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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Aug 07. 2023

일본 사회당이 무너진 이유

제1야당의 처참한 붕괴와 자민당 독주 체제의 완성

https://youtu.be/FocOaT1bphE?si=Id4HZsNcfI2WDIh5

제1야당이었던 정당이 군소정당이 되는 건 쉽지 않다. 한국 정치사에서 기성 양당 중 하나였던 새누리당이 최순실 게이트로 인한 박근혜 탄핵 사태로 자유한국당으로 당명이 바뀐 이후에도 2020년까지 힘도 못썼지만 지금 현재는 집권 여당이 되어 윤석열 대통령을 배출해냈었기도 했으니 말이다. 심지어 2016년 최순실 게이트에서 정부와 여당 지지율은 한 자릿수로 내려간 적도 있었는데도 그 정당이 2021년도 기점으로 역전한 것이었다. 영국에서도 마가렛 대처 이후 노동당은 노조 파업 실패와 영국병에 대한 책임으로 암흑기를 보냈지만 그래도 토니 블레어라는 총리를 배출해내며 집권에 대한 역량을 보였다.


그런데 유독 재집권에 실패한 것도 모자라 저 밑 땅끝까지 추락하여 지금은 원내에서 쫓겨날까 말까한 제1야당 출신 정당이 있다. 그 주인공은 일본 사회당이라는 정당이다. 심지어 이 정당이 아예 집권을 한 적이 없는 쩌리 정당도 아니었는데다가 여러 호재들도 있었으며 지지 기반도 강력했다. 하지만 일본 사회당은 그 기회를 대차게 말아먹었으며 지금은 사회민주당이라는 군소 정당으로 몰락해 참의원 2석, 중의원 1석이라는 비참한 처지에 있다. 이건 일본 공산당에게도 밀리는 수준인데 한 때 55년 체제 하에 자민당과 함께 주역이었던 일본 사회당은 왜 저 꼬라지가 났을까?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일본 국민들의 보수성은 부차적인 요소고 그에 못지 않게 사회당에게는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다는 것이다. 2차세계대전 패전과 함께 GHQ는 일본 기성 세력들에게 적대적이었다. 물론 사회주의자들에게도 호의적이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치안유지법이나 국체명징운동이 벌어져 좌파는 전부 다 때려잡던 시절에 비하면 많이 양호한 것이었고 GHQ 내부 G2가 공산주의와의 대결을 우선시해 요시다 시게루를 후원한 반면, GS라 불리는 민정국은 가타야마 데쓰 같은 사회주의자 총리 배출을 지지할 정도로 사회개혁에 관심이 많았었다. 적어도 전쟁 이전보다는 확실히 좌파 세력들에게 기회가 찾아왔다는 말.


그리고 이걸 명심하자. 사회당은 결코 국회 내에서도 힘이 없는 세력이 아니었다. 55년 체제 출범 당시에도 자민당이라는 거대 여당이 등장했지만 사회당은 2:1의 의석을 가지고 있었다. 이전에 사회당은 우파 사회당과 좌파 사회당으로 분당된 상태였지만 그래도 중대선거구제 탓에 지역구에 따로 출마해도 당선자가 여럿 나왔었으며 자민당 창당에 맞서 다시 통합했기에 세가 약하다고 볼 수 없었다. 실제로 1958년 중의원 선거에서 166석을 얻었기에 자민당의 개헌선을 단독으로 저지할 실력도 있었고 1960년 도쿄 찌르기 사건으로 사회당 위원장 아사누마 이네지로가 극우 청년에게 암살당한 사건은 호재로 쓴다면 쓸 수 있는 카드였다.


