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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Aug 12. 2023

전후 일본의 두 가지 노선 - 보수 본류와 보수 방류

자민당을 주도하는 양대 축

https://youtu.be/0-jCnJCx3Tg?si=VW-0oy7fRMv33OFX

일본 전후 체제, 더 나아가 지금까지도 정책 결정에 영향을 주는 제1당 자민당의 노선 대립은 일본 정치를 바라볼 때 놓쳐서는 안되는 핵심 포인트다. 특히 이게 호헌vs개헌 논쟁에도 상당히 중요한 흐름이라 이 중심에 있었던 자민당 내 보수 본류와 방류의 노선은 1945년 이후 일본 정치를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사실이다. 물론 냉전과 55년 체제가 끝난 시점에서 두 세력의 극심한 이념 선명성의 차이가 다소 옅어지며 외부에서 보기에 경계가 흐려지긴 했지만 일본이라는 나라의 앞으로의 방향성을 예측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척도가 될 것이다.

보수 본류 세력을 대표하는 정치가 요시다 시게루 전 총리

보수 본류(保守本流) - 호헌파, 비둘기파


요시다 시게루는 1946년 공직 추방으로 하토야마 이치로, 고노 이치로 등 경쟁자 정치인들이 활동이 금지당한 상태에서 자유당을 창당하며 급부상했다. 이때 공직 추방으로 생긴 빈 공간을 요시다는 관료 출신자들을 대거 영입해서 "요시다 스쿨"을 구성, 정계의 주도권을 잡았다. 요시다 내각은 3차에 걸쳐 구성되었으나 3차 내각 시기인 1949년 2월 16일부터 1952년 10월 30일 사이에 요시다 노선이라는 이른바 '보수 본류' 노선이 정착되었다. 이 시기가 미국의 대일 점령 정책이 전환되던 시점이었다.


요시다 시게루는 경제 우선 논리를 펼쳤다. 당시 일본은 패전으로 점령 상태였기에 하루빨리 경제 성장을 하여 부흥하는 것이었는데 일단 1차적인 목표는 점령 상태 종식을 위해 연합국과 강화조약을 체결하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자립적으로 경제적 생존을 하는 것이었고. 1945년 9월 패전 직후 맥아더를 만난 요시다는 파시즘도 못사는 나라니까 집권하는 것이라며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경제를 성장시켜 국민에게 일자리를 주고 생활을 안정시키는게 급선무라 칭했다. 요시다의 구상은 경제적인 부를 축적해 국제사회에서 발언권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요시다가 사회당처럼 무조건 재군비를 거부하고 아예 비무장 중립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한 건 아니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국력이 허락하는 한도에서의 재군비는 불가피하다고 봐았다. 그러나 미군의 군비 증강 요구에는 지금은 경제가 가장 중요하다며 거절 의사를 항상 표시해왔고 미국하고 단독 강화를 맺었다. 사회당이나 공산당, 심지어 방류 정치인들조차도 소련, 중국과 강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요시다는 확고하게 미소 대결의 격화 상황을 이용하는 단독강화야말로 일본 부활의 지름길이라 보았다.


대신 점령 상태에서 벗어난 이후의 안보적인 측면의 방비로써 미일 안보조약을 맺었다. 어차피 혼자 군비를 증강해봤자 소련의 위협을 못막으니 그냥 현실적인 판단으로 일본이 부담할 군비는 최소화하며 미국으로부터 유사시 안전을 보장을 받는 전략을 취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 일본은 미군에게 군사기지를 제공하였으며 미국 또한 일본을 점령 통치한다는 정치적 부담을 해소하면서 동아시아 지역에 전초기지를 마련할 수 있었다. 즉 주일미군의 존재는 일본과 미국의 이해관계가 맞물린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6.25 전쟁을 거치며 동북아에서 공산주의의 팽창이 심해지자 10개 사단 정도는 보유하라고 하며 군비 증강을 요구했고 요시다는 소련에 필적하는 군사력 보유가 불가능하고 경제적 부담이 큰데다가 주변국의 반발이 심하다며 반대 입장을 일관되게 표현했다.그렇지만 결국은 MSA(상호안전보장법) 원조를 받기로 하면서 1953년 10월 합의를 통해 병력을 증강하는 대신 추가 원조를 받기로 하였고 덜레스도 이후부터는 경제 부흥에 주안점을 두기로 했다. 이렇게 탄생한게 자위대이며 요시다의 이러한 평화헌법 하에 방위력을 정비하는 한정적 재군비 노선에서 탄생한 것이었다.


