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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Aug 17. 2023

노태우, 보통 사람의 시대를 개막한 '물태우'

대한민국 정치인-3

https://youtu.be/sNikwz23upE

노태우라는 전직 대통령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일반적인 평가는 매우 낮거나 관심조차도 없다. 여론조사 기관 리서치뷰의 2010년 역대 대통령 호감도 조사에서 박정희와 노무현은 각각 34.7%, 31.5%를 기록했고 이어서 김대중과 이명박도 10%대 내외의 수치를 기록, 심지어 이승만이나 전두환 및 김영삼도 1~3%대를 기록했지만 노태우만은 0.5%에 그쳤다. 독재자라 비판받았던 이승만, 전두환보다도 평가가 안좋은, 아니 그냥 부정적인 쪽으로조차도 관심을 못받는 대통령인 셈이다.


인간 노태우는 물론 좋게 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는 12.12 군사 쿠데타의 주도자 중 하나였으며 5.18 민주화 운동 당시에는 계엄군 사령부 라인 상층부에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대통령 퇴임 이후 전두환과 함께 감옥행을 갔으며 문민정부가 시행한 역사 바로세우기 작업에서 신군부의 악행이 전부 드러나면서 신군부의 2인자 노태우도 더 이상 이미지가 회복될 여지마저 다 날아가게 되는 상황에 이르었다. 그래도 죽기 전에는 전두환과는 달리 자신의 과오에 대해선 사과를 하고 간 탓인지 몇몇 5.18 당시 시민군 참가자나 유족들이 장례식에도 오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여야 모두 양김을 뿌리로 하는 한국 정치 특성상 군사 독재의 부역자 노태우는 인식이 좋을 수가 없기에 아마 앞으로도 크게 반전되진 못할 거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의문을 하나 던질까 한다. 인간 노태우가 군사 쿠데타의 수괴였다는 것과는 별개로 대통령으로서의 노태우도 실패한 지도자였을지 말이다. 비록 뭐 양김의 분열 덕택에 대통령 선거에서 어부지리로 당선되었고 전두환의 수하였다는 점이 정통성을 갉아먹은 점이 있었지만 그래도 하나 말할 수 있는 건 나는 진영 논리를 떠나 노태우에 근접할 정도의 통치자로써의 역량을 갖춘 민주화 이후 대통령은 기껏 해봐야 김대중 정도가 끝일 거라 생각한다. 그만큼 대통령 노태우는 우리에겐 현재 잊혀졌지만 행정가로써의 실력을 바탕으로 군사정권에서 민주주의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상황에서 유연한 리더쉽, 정책들을 선보였었던 지도자였던 사람이다.

노태우 경제 정책의 의미


이건 다들 관심이 없어서 그렇지, 노태우가 경제 정책에서 상타 이상 쳤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많지는 않을 것이다. 뭐 이렇게 말하면 이미 출범 당시부터 100억 달러의 경상수지 흑자와 12%의 증가율을 비롯해 인플레이션 3%, 서울올림픽 유치로 인한 수출 촉진 등 전두환 시대의 3저 호황을 그냥 날로 먹어서 잘한 것이지, 여기에는 노태우 정부의 공은 없다고 보는 시각이 있을텐데 당시 상황이 그렇게만 낙관적이지만은 않았던 걸 경시했으니 저렇게 보는 거다.


이게 되었던 것은 3저라는 것의 현상 덕분이었고 만약 국내적으로 민주화와 맞물려 이런게 사라진다면 경상수지는 얼마든지 악화될 수 있었다. 인플레이션이 낮은 것은 전두환이 강박적으로 안정적 기조를 추구했기 때문으로 물가상승 압력이 외부로 표출되면 다시 상승할 수 밖에 없었다. 이미 이 시점에선 중화학공업 중심 수출주도성장이 일부 업종에서의 중복, 과잉 투자, 정부의 지나친 보호로 산업경쟁력 약화, 소득분배 악화 등이 초래하며 한국 경제의 전반적인 성장력 둔화로 이어질 만한 상황이었다. 이 밖에도 주택보급률도 국민소득수준을 따라가지 못하는 등 1988년 시점은 개혁이 필요한 시기였다.