그러나 통합 이후 사회당 우파와 좌파는 파벌 갈등에 휘말렸다. 당시 국회에선 저항 정당, 정책에선 교섭 정당의 노선을 걸었는데 이것의 파토가 조짐이 보인 시점은 1956년 중의원 선거에서 20~30석을 추가 확보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포문을 연 사회당 우파의 니시오 스에히로는 <월간 사회당> 1958년 9월호에서 국철 니가타 투쟁과 같은 급진운동과는 독자적 입장을 가져야 하고 사회당을 일본 최대 노조였던 총평으로부터 자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일본 정권은 기시 노부스케 내각으로 경찰직무법 개정안 제출 등 야당과는 노골적인 적대관계였다. 그랬기에 사회당 좌파 입장에서는 좋게 보일리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안보 투쟁 과정에서 당내 주류인 스즈키파가 공산당과의 공동 투쟁을 주장하고 대부분의 사회당 정치가들이 이 입장을 지지하며 니시오는 배제된다. 결국 그는 탈당하여 40석의 민사당을 결성했고 그 와중에 아사누마 이네지로가 암살당하는 일이 터지며 양 세력은 갈데까지 가게 된다. 거기에 더해 에다 사부로가 자본주의 틀 내에서 실시될 수 있는 변혁을 주장하는 '구조개혁론'을 발표, 이에 사회당 내부에서 구조개혁론은 사민주의적 개량주의라고 크게 비판받는다. 이 와중에도 에다는 소련, 중국식 사회주의를 후진적이라 비판하며 사사키 고조에게 거세게 비판받아 고립된다.


이후로 나온 사회당의 비전이 바로 1964년에 발표된 <일본에서의 사회주의로의 길>, 즉 '길'이라 불리는 행동 지침이다. 물론 당내 좌파 사회주의 협회와 에다의 구조개혁론을 타협하여 내놓았기에 당장의 폭력혁명론은 부정하나 1966년 수정을 거치며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일종의 계급 지배이며 혁명의 합헌적 이행 표현이 삭제되었다. 요컨대 평화혁명은 현행 헌법의 틀 안에서 시행되는게 아니라 헌법의 틀을 뛰어넘는 계급 지배에 기반해 신속하게 이행하는 레닌주의적 방식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사사키 고조와 사회주의 협회는 <길>을 중심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따라 호헌 평화주의를 원칙으로 하는 반체제 저항 정당을 표방해갔다. 이는 교조적인 마르크스주의 정당이라는 것으로 이게 그 이념으로서 복지 국가와 사민주의를 부정한다는 말이다.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이행이라는 표현 자체가 반대파(지배계급)을 철저히 억눌러서 저항 의지를 밟아버린 후에 자연스럽게 평화 혁명을 이룬다는 것인데 대놓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주장하지 않지만 계급 지배 노선을 분명 주장한다.


즉 <길>은 교조적 마르크스주의를 그대로 따르는 정당이라고 확인시킨 셈이다. <길>에서는 복지 국가를 향해 사회주의 체제와 경쟁에서 밀리는 자본주의가 궁여지책으로 혁명을 분쇄하기 위한 안전장치로 사회보장, 부분적 소득분배 개선 등의 당근책을 던져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지지를 유지하려는 수단으로 보고 있다. 사회당은 분명 공약에서는 복지 정책을 내세웠지만 <길>이 실질적인 행동 강령인 이상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념 정당으로써 사민주의자들 같은 자본주의와 타협한 이들이 주장하는게 복지국가라서 따라서 그 이유로 부정한다는 것이다.

이게 진짜 심각한 문제인 것은 사회당은 의회 정당이라는 것에 있다. 사회당이 <길>을 바탕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기대를 못버리고 있던 시절에 일본은 이케다 하야토 총리의 주도 하에 소득배증계획을 실시했고 경무장, 경제우선 논리에 따라 가파른 성장세를 기록하고 있었다. 자민당은 "경제"에 중점을 두고 유권자들을 설득하고 있으며 실제로 성과도 내고 있던 타이밍이라 사회당이 주장하는 사회주의 혁명에 공감이 갈 리가 없었다. 더욱이 사회당은 자신들이 하겠다는 사회주의 혁명 이후 일본에 어떠한 청사진을 그려나갈지 구체적으로 유권자들에게 설명한 적이 없었다.