기시 노부스케가 미일 안보조약 개정과 함께 1960년 안보투쟁으로 사퇴하고 난 뒤부터 고도경제성장기가 열리며 한동안 보수 본류의 시대가 열린다. 이 흐름의 첫 단추는 요시다 스쿨의 수제자 이케다 하야토였는데 그는 1인당 국민 소득을 1960년 12만 엔에서 3년 후에는 15만 엔, 10년 후에는 2배 이상이 될 것이라 강조하는 '소득배증계획'을 내세워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을 염원하던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다. 사실상 경제우선주의의 시대가 열린 것인데 이케다 이후로도 자민당 주류 세력은 당내 우파의 헌법 개정 요구를 회피하는 자세를 취하며 안보투쟁 때와 같은 상황이 벌어질 만한 논란거리 자체를 애초부터 만들지 않는 수법을 취했다.


요시다 노선의 '보수 본류'는 1993년 호소카와 모리히로 내각이 들어설 때까지 일본 정책 결정의 주요 노선이었다. 오늘날 굉지회, 헤이세이 연구회가 대표적인 요시다 노선의 실질적인 계승자이며 이케다 하야토, 사토 에이사쿠, 다나카 가쿠에이, 다케시타 노보루, 그리고 1993년 자민당 분당을 통해 일본 민주당계로 빠졌던 오자와 이치로도 본류 쪽 파벌과 연합했었던 사람이다. 보수 본류 노선은 1980년대까지의 일본 고도 성장을 이끌었던 힘이었지만 버블경제 붕괴와 함께 당내에서 예전보다 힘을 많이 잃었으며 일본 정치하면 부정적으로 떠오르는 파벌 정치 역시 고도 성장기의 산물이었다. 그렇지만 2021년 굉지회 출신 기시다 후미오가 총리 자리에 오르면서 세가 어느정도 있다는 건 입증했다.

보수 방류 세력의 수장, 하토야마 이치로(좌)와 기시 노부스케(우)

보수 방류(保守傍流)- 개헌파, 매파


이들은 20세기까지는 자민당에서 비주류였다. 1951년 점령 당국이 공직 추방 해제를 실시하며 다시 정계로 들어온 하토야마 이치로와 고노 이치로, 기시 노부스케 등이 요시다 노선에 적극적인 비판의 선봉장이 되었다. 하토야마를 비롯한 일본 민주당 출신 정치인들은 요시다와 보수 본류 정치인들의 정책 노선이 지나치게 미국 중심적이며 자주성이 없다고 비판하는게 주요 주장이었다. 따라서 요시다 노선의 보수 본류가 비둘기파라면 하토야마, 기시 노선의 보수 방류는 매파인 셈이다.


이들의 노선 방향을 살펴보자. 먼저 미국 일변도의 외교를 벗어나 일본의 대외정책을 전방위화하는 것이었다. 당시는 일본이 요시다 총리의 주장에 따라 외교의 방향이 지나칠 정도로 미국에 치우쳐진 상황이었다. 어쨌든 보수 방류가 주장하는 다변화 외교란 소련, 중국과 국교를 정상화하고 미국에게 자주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었다. 물론 이들 역시 미일동맹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고 다만 일본의 외교적 방향성을 다른 국가로도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기시 노부스케는 한일수교에 적극적이었으며 총리 재임 기간 동안 한국을 비롯해 동남아시아 같은 옛 일본 침략전쟁의 피해국에 사죄 및 배상 문제를 논의하는 모습을 보였었다.


