닌 절대다수의 민중에 대한 우심한 착취를 용인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인민의 정치적 자유 활동을 보장함이 없이 집권자 아닌 절대다수의 민중에 대한 가혹한 압제를 용인한다는 것이다...(중략) 그러니 이에 반하여 피영도적 위치에 있는 민족이나 국가는 한결같이 그들 자신의 자유로운 발전에 대한 영도적 세력의 부당한 제약의 파기를 의욕하고 있으며 나아가 자산가나 집권자가 아닌 전 세계 인민은 모두 경제적 균등 번영과 정치적 자유 활동이 아울러 보장되는 새로운 사회 체제 수립을 갈망하고 있다.


물론 족청의 이러한 성향은 중앙훈련소 시절 중국에 있던 이범석이 장제스에게서 배워온 것이다. 장제스 역시 국민정부 시기에 "국가지상 민족지상"이라는 구호를 내걸었고 이는 족청 창립 후 "민족지상 국가지상"으로 바뀌어 활용되었다. 아무래도 이미 국가가 존재하고 무엇보다 그 국가를 따르게 했어야 할 중국 국민정부와는 달리 아직 국가가 없는 상황이었기에 이범석은 민족을 앞에 뒀다. 그럼에도 이범석은 유독 "피"를 강조했다.


독일의 히틀러가 순혈운동을 일으킨 일이 있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하지만, 그것이 독일민족의 형성된 역사 배경으로 보아 사실상 되지 못할 일이긴 하였으나, 현실적으로 유대인을 배척함으로써 민족적 결속에 심대한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이 하나의 실례만 가지고도 피의 순결이라는 것이 얼마나 존귀한 것이며 중요한 것인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니 우리는 이 점 충분히 음미할 필요가 있다.

- 1947년 6월 15일, 조선민족청년단 중앙훈련소에서 강의하던 중에 한 말 -
조선민족청년단 창설 1주년 기념식

또 무엇보다 족청계가 친미적 태도와 거리가 먼 것은 바로 이범석이 2차세계대전을 파시즘 대 민주주의의 전쟁으로 보는 주류 견해를 부정하고 오히려 패전국인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가졌던 인식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번 대전을 단순한 주의(主義)와 주의의 싸움이라는 주장은 천진난만한 소견이며 민족과 민족과의 투쟁이 본질이고 주의와 주의의 싸움은 형식이고 명분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전쟁에 있어서 민족과 민족의 연합은 오직 민족적 이해타산에 근거했다고 본 것은 덤이었고.


이번 대전(제2차세계대전)을 단순히 사상과 사상의 싸움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은 너무나 천진난만한 소견이라 하겠다. 실은 민족과 민족과의 투쟁이 주인이오 본질이오 우연이오 사상과 사상의 싸움은 형식이오 명분임에 불과했던 것이다. 전쟁에 있어서의 민족과 민족의 연합은 오직 민족적 이해의 타산에 근거하였을 것이다.


그러한 이범석은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가 되었다. 그리고 그 이범석은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이 되자마자 "정훈 공작"이라는 이름으로 미국과 대립하면서 정치국을 설치하려 했다. 정치국은 본래 소련 붉은 군대에서 시작한 제도로 이범석이 중국이 있을 때 국민당군이 소비에트를 모델로 삼아 군을 정치적으로 지도하기 위해 도입한 제도였다. 이를 통해 이범석은 반공 혁명군을 만드려 했으나 사임과 함께 무위로 돌아갔다.