유럽에서 좌파 정당이 수권 정당이 된 것은 어느정도 현실과 타협했기 때문인 것도 있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베른슈타인이 수정주의적 마르크스주의를 주장한 걸 바탕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와는 차별화되는 사민주의를 구체화하였고 1951년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통해 체제 하의 사회주의를 내세워 지금까지도 정치를 주도하는 한 축으로 남았다. 영국 노동당의 전후 총리 클레멘트 애틀리 역시 현실적으로 힘든 혁명론을 주장하는 당내 공산주의자들을 쫓아낸 후에 베버리지 보고서를 바탕으로 한 복지국가를 주장해서 처칠을 총선에 이겨 집권할 수가 있었다.


일본 사회당이 저렇게 현실적으로 혁명으로 자민당을 이기는게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저항 정당을 고집한 것은 안보투쟁 때문이다. 안보투쟁에서 사회당은 기시 노부스케가 퇴진한 걸 두고 이제 조금만 더 가열차게 투쟁하면 자민당이 무너질 거라는 헛된 희망을 품게 되었다.  그래서 사회당이 주장한 건 반미 호헌 정당이었지만 정작 이미 1970년대로 넘어가면 대부분의 일본인들에게는 안보투쟁이 잊혀진 문제가 되버린다. 복지 국가를 부정하는 사회당에게 있어서 그들의 아젠다는 반미 하나였고 딱히 다른 비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냉전 중이었는데 노골적으로 소련, 중국, 북한을 찬양한 건 덤이고.


한편 재미난 사실은 사회당에서 갈라져나온 민사당은 사회당과는 정 반대의 성향을 보였다는 것이다. 민사당은 사회당의 친북, 친소적 경향에 반발해 나온 만큼 국방정책이나 외교관은 자민당 내 주류 세력인 보수 본류보다도 더 우파적이었으며 가히 전전 시대 사회대중당 내 천황제 사회주의자들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특히나 집단적 자위권을 이때부터 공론화시키려 했으며 신군부에 붙잡힌 김대중을 석방시키려고 노력하는 일본 정부를 비난했다. 베트남 전 당시에는 미군의 개입을 환영한다는 뜻을 밝혔다. 사회당이 중국의 문화대혁명과 킬링필드로 대표되는 캄포디아의 폴 포트 정권을 지지하는 극좌 꼴통이어서 문제였다면 얘네는 피노체트나 전두환 같은 학살자를 지지하는 극우 꼴통이니 극과 극은 통하는 셈이다.


다시 사회당 대외관 얘기를 하자면 일본에서 소련은 북방영토, 주일미군 문제로 안보적으로 심하게 대립 중이니 말할 것도 없고 북한도 일본에 있어서 상당히 골칫거리였다. 일본인 납북자가 주기적으로 발생한데다가 조총련이 북한의 외화벌이 자금줄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사회당은 북한에 주기적으로 방북 사절단을 파견하였고 훗날 위원장이 되는 도이 다카코는 납북 범죄자 석방을 한국 정부에 요구하는 시위를 하기도 했다. 문제는 여기서 청원이 먹혀들어 일본인들을 대거 납북시킨 흉악범 중 일부가 석방, 북한으로 송환되어버리는 바람에 납북 피해자 가족들이 분노하였고 이게 나중에 발굴되어 도이 다카코의 이미지를 박살냈다. 오죽하면 사회당의 친북 성향은 같은 좌파 정당인 일본 공산당이나 트로츠키주의 반(半) 테러 조직인 중핵파마저도 절레절레할 정도였다.