무엇보다 보수 방류 세력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바로 적극적인 개헌파라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 정치 구조는 요시다의 영향을 받는 온건 보수 정치인들이 평화헌법을 옹호하는 상황이었는데 이에 하토야마와 기시는 때로는 강경하게 평화헌법이 일본의 자주적인 주권 행사로 선택된 체제가 아니라고 열변을 토했다. 보수 방류 인사들에게 평화헌법과 전후 체제란 점령군인 GHQ가 일본인들에게 강요한 역사적인 수치였으며 주일미군에 대해서도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았다. 실제로 하토야마 내각의 외무상이었던 시게미쓰 마모루는 1955년 11월 미국의 덜레스 장관과 미군 철수를 협의하기도 했는데 그 결과 비록 철수는 실패했지만 미국과 분담금을 교섭해 국가예산 2%까지 감액하는데 성공했다.


보수 방류 세력이 급부상한 것은 자민당 창당 이전부였다. 정계 복귀와 함께 일소 국교정상화와 재군비를 앞세우며 요시다 시게루와 차별화되는 입장을 선보인 하토야마 이치로는 분당파 자유당을 창당하고 헌법 개정, 자위군 조직 등 본류에 대치되는 노선을 확고히 했다. 한편으로는 비(非) 하토야마 계열로써 공직 추방 해제자 출신 방류 세력도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이 시게미쓰 마모루와 연합하여 1952년에 일본 개진당을 창당한 미키 다케오와 마츠무라 겐조였다. 동시에 얘네가 하토야마와 합치하여 만든 정당이 일본 민주당으로써 55년 체제 성립 당시 자민당의 한 축이 된다.


미키 다케오의 정치 이념은 "보수 좌파"로 대표되는 진보적인 우파 성향이라고 볼 수 있는데 쉽게 말해서 나중에 일본 사회당에서 분당되는 민사당 같은 사회당 우파와 성향이 비슷한 부분이 많다고 볼 수 있을 듯. 어찌 되었건 미키 다케오는 내정에 있어서는 협동주의 성향을 보였고 훗날 정치적인 판단에서 의회 해산이 필요했음어도 끝끝내 헌법 정신을 준수할 거라는 이유로 거부하는 등 자민당 내 보수 본류, 방류라는 이분법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독특한 정치인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역시 민주적 통제라는 조건 하에 자위군 창설을 주장했으며 미일안보조약을 상호방위조약으로 변경하고 점령 하의 제도를 재검토하고 미군 점령 하에 있던 오키나와를 조기에 반환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요시다가 주도하는 대미 협조 노선, 경제우선주의에 대해 항의하는 면모만큼은 방류의 성격이 존재했었다.


하토야마는 1954년 개진당과 합당해 중의원 121명, 참의원 18명의 일본 민주당을 출범시켜 방류를 세력화했다. 헌법 개정, 자위군 창설, 중소를 위시한 공산주의 및 아시아 각국과의 국교 정상화 등을 앞세웠던 일본 민주당은 요시다 총리가 조선업계에서 정치자금을 제공받았다는 논란이 터진 것에 힘 입어 내각불신임안을 제출, 하토야마 내각을 성립시켰다. 하토야마의 성향은 전쟁이 끝나지 않은 일본에서 매우 큰 논란이 되었다. 총선 당시 그는 연설에서 점령 정책의 시정을 위한 헌법 개정을 주장하거나, 방위력을 증강시켜 미군을 철수시켜야 한다거나 하는 등의 주장으로 요시다의 자유당 뿐만 아니라 사회당의 반발도 불러왔다.


1955년 총선은 사회당이 좌우를 합해 156석, 정확히 우파 사회당 67석과 좌파 사회당 89석을 얻었고 제1당 민주당은 185석, 자유당은 122석을 얻었었다. 안 그래도 안정된 국정운영이 어려운 구도였는데 여기에 대해 우파 사회당과 좌파 사회당이 1955년 10월 좌우파 간 통합으로 4년의 분열을 끝내고 일본 사회당을 출범시키며 위협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과반수를 확보하는 걸 통해 국정운영의 동력을 삼기 위해 민주당과 자유당은 "보수 합동"을 추진, 그 해 11월 15일 자유민주당(自由民主党)을 창당하며 보수vs혁신 세력의 구도인 양극화된 55년 체제가 시작되게 되었다.


