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의 본망"은 요코야리 멩고라는 우리에게는 <최애의 아이>의 그림 작가로 유명한 사람이 제작한 만화이다. 원래 동인지 작가였던 멩고의 만화 특성상 당연히 수위가 높으며 대놓고 중요 부위를 노출을 하진 않지만 대략적으로 육체적 관계를 가지고 있음과 가진 후의 장면들을 보여주고 있기에 그냥 서비스씬만 보내고 마는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진지하게 성관계를 다루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19금 딱지가 붙은 것은 덤이고특히 고등학생이 주 소재라는 점, 사제 간의 연애나 동성애에 관한 문제까지 다룬다는 점에서 훨씬 더 충격을 주고 있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난 쓰레기의 본망이 다른 여타 서비스씬에만 집중한 작품들과는 본질이 다른, 보다 심도 깊은 작품이라 생각한다. 왜냐면 쓰레기의 본망은 이기심, 대역, 그리고 사랑한다는 변명 같은 연애에 있어서의 이면을 제대로 고찰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우선 이 만화는 여타 애니와는 달리 일본 문학 특유의 감성을 살렸다. 섬세하고 부드러우면서, 자기가학적인 느낌을 담았고 꽃내음이 풍겨져오는 느낌까지 줬다. 성관계를 가지는 장면은 단순히 본능적인 욕구를 해결하는 듯한 뽕빨물적 묘사보다는 문학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애니나 만화치고는 상당히 미학적으로 묘사하려고 노력한 티가 보였다. 이게 지나치면 가식으로 보이겠지만 그러한 가식보다는 솔직함이 묻어나온 셈이다.
이 작품의 연애 관계는 말 그대로 막장 드라마와 같다. 여주인공 하나비는 같은 동네에서 남매처럼 자랐던 카나이 선생을 사랑하고 무기는 아카네 선생을 좋아한다. 그리고 카나이 선생은 아카네 선생을 좋아하고 둘은 잘 이어지는 듯 해보인다. 또 하나비가 "엣짱"이라는 친근한 호칭으로 부르는 사나에는 하나비를 사랑하는 레즈비언이며 노리코는 자신이 평생을 왕자님으로서 동경해온 무기를 짝사랑한다. 이렇듯 쓰레기의 본망 속 연애관계는 엇갈릴 대로 엇갈려 있고주인공 하나비와 무기는 각자 짝사랑하는 상대에 대한 마음만 품고 제대로 고백하거나 하지 못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하나비는 무기와 서로의 목표를 향해 나간다는 기치 아래 이루기 전까지 서로의 빈 자리를 채워주기 위해 위장 커플이 된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서로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두 주인공이 각자의 대리만족을 위해 사귀는 척을 한 것이다. 하다보니 육체적으로 관계를 맺는 수준까지 하나비와 무기는 서로 각각 카나이 선생과 아카네 선생을 떠올리며 성적 흥분을 느끼는 뭐 정상적인 성욕을 가진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관계다. 같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커플이 되었건만 결국은 서로의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한 "공의존" 관계가 되어버린 것이고그렇게 둘은 정상이 아닌 "쓰레기로서의 본능"이 깨어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하나비와 무기는 쓰레기다운 행세를 한다. 하나비는 자신이 짝사랑하는 상대인 카나이 선생이 좋아하는 사람인 아카네 선생처럼 되겠다는 이유로 마음도 없으면서 마음을 주는 척하여 남자들을 꼬드겨 이용하려는 소위 "여왕벌"로서의 모습을 점점 보이게 된다. 또한 자신에게 연심이 있는 동성 친구인 사나에를 무기와는 또 다른 성격의 대리만족, 현실도피용으로 이용하려는 듯한 행보도 서슴치 않았고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은근 아카네 못지 않게 하나비도 타인과의 연애관계에서 우위에 서고 싶어하는 심보가 강함이 잘 드러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무기도 쓰레기스러운 것은 마찬가지다. 마음에도 없고 그저 자신을 일방적으로 왕자님으로만 바라보는 소꿉친구 노리코의 마음을 이용하여 관계를 맺는 용으로 이용하려는 듯한 모습도 보였으며 단지 외롭다는 이유로 중학교 시절 파트너였던 사람에게 연락해 일회성 성욕 해소로 사용하는 등 그 역시 이 작품에서 쓰레기라는 의미에 꽤 크게 부합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작품의 두 주인공의 성격은 정상적인 사고방식 선에서는 이해가 불가능하며 이 정도면 더할 나위 없는 총체적 난국 수준의 쓰레기들끼리의 대리만족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하나비와 무기의 짝사랑은 다르다. 하나비는 비교적 순수한 마음에서 같은 동네에서 남매처럼 자랐었던 카나이 선생을 짝사랑하는 것이고 무기는 아카네 선생이 순수하지 않다는 사실을 안다. 아카네 선생은 작중에서 나오다 싶이 여러 남자들을 사귀며 그 남자들에게 인정받는 것을 통해 욕구를 충족하는 사람이다. 한마디로 사랑을 해야 만족하는 부류가 아니라 그 반대로 사랑을 받아야 만족감을 느끼는 부류라는 셈. 어찌보면 이 작품의 제목인 "쓰레기의 본망"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 아닐까 싶으며사실 비교적 순수했던 연심을 가진 하나비가 주변 환경 탓에 왜곡되어 비뚤어지는 방향으로 가게 된 것 또한 이 아카네 선생을 향한 질투에서 비롯되었다.