그리고 사회당이 가만히 입으로만 털어대는 정당이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닌게 얘네는 1960~70년대 일본 운동권의 폭력 사태에 연루된 사건이 엄청 많다. 애초에 사회당은 호헌 평화 정당을 자처했지만 일본 군부 시절로부터 자유롭진 않다. 도쿄 찌르기 사건에서 극우 청년에게 암살당한 아사누마 이네지로는 일본 군부의 어용기관인 대정익찬회에 합류한데다가 일제의 식민통치를 옹호했었다. 실제로도 사회당은 전후체제 하에 베평련 등지에서 일본의 반미우익들과는 줄곧 연대를 해왔었다.


당장 중핵파, 적군파 등과 함께 일본의 극좌 운동을 주도한 사청동(일본사회주의청년동맹)의 뿌리부터가 일본 사회당 청년조직이었고 사회당은 여기에서 선을 명확하게 긋지 않았었다. 사청동이라는 파벌은 중핵파 같은 다른 성향의 좌파 조직들과 유혈이 낭자하는 난투극들을 벌이고 다녔으며 이 중 혁명적노동자협회는 지금까지도 살아남아 일본 우익들의 근거지 같은 곳에 간혹 가다가 방화를 저지르며 활동하고 있다. 당연하게도 이 단체들의 기원은 일본 사회당이다.


노조의 문제도 사회당의 몰락에 일조했다. 당시 일본의 노조는 크게 총평과 전노로 나뉘어져 있었다. 총평은 저임금 체제의 고착화는 물론 일체의 정치적 억압과 재군비를 단결투쟁으로 분쇄시킬 것을 목표로 삼는 조직으로 일본 사회당 측과 협력 관계가 깊었다. 반면 전노는 총평이 정치투쟁을 하는 것에 반발해 탄생한 조직이었고 이들은 노사협조에 따른 생산성 향상을 지향했다. 총평은 전노의 생산성 운동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며 지배계급의 노동자 계급 의식 와해 및 노조 어용화 공작이라고 비판했다.

특히 총평은 이후로도 계급적 관점에서 기업 횡단적 산별 조직을 강화하려는 움직을 보여 경단력이 기업에 묶어들여 시도를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 와중에 닛산은 전노를 중심으로 한 노사협조로 자본금이 1953년 14억 엔에서 1956년 21억 엔으로 급증했고 순이익은 1년 만에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 이어서 총평의 산별화 전략을 따르던 민간 노조들이 1960년대 초에 차례로 무너졌고 탄광의 경우 탄노가 총평의 주력부대로써 직장 투쟁에서 성과를 냈지만 결과적으로 총평은 산별 조직을 강화할 돌파구를 찾는 전략이 실패하고 임금 인상 투쟁에만 국한되었다.


더욱이 1973년 석유파동을 계기로 민간 노조들이 경영합리화에 적극적으로 협력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파업 중심의 투쟁을, 그것도 석유파동 상황에서 이어가던 총펑의 계급주의 노선은 고립될 수 밖에 없었다. 총평은 마루세 반대 투쟁의 승리에 도취되어 철저하게 사회당 좌파인 사회주의 협회와 연계, 국철노조를 중심으로 민간 노조 주도의 노동 전선 통일을 거부하며 계급투쟁 노선을 견지했다. 이미 니기타 투쟁 때부터 그들은 국철 당국의 징계로 니가타 투쟁이 벌어지자 공권력 투입이 생길 정도로 강경하게 싸웠는데 시민들은 이에 동의해주기는 커녕 화물 수송 정체에 분노한 농민들이 오히려 국철노조 본부에 습격하는 등 여론을 읽을 능력이 부족했다.