노태우 정부가 꺼내든 카드는 첨단산업육성과 제조업 강화, 사회간접자본 확충, 금리자유화, 주식시장개방, 주택 2백만호 건설, 금융 자유화, 토지공개념 시행, 대기업 비업무용 부동산 매각, 의료보험 및 연금 확대 등이었다. 1988년 경제성장률은 11.7%였지만 임금상승, 원화절상 등으로 수출 부진이 지속되자 산업 구조조정이 실시되었다. 이때부터 중형 컴퓨터를 비롯해 기계,  자동차, 전자 등 성장유망 제조업에 대한 투자가 확대되었고 이는 선진국의 제조업 약화를 이용한 것이었다. 중소기업 역시 공통애로기술 개발을 중점적으로 지원해줬다. 그리고 이러한 첨단 기술 개발은 다음 정부의 기조에게도 이어진다.


사회간접자본 확충도 정부의 중점 사업이었다. 1987년 사회간접자본이 전 산업 자본계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2.4%였고 10년 전 1977년에 비해 1.9% 하락한 수치였다. 이같이 신규공급이 저조한 상황에서 경제가 급속도로 팽창하여 수요가 커졌고 이로인해 경부고속도로 왕복소요시간이 1980년 대비 2배로 증가하거나 자동차 수가 5배 늘었음에도 도로 연장은 1.2배 수준에 불과한 상황이었다. 이에 노태우는 경부고속철도, 영종도 신공항, 경부고속철도, 서해안고속도로, 서울외곽순환도로, 광양항 등 훗날 한국경제의 주축을 이루는 사회기반 시설들을 건설했다.


이때 투자계획규모는 1992~1996년 5년간 39조 원이었는데 1987년 사회간접자본스톡이 56%고 1992년 GDP의 15%였다. 1991년도 정부 지출이 23조에 불과했던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야심차게 추진했다는 얘기. 그러나 당시 여아는 모두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 점에서 노태우가 사회간접자본을 크게 확충하려 시도한 것은 어찌보면 정치적 고려보다는 실질적으로 국익이 되는 방향을 선택한 것 같다. 그렇지만 노태우가 잡아놓은 방향성과 재임 기간 동안 사회간접자본 시설 착공이 있었기에 다음 정권에서도 사업연속성이 유지될 수가 있었다.


물가 정책도 노태우가 공들인 부분이다. 1987년 이후 임금인상으로 명목임금만 해도 노태우 임기 동안 18%가 올랐으며 이건 김영삼 정부보다도 70%나 높은 수치다. 그 상황에서 노태우는 통화공급 안정, 부동산가격 안정, 산업 원가상승력 억제 등을 내걸고 은행 지급준비율을 7%에서 11.5%로 인상했다. 더 나아가 은행예금 증가액 30%를 지급준비금으로 추가 예치하는 한계지급준비제도를 시행했고. 또 통화안정증권을 발행해 시중의 통화량도 환수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부동산 가격은 빠른 상승세를 보여 주택가격이 1990년까지 연 15% 올랐으며 서비스 부문도 물가가 상승했다.


1988년 이후 2백만호 주택 건설을 시행하면서 부동산투기 억제를 위해 조세 제도를 강화하고 토지공개념을 도입했다. 물가 상승이 비용상승으로 이어지는 문제에 대해선 국제유가 하락 흐름에서 전력, 수도, 도시가스 요금, 석유류 가격 인하를 추진했다. 반면 공공요금은 최대한 인상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소비자 물가로 측정한 인플레이션율이 1991년에 9.3%로 상승했지만 임기 마지막 해에 6%대로, 새정부 출범 이후 4.8%로 떨어졌다. 비록 노태우가 이전 정부의 강력한 물가억제 정책으로 눌렸던게 폭발했었던, 어찌보면 빠른 물가상승에 있어서는 그의 경제정책의 직접적 결과는 아니었기에 무조건 책임을 돌릴 수는 없지만 적어도 출범 초기에 물가상승압력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다면 과도한 인플레이션은 방지가 가능했을 것이라는 아쉬움은 있다.


노태우의 경제 정책의 배경은 구조적 변화가 요구되는 경제적 전환기였으며 중화학공업의 성장동력이 크게 정체되던 시기였다. 동시에 임금과 부동산 가격이 크게 상승해서 기업 경쟁력이 약화되었고. 그런 와중에도 노태우는 소득분배구조와 사회복지 개선이라는 요구를 반영하여 여러 개혁적인 정책들을 펼쳤고 사회간접자본 확충과 금융개방 정책은 다음 정권으로 계승되었다. 물론 노태우 시기의 높은 물가 상승은 과오라면 과오겠지만 어쨌든 한국 경제의 구조적 변화 속 노태우 정부의 역할은 상당히 선구자적이었다 할 만하다.


