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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Aug 14. 2023

1990년대 비(非) 자민 총리의 시대는 왜 망했는가?

처음부터 엉망이었던 조합

https://youtu.be/gmLrJTpOx4A

1990년대 55년 체제의 해체로 탄생한 비(非) 자민 연립내각은 1993년에 집권한 호소카와 모리히로부터 하타 쓰토무로 이어진다. 이후에 집권한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자민당과 연정했지만 사회당 소속이었던 생각하면 1996년까지도 비 자민 총리 시대라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쩌면 1940년대 전후 시대 가타야마-아시다 시절이나 후일의 2009~2012년 당시 일본 민주당 정권과 함께 몇 안되는 일본 민주-혁신 야당의 집권 사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전이나 그 이후나 일본 정치사의 주흐름은 자민당이 주도하거나 현재는 공명당이 정권에 가담하는 형식이기 때문. 그래서 일본 정치에 있어서 1990년대 비 자민 연립내각의 출범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실제로도 비 자민 연립정권의 첫 타자 1993년 출범한 호소카와 내각은 신생당. 사키가케, 일본신당, 공명당, 민사당, 사회당 등 55년 체제를 대표하는 자민당을 제외한 나머지 야당이 협치를 통해 구성한 정부였다. 더구나 연립 여당들인 사회당, 민사당은 노조라는 기반을, 공명당은 창가학회를, 자민당 탈당파(사키가케, 일본신당, 신생당)은 개인후원회라는 튼튼한 밑바탕이 있었는지라 분명 잘만 한다면 이 셋의 기반을 상부에서 결합하고 하부 지지 조직을 연계시켜 큰 시너지 효과를 낼 만한 상황이었다. 거기다가 호소카와 내각의 출범 직후 지지율은 71%로 당시까지 전후 정치사에서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그러나 결국 비 자민 총리의 시대는 무라야마를 끝으로 무너지고 잃어버린 10년이 어느정도 안정을 되찾으며 회복을 되가던 걸 주도한 정당은 버블경제 붕괴의 주역이자 구체제의 상징이었던 자민당이었다. 어째서 그렇게 압도적으로 지지를 받았던 비 자민 연립내각은 일본 정치에 근본적인 변화를 하지 못하고 무너졌을까? 전에 한 차례 일본 야당들의 실패를 다뤘던 적이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니 이 글에선 2009년 민주당 정권 이전의 야당 집권 사례인 1993년 비 자민 연립내각에 대해 다뤄보고자 한다.

결국 기존 정치권에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된 정치개혁


사실 호소카와 내각은 본질적으로 상당히 불안한 구조였다. 오자와 이치로가 야당들을 한 곳에 모아 연립정권을 구성했으니 일단은 한 배를 탔긴 했지만 자민당 탈당파와 사회당, 사키가케는 의견을 크게 달리 하는 지점이 의외로 중요한 사안이었다. 대표적인게 PKO 법안으로 대표되는 국제협력법안이라는 일본의 대외개입을 확장하는 사안이었는데 오자와 이치로는 보통국가화 주장의 선발 주자였고 민사당 역시 안보관에 있어서 자민당 내 보수 방류와도 통하는 지점이 상당히 많았지만 사키가케는 그렇다 쳐도 사회당은 그들과는 너무 이질적이었다.


그래도 이들을 하나로 뭉치게 한 것은 정치개혁법 문제였다. 호소카와 총리는 1993년 8월, 첫번째 각의 후 기자회견에서 "관련 법안이 성립하지 못한다면 정치적 책임을 지겠다"고 언급하는 등 꽤나 단호한 입장이었다. 오자와는 정치개혁안으로 사실상 소선거구제를 틀로 제시했지만 만약 이 제도의 시행 시 소수 정당의 생존이 힘들어지는 등의 문제가 있었다. 당연히 사회당은 반대했고 쟁점은 선거제도 개편에서 비례대표제 요소를 얼마나 가미할 것이냐는 것으로 흘러갔다. 어떤 면에서 자민당과 정권의 차이보다도 내부 의견 충돌이 더 심했다는 것이다.