결국 교조화된 국철노조는 끝까지 계급주의를 고수하다가 마루세 반대 투쟁에 동참한 언론들의 비판까지 받게 된다. 심지어는 그 총평마저도 1975년 '파업권의 파업'에서 사실상 실패한 후 유연화되어 민간노조가 주도하는 노동 전선 통일에 순응했는데 말이다. 1985년 12월, 나카소네 총리가 국철의 분할 및 민영화를 추진하는게 최종 국면을 맞이, 국철노조는 약소 노조로 전락해버렸다. 이 시기 이후부터 노조들은 사회당을 통해 정치적 의견을 내기 보단 민간 노조끼리 공동 전선을 구축해 자민당 지도부와 교섭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1960년대 직업투쟁에 계급투쟁을 엮던 미이케 투쟁에서 총평은 커다란 타격을 입었고 현장 관리자의 작업 지시시를 무시하고 생산제한을 거침없이 하기도 했는데 여기서 총평이 패한 건 에다가 사회당 내에서 구조개혁론을 주장하는 일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총평 내에서도 사회주의 협회가 꽉 잡고 있는 국철노조 정도를 제외하면 사회당을 지지하지 않는 조합원들도 꽤 많았으며 총평 조합원들의 명분 없는 파업에 반감을 품는 일본인들도 많았다. 앞서 말한 니가타 투쟁 당시 화물 수성 정체에 혁명의 기반이 될 농민 계급 사람들이 분노를 느꼈던 것도 그 예시 중 하나일 것이다.

사진 출처: http://klsi.org/bbs/board.php?bo_table=B07&wr_id=837

그리고 과연 총평의 모든 조합원들이 사회당에 지지를 보냈는가, 의 문제인데 공식적인 협력과는 별개로 1976년 조사에서 조합원들의 사회당 지지는 42%로 무당층의 45.6%보다 낮은 수치였다. 특히 민간노조 조합원들의 사회당 지지율은 29% 밖에 되지 않는 점을 감안할 때 실질적으로 노조에서 친 사회당 여론을 주도하는 계층은 공공노조 쪽일 확률이 크다. 전노는 오히려 민사당과의 유착이 심한 사이였고 이들은 기업이 성장해야 노동자의 권리 증진으로 이어진다는 원리를 부정하지 않았기에 총평 위주의 투쟁에 미온적이었다. 그나마 중선거구제 덕분에 제1야당 자리를 몇십년 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인데 저때부터 당내 기반이 노조의 분열과 총평 조합원들의 이탈 속에 갉아먹히고 있었다.


그리고 총평의 생각과는 달리 자민당 체제와 기업들이 당근책을 아예 안 던진 건 아니다. 55년 체제 수립 후 첫 노동대신인 구라이시 타다오는 노조의 파업에 강경하게 대처하는 한편으로는 계급 교차 연합을 추진한다는 목표 아래 노동정책의 방향성을 완전고용 실현, 근로조건 향상, 사회보장 확충으로 잡았다. 1957년 국철 니가타 투쟁에는 공권력으로 진압했지만 한편으로는 총평과 전노의 최저임금 의견 차이를 이간질할 목적으로 전노의 의견에 맞춰 정부안을 마련, 노사협조라는 교묘한 슬로건을 앞세우게 되었다.


