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이슨 May 17. 2023

5.16 기념으로 쓰는 박정희에 대한 나의 평가

박정희, 난 싫어하지는 않는다. 물론 독재자는 맞다. 과오를 애써 부정하며 반인반신으로 섬길 생각은 나한테는 없다. 그럼에도 그는 업적 역시 많았다. 왜냐면 어쨌거나 좌우 따질 것도 없이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되었으니 말이다. 거의 1940년대 태평양 전쟁 시기부터 1950년대 이승만 정부 때까지 경제는 추락만 거듭했다. 이승만이 농지개혁은 잘했을지 몰라도 경제 개발의 비전을 제시하진 못했으며 장면은 왔다리 갔다리 하면서 민주당 구파 신파로 나뉘어 예산 갈라먹기만 하면서 경제개발 계획을 실행하지 못했다.

5.16으로 집권한 박정희에게는 남로당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지금으로선 상상이 안되겠지만 민주공화당 못지 않게 신민당도 색깔론에 한창 진심이었다. 그렇기에 박정희는 뭔가 했어야 했다. 그래서 꺼내든게 경제다. 일관제철소 건설과 포스코 설립은 아무런 돈이 없었던 대한민국 입장에서 상당한 도박이었다. 당시에 한국의 신용도는 낮았고 이러한 건설 사업은 독재자의 자기 과시용 돈낭비로 평가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해냈다. 몇십년 후 한국에게 있어서 철강 산업과 조선업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효자산업이 되었다. 박정희가 한 사업들, 물론 이면은 있을 거다. 전태일로 대표되는 노동계 탄압도 있었고 무리하게 밀고 나가서 한국 사회의 빨리 빨리 문화가 정착되게 한 원인을 제공했다. 그러나 6.25 전쟁의 폐허 속에서 함께 한 굶주림은 방법이 어쨌거나 해결되었고 좋은 의미로건 나쁜 의미로건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의 시스템 대부분을 형성한 건 다름 아닌 박정희였다.

물론 일부 우파들은 박정희가 자유주의 경제 성공 신화의 사례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틀렸다. 박정희가 참고한 모델은 만주국의 실세 2키 3스케, 그 중에서도 기시 노부스케가 주도했던 만주국 산업개발 5개년 계획이었다. 입안자들은 대학 시절 마르크스 경제학과 기타 잇키 사상에 빠져있었으며 스탈린의 5개년 계획, 히틀러의 재군비,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의 장점들을 따와 만주국이라는 실험장에서 통제파-신흥재벌-혁신관료라는 새로운 카르텔이 마치 톱니바퀴가 움직이듯이 실험을 설계하고 실행했다. 이는 전후 일본의 자민당-경단련-언론 카르텔로 이어졌고 우리나라의 박정희는 만주국에서 통제주의 경제가 성공하고 발전하는 걸 지켜봤다.

따라서 박정희는 자유시장경제론자가 아니다. 물론 사회주의 계획 경제와도 거리가 멀지만 내 개인이 평가하기에 박정희와 가장 유사한 체제는 코포라티즘, 즉 협동조합주의라는 국가주의 경제라고 본다. 당시 미국은 박정희가 구상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보고 너무 좌파적이라며 딴죽을 걸었을 정도였다. 실제로 만주국이 국영 기업인 만철과 만주중공업개발주식회사를 중심으로 미쓰비시와 닛산, 도요타 등이 투자를 해서 개발했듯이 박정희 시절에도 국가 주도로 대기업을 키우고 포스코라는 자유시장 원리와는 도저히 안맞는 공기업을 일방적으로 밀어주는 방식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박정희는 자유주의라고 불리는 정치 사상을 싫어했다. 4.19 이후의 술자리에서 박정희는 2.26 사건의 국수주의적 기백을 극찬하며 자유주의를 부정적으로 평하는 말을 남겼다. 이러한 사상은 초기 박정희 시절의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도 잘 나타나는데 그가 성공적인 혁명 사례로 든 것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 케말 아타튀르크의 터키 혁명, 쑨원의 신해혁명, 나세르의 이집트 혁명이었는데 이 사건들은 모두 자유주의 또는 서방의 위협에 맞서 벌어졌던 사건들이었다.

그런데도 우파들 중에 아직도 자유주의가 좋다면서 5.16이 마치 위대한 자유주의 혁명이 되는 냥 구는 사람들이 있다. 아예 무슨 유튜버는 행사까지 한다더만. 박정희가 살아 돌아온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궁금하다. 박정희는 이념이라도 확고했다. 5.16은 명예 혁명이나 미국 독립전쟁보다는 2.26 사건이나 신해혁명에 가까웠다. 근데 박정희를 자유주의 진영의 리더라고 칭송하는 지칼 같은 애들이 2.26, 신해혁명 이런 게 뭔지는 알까?

독재자라는 타이틀, 이건 그래도 유신하기 전에 자발적으로 내려왔으면 덜했을 거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고 10.26에 가게 된 것이다. 임기 말에는 중화학공업에 너무 과도하게 집중한 나머지 경직성이 강화되고 오일 쇼크로 인한 인플레이션이 온 나머지 경제 신화도 한계에 왔다. 그래도 변화를 시도하긴 했다. 첫번째가 김종인을 이용해 국민건강보험제도와 국민연금 제도를 실시해 그래도 아예 복지제도가 0에 가깝던 한국에서 토대를 마련해주긴 했다. 물론 그래도 아주 부족한 것도 맞고 이후 보수 대통령들은 노태우의 의료보험제도 확대 및 최저임금제 강화, 이명박의 대학 등록금 인하, 박근혜의 문화의 날 지정 정도만 제외하면 크게 의미 있는 복지 정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중화학공업에는 미련을 못버렸으며 다른 산업에 갈 예산까지 거기다가 끌어다 쓰는 걸 유지했으며 오일 쇼크로 인한 인플레이션은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전태일 사후에도 제대로 된 노동대책이 나오지 못했고 이는 부마항쟁의 발단이 되는 YH 사건으로 이어진다. 말년의 박정희는 김종필과는 거리를 두면서 차지철과는 가까이 하는 판단력이 흐려진 모습들을 보였다. 그래서 부마항쟁 때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다. 부산은 광주보다도 큰 도시고 이미 정권의 기반 자체가 상당히 흔들리는 상황이었기에 김재규가 쏘지 않았더라도 박정희는 좋게 끝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박정희 시대를 진정으로 제대로 평가하고 있다면 군사정권 시대와 민주화 시대 모두를 극복할 패러다임을 제시해야 한다. 박정희의 산업화 유산이나 김대중의 민주화 유산이나 오늘날 대한민국의 시스템을 만들었지만 그 시스템은 낡았다. 되돌아갈 수 없다. 두 개 모두 공을 계승하면서 과를 되풀이하지 않게 바꿔나가야 한다. 그것이 어쩌면 박정희를 진정으로 추모하는 동시에 더 좋은 모습으로 가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박정희로부터 얼마나 자유롭고 얼마나 붙들려있는가?

매거진의 이전글 1차세계대전에서 러시아가 패한 게 배후중상 탓?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