이어서 1993년 9월 임시국회에서 호소카와 내각이 정치개혁 관련 4개 법안을 제출했는데 소선거구제 250명, 비례대표제 250명이 병립하는 2표제 안이었다. 이에 자민당 측도 맞대응으로 소선거구제 300명, 비례대표 175명을 제안했다. 결국 고노 요헤이 자민당 총재와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의 합의로 새로운 선거구제가 개편되었다. 기호제의 2표제. 소선거구 300명 비례대표 200명 등을 근간으로 하여 1994년 3월 1일 마침내 오늘날까지도 일본에 영향을 끼치는 새로운 선거구 제도가 만들어졌다.


긍정적으로 이 개혁을 평한다면 정당 간의 현실적 타협의 산물이었다. 만약 소선거구 시행 시에는 소수 정당들은 생존이 힘들어질 것인데 그 와중에 공명당, 공산당, 민사당 같은 기성 정당 정도만 비례대표제를 통해 생존이 가능할 것인게 자명했다. 그런 점에서 비례대표제를 유지한 것은 소수 정당에 대한 배려의 성격이 있었다. 특히 소선거구 1표, 비례대표 1표는 소수 정당의 독자 생존을 보장한 조치였으며 분명 오늘날 일본 정치에서 소수정당이 원내에 입성하는 것에는 이때의 개혁 탓도 있으리라 본다.


그러나 다르게 본다면 어쨌든 이 정치개혁법은 기성 결국은 정치권에 유리한대로 자기들끼리 획정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비례대표 블록이 전국구인 것은 당연히 전국에 지지 조직을 가진 정당인 자민당이나 특정 지역에 조직이 강한 공명당 같은 이들에게 유리하게 짜여진 부분이었다. 민사당도 민간 노조의 기반인 아이치현 등 산업단지 지역에서 지지를 받기 쉬웠고 사회당도 훗카이도와 규슈 등에 지지 기반을 가지고 전국을 블록으로 나누는게 가능했다. 즉 이 같은 선거제도는 주류 정치권의 이해관계와 크게 얽혀있는 개혁의 산물이었다. 

이념적으로 균열될 수 밖에 없었던 연립 정권


위에서 설명했다시피 비 자민 연립내각에 참여한 사회당은 자민당에 반대한다는 대의명분으로 참가했지만 그들이 참여한 건 어디까지나 고립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간 것에 가까웠다. 또 다른 자민당 탈당파인 사키가케조차도 오자와 이치로의 보통국가론, 재무장 주장에 이념적 공유를 아예 안했으며 재미있는 건 걸프전 파병 논란 당시 오자와가 주장하던 헌법개정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했던 정당이 다름 아닌 사회당이었다. 정작 웃긴 건 그렇게 보통국가를 주장했던 오자와가 지금은 입헌민주당에서 자민당에 반대하는 진영 논리에 따라 호헌파의 위치에 선다는 것이지만...


오자와 이치로는 지금의 행보와는 달리 1990년대에는 60년대 안보투쟁 이후 일본 내 헌법개정 논쟁에 다시 불판이 열리게 만든 당사자로 지목받을 만큼 자민당의 보수 본류 정치인들 그 이상이었다. 1993년에 발간한 <일본개조계획>이라는 전전 시대 기타 잇키의 <국가개조법안대강>과 비스무리한 제목을 가진 책은 일본이 평화유지군 파견 통해 국제적으로 공헌을 하여 이를 바탕으로 헌법 개정을 시행, "보통국가"로 나아가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대놓고 일본이 적극적으로 국제 문제에 개입하여 자위대를 격상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던, 오늘날 일본 개헌 바람의 원조였던 정치인이었다.


당연히 자위대조차도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던게 사회당이었기에 헌법 개정을 외치는 오자와와 이념적으로나 정책적으로나 지향성에 공통점이 있을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사회주의 경제를 주장하는 사회당과 관료제에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내며 신자유주의적 시장 개혁 및 규제완화를 주장하는 오자와 이치로는 쌀 시장 시장 개방 논란, 국민복지세 구상 등으로 치열하게 싸움을 벌였다. 그 상황에서 오자와와 같은 자민당 출신인 사키가케 의원들도 오자와의 보통국가론을 비판하며 대립각을 세웠고 정권 내부는 계속 지속적으로 의견 갈등으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연립여당들은 야당인 자민당보다도 자기들끼리 더 열심히 싸웠다는 얘기인 셈.