지금부터 아래의 맺음말 이전의 내용은 보수 본류와 방류의 노선에 대한 쟁점들을 서술해보고자 한다.

쟁점 1: 보수 방류는 과연 '반미 보수'였는가?


하토야마 내각을 이어서 해보자면 그가 총선 이후 헌법 개정과 재군비를 공약하면서부터 좌우 사희당, 노농당, 공산당으로부터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총선 직후 특별국회에 헌법조사회법안을 제출한 것을 시작으로 헌법 개정을 시도하려 했지만 문제는 1956년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61석을 획득해 비개선과 합쳐 124석을 획득했음에도 사회-공산-혁신계 무소속의 연합만으로도 90석이 되어 재적 의원 248석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면서 보수 합동을 통해 55년 체제를 구축하였음에도 쉽지 않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하토야마는 소선거구제를 도입하여 중의원에서 3분의 2를 확보, 난국을 타개하려 했으나 개진당 계열의 마츠무라 겐조마저 조급하다고 비판할 정도로 당내 반응이 좋지 않았다. 미일안보조약 개정은 번번히 미국의 반대로 실패했던 것은 덤이고. 이 상황에서 하토야마 총리가 승부수로 던진 것은 일소 국교 정상화 추진이었는데 여기서 본류 세력들은 이케다 하야토를 중심으로 방해하고 나섰다. 하지만 1956년 일소 국교 정상화는 총리의 소련 방문으로 굉장히 성공적으로 이뤄지면서 소련 영내에 남아있던 일본군 포로 송환도 속도가 빨라지게 되었다.


이후 이시바시 단잔을 거쳐 집권한 보수 방류 총리는 기시 노부스케였다. 1958년 총선에서 287석을 얻은 기시 총리는 굉장한 강경 보수 성향이었다. 일본교직원노동조합과 대놓고 대립각을 세운 것은 물론이고 그들을 무너뜨리기 위해 1958년 도덕교육 의무화, 9월에는 교직원 근무평정의 전국 실시를 단행했다. 10월에는 경찰법 개정을 내놨는데 이 때문에 사회당과 총평의 대여 투쟁으로 시끄럽지 않을 날이 없었다. 게다가 기시 노부스케라는 인물 자체가 만주국과 일본 군부 체제에서 고위직에 있었고 그 때문에 전후에 A급 전범 용의자로 체포되기도 한 인물이었는지라 기시 내각의 움직임은 전전으로의 복귀라는 인상을 주었다.


결정적으로 기시 내각이 추진한 미일 안보조약 개정은 그의 사퇴로 이어지게 되었다. 미국을 방문하여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회담을 가진 그는 미국이 일본의 방위 의무를 명시함과 동시에 일본이 지는 책임이 헌법 범위 안에 있었음을 명기하고 미군 배치나 일본 내 기지 사용시 일본 정부와 협의한다는 조항을 넣었다. 하지만 기시 내각의 이러한 시도는 그가 전범 용의자였다는 과거와 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된 시점에 군국주의 시대로 돌아간다는 공포에 휩싸인 반정부 시위대의 격렬한 시위와 당내 반발로 무너졌다.


