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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은 자신이고, 남은 남이다"

애니 <청춘 돼지는 외출하는 여동생의 꿈을 꾸지 않는다(극장판)>

by 제이슨

https://youtu.be/bHhPvXuvfPs?si=VzURW7L2mENbzvVL

일전에 <사쿠라장의 애완그녀>라는 작품을 소개한 적이 있었다. 그때 리뷰하면서 내 기억으로는 제목은 꽤나 민망하지만 내용을 보면 낚시용으로 적어놓았던 것을 알 수 있으며 본질은 청춘물의 성격을 띄는 성장 스토리였다고 의외로 고평가했었던 걸로 알고 있다. <사쿠라장의 애완그녀>는 천재와 평범한 이가 한 공간에 살아가며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하고, 때로는 미워할 정도의 질투와 열등감을 느끼며 "노력한다 해도 과연 보상이 따라오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의 해답을 스스로 찾아가는 과정을 다루는 등 라노벨치고는 주제의식이 괜찮았었던 작품이었다.


그런 "사쿠라장"을 쓴 작가가 현재 연재하고 있는 작품이 바로 "청춘 돼지" 시리즈이며 작가 특유의 네이밍 센스답게 상당히 민망하고 쪽팔린 듯한 제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전작 "사쿠라장"이 그랬듯이 "청춘 돼지" 시리즈는 은근히 진지한 주제 의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작중에서 메인 소재인 "사춘기 증후군"이라는 것은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현실에서는 없는 작중에서만의 설정이며 각 등장인물들이 자신에 기반해있던 내면의 트라우마로 인해 자연적으로 발현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사춘기 증후군은 등장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불안 심리가 극에 달한 상황을 가상 설정이라는 방식을 통해 표현한 것이며 주인공 아즈사가와 사쿠타가 주변 등장인물들이 겪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이 본편의 큰 줄기이다.

이번에 리뷰할 극장판 <청춘 돼지는 외출하는 여동생의 꿈을 꾸지 않는다>는 사춘기 증후군의 또 다른 피해자이자 주인공 사쿠타의 여동생 아즈사가와 카에데가 과거의 트라우마와 이로 인한 사춘기 증후군의 증상을 극복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카에데는 중학생 시절 집단괴롭힘을 받은 것이 발단이 되어 등교 거부 생활을 이어가다가 어느날 갑자기 사춘기 증후군이 발병, 정신적 고통에 따른 물리적 상처가 생겨났고 그로 인한 충격으로 기억을 상실하고 인격이 분리되는 해리성 장애를 겪게 된 것이었다. 이후 카에데는 트라우마와 공포에 휩싸여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으며 그렇게 골방지기로 살아가다가 자신을 끝까지 믿어주고 챙겨주는 오빠 사쿠타와 그의 여친 사쿠라지마 마이의 도움으로 마침내 기억을 되찾고 원래 인격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작중 시점은 기억이 돌아온 카에데가 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하며 시작한다. 카에데는 오빠가 다니는 고등학교를 목표로 수험 생활을 하겠다고 하고 사쿠타는 믿어주고 지지한다. 카에데가 등교 거부를 한 세월 동안 진도가 뒤쳐졌던 탓인지 합격 가능성이 낮았음에도 말이다. 결과적으로 카에데는 밤을 세워가며 공부할 정도로 노력했지만 시험 당일 쉬는 시간에 자신이 다녔던 중학교 교복을 입고 있는 여학생을 보고 다시 사춘기 증후군이 발병하여 컨디션이 급격히 악화되어 보건실에 드러눕게 되고 다급히 찾아온 사쿠타에게 자신은 이전 인격으로써의 "카에데"보다 부족하고 열등하다고 자책하며 본심을 털어놓는다.

