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중학교 동창인 친구랑 영화 <오펜하이머>를 봤다. 총 3시간이나 되는 러닝타임이었기에 솔직히 보다가 화장실도 한번 정도는 갔다왔었고 또 영화 구조 자체가 놀란 감독 작품치고 꽤 단순해서 조금 실망한 감도 있었다. 내용 중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천재 물리학자인 주인공 오펜하이머가 여자랑 섹스(...)하면서 핵무기를 개발하고 또 높은 아저씨들끼리 담배 물고 대화하는 장면들이다. 거기에 더해 핵무기 개발 당시는 과거 시점으로 현 시점인 오펜하이머에 대한 청문회 상황과 왔다갔다하면서 장면을 전환하기에 솔직히 어지롭고 정신 사나운 부분도 있었다. 그래도 크게 고평가를 할 부분이라면 맨해튼 계획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가 오펜하이머라는 한 인물의 결정으로 완성되는 과정을 통해 그 서사 속 진행 과정을 상세하게 묘사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나의 단편적인 의견이었고 실제로 영화 <오펜하이머>가 품고 있는 있는 가장 중요한 주제의식은 바로 시대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걸 알기 위해서 영화라는 도구가 선전 방식 혹은 그 시대의 요구를 반영해 관철시키는 방식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과거 나치 독일은 괴벨스가 영화의 중요성에 크게 주목했었는데 그리하여 영화를 통해 국민들을 자신의 지지세력으로 끌어오고자 했었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만 해도 뉴스 다큐가 있으며 이건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뉴스릴로부터 전쟁과 그 원인과 영향에 대한 최고의 통찰력을 끌어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미국 역시 1차세계대전과 2차세계대전에서 국민들의 동조 여론을 이끌어내기 위해 영화라는 도구를 사용했으며 이는 전선에서 싸우는 연합군의 대의를 각인 시켜주기 위함이었다.
1990년대 이후로는 <붉은 10월>, <패트리어트 게임>, <에너미 라인스> 같은 영화들 뿐만 아니라 <메달 오브 아너>, <콜 오브 듀티>, <레인보우 식스> 같은 게임들도 다 그 시대에 맞춰 선전전의 형식도 알게 모르게 포함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물론 중국의 <특수부대 전랑>이나 과거 일본 제국의 대본영 프로파간다처럼 대놓고 노골적으로 선전하지는 않지만은 그럼에도 시대 정신이나 할리우드 혹은 자국 문화산업에서의 선전 목적 또한 조금이나마 들어가는 경우도 많다. 가령 한국의 경우는 박근혜 정부 시기의 <국제시장>, <인천상륙작전>이라던가 문재인 정부 시기의 <택시 운전사>, <1987>이 그 시대의 정신을 은근 보여주는 사례라 볼 수 있다.
영화 <오펜하이머>도 오늘날의 국제정세랑 상당히 밀접하다. 오늘날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중국과 대만 사이의 양안전쟁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시점인데이 상황에서 미국은 다른 적대국으로부터 핵 위협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핵무기를 사용해 유일하게 대랑살상을 낸 국가는 이때까지 한 나라 밖에 없었는데, 그게 미국이었다. 동시에 핵 미사일로 협박하는 나라의 원조도 미국으로 실제로 그들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린지 약 5~6년 만에 한국전쟁에 개입하는 중공군을 처단할 목적으로 만주에 원자폭탄을 사용할 구상을 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그런 나라가 핵 무기를 두려워 하라고 선전하기 위해 선전전을 하고 있다고 하니 뭔가 앞뒤가 안맞을 수도 있다.