여기까지가 보수 방류가 55년 체제 동안, 일시적이었지만 자민당의 주도권을 잡았던 시절의 행보에 관한 설명이었다. 일각에서는 보수 본류와 방류를 설명할 때 친미 보수와 반미 보수라는 이분법로만 보려 한다. 이건 내가 재밌게 읽은 책이었던 마고사키 우케루 전 외무성 국제정보국장의 <미국은 동아시아를 어떻게 지배했나>에서도 은근히 사용되는데 내 생각으로는 친미와 반미라는 관점에서만 자민당 내부 노선 갈등을 과연 설명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이게 기시 노부스케라는 인물이 과거 만주국이나 태평양전쟁 당시 도조 히데키 내각에 참여했던 것과 헌법 개정론자라는 것 때문에 일본을 전쟁 가능한 국가로 되돌려 전전 시대로 복고하고자 하는 정치인이라는 인식이 생긴 것 같다. 그러나 기시 노부스케라는 정치인은 <뉴스위크> 외신부장 해리 칸을 통해 미국 정치인과 접촉하고 1960년대 초까지 CIA에서 일본 정당과 정치가에게 매년 200만 달러에서 1,000만 달러의 자금을 제공했을 때 가장 수혜를 본 게 그였다는 말도 있다. 당장 그에게 영어를 가르쳐준 파케남은 미국 대일협의회(ACG)라는 미국 정계 쪽 단체 간부였다. 한마디로 기시 총리는 어쩌면 미국 정치계의 지원을 받았다는 셈.


하토야마, 기시의 각각 일소 국교 정상화와 미일 안보조약 개정도 미일동맹을 부정하려는 목적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미일동맹의 틀 안에서 일본의 자율성을 강조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으며 기시가 미일 안보조약을 개정한 것도 근본적으로 요시다 시게루의 노선을 부정한 건 아니었다. 안보조약의 개정은 미일관계의 불평등성을 시정하여 양국 관계를 강화, 더 나아가 안전보장에 대한 확실한 담보를 얻는 것이 목표였다. 즉 쉽게 말해 하토야마와 기시는 전임자를 전부 부정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협조주의를 계승하고 외교의 장을 넓혀 이를 보완한 것에 가깝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 보수 방류도 무작정 급진적으로 지금 당장 전쟁 가능한 국가로 변신시켜 전후 체제를 전부 파괴하는게 아니라 미국과 안보 분담을 공유해 경제 성장을 해야 하는 상황을 인지하기는 했다는 것이다.


기시와 하토야마 이후의 보수 방류 총리들은 그들보다 더 친미적이었으면 친미적이었지, 반미는 커녕 탈미적인 시도도 줄어들었다. 1980년대 총리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거나 역사수정주의 행보를 보이는 등 예전 전전 시대에 대한 향수를 자극했지만 외교으로는 전두환, 레이건 대통령과 안보 공조 체제를 구축하고 소련을 대상으로 한 '불침항모' 발언, P-3 초계기 도입 등 오히려 주일미군과 관계가 강화되었다. 고이즈미 내각의 외교도 아시아보단 미일동맹 지향에 가까웠고. 따라서 아마 방류 세력들이 추구하는 전쟁 가능 국가, 보통 국가는 과거 일본 제국으로의 복고보다는 전형적인 친미 최전선 국가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한다.

보수 본류 세력의 급격한 약화를 불러온 리쿠르트 사건, 이는 55년 체제 붕괴로 이어졌다.

쟁점 2: 보수 본류의 경무장 논리가 지금까지 지지를 못얻는 이유


우선 문제 중 하나는 보수 본류의 내부의 부패다. 보수 본류 세력, 더 나아가 일본 고도경제성장기를 대표하고 지금까지도 영향력이 상당히 존재하는 자민당과 카르텔을 구성하는 세력을 꼽자면 관료 계층과 경단련을 고를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정치에서 관료는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해오던 계층이다. 요시다 스쿨의 주요 인사들 중에도 관료 인사들이 상당하며 고도성장기 동안 정부의 정책결정은 그들이 주도했다. 관료 계층은 고도성장기를 이끈 주역이었지만 어찌보면 지금 일본이 아날로그식 행정 때문에 큰 골치를 겪고 있는 것도 그들이 만든 병폐 중 하나다.


55년 체제의 어두운 이면은 뒤에서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한 뒤 정당정치를 무력화시키고 의회를 관료들의 결정을 사후추인하는 구조이다. 지금까지도 일본에서 정책 결정 과정에는 정계, 경제계, 관료의 사적인 네트워크가 영향을 안끼친다고 말할 수는 없는 셈. 퇴직 관료들은 자민당을 통해 정계에 들어가 파벌을 형성하고, 관료들은 경단련 내 기업들을 후원하고, 그리고 기업들은 관료들에게 돈을 건네주는데 이 과정에서 정경유착이 극심해지는 것이고, 당연히 이건 부정부패와도 밀접한 문제다.