여기서 흥미로운 부분이 사쿠타가 카에데가 있던 교실로 가서 짐을 정리하다가 이전의 카에데가 썼던 일기장을 읽다가 오빠가 다니는 고등학교에 다니고 싶다는 내용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니까 현재의 카에데는 자기 자신이 인생에 중요한 진로에서 여전히 주체가 되지 못한 것이며 결국 도돌이표로 이전 인격으로써의 카에데라는 이름 뒤에 숨고 싶은 것이다. 그만큼 카에데는 중학교 시절의 집단따돌림 피해자라는 자책감이 마음 속 깊이 자리잡고 있기에 자신이 그렇게 주변 사람들에게 좋게 대접받는 것도 이전 인격이 노력했기 때문이며 본인은 그 시절에 머물러서 한 게 아무것도 없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즉 작중 시점에서 카에데의 상태를 정리하자면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고도 할 수 있겠다. 워낙 기억 공백 기간이 있기도 하고 또 공백 이전의 기억이라고 해봐야 워낙에 안좋은 악몽 뿐이었기에 그 공백 중에 있던 인격 뒤에라도 숨고 싶던 것이다. 또한 오빠가 다니는 고등학교로 가고 싶은 것도 이전 인격의 소망인 탓도 있었지만 다른 의미로 보자면 남들과 다른 삶을 살아갈 자신이 없었던 탓도 있다. 이는 사쿠타가 진짜 다니고 싶다면 응원해주겠지만 무리해서 다닐 필요는 없다고 안심시킬 때 카에데가 했던 말에서 잘 드러나는데 그녀는 남들과 다른 게 부끄럽다는 말을 한다. 카에데는 등교거부라는 생활을 했던 기억이 트라우마가 되었고 이게 남들보다 자신이 못하다는 감정으로 이어져 무조건 남들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카에데의 심정은 나도 100%는 아니지만 약간은 이해할 만한 기억이 있었다. 나 역시 중학교를 그만뒀었던, 어찌보면 흔치 않은 학교 밖 청소년 유형이었고 그 상황에서 남들의 시선 중에는 인생 종쳤다는 식의 반응도 의외로 꽤 있었다. 그때 나도 길을 잘못들어간 것일까라는 생각도 종종 들었으며 자퇴 이후 한동안 방향성의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세월을 보낸 적도 있었다. 그러면서 나도 남들에 맞추고 비슷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고 성격을 바꿔볼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지금이야 체념한건지, 수용한건지는 모르겠는데 나의 기질을 인정하고 살아가고 있지만 그래서 자기 자신을 여전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느냐 하면 솔직히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작중에서의 카에데는 좌절 속에서도 앞으로 나아가는데 성공한다. 주인공이자 오빠 사쿠타가 좌절한 카에데를 달래기 위해 데려간 스위트 불릿이라는 아이돌 그룹의 미니 라이브 공연에서 카에데는 그룹의 리더 우즈키가 자신과 똑같은 등교 거부 경험이 있고 현재는 통신제 고등학교에 다니며 아이돌 활동도 병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공연이 끝난 후 미리 사쿠타의 부탁을 받은 토모에의 주선으로 우즈키와 만나게 되는데 여기서 우즈키는 자신의 어머니가 통신제 고등학교에 진학할 것을 권유하며 했었던 "우즈키의 행복은 남들이 정하는 게 아니라, 우즈키가 정하는 거야"라는 말을 카에데에게 알려준다. 이것이 그날에 있었던 이전 인격이 사라져서 슬프기도 했지만 본래의 카에데가 돌아와서 한편으로는 기뻤다는 사쿠타의 말과 맞물려 모두와 똑같이 살아가기 위해 억지로 굳이 맞출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카에데가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한껏 성장했음을 잘 표현해주는 대목이 비록 인원 미달 탓이긴 하지만 오빠의 고등학교에 합격했다는 통보를 받았음에도 자신은 그걸 포기하고 통신제 고등학교라는 새로운 도전을 해보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분명 사쿠타의 고등학교인 미네가하라 고교는 현립 고등학교이기에 나쁘지 않고 또 본인이 그토록 원하던 남들하고 비슷한 고교 진학 루트인데도 그래도 자기는 자기 길이 있다고 믿으며 통신제 고등학교를 선택했다. 이는 이제 카에데에게는 이전 인격으로써의 카에데나 남들한테 맞추며 사는 인생이 아닌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며 오빠가 전에 말했던 별것 아닌 일로도 행복함을 느끼며 살아가는 삶을 목표로 하게 되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인 것.


이처럼 카에데는 자기는 자기, 남은 남이라는 걸 인정하고 똑같은 길을 가기 보다는 나에게 맞는 길을 골라서 스스로 결정하기에 이르며 오빠에게 의존하던 삶에서 자신이 주체가 되는 삶으로 개척하는데 성공했다. 다만 아까 말했듯이 현실은 그렇게 살기가 쉽지 않고 이건 나도 마찬가지이며, 특히 카에데처럼 극심한 PTSD를 갖고 있는 사람은 더더욱 구석으로 몰리는게 실제 상황의 냉정한 모습이긴 하다. 그래도 카에데가 그랬듯이 그 어려움도 다 지나가는 법이고 이 작품의 주제의식으로 하나를 꼽자면 그 어려움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주체성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것이 비록 대다수의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과제지만 자신을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는 최소한의 조건일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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