실질적인 이념 지향성으로 봤을 때 호소카와 내각을 구성하는 정치인들은 서로 성향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가령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는 과거사 사과에 적극적이긴 했어도 본질적으로는 자유주의 우파 정치인이었으며 그가 영입한 사람 중에는 에다노 유키오 전 입헌민주당 대표 뿐만 아니라 고이케 유리코 같은 보수 정치인도 있었다. 훗날 2014년 호소카와가 도쿄도지사 선거에 출마했을 때는 자민당 거물인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지지하기도 하는 등 마냥 오늘날 일본 야당 같은 진보 자유주의 성향이라 보기는 힘들다.


오자와 이치로는 위에서 말했으니 패스하고 사회당도 자민당 탈당파와는 도저히 접점이 없었다. 호소카와 총리와 사회당이 비슷했던 면이라고는 과거사 반성에 적극적이었다는게 끝이었고 잃어버린 10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경제 개혁의 방향성에서 그 둘의 의견은 너무 달랐다. 사회당은 지금의 입헌민주당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경제에 있어서 마르크스-레닌주의 물이 덜 빠졌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좌파적이었지만 호소카와, 오자와는 전형적인 작은 정부, 신자유주의 지향으로써 오히려 자민당 본류 정치인들과의 경제관, 특히 분배에 있어서의 차이가 덜할 수준이었다.


그리고 뭣보다 오자와의 정치 방식은 그의 스승인 "어둠의 쇼군" 다나카 가쿠에이와 놀라울 정도로 닮은 점이 많았기에 다른 이들에게 불만이 안생길 수가 없었다. 호소카와 내각은 지나치게 비밀스럽게 밀실 정치가 진행되었는데 이걸 주도한 사람이 오자와 이치로였다. 자민당 각복전쟁 시기 측근정치를 떠올리게 하는 지점인데 국민복지세 문제에서 터지고야 말았다. 발단은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가 정부나 연립여당 간 합의나 조정도 없이 소비세율을 7%로 올려 사회복지에서 쓰겠다는 국민복지세를 내놓은 것이었는데 가뜩이나 참의원 선거 앞두고 있던 상황에서 오자와 독단으로 일을 개판냈다. 때마침 사가와규빈 스캔들이 터졌고 호소카와는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사회당의 자폭 (Feat. 자아분열)


결국 오자와 중심의 연립정권 행보에서 이탈한 사회당은 정치적 초강수로 55년 체제 하에 정적이었던 자민당과 손을 잡기에 이른다. 사회당과 자민당 내 보수 본류는 경제 정책 면에서 성장과 분배의 조화를 추구하고 대외에서도 오자와의 보통국가론과는 차이가 있었기에 두 당이 아이러니하게도 오자와보다도 잘 맞았던 셈이다. 그 결과 사회당은 오자와라는 정치가에 대한 반대를 위해 예전의 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오랫동안 같이 국회를 운영해오는 악우인 자민당과 연합해 연립정권을 구성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사회당의 이 같은 180도 전환은 "악마와 손잡았다"라는 비판이 나올 정도로 이례적이었고 그동안의 근간이었던 미일동맹 반대, 자위대 해체, 원전 반대 등의 노선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사회당과 자민당의 연립으로 집권한 무라야마 총리는 의외로 그러한 근간을 싹 부정하며 "본인은 총리로써 미일 안보조약을 존중할 것이며 자위대는 합헌이다"라는 말을 국회 연설에서 했으며 기미가요에 대한 제창도 이어갔다.


문제는 사회당 내부에서 커다란 반발이 나왔던 것인데 무라야마는 참고로 사회당 좌파였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당 대회도 없이 노선 변경을 해버리니 노조와 지지자들의 거센 반발이 이어졌고 그동안의 정체성은 다 날아갔다. 물론 55년 체제 동안 사회당이 교조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념에 대한 미련을 못버리며 현실 정당이 아닌 저항 정당으로서의 행보만 보여왔다가 노조 이외의 다른 계층으로부터 외면받는 결과를 얻었던 것은 실책이다. 하지만 어찌되었건 당의 존립 근거 자체를 위협하는 결정을 사회당 지도부가 일방적으로 결정내린 것은 커다란 문제였는데 애초에 그 시점에서 사회당에게 남은 건 호헌, 비군사라는 정체성이 전부였다. 그 결과 사회당은 스스로를 부정해버리는 논리를 펼쳐서 그나마 존재하던 존립기반마저 자기 손으로 부쉈다.