당장 록히드 사건을 시작으로 리쿠르트 사건, 사가와규빈 스캔들까지 일본 자민당의 부정부패 사건들의 대부분은 보수 본류 쪽에서 터졌다. 록히드는 총리였던 다나카 가쿠에이가 연루되었으며 리쿠르트 사건은 다나카의 부하 출신이자 보수 본류의 한 축인 경세회의 리더 다케시타 노보루가 사고친 것이었다. 사가와규빈 스캔들은 가네마루 신 부총재가 핵심 인물이고 그 또한 경세회였는데다가 여기서 탈당하여 사키가게, 신생당을 결성하는 멤버들이자 오늘날 일본 입헌민주당 및 국민민주당의 뿌리라고 볼 수 있는 호소카와 모리히로, 오자와 이치로도 이때 연루되어 자민당을 탈당해 야당으로 간 것이었다.


아베 신조의 모리토모 비리 사건은 그럼 뭐냐고 얘기가 나돌텐데 이건 관료와 재계 같은 정통 카르텔(?) 중심의 비리라고 보기는 뭣하다. 물론 관료들이 연관이 안된 건 아니긴 한데 이건 일본회의 같은 일본 우익 세력들이 아베와 유착한 것이라 보는게 맞다. 왜냐면 관료 집단이나 경단련의 지원을 받는 본류 쪽과는 달리 방류는 재야 우익 세력들과의 연계를 통해 힘을 키워왔기 때문. 이것도 나름대로 일본 정치에서 부정부패 문제로써 점화되는 측면이 있긴 한데 보수 본류의 관료, 재계와의 유착과는 성격은 다르다고 본다.


리쿠르트와 사가와규빈의 연이은 사건은 결과적으로 자민당 정권의 붕괴로 이어졌는데 이때 버블경제 붕괴도 한 몫했다. 55년 체제의 마지막 총리는 에도 막부의 최후의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에 비유되는 미야자와 기이치였는데 딴 건 몰라도 버블경제 붕괴는 보수 본류의 기존 경제 논리가 더 이상 사용되기 무리임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 와중에 가이후 내각은 시행 직후부터 일본 시중은행들의 부동산 담보 대출을 정지한다는 내용의 부동산 대출 총량 규제라는 정책을 하다가 주가를 박살냈으며 미야자와 쇼군(?)은 경기 부양을 위해 대규모 토목 공사 했다가 괜히 돈만 날리고 빚만 늘렸는데 결과론 측면에서 대실패로 끝난지라 보수 본류 노선에 대한 신뢰만 잃는 계기를 낳았다.


반면 버블 붕괴로 인한 잃어버린 10, 20년을 극복한 것은 55년 체제 동안 개헌 같은 의제에만 집중한다고 비판받은 자민당 내 방류 세력이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가 실시한 '6대 개혁'이 역으로 경기 침체를 불러오고 아시아 통화위기로 인해 닛케이 지수가 1998년 말 13,000엔 선으로 하락하는 등의 위기가 있는 상황 속에서 집권하여 강경하게 구조개혁과 불량채권 처리를 단행, 국채 30조엔 이하를 달성하고 해외 경기 호조에 힘입어 수출 및 경기회복을 달성했다. 아베 신조도 2018년 평균 실업률이 전년 대비 0.4%포인트 낮아진 2.4%를 기록하며 24년만의 최저 수준으로 낮추는 등 비록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 못했지만 분명 민주당 정권이나 오랜만에 등장한 보수 본류 정권인 기시다보다는 경제에서 유능한 면모를 보였다.