특히 1959년 4월 국민연금법이 제정되었고 공적 연금을 바탕으로 시장 지위의 격차를 반영한 사회보험 모델을 차용했다. 여기에는 베버리지 보고서와 같은 주변 노동력에 대한 최저한의 일률 급부를 갖춘 시스템이 있었다. 1958년에는 국민건강보험법이 실시되었고 일본 정부는 또 다른 야심찬 당근책을 준비한다. 바로 기업 복지의 일환으로써의 주택 관련 비용 문제였는데 실제로 1953년부터 <산업 노동자 주택자금 융자법>이 실시되어 주택 건설 지원을 위한 대출 조건을 정비, 결과적으로 1955~65년 사이 30~40%의 특별 분양 주택이 마련 및 사내 융자, 적립 제도가 보급되었다. 이외에도 자민당 체제 하에서 노인의료 무료화 정책, 의료보험의 피부양자 급부 인상, 후생연금 급부액의 대폭적인 증가, 국민연금에 물가연동제의 도입, 고용보험제도 도입 등이 이루어졌는데 이렇게 하여 동우회, 생산성본부, 일경련 주도로 완성된 노사협조 노선이라는 당근책은 1960년대에 60%에 가까웠던 사회당에 대한 노동자들의 지지를 1970년대에 30% 후반대까지 떨어지게 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어차피 자민당에게 농민과 자영업자의 표는 워낙 부화뇌동일 정도로 확고하였는지라 제1야당인 사회당을 흔들기 위해선 그들의 지지 기반인 노동자 계급을 공략할 필요가 있었다. 자민당의 목적은 노동진영을 자민당, 관료, 재계의 카르텔이 만든 정치체제에 포섭하여 그들을 기업 안에다가 묶어두는 것이었다. 그 목적은 성공을 거두었다. 1950년대 산업노동자들에게 30%대의 지지 밖에 얻지 못했었던 자민당은 1980년에 이르어 40%를 확보하게 되었고 딱 그 시점에서 노동자의 사회당 지지율은 26%에 그쳤다. 이것이 자민당의 포괄정당화 전략에 사회당이 말려들게 된 배경이고 결국 이게 어차피 노사협조해봤자 어용단체 말고 뭐가 되겠냐는 비관적인 관점에서 사회당이 저항 정당에 미련을 못버린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단순히 사회당의 좌경화만 그들의 실패 원인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사회당이 1960~70년대 동안 집권을 하지 못한 것이 체제 저항 정당임을 고집했던 전술 때문이라는 건 분명 부정 못할 사실이지만 진짜로 사회당이 제1야당은 커녕 원내에 의석이 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군소 정당으로 전락한 것은 극좌 노선을 걷던 시기가 아니라 이시바시 위원장이 <길>을 폐지하고 신선언을 채택하여 사민주의를 지향하는 현실 정당화를 추진한 이후였다. 그게 현실적인 판단인게 맞음에도 사회당이 저 꼴난 것의 가장 큰 원인은 신선언 이후의 시대에 있다.


사회당은 1993년 드디어 집권에 성공한다 단독으로 총리를 배출한 게 아니라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가 주도하는 비 자민 연립 정권에 참여한 것이다. 이때로 가면 사회당은 많이 온건화되어 저항 정당보단 현실 정당에 가까운 노선이었다. 근데 여기서 사회당은 일본신당 소속 총리인 호소카와 모리히로에 지나치게 날을 세운다. 당연히 안 그래도 자민당 뺀 정당끼리 모여 만든 불안정한 내각을 사회당이 흔든다는 비판이 나왔고 사실상 반 자민당을 기치로 유지해온 정당이었건만 이 일 때문에 자민당을 싫어하는 유권자에게 더 욕을 먹고 외면받게 생겼다.


이후 여야 초당 내각의 총리로 사회당 소속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총리가 되었기에 드디어 가타야마 데쓰 이후 몇 십년 만에 사회당은 총리를 배출한 셈이었다. 그러나 호소카와 내각 당시 하는 일마다 내부총질 했으면서 자신들은 자민당과 손잡고 연정을 출범하고, 또 그것도 모자라 자민당이 요구하는 것들을 무조건 수용해준다며 진보층에게도 이중적이라 비난받았다. 게다가 사회당은 이때까지 자민당 반대 하나만으로 표를 받아온 집단인데 자민당의 협조로 무라야마를 총리로 세운 것은 물론이고 각종 현안들에 좌파적 색채를 내기보단 자민당에게 협치하는 방향으로 갔다.


신선언 시행 과정에서 1987년 1월 야마기시를 비롯해 11명의 노조 간부가 직접 '신 사회당 추진 간담회'를 만들고 <사회노동평론> 9월호에서 사회당과 민사당의 화해를 요구하는 등 노조 쪽은 의외로 사회당의 현실정당화를 동의했다. 실제로 1979년 이후부터는 총평도 제55회 대회에서 연립 정권 시대를 열기 위해 통일전선을 하겠다며 최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반미적 표현을 자제하였는데 이 시기를 시점으로 총평의 방침은 유연화된다. 그 후 야마기시도 PKO 법안에 조정안을 내는 등 사회당이 급격히 호헌 노선을 포기한 것에는 이 영향도 있을 것이다.

