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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의 매력

레프 구밀료프 <상상의 왕국을 찾아서>

by 제이슨

문재인이 러시아 국가두마에서 한 연설에 언급한 사람이자 1세대 유라시아주의자 레프 구밀료프가 쓴 <상상의 왕국을 찾아서>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상당히 재밌다. 저자가 스탈린 시절 중앙아 굴락에 수용되어 있는 동안 중앙아시아의 지리와 유목민족의 역사, 문화, 정치, 경제에 대해 공부했고 출소 이후 사적 유물론을 배우는 역사학 대신 지리학 전공해 소련 시대에도 이반 일린 사후 끊겼던 유라시아주의 연구가 이어지게 하는데 역할을 했다.

보통 러시아를 보는 관점은 범슬라브주의 또는 범유럽주의였다. 이 경향은 표트르 대제 이래 러시아가 서구화의 길을 걸으며 더욱 분명해졌다. 그러나 구밀료프는 제정 러시아 시절의 서구 사대주의 경향과 공산주의 소련의 유물론적 모더니즘을 모두 비판하며 러시아의 뿌리를 중앙아시아, 더 나아가 몽골에서 찾고 있다. 그는 타타르의 멍에라고 불리는 몽골 간섭기가 러시아에게 있어서 유럽, 슬라브 국가가 아닌 범아시아적 경향도 같이 띄고 있는 유라시아 국가라는 정체성을 심어줬다고 봤다.

그래서 이 책에서 초반에 다루는 주제는 거란과 여진, 타타르, 몽골이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이 팽창하여 어떻게 중국화를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도 독자적인 정체성을 유지했는지도 잘 나온다. 또한 중앙아시아와 중국에서 투르크인들과 타타르인, 위구르족, 여진족, 거란족, 몽골족까지 이들이 어떻게 유라시아 대륙의 공간에서 유럽과 아시아 문명이 만나는 지점에서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웠는지 잘 나온다.

러시아는 유럽 변방의 슬라브족으로 출발했다. 유럽 중앙에서 동 떨어져 아무것도 없던 그들에게 문명과 문화를 전파해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서양의 가톨릭 교회 문명이 아닌 무식하고 야만적으로 여겨지던 유목민인 몽골족이었다. 훗날 러시아 행정과 군사의 기반이 되는 조직들은 몽골 쪽으로부터 들어온 것이 많으며 역참은 나중에 제국을 형성한 러시아가 방대한 영토를 효율적으로 통치하는 것에 큰 영향을 끼쳤다. 나폴레옹은 "러시아인의 얼굴을 긁어보아라. 그러면 몽골인이 나타날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참 의미심장한 말이다.

구밀료프는 이처럼 대륙의 지정학과 중앙아시아 지역의 중요성, 그리고 러시아가 받은 아시아 문화로부터의 영향을 강조했다. 이러한 공로로 구밀료프는 카자흐스탄에 그의 이름을 딴 대학이 생겼으며 슬라브족(러시아)와 투르크족(튀르키예)의 문명이 만나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해가는데 역할을 하고 있다. 러시아 입장에서도 중앙아시아는 새 문물을 전해준 몽골족, 타타르인들과 관련이 깊은 곳이었고 튀르키예 입장에서는 투르크인들과 위구르족들이 당 제국 붕괴 시즌부터 이 곳으로도 많이 확장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대륙에서도 중앙아시아-북중국 지역의 중요성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우리는 발해 멸망 이후부터 통일신라를 계승한 고려가 민족 유일 국가가 되면서 대륙 확장의 정체성이 좀 옅어진 감도 있지만 그 고려는 거란으로부터, 여진으로부터, 몽골로부터 침입을 받아왔던 나라였다. 즉 그러니 우리와 무관한 역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 지금 중앙아시아 지역은 상당한 블루오션 지역으로써 성장 가치가 있는 지역이기도 하고 중국은 이곳에 진출하여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려 하고 있는 상황이다.

아쉽게도 한국에는 중앙아시아에 대한 연구가 많이 미흡하다. 물론 나 역시 그동안 중앙아시아를 구 소련과 러시아의 일부로만 인식해왔기도 하고 이제서야 중앙아시아에 대한 가치를 느끼는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한국에서 중앙아시아에 대해 검색하면 나오는 책이 죄다 단군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환단고기 서적들일 정도로 빈약하다. 앞으로 동남아와 함께 성장할 가능성이 높은 곳이 중앙아시아인데 참 씁쓸하긴 하다. 굳이 한국과 중앙아를 엮을 거면 차라리 고려인 얘기를 하던가.

구밀료프의 다른 서적, 특히 흉노 제국에 대해 다룬 책은 아직까지 번역이 안되고 있으며 <상상의 왕국을 찾아서>가 유일한 국내 번역서지만 그래도 언젠가 다른 서적도 출판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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