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5공화국과 관련된 작품은 뭐가 있을까? 대표적으로 5.18로 한정한다면 <택시 운전사>와 <화려한 휴가> 등이 있을 것이고 정권 막바지나 6월 항쟁으로 본다면 <보통 사람>과 <1987>이 대표적인 예시일 것이다. 이들 작품의 공통점은 기본적으로 당시의 독재 정권을 비판한다는 것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으며 그렇기에 당연히 일정부분 정치적 논리가 있다는 비판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러한 작품들은 최소한 역사왜곡은 없이 작중에서 시대적 상황만 자세히 묘사한데다가 그 당시 정권이 부당하게 집권했고 또 부당하게 탄압했던 것 자체는 부정할 사람이 없을 것이니크게 정치적으로 비판받을 요소가 강하진 않다.
한편으로는 5공화국 시대와 연관성이 있는 주제를 택한 작품으로는 <26년>이라는 영화가 있다. 강풀 작가의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데 보면 알겠지만 원작이나 영화나 웬만한 5.18, 6월 항쟁 영화 이상으로 정치성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며 영화의 큰 줄기 자체도 무슨 거대한 서사 이런 거는 없고 그저 악질 독재자였던 전두환을 처단한다, 이게 전부였다. 사적제재를 메인 소재로 삼는 거 자체야 나쁘지 않다. 그런데 <26년>은 유감스럽게도 사적제재를 다루는 작품이면서도 그에 대한 회의감의 문제나 또 다른 시선은 제대로 묘사하지 않은 채 어쨌든 전두환은 나쁜 놈이니까 비합법적으로라도 죽어야 한다는 586 운동권 세대들의 자위용 스토리로 가득찼다.
5.18을 심도 깊게 다룬 <화려한 휴가>가 2007년에 나왔었고 신군부의 입장에서 5공화국을 다룬 드라마 <제5공화국>이 2005년에 나왔던 것을 감안하면 그에 비해 2012년에 나온 <26년>은 오히려 더욱 퇴보한 서사와 스토리를 들고 나왔었던 작품이었던 것이다. 평면적인 선악 구도, 관객들로 하여금 입체적이고 다방면적인 사고로 바라볼 수 없게 만드는 요소, 사적제재라는 범죄를 중점적으로 다루면서 이러한 행위의 옳고 그름을 관객이 아닌 원작자가 가르치려 드는 행위 등등 난 그래서 <26년>이라는 작품을 진보판 <인천상륙작전>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다가 2022년 간만에 5공화국을 소재로 한 신작 영화인 <헌트>가 나왔다. 게다가 이번에는 5.18의 시민군도, 6월 항쟁의 시위대도 아닌 신군부 측에 서있던 세력인 안기부 진영을 다루는 작품이었다. <제5공화국>, <보통 사람> 정도만 제외하면 대체로 당시 정권측 편에 서있던 인물들을 다루는 작품은 잘 없으니 말이다. 여기에다가 반전으로 두 주인공 모두 겉으로 보기에는 안기부의 고위직으로 앉아서 전두환 정권에 충성하며 간첩 "동림"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물로 보이지만 둘 모두 뒤로는 "대한민국 1호 암살 작전"이랑 관련이 깊은 인물이다.
박평호는 우선 남파간첩이다. 그가 파견된 목적은 1호 암살과도 연관이 크며 그 역시 전두환을 암살하고 새로 들어선 정권과 남북대화를 하여 평화를 이뤄내고 통일을 한다는 일종의 비현실적이고 위험한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물론 작중에서 박평호는 후에 1호 암살 작전을 두고 남파공작단과 결별하고 적대하다가 마지막에 가서 변절자로써 최후를 맞이하지만 어쨌든 간 마냥 선한 인물이라고는 볼 수 없는 인물이다. 박평호는 자신의 "동림"이라는 것이 드러난 이후에 비록 신변을 안들키기 위해서 어쩔 수는 없다고 하나 자신이 아끼던 직속 부하인 방주경을 목졸라서 살해했는데 이는 그가 목적을 위해서라면 인간성도 기꺼이 내려놓을 수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라 생각한다.