오늘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단순한 우크라이나에 대한 침공이 아니라 나토와 러시아 사이의 "대리전"이다. 게다가 오늘날 미국은 핵 관련 전력을 지속적으로 더 키우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이런 상황 속 할리우드의 반핵 영화가 나오는 것은 미국 정부가 러시아와 중국의 핵 위협을 더욱 강조하려는 분위기와 연관이 있다. 미국 정부가 제작을 지시했다는 따위의 음모론 주장이 아니라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상 시대적인 정신과 선전 도구로써의 성격이, 그것도 전쟁을 다루는 영화라면 더더욱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것 때문이다. 미국의 명분 없는 전쟁을 미화한 <아메리칸 스나이퍼>, <람보>가 그러한 사례의 노골적인 예시이며 게임 <콜 오브 듀티 블랙옵스 2>는 반미주의자 악역 캐릭터 라울 메넨데즈를 이례적으로 멋있게 묘사했지만 정작 앙골라의 전쟁광이자 친미 군벌 지도자 사빔비를 찬양하고 무자헤딘을 호의를 줘도 뜬금 없이 배신하는 쓰레기들로 묘사하는 등 기존 콜옵 시리즈의 제국주의적 서사가 오히려 강화되어 미국을 적대하는 세력들을 전부 미개한 절대악으로 보이게끔 만들고 있다.
그렇기에 <오펜하이머> 같은 반핵 영화가 나오는 것도 얼핏 보기엔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 같은 악행들을 비판하는 듯 해보이고 일리있는 분석이기도 하지만 그 역시 결국 할리우드 당대의 시대적 정신, 그러니까 네오콘-리버럴 세력들이 추구하는 미국 정부의 아젠다를 대중에게 투영하는 흐름과도 아예 무관하진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식으로 영화를 일종의 정치적 선전으로 써먹으면서도 크게 주장의 색깔을 드러내지 않는 할리우드의 제작 방식은 유치뽕짝한 수준인 중국의 <특수부대 전랑>이나 한국의 <인천상륙작전>에 비해 상당히 시너지 효과가 더욱 좋은 편이며 자국 외의 해외에도 상당히 먹히기 좋은 방편이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할리우드가 가장 큰 장점은 대중들이 영화를 어디까지나 영화로 보게 하면서도 내세우고자 한 아젠다를 투영시킬 수 있을 정도의 작품성을 가진 영화를 만들어낼 실력이 있다는 것으로 이는 중국보다도 훨씬 우위에 있다.
오펜하이머 박사는 핵무기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져서 수많은 민간인들이 아무 죄 없이 죽어나간 것을 보며 죄책감을 느끼고 그 때문에 수소폭탄 개발은 결사반대한다. 이와 더불어 맨해튼 계획에 소련 간첩이 정보를 유출했다는 것이 밝혀져 좌익 경력이 있는 오펜하이머 본인을 대상으로 한 청문회까지 벌어졌다. 이렇게 수십만의 목숨을 빼앗은 정책 결정에 관여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낀 그였지만 끝내 공식적으로는 사과하지 않는다. 자신의 손에 피를 묻혔지만 어쨌든 더 큰 피해를 내지 않고 전쟁을 확실하게, 그리고 예정보다 더 빨리 끝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오펜하이머의 이런 모습은 미국 정부가 가진 딜레마와도 연관된다. 미국은 자유민주주의를 명분으로 타국을 침략하고 무고한 사람들에게도 커다란 피해를 입혔고 거기에 딜레마가 생기기도 하여 반전 여론도 일어나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자신들이 한 선택에 대해선 후회하거나 사과하지 않는다. 오펜하이머와 미국이라는 나라, 이 부분이 의도한건지는 모르겠고 제작자만이 알겠지만 오펜하이머라는 인물 자체가 가진 선택과 후회 사이의 딜레마가 미국이라는 나라의 행보를 상징하진 않을까라는게 조심스러운 나의 극히 주관적인 생각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재미를 보장하고 또 생각할 거리를 주는 훌륭한 매체임과 동시에 상영 시기의 시대적인 상황과 정신을 이해하면 더 재밌게 볼 수 있다고 말이다. 특히 맨해튼 프로젝트라는 거대한 계획이 개발되는 핵무기의 위력처럼 통제불능이 되어 파괴적으로 변해가는 걸 보여주기도 하고 선전의 도구로써의 영화가 아닌 순전히 순기능이라는 측면에서만 보자면 기후변화, AI 같은 미래 시대의 의제들의 윤리적인 고민에 대한 성찰을 해볼 계기를 마련할 작품으로서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개인적으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전작인 <인터스텔라>, <덩케르크>에 비하면 조금 아쉬웠지만 그래도 재밌게 봤고 과학 기술에 대한 윤리적인 고민을 한번쯤 해볼 수 있게 해주는 괜찮은 작품이었다고 평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