무라야마 총리의, 적어도 한국인 입장에서의 업적이라고 볼 내용이 있다면 종전 50주년 맞이 담화, 즉 "무라야마 담화"였다. 1995년 8월 15일에 있었던 이 담화에서 무라야마 총리는 위안부 문제를 인정하였던 "고노 담화"를 계승하여 아시아 국가들에게 과거 일본이 저질렀던 전쟁범죄에 대해 구체적으로 사죄를 진행했다. 그리고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배상 조치의 일환으로 "아시아여성기금"을 설립해 일본 현대사에서 최초로 한국에 대한 물질적 보상 조치를 해줬다. 물론 1965년 한일기본조약으로 인해 일본 정부 차원에서의 배상이 불가했기에 민간의 형식을 빌려서라도 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무라야마 정권은 전반적으로 보았을 때 그다지 유능하지 못했던 정부였고 자민당과의 연합은 당장으로썬 총리를 배출하며 연명하긴 했지만 결과론적으로 사회당이 오늘날 사회민주당이라는 1석도 간당간당한 원내 군소정당 수준으로 밀려나는 것의 원인이 되었다. 마침내 사회당 우파는 탈당하여 하토야마 유키오와 간 나오토 등이 추진하던 일본 민주당에 합류했으며 사회당 잔류파들은 당명을 바꿔 사회민주당이 되었지만 지금 현재 이들은 일본 공산당이나 레이와 신센구미에게마저 밀리는 상황이다.

애초부터 개혁 세력답게 깨끗...했나요?


자민당이라는 정당이 55년 체제 동안 관료, 경단련과의 유착으로 상당히 부정부패로 얼룩진 세월을 보내웠었던 것은 사실이다. 지금도 거기서 완전히 자유롭지도 못하기도 하고 당내에서 그렇게 반대파들 제압하던 그 아베조차도 모리토모 사건은 그렇다 쳐도 허망하게 죽고 나서야 통일교와의 관계라는 매우 심각한 문제가 있었음이 드라나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자민당은 당의 뿌리인 요시다 시게루가 조선업계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던 그 시절부터, 더 거슬러 간다면 전전 일본 제국 시대 입헌정우회가 재벌과 화족으로부터 돈 받던 시절부터 지속되어온 문제다.


그리고 자민당이 버블경제 붕괴를 낸 것도 어느정도 사실이긴 한데. 분명 고도경제성장기를 이끈 건 자민당이었지만 부순 것도 그들이라는 소리. 1985년 나카소네 내각이 맺은 플라자 합의의 결과 1달러=241엔이 다음해 155엔을 넘으며 엔고가 시작되었고 가이후 내각은 일본 시중은행들의 부동산 담보 대출을 정지한다는 내용의 부동산 대출 총량 규제라는 짓을 하다가 안 그래도 과열된 부동산 시장, 주가까지 박살냈다. 55년 체제 최후의 쇼군 미야자와 내각은 공적자금을 투입하고 불량채권 정리를 하려다가 실패하고 그대로 잃어버린 10년이 시작된다.


그러나 과연 자민당이 잃어버린 10년 시작에 첫 스타트를 끊었다고 한들, 그게 자민당 탈당파들로 대표되는 자칭 "개혁" 세력이 깨끗했다고 하는 것의 논제로는 세울 수 없다. 먼저 탈당파들부터가 자민당 파벌 정치의 상징인 다나카 가쿠에이의 후계 세력들이었으니 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다나카의 부하이자 목요연구회를 장악했던 다케시타 노보루가 자기 세력을 규합해 만든 경세회가 자민당 탈당 세력들의 뿌리였다. 그 다케시타파 밑에서 성장해온 정치가가 입헌민주당의 아버지 오자와 이치로와 오카다 가쓰야 전 입헌민주당 간사장이였고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 호소카와 모리히로 전 총리의 경우에는 다나카파로 정계에서 활약했던 인물이었기에 일본 민주당계는 보수 본류의 후신이라 봐도 무방한 셈이다.