무라야마 총리의 사죄는 모범적인 일본 정부의 과거사 인정 사례로 알려져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호헌 평화주의의 수정은 기존 지지층의 이탈을 불러왔다. 도이 다카코 위원장 시기 사회당은 민주집중제와 사회주의 혁명론을 포기할 것을 선언했고 야마구치 쓰루오 서기장은 "당의 기본 정책의 관하여"라는 제안을 통해 전수방위에 따른다는 조건 하에 자위대 합헌 인정, 87년 체제 수립에 따른 남한 정권 인정 등 기존 사회당의 호헌, 친북 방침에 대치되는 입장을 내놓는다. 종국에는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가 안보조약을 견지하고 최소한의 방위력을 정비한다는 입장을 밝히며 비무장 노선에 대한 사회당 창당 이래의 방침을 전부 부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단순히 호헌주의만 포기하는 것이면 나쁘지 않은 선택일 수도 있다. 근데 그래놓고는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하여 일제의 식민지배와 전쟁범죄를 사죄했다. 이걸 까려는 건 아니고 주변국인 우리 입장에서는 좋게 평가할 요소였지만 이미 호헌주의 포기로 우경화 테크를 탄 마당에 왔다갔다 했기에 당내에서 무라야마는 좌우 어느 쪽으로부터 좋게 평가받지 못했다. 심지어 민사당은 아예 오자와 이치로가 주도하는 신진당에 붙어버려 사회당 좌우파 통합은 아예 물 건너갔다. 거기에 더해 어느정도 현실정당을 자처한다는 여당의 총리가 김일성 사망에 조전을 보냈던 것은 아직도 친북 행위에 미련을 못버렸다는 비난이 쏟아지게 되는 계기였다.


무라야마 내각이 일처리를 잘한 것도 아니었다. 물론 무라야마 담화는 한국인 입장에서는 긍정적인 사건이고 원폭 피폭자 보호법, 전후 50년 결의 통과, 고령사회 프로그램 특별조사회 설치 등의 성과도 없진 않았으며 관료들 입장에서도 자민당과 협치해 안정감 있게 중요 법안들을 차례로 효율적으로 통과시켰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무엇보다 일본 정부의 첫 위안부 피해자 배상인 아시아여성기금을 설립한 것도 무라야마의 공이었다.그러나 무라야마 시절에 있었던 고베 대지진과 옴진리교 테러 사건 대처에서 내각이 제대로 된 대응과 사후 처리를 하지 않았었고 결과적으로 많은 의원들이 사회당을 탈당하고 자민당 탈당파에 합류, 일본 민주당을 창당하기에 이른다. 공교롭게도 사회당의 라이벌이었던 민사당도 민주당에 합세해 훗날 일본 민주당계에서 개헌파 성향의 노다 요시히코 파벌의 정신적 뿌리가 된다.

일본 사회민주당의 2023년 포스터. 무라야마 전 총리도 고문직에서 사임한 마당에 아직도 생존...?

현재까지도 사회당은 존재하긴 하는데 그게 오늘날의 일본 사회민주당이다. 그러나 그들은 존재감이 거의 없다시피 하며 강성 좌파 지지층은 대부분 일본 공산당이나 야마모토 타로라는 배우 출신 신인 정치인이 창당한 레이와 신센구미를 지지한다. 그리고 실제로도 일본 공산당은 기관지인 <아카하타>를 통해 지속적으로 입장을 내보내고 오키나와 평화운동, 반핵 운동 등에서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는데 반해 일본 사회민주당의 존재감은 호헌을 제외하면 아무런 아젠다도 없는 상태다. 이미 대부분의 당직자와 정치인들은 입헌민주당으로 가버린 상태인 건 덤이고. 일본 경시청에게 테러조직 취급받는 중핵파에 소속된 호라구치 토모코라는 구의원보다도 활동이 없는 상태인 걸 보니 그냥 이 당은 한국 정치 속 정의당이나 노동당하고 비교하기도 아깝고 말 그대로 민생당하고 엮어야 할 판인 상황.