보수 본류의 경무장 노선은 이미 일본인 입장에서는 철 지난 소리로 받아들여지는게 현실이다. 아예 근거없는 소리는 아닌게 실제로 냉전 당시였던 55년 체제 때와 지금 일본의 환경은 완전히 다르다. 더는 미국한테 안보를 기대고 일본은 경제에만 집중한다는 정책은 불가능한 상황이라는 말이다. 1991년 걸프전에서 일본이 평화헌법을 근거로 자위대 파병을 거부하고 130억 달러로만 지원했다가 국제적으로 무시당했다는 일화는 워낙에 유명하고 2010년에 있었던 센카쿠 열도 중국 어선 충돌 사건, 다음해 중국의 일본 GDP 추월하는 일이  벌어지는 등 안보적 여건이 지속적으로 악화되고 있다. 심지어 미국조차도 일본이 재무장하여 서방 세계가 중국과 북한을 포위하는데 앞장서길 원하고 실제로도 집단적 자위권 같은 이슈마다 적극적으로 지지해주고 있는지라 옛날처럼 경제"만"할 수는 없다.


이런 상황이니 보수 본류 파벌에 속하는 정치인들도 예전처럼 마냥 경무장하고 경제에 집중해야 한다는 소리는 꺼내지 못한다. 상황 자체가 워낙에 다르니 말이다. 본류라고 보긴 뭣하지만 아시아 평화주의자였던 "고노 담화"의 고노 요헤이 장관의 아들 고노 다로는 리버럴 성향이지만 아버지보단 우파적이고 심지어 본류 파벌의 핵심인 굉지회 소속 현직 총리 기시다 후미오조차도 헌법 개정에 소극적이지만 동의한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실제로 기시다 내각은 방위비를 2%로 증액하거나 집단적 자위권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등 정체성 자체는 본류이면서 방류가 주도하는 21세기 일본의 우경화 흐름에 다소 편승하는 듯한 행보도 보이고 있다.

맺음말: 앞으로의 일본 정책 노선


2021년 자민당 총재선은 다카이치 사나에를 제외한다면 온건 보수끼리의 대결이었다. 그 결과 기시다 후미오라는 오랜만에 보수 본류 총리가 탄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시다 총리는 굉지회라는 조직의 특성상 대외정책에서 한국과 협상하는 등 다소 온건한 행보를 보이고 있고 내부적으로 이게 문재인이 한 소득주도성장이랑 다를게 뭐냐는 비판이 나올 정도로 '새로운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경제 정책에서 의외로 진보적인 면도 꽤 강한 편이다. 뭐 이건 기시다가 좌파적이라기 보단 굉지회 설립자 이케다 하야토부터 소득 분배를 중시했기 때문도 있지만.


다만 그와는 별도로 봐야 할 점이 기시다 후미오의 성향을 예전 보수 본류에 대입해서 경무장, 경제우선논리만 무조건 따를 거라 생각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미 현 시점에서 소선거구제 도입 이래 자민당의 파벌 정치가 약체화되어 보수 본류와 방류의 구분이 무의미해진 경향도 있는데다가 2000년대 고이즈미 준이치로 이후로 일본의 우경화를 주도하는 건 구 방류 출신들이다. 물론 기시다의 개헌관이 아베에 비해 모호하긴 하나 그도 개헌이 대세라는 흐름을 굳이 역행하진 않을 것이다. 앞으로의 일본 정치 상황은 현재 마이넘버 등의 문제로 기시다 내각이 위기에 빠진 시기라 중의원이 그대로 유지될지, 아니면 해산될지 불투명한 상태지만 그럼에도 방류 세력의 담론을 계승한 이들이 주도하는 개헌의 흐름은 변함 없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보인다. 실제로 저번 참의원 선거 결과 개헌파인 유신회와 국민민주당의 의석까지 합치면 참의원 전체 의석수의 3분의 2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기도 했다.