그렇기에 보수 본류의 최악의 문제였던 부정부패도 그대로 담습한다.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는 국민복지세 문제와 더불어 사가와규빈 스캔들에 연루되었는지라 그것도 물러나게 되는 이유 중 하나였으며 오자와 이치로 이 사람도 상당히 부패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정치가였다. 정치자금 문제로 몇번이고 법원을 들락날락 거리며 희대의 촌극을 혼자서 찍었고 한국 정치의 이인제 그 이상으로 이곳저곳에 찍먹하며 철새짓을 지속하기도 했다. 오죽하면 입헌민주당 지지자들조차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오자와 만큼은 싫어하고 있다.


오자와 이치로는 대단히 실패한 정치가인게 혐한 극우와는 거리가 멀지만 일본 정치의 구조를 저지경으로 만든 건 그의 책임이다. 오자와는 <일본개조계획>에서도 밝혔듯이 관료 계층에 대한 혐오를 쏟아내며 때로는 포퓰리즘적이라 보일 정도로 정치가 위주의 정치를 구상하고자 했는데 결과적으로 그가 원하던 바가 일부나마 이뤄졌다. 근데 그러면서 관료들이 우경화를 억제하던 부분이 없어지자 우익 정치인들이 난동을 부리게 되었으며 본인은 흑역사로 생각하겠지만 어쨌든 1960년 안보투쟁 이후로 파 묻혀있던 헌법개정, 보통국가화 논리를 다시 끌어온 건 오자와 이치로였다. 물론 현실적으로 헌법개정론이 안 나올 수가 없었지만 그걸 더 빨리 파헤친 건 오자와 이치로였다는 점에서 "어둠의 자민당 총재" 노릇을 한 입헌민주당 정치인이라는 유일무이한 업적을 달성했다.

맺음말: 정치적 의미에서의 "잃어버린 10년"


잃어버린 10년은 단순한 경제적 의미에서만 볼 수 없다. 이 전환으로 경무장, 경제 우선 논리로 대표되는 본류의 주장이 파토나고 기시 노부스케 이후 함부로 나오지 못하던 헌법개정론이 부활한 보수 방류 세력을 통해 논의의 장에 옮겨갔다. 동시에 호헌주의와 평화주의 중심의 사회당 같은 혁신 세력이 몰락하고 소일본주의를 제창하는 자민당 본류 세력의 대결 구도가 무너지며 한편으로는 오자와 이치로 및 자민당 탈당파가 주도하는 민주당 야권과 자민당 내부의 새롭게 등장한 내셔널리즘 세력 간의 대립이라는 흐름이 생겼다는 것이다.


55년 체제의 몰락과 함께 등장하여 잃어버린 10년과 동거했던 비 자민 연립내각은 결과적으로 보면 실패했고 태생적으로 한계가 너무 명확했지만 21세기 일본 정치 구도를 결정 지었다는 것 외에도 성과는 있었다. 선거제도 개편 등이 포함된 정치개혁법으로 관료주의가 상당 부분 타파되었던 것은 분명한 업적이었으며 비록 사회당의 반대로 실패했지만 소비세를 국민복지세로 바꿔 일본에 있어서 획기적 복지 정책을 시행했었다는 점은 높이 볼 만하다. 그리고 과거사 사과에도 호소카와, 무라야마 모두 적극적이었고.


이같은 정계 개편으로 자위대의 해외파병 논의가 현실화되고 일본 자위대가 점차 자위대로 발전하는 것의 계기가 되었다. 다나카-다케시타파류 본류가 일본 민주당의 뿌리가 됨에 따라 세력이 약체화되면서 자민당의 주도권은 방류에 넘어갔다. 덤으로 오자와가 자민당을 떠나기 전 뿌리고 갔던 헌법개정 떡밥은 당사자 본인은 지금 현재는 부정하고 있지만 정작 고향인 자민당은 잘 써먹고 있는 점도 재밌는 부분이다.


그동안 잃어버린 10년은 경제적 의미에서만 엔고, 디플레이션 등 장기침체로 대표되는 부분에서만 조명된다. 물론 일본인들 입장에서는 1980년대 거품경제 때와는 대비되는 굉장히 괴로웠었던 시기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오늘날 일본 정치 구조가 결정되는 것에 55년 체제의 유산 만큼이나 지대한 영향을 끼친 시대였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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