또 다른 주인공 김정도는 5.18에 계엄군으로 참전했던 이다. 미리 사전에 암살 계획을 알아채고 자신을 막으려 하는 CIA 지부장에게 김정도는 1980년 5월 18일날 시작된 진압군의 발포로 3천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그렇기에 자신은 국민을 학살한 독재자를 대통령으로 인정할 수가 없다고 하는데 그렇게 하여 때를 기다리며 전두환 암살을 준비했었던 것이었다. 어찌보면 이 작품에서 가장 민주주의에 부합하는 이상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긴 하나 정작 김정도 역시 군사 정권의 부역자 중 하나였으며 테러 직후 동료들을 거리낌 없이 사살하는 냉혹함을 보여줬다. 무엇보다 김정도는 자신의 목표 달성을 위해 북한의 테러 계획까지 기꺼이 활용하기에 이르는데 이걸 보면 박평호 그 이상으로 상당히 위험한 사고방식을 가짐과 동시에 이상만 앞서는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이는 박평호와 김정도 모두 자신들이 피해를 입으며 살아왔었던 분단 체제의 사슬을 타파하려던 일종의 혁명가 기질이 있는 사람들이었음에도 결국 그 체제 안에 갇혀서 또 다른 가해자가 되었음을 알려준다. 따라서 남파간첩이면서 1호 제거 후 평화통일이 가능할 것이라는 망상에 빠져있는 박평호와 민주주의를 열망하며 독재 타도를 지향하지만 동시에 부역자이면서 급진적으로 체제를 부순 후의 대책이라고 할 것도 없는 김정도 모두 작중에서 좋게 그려지지 않는다. 차이점이라면 박평호는 천보산이 1호 제거 후 전면전 개시라는 계획을 세웠다고 말한 것을 두고 암살은 안된다고 마음을 먹게 되었지만 김정도는 이 정보를 알고 있음에도 북한이 항상하는 화법으로만 생각하며 끝까지 밀어붙였다는 것이다. 또 아이러니한 부분이라면 김정도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찾은 사람이 놓친 암살 대상인 전두환도 아니고 바로 박평호였다는 것인데 둘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동시에 마지막에는 이상이 엇갈린 것을 안타까워 했음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박평호는 최후반부에 가서 총에 맞아 죽으며 양딸인 조유정에게 한국 여권을 쥐어주고 새 삶을 살게 해준다. 사실 조유정은 북한에서 박평호에게 붙인 감시역 간첩이었고 박평호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대강 짐작은 하고 있었다. 조유정은 박평호의 딸로 있으면서 북한의 간첩이면서도 박평호를 향해 "독재자보다 독재자의 하수인이 더 나쁘다"고 중의적 의미에서의 일갈을 한다거나 간접적으로 학생 운동을 돕는 등의 행보를 보여왔다. 이것은 그녀가 북한의 간첩이지만 북한 정권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으로 특히 비록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은 못하지만 그들을 빼돌려주는 등의 도움을 주는 것은 자신의 나라에서 할 수 없는 일을 적국의 학생들이 한다는 것에 대한 부러움도 있을 거다.
따라서 박평호는 그런 맥락에서 자신이 죽기 전 조유정에게 북한 정권에서 벗어나 새 삶을 살으라며 한국 여권을 쥐어준 것이며 여기서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자신과 기성세대들은 비록 분단 체제와 이념 경쟁에 사로잡혀 또 다른 비극을 만들어냈지만 그녀와 신세대들은 그걸 넘어 자유롭게 살아가라고 메세지를 전한 것이기도 하다. 박평호는 조유정과 처음 만난 자리에서 나이를 물었는데 단순히 의례상 묻는 것을 넘어 어린 애들까지도 자신들을 포함한 기성세대가 만들어낸 대결 분위기 속에서 희생되며 저렇게 도구로 쓰인다는 사실에 안타까움과 씁쓸함, 동정 등 복잡한 심경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영화 <헌트>의 메세지는 기존 5공을 다룬 미디어 매체 중에서도 상당히 색다르게 접근한다고 보여진다. 10.26과 12.12 때만 해도 군부의 하수인으로써 반대파를 고문하는 걸 주저하지 않았던 김정도가 5.18을 거치며 전두환을 제거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게 된 것은 아마 작중에서 김정도라는 캐릭터를 통해 최대한 정치성을 덜 표출하면서도 5.18을 이용해 5공을 더 강하게 비판하게 하는 것에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특히 첩보물, 정치물로써의 장점을 살펴보자면 전두환 정권기 대공작전이 돈으로 안기부장 자리에 올라간 사람, 작전을 멋대로 바꾼 사람, 엉뚱한데서 "동림"과 "천보산"이라는 북한 간첩을 찾는 모습 등 당대 정보기관의 문제점을 제대로 짚으며 더 몰입감을 선사했다.
이런 부분은 5공을 다룬 다른 작품들과도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특히 사적제재를 대놓고 미화하는 운동권 세대의 자위용 영화에 불과한 <26년>에 비하면 <헌트>가 내세우는 주제의식은 보다 발전되어 다양한 관점에서의 국가관과 세계관을 지닌 이들이 서로 충돌하고 대립 구도를 세우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묘미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건 내 생각이긴 하지만 저렇게 민감한 한국 현대사를 다루는 작품들에 있어서 <26년> 같이 명확한 선악 구도를 가지고 정의의 재판을 하는 서사로 진행되기 보단 차라리 <헌트>처럼 다양한 관점에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며 해석의 자유를 관객한테 맡기는 방식이 더 적합하다고 본다.
이 영화를 본 게 아마 작년 말이었을 것이다. 영화관에서 개봉했을 때 놓쳐서 못봤었는지라 넷플릭스에 공개된 당일 재밌게 봤었다. 굳이 깊게 생각 안하고 보더라도 팽팽한 대립구도 속에 전개 또한 몰입감이 좋은 편에 속하니 연출만으로도 좋게 볼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