이 정도로만 봤을 때 사회당은 대실패한 정당으로 유럽형 사민당이 도저히 되지 못했던 정당이다. 근데 하나 생각해봐야 할 점은 그래서 지금 일본 야당은 사회당 만큼의 역량이라도 존재하는가이다. 총평 이후 등장한 일본 최대 노조 렌고는 입헌민주당을 지지하는데 사실상 외부에선 어용 취급 당할 정도이다. 입헌민주당은 내부 당론 통일은 물론이고 자민당이 큰 실책을 범한 상황에서도 참 일관성있게 대안 제시 하나 못해 재작년과 작년의 중의원, 참의원 선거 두 개를 말아먹고 자민당의 아성을 넘보기는 커녕 제3당이자 오사카 지역정당인 일본 유신회와 경쟁해야 할 처지이다. 지금 일본이 통일교 유착 문제와 기시다 총리의 마이넘버 카드 문제로 내각에 대한 지지 여론이 급락 중이지만 2009~12년 민주당 정권기의 악몽 탓도 있고 게다가 국민민주당이 입헌민주당의 반 자민 전선에 너무 미온적이라 힘을 모으기가 힘들다. 기시다가 중의원 해산이라는 승부수를 둔다 해도 입헌민주당의 과연 유의미한 의석을 가져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https://news.yahoo.co.jp/articles/ff90bbb5ebe23104917f5c28dca48c7acbe6c2ea

(입민과 국민, 그리고 이즈미와 다마키 대표 사이의 갈등)


https://news.yahoo.co.jp/articles/3a56e454243209e499d6f51ee93925ffa6127ad9

(건강보험증 폐지를 얘기하는 기시다 총리, 그리고 연내 중의원 해선 및 재선거의 가능성)


이런 부분에 있어서 사회당은 그래도 총평이라는 기반을 가지고 입헌민주당보다 훨씬 더 많은 의석을 챙겨 대여 투쟁의 포석으로 삼기라도 했다. 사회당도 민사당이 떨어져나가는 등 야권의 분열이 존재하긴 했지만 어쨌든 자민당과 함께 55년 체제를 구성하면서 물론 친북, 친중 경향에 기인한 것이지만 평화 호헌주의 노선을 확고하게 주장하여 자민당 내 보수 방류의 보통국가화 요구가 나오는 것을 철저하게 국회 의석만으로 눌러왔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사회당이 비록 55년 체제 하에서 중선거구제 덕분에 제1야당 자리를 유지한 측면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당대 일본에서 가장 강한 반정부 세력임과 동시에 오늘날의 입헌민주당보다도 요구를 잘 관철시켰음은 부정 못한다.


그러나 사회당은 어찌 되었건 안이하게 총평이라는 지지 기반에만 의존해오며 스스로 자멸하였음은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며 지금 일본 야당인 입헌민주당이 이렇게 힘을 못쓰는 자민당 일당 우위 구도가 완전히 자리잡힌 것은 사회당 실패가 만들어낸 측면도 있다. 즉 사회당이라는 제1야당의 무능과 폭망이 불러온 결과가 오늘날 자민당의 독주와 일본 국민들의 정치적 무관심이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일본 야당에게 기대를 아예 안하고 차라리 차악으로 자민당 내 지한파 성향의 보수 본류~온건 방류 정치인들을 더 깊게 관찰하며 그들의 목소리가 커지길 바라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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