성과적인 측면에서도 노태우 정부는 극심한 노사분규와 국제수지 적자, 가파른 물가상승이라는 최악의 악재를 만났음에도 각종 지표상에선 상당히 선전했다. GNP는 1987년 1,289억 달러에서 1992년 2,900억 달러가 되었고 1인당 GNP도 1987년 2,700달러에서 1992년에는 7천 달러로 증가했다. 임기 중 연평균 8.4%의 경제성장을 달성했으며 고용에서도 1963년 이래 역대 최저였었던 2.3%의 실업률을 기록했다. 인천공항, KTX,  서해안 고속도로, 1기 신도시 등 오늘날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국책사업들이 이때 추진되었던 걸 감안하면 장기적으로 바라보는 안목도 있는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친미일변도에서 대미자주외교로


노태우는 군사정권의 후예면서도 상당히 국제정치적 질서의 변화에 과감하게 대응했다. 군사정권 시기 우리의 국시는 "반공"이었고 박정희와 전두환 지지기반의 정서 또한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감이 근간해 있었다. 게다가 노태우는 취임 직전 북한 간첩 김현희가 일으킨 대한항공기 폭파 사건으로 인해 반공 분위기가 감도는 상황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당선되었던 사람이다. 그렇기에 노태우 정부가 들어섰을 때, 특히 운동권 진영에서는 그를 냉전적 반공주의자 미국의 똘마니라고 비방했었다.


그러나 분명 노태우는 국제정세에 맞추기 위해 건국 이래 우리를 지배해온 냉전적 반공 이데올로기를 포기했다. 그의 북방외교와 대북정책은 정권 내부의 반발까지 불러올 정도였다. 북방외교의 담당자 박철언 보좌관은 훗날 2010년 인터뷰에서 정권 내부의 고위관료나 군부, 여당인 민정당의 정치인들 같은 반대파들을 향해 친미일변도 극우 세력이라 표현할 정도로 그들이 악질적으로 북방외교를 방해해왔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노태우의 북방외교는 한국 주도의 선제적 접근과 각 분야가 서로 연계되어 있는 것을 함께 보는 총합적 접근을 원칙으로 하여 남북관계 뿐만 아니라 동북아 정세에서 한국이 주도권을 쥐는 지금봐도 상당히 급진적인 구상으로 탄생한 정책이기에 내부적인 불만은 생길 수 밖에 없었다.


노태우는 나카소네, 레이건과 우호 관계를 구축하였던 전두환과는 달리 다소 대미자주적 성격을 보였다.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가 방문한 자리에서 그가 미국이 파나마 침공 같은 남을 무시하는 강압적인 짓들을 한다고 비판하자 노태우도 이에 동감하는 의사를 표했다. 존스홉킨스 대학에서의 강연에서 한 학생이 한국 운동권의 반미주의를 얘기하자 노태우는 우리 1세대들이 불행히도 어려운 환경에서 자존심을 잃었기에 2세들이 더욱 그렇지 않는 면모를 보이는 것이라 얘기하기도 했다.


노태우는 그리하여 미국과 공동의 이해를 합의하면서도 한반도 문제에서 주도권을 잃지 않으려 했다. 평소에 남 눈치보는 외교가 뭐가 자주적인 나라냐고 자문하곤 했던 노태우는 취임 이후 즉각 바로 용산 미군기지를 이전하는 것을 검토하게 시켰다. 민족자존을 내세웠던 그는 평시작전권 환수도 받아냈으며 주한미군 감축 문제가 제기되던 상황에서 한국군의 주도적 역할을 강조했다. 평시작전권 환수 이후에는 군 상부구조를 개편하여 육해공군 군제를 합동군으로 바꾸고 합동참모회의를 합동참모본부로 개편해 평시작전권 환수 후의 조치에 대비를 하였다.