그런 아카네 선생을 무기는 왜 사랑하는 것일까? 단순히 쓰레기임을 알지만 그래도 좋다는 감정? 사실 이 작품을 본 사람 대부분은 이리 생각하겠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무기는 그러한 아카네 선생을 남자 없이 못사는 가련한 인간이라는 점과 본능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성 덕분에 좋아하는 것이다. 얼핏 보면 무기도 제정신이 아닌 인간 같아 보이는데(솔직히 맞다...) 그럼에도 그는 남들이라면 누구나 싫어할 면모인 솔직하게 성욕을 드러내고 욕구 충족을 하기 위해 포장하지 않고 대놓고 악한 면모를 보이는 게 좋다는 이기심이 먼저인 것이다. 그럼에도 무기와 하나비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의 쓰레기 같은 행동의 기반에는 바로 "공허함"과 "외로움"이 기반되어 있고 특히 하나비의 경우 독백에서의 절절한 심정은 과연 그녀를 무조건 악하다고만 비난할 수 있을지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해준다.
다른 인물들도 포장하지만 결국 그들도 각자의 이기심을 사랑이라 지칭한다. 사나에는 본인이 레즈비언임에도 자신을 사랑하는 아츠야의 연심을 이용하는 모순되는 행보를 보이고 노리코는 무기를 짝사랑하지만 마지막에 드러나는 바로는 그녀의 사랑은 진실된 것이 아닌 그저 무기를 자신을 구원해줄 왕자님으로써 투영하여 바라보며 자기 좋을대로 아전인수식으로 멋대로 해석한 자기만족일 뿐이었다. 아카네 선생은 무기 얘기를 하면서 말했지만 그녀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그들이 자기를 사랑해주기만 바라는 솔직한 이기주의자로써 이 작품의 주제의식을 나타낸다. 결론적으로 이 작품에서 이어지는 커플은 결혼에 성공한 카나이 선생과 아카네 선생 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카네 선생은 결혼하면서까지 카나이 선생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저 결혼하면 무언가 재미가 있을 것 같아서 카나이와 결혼한 셈.
그러나 카나이 선생은 아카네 선생과는 달리 비교적 이타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관점은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어찌보면 남한테 사랑받길 원하는 인정 욕구를 드러내는 아카네 선생과는 솔직함이라는 측면에서는 닮아있다. 그리고 여기서 아카네 선생은 서서히 그에게 감화되기 시작했고 진실한 사랑을 깨달아 간다. 마지막에 아카네는 끝내 단발로 머리를 자르고 카나이 선생의 품에 안겨 "나는 무상의 사랑에 휘감겨 있다" 라는 독백을 하며 마무리한다. 이런 걸 보면 아카네 선생이 사실 내면 깊은 곳에서는 원하던 것은 남이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아카네 선생의 행보는 전형적인 애정결핍증을 가진 사람으로써의 모습인데 때마침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모든 것을 헌신할 정도로 쏟아부을 수 있는 남자, 즉 카나이 선생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진실한 사랑을 깨닫지 못했던 아카네 선생은 카나이 선생을 통해 사랑의 본래 의미를 깨닫고 당장은 아니지만 점차적으로 변해갈 것을 암시하는 열린 결말로 끝낸 것이다.
독자들이 꼽기에 가장 비참한 결말을 맞은 것은 하나비일 것이다. 1차로 카나이에게, 2차로 무기에, 3차로 사나에에게까지 실연을 당해 모든 것을 잃었다. 솔직하게 욕구 충족을 하던 아카네 선생과는 달리 하나비는 자신의 이기심이 그녀 못지 않다는 사실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고 그 이기심을 사랑이라는 형태로 포장했지만 결과는 비참했다. 애초에 이 작품이 내세우는 주제 의식이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솔직함"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가식적인 하나비가 실패하는 건 당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하나비는 3연속 실연을 겪으며 한 단계 성장을 하기에 이른다. 보다 솔직한 사람이 되어 당당하게 돌아왔고 마지막에서 다시 무기를 만나 새롭게 시작하는 걸 암시하는 열린 결말로 끝난다. 아카네 선생과 하나비는 둘다 극단적인 이기심을 가진 존재들이었지만 전자는 성공적으로 커플이 이어짐을 통해 진실한 사랑을 깨달아갔고 후자는 3연속으로 실연을 경험하고 밑바닥까지 추락함으로써 남에게로의 의존증과 가식적인 면모를 밑에서 청산한, 주제의식을 상징하는 두 인물이 다른 방식으로 솔직함에 맞춰 변화하기에 이른 것이다.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얼마나 솔직하며, 이기심을 가지고 있는가? 물론 사회에는 아카네 선생과 하나비 같이 극단적으로 이기심을 보이는 사람은 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누구나 이기심과 자기 만족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어느 누군가를 또 괴롭게 만드는 일이 없다고 할 수 있는가? 사회는 가식적이며 위선적일 수 밖에 없는 동네지만 거기서 우리가 또 다른 인간과 공의존을 형성하고 자신의 이기심을 순수한 사랑이라고 부정하는 건 결국 안하느니 만도 못한 것이다. 솔직하지 않은 상태를 벗어나려면 하나비처럼 밑바닥을 맛보게 해야 한다는 말은 너무 잔인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가식이 사회에서 아예 필요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그러나 하나비가 가식과 포장을 멈춘 후에 더욱 편안해지고 꿈도 찾은 것처럼 지나치게 가식적으로 이기심을 포장하는 건 문제다. 아카네 선생처럼 위악을 하라는게 아니라 하나비가 솔직함을 깨닫고 재회한 무기를 정면으로 마주한 결말처럼 조금만이라도 솔직해지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