그리고 민주국민당의 배제와 자유당의 결성은 반자유주의 세력 족청의 영향력이 마냥 이승만 정부 내에서 무시할 정도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1951년 광복절 기념사에서 이승만은 "농민과 노동자를 토대로" 하는 신당 결성을 언급하며 민주국민당을 특권계급과 자본가로 구성된 정당이라고 비판했다. 이때 이범석은 장제스가 국민당을 개조하며 광대한 노동 민중을 당의 사회적 기초로 삼아 그 결과 노농 계층 당원 비율이 1951년 8월 기준 49.31%로 오른 것을 얘기하며 중국 국민당을 모델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또 자유당은 창당 과정에서 원외 자유당이긴 하지만 대놓고 반(反) 공산, 반 자본, 반 봉건적 통일노농당이라고 설명했으며 이때 민주국민당 쪽에서는 그들을 사회주의자라고 지칭하며 비난을 퍼부었다. 또 신당발기취지서에는 특권과 착취와 불평과 부자유가 없고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되며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협동생활경제 체제라는 표현과 국민 전체의 경제생활 균형과 생산 분배 소비에 있어서 계획적인 협동경제체제를 지향한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었다.


이렇듯 대한민국의 초창기는 족청의 주도로 자유민주주의라기 보다는 일민주의라는 유사 파시즘, 국가사회주의 요소가 가미된 제3세계주의 국가에 가까웠다. 적어도 부산정치파동으로 이범석이 퇴출되기 전까지는. 그럼에도 족청의 역할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중요했던 것은 먼저 한국의 몇 안되는 파시즘 세력이었다는 것이다. 이범석은 광복군 사령관 시절부터 히틀러를 찬양했으니 더 말할 것도 없고 안호상은 아예 독일에서 헤겔 철학을 공부한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이범석 세력이 몰락한 후 한국에서 민족주의를 공식적인 슬로건으로 내걸고 나오는 원내 극우 정당이 사실상 없다는 것에서 족청 세력이 가진 위치는 한국 정치사에서 은근히 독보적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일민주의라는 체계가 안호상이 주도하여 이승만 정부 초기 북한의 공산주의에 맞서는 남한의 이데올로기로 자리잡게 하려 했으나 이범석이 마케이누가 된 이후 흐지부지 되었다는 것. 일민주의라는게 옳고 그름을 떠나 한국에서도 미국의 자유민주주의를 무조건적으로 전부 수용하고 받아들이기 보단 쑨원의 삼민주의와 같은 독자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서구에 종속되는 것을 막는 한편 자기만의 이념을 갖출려는 몇 안되는 시도였기에 의의는 있다.


마지막은 글 주제처럼 우파 유튜버, 국민의힘 측 의견과는 달리 대한민국의 건국과 함께 자유주의자들이 주도하여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시장경제를 바로 이식하기는 개뿔 오히려 경제적으로 좌익적 경향을 갖고 대외적으로 파시스트들과 비슷한 인식이 있는 사람들이 정부에서 영향력이 컸다는 것이다. 제헌헌법은 오늘날 6공화국 헌법의 경제민주화 조항 이상으로 좌파적인 부분이 크며 이 뜻은 대한민국은 자유시장경제를 근간으로 둔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출발한 나라가 아니라는 말이다. 애초에 이승만 이후의 박정희도 국가통제주의적인 경제였고 오늘날 대한민국의 경제 체제도 자유시장보다는 일본식 하향 경제에 가깝다.


대한민국이 생겨난지 약 75주년이 다되가고 점점 사회가 목적성이 없이 당장의 물질과 쾌락만을 추구하며 개개인이 피폐해져가고 있는 지금, 이 나라가 애초부터 생길 때의 이데올로기 자체를 한번 고찰해볼 때이다.


참고 문헌:


후지이 다케시,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 역사비평사, 2012

후지이 다케시, <당국 체제의 연쇄 -동아시아 내전과 냉전->, 동북아역사재단, 2014

서중석, <이승만의 정치이데올로기>, 역사비평사, 2005

후지이 다케시, <제1공화국의 지배이데올로기 -반공주의와 그 변용들->, 역사비평 83호, 역사비평사, 2008

이택선, <해방 후 이범석 정치노선의 성격 - 파시즘 논의와 국제정치적 배경을 중심으로 ->,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8

전재호, <해방 이후 이범석의 정치 이념: 민족주의와 반공주의 중심으로>, 전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2013

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2-I>, 글항아리, 2023

매거진의 이전글 5.16 기념으로 쓰는 박정희에 대한 나의 평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