그러면서 동시에 노태우 하면 떠오르는 업적인 북방외교를 하기 위한 방편으로 미국을 중재자 역할로 유도했다. 미국과 사전협의 없이 즉시 "민족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을 발표하면서 대신 미 대사한테 중재자 역할을 개인적으로만 부탁하기도 했었지만 동시에 샌프란시스코 한소정상회담 당시 노태우가 고르바초프를 샌프란시스코로 방문하게 설득하고 한국에 통보하는 것에는 슐츠 국무장관을 활용했다. 이어서 노태우는 한소정상회담 직후 백악관을 방문해 한미 간 군사협력은 이어갈 것이라 밝혔다.


노태우의 이러한 대미자주적 성향은 박정희의 영향이다. 박정희와 10월 유신에 대한 생각을 묻는 질문에서 자신은 당시에 10월 유신이 민족자존이자 자주국방이라 생각했었던 민족주의자였다고 평했다. 노태우의 최측근 박철언은 훗날 인터뷰에서 노골적으로 당시 정부와 여당 내 종미, 종일 세력에 대한 혐오를 드러냈었고 정부를 주도한 외교안보 라인들이 꿈꾼 이상적인 국가상이란 바로 동아시아의 영국이 되는 것이었다. 당장 대통령 노태우부터 북방정책의 목표를 동북아의 변방국가에서 중심국가로 키우는 것이라 설명하며 퇴임 이후 조갑제와의 인터뷰에선 조선족, 고려인 귀환 추진 및 러시아 극동지역 개발을 주장하다가 옐친과 논쟁했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의 민족주의적 성향은 시민 사회는 물론이고 민정당과의 타협과도 없이 엘리트들의 독단으로 북방외교가 이뤄졌는지라 정부가 무조건 친미 반공은 아니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에는 실패했다.

북방외교의 진정한 의의는 남북 체제경쟁의 승리


북방외교와 대북정책을 먼저 비판점을 논하고 가자면 결과적으로 우리가 전술핵무기를 철수하고 비핵화 공동선언까지 맺었음에도 지금까지 북핵이 이어져 오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때를 기점으로 북핵 문제에서 한국이 주도권을 쥐는 걸 미국이 허용해주게 되었지만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포기한다는 걸 전제로 한 조건이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 비핵화 공동선언을 추진한 것은 큰 아쉬움이 남는 지점이다. 이 때문에 북한 핵개발 포기에 대한 검증 없이 선언적인 비핵화에 그쳐 후일 핵 문제 해결에 불씨를 남겨놓게 되었다.


그러나 북방외교는 미국의 눈치를 비교적으로 덜 본 한국 외교의 자율성이 두드러진 외교 정책이었다. 김종휘와 박철언의 주도로 미국이 아시아 지역에서 아젠다를 만들기 전에 우리가 먼저 아젠다를 던지고 선제적 외교를 하여 독립성을 확보했다. 한국 역대 대통령 중에서 이만큼 대미자주적이었던 대통령은 보수 쪽에선 박정희, 민주당 쪽에서는 노무현 정도가 전부였기 때문에 더욱 독보적이다. 그런 점에서 노태우식 민족주의적 보수는 김대중식 민족 자유주의와도 상당부분 협치가 되는 부분이 있으며 아마 노태우의 사례는 보수와 진보의 의견 차이를 뛰어넘어 새로운 외교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참고 모델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북방외교의 큰 업적은 바로 북한을 세우는데 큰 공헌을 한 두 국가로부터 우리 정부의 정당성을 인정받은 것에 있다. 소련과 중국은 냉전 내내 적국이었으며 그들과 북한은 유착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어찌 되었건 소련과 수교를 맺은 것은 북한만을 유일한 한반도 정부로 인정하고 그들을 정부 수립 이래 끝까지 후원해오던 국가가 결국은 우리를 인정하기에 이르게 되었다는 의미가 있다. 당시 북한은 한소수교를 막기 위해 북한을 방문한 셰바르드나제 외무장관을 상대로 윽박지르고 하대하는 등 별 수를 다 썼으나 실패했고 다른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도 연이어 남한과 수교하며 홀로 고립되었다.


그리고 소련이 우리랑 수교를 맺으면서 던져준 선물인 북한에 대한 무기 지원 중단은 여전히 북한군이 T-62 전차 기반의 천마호, 폭풍호, 선군호를 아직도 주력으로 쓰고 가장 최신 전투기가 냉전 시대 유물인 MiG-29인 것과도 연관이 될 정도다. 물론 러시아 과학자들이 소련 붕괴 이후 북한으로 건너가 북핵 개발에 참여했긴 했지만 정부 차원에서는 대놓고 퍼주진 못하는 구조라 북한군 현대화가 더뎌지는 원인이 되었기도 하다. 북한의 배후 지원 세력 차단을 통해 우리는 안보에 있어서 위협 요소를 하나만이라도 줄이게 되었고 한국군 전력 강화를 할 타이밍을 벌었다.