 자민당을 주도해왔던 보수 본류와 방류의 대립은 고이즈미 이래 우경화의 흐름 속에서 경계선이 옅여졌고 무엇보다 2009년 중의원 선거의 대패를 계기로 파벌 정치가 약화되고 있는 흐름이다. 일례로 방류 쪽 파벌인 지수회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시절에는 아베 신조보다도 훨씬 더 오른쪽에 위치한 정치적 스탠스를 가지고 있었으나 지금은 니카이 도시히로가 주도권을 잡으면서 단지 개헌이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방위비 증액만 찬성할 뿐이지 부자 증세나 전교육 무상화, 피선거권 연령 같은 국내적 의제를 넘어서 친중 및 친한 외교나 대북유화책에 적극 동조하는 등 오히려 기시다 후미오보다도 더 왼쪽에 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이니 말이다. 반면 본류인 헤이세이 연구회 출신 모테기 도시미쓰는 2019년 한일 무역분쟁과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에서 강경한 반한 스탠스를 취할 정도였는데 이걸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최소한 지금 현 상황의 일본 정치는 55년 체제의 낡은 이분법인 보수 본류와 방류의 대립이라는 구도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일본 정치 입문하기 좋은 서적들 소개:


http://aladin.kr/p/zFmtB

아마 이 책이 일본 정치를 다룬 서적 중에서는 국내 탑급일 것이다. 55년 체제 하에 자민당이 어떻게 파벌 정치를 운영하고 갈등을 빚어왔는지, 또 어떤 식의 노선을 취했는지와 나아가 자민당에서 방류가 주도권을 쥐기까지의 과정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정당 간 역학 관계나 자민당 외에도 사회당이나 민주당 같은 야당들의 내부 갈등도 상세히 나오긴 하는데 자민당 만큼 중점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한계는 있다. 일본 정치를 심층적으로 파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439898

아시히신문 기자였던 일본이 쓴 일본 전후정치사 책이다. 일본 정치의 입문서로 괜찮다 싶은 책이기도 하면서 의외로 설명은 충실해서 심층적으로 파고 싶은 사람들에게도 나쁘지 않은 선택은 될 수 있겠다 생각한다. 다만 꽤 오래된 책이라서 고이즈미 시절인 2004년에서 끊기에 현재 일본 정치적 상황까지 이해하기에는 부적절하다는 단점도 있다.


http://aladin.kr/p/FL7A5

도쿄에 유학했고 그곳에서 교수 생활했던 학자가 쓴 책이다. 한국인이지만 일본에서 오래 살았던 저자의 특성을 활용해 상대적으로 객관적인 태도를 취하는 논조다. 아베 총리를 비롯해 역대 일본 수상을 연속 배출한 자민당의 일당 독주 체제, 파벌과 세습 정치, 정치에 대한 국민의 무관심 등 문제점도 진단하면서 일본 정치는 과연 알려진 것처럼 삼류 정치인지, 개헌과 보통국가화의 쟁점까지도 전반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건 위의 저서보단 비교적 최신이긴 한데 딱 2018년에 나온지라 아베 내각 중반부에서 끊긴다.


http://aladin.kr/p/FN1rT

일본인 학자가 저술한 일본 경제사 이야기. 버블 경제 붕괴 이후부터 아베노믹스까지 다루고 있다. 다소 회의적인 관점으로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경제 분야에서 높게 평가받는 총리인 고이즈미 준이치로와 아베 신조의 정책도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는 않으며 부작용도 컸다고 지적하고 있다. 다만 그러면서도 하토야마-간-노다로 이어지는 일본 민주당 정권에 대해서도 등장 당시에는 국민에게 희망을 주었지만 돌파력이 부족했고 장래 국민들의 어떤 삶을 실현해갈지에 대한 기전이 부족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http://aladin.kr/p/pwOb

제목이 상당히 자극적이고 내용도 실제로 꽤나 도발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원서명은 "전후사의 정체" 출간 당시 아시히 신문으로부터 반미 음모론을 주장하는 서적이라며 강한 비판들을 받았고 내용 중에 실제로 음모론 성격이 드러나는 부분이 없다고는 못하기에 걸러들을 부분은 적당히 알아서 판단해야 한다. 하지만 일본 전후 정치사에서 대미자주 외교를 선보였던 총리들을 재조명하고 그동안 친미 일변도였던 일본의 대외정책 및 정치구조를 신랄하게 비판한다는 부분에서는 높이 볼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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