중국과의 수교는 훗날 그들이 우리나라 최대 교역국이 되고 이게 무역 경기 활성화로 이어져 한국 경제의 급속한 성장으로 발전되었다. 여기에는 1990년대 이후 중국 경제가 매우 빠른 속도로 성장해 21세기 이후로는 세계 시장에서 강하게 잡고 있게 되었는지라 중국과의 경제 교류가 한국 경제에 도움이 크게 되긴 했다. 뭐 이 과정에서 다소 대중 의존도가 심해지는 등의 문제가 있었긴 했지만 이건 노태우 이후 정부들의 대응에 문제가 있었던 부분이고 어차피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점점 힘이 쎄지고 있는 정세 속에서 우리만 한중수교를 거부하며 대만과의 관계를 계속 고집할 이유는 없었다. 중국이 한국 경제를 잠식한다는 비판 이런 거는 지극히 오늘날 상황만 가지고 결과론적 측면의 관점일 뿐이지 당시로써 한중수교는 불가피했다.


결국 소련, 중국이 한국과 관계를 맺게 되고 공산 국가들도 대부분 북한을 포기하거나 민주화되면서 북한은 고립된 신세에 처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소련의 대북 경제지원은 북한이 1960년대 주체노선을 천명한 이래 계속 줄고 있었으며 김일성이 무리해서 돈 다 써가며 추진한 평양국제학생대회 등은 화제를 못끈 채 88 서울올림픽 및 거기에 공산 국가들이 참여한 것에 묻혀버렸다. 이런 흐름 속에서 고립된 북한도 결국 대화의 장으로 나와 비핵화 선언에 일시적으로나마 합의를 보았다. 뭐 이것도 이후에 "서울 불바다" 드립치면서 금방 와해되긴 했지만 말이다.


내가 북방외교를 노태우가 아니면 할 수 없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만약 김대중이 1987년도에 대통령이 되서 시행했으면 성공 여부는 둘째 치고 정권이 살아남을 수가 있었을까? 위에서 박철언 얘기하며 정권 내부에서도 북방외교와 대북정책에 대한 반대가 극심했다고 설명했는데 이게 시행되면 군부 체제의 존재 이유였던 반공주의가 약화되거나 변화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까지는 김영삼의 숙군 이전이었기에 하나회 조직과 5공의 잔당이 군부, 정부 요직 등에서 꽤 큰 힘을 쓰고 있을 때라 만약 김대중이나 김영삼이 북방외교를 했다면 거센 반발로만 끝난다면 다행이고, 최악의 경우에는 또 다시 쿠데타가 벌어졌을 수도 있다.


노태우는 그런 점에서 그래도 하나회 2인자 출신이었던 배경이 있었는지라 군사정권에서 민주화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고위관료-민정당-국방부로 이어지는 보수층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북방외교, 대북교류 확대와 같은 획기적인 정책들을 강한 의지로 밀어붙이는데 성공할 수 있었던 부분도 있다. 어찌보면 노태우가 군사정권의 후예였기에 과도기 속 군부가 여전히 불만을 드러내는 상황에서도 이런 행보가 가능했었던 아이러니한 상황인 셈이다.

의외로 진보적인 면이 있었던 대기업, 복지 정책


그동안의 고도성장기에서 박정희와 전두환은 정경유착을 통한 성장 방식을 추구하였다. 이것이 상당부분 성공해서 대한민국이 가난에 시달리지는 않게 되었지만 매우 큰 문제점이 있었다. 일단 경제력이 집중되어 대기업들이 재벌을 중심으로 하나의 거대한 세력을 구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정치민주화의 과정에서 독과점에 대한 사회적인 비판이 대두되기 시작했으며 이에 노태우는 법, 제도의 측면에서 개혁을 추구했다. 이는 전임자이자 보스 전두환이 국제그룹 해체 당시 썼었던 방법과는 상당히 대비된다.


노태우가 실시한 대기업 정책은 매우 강경했다. 먼저 상호출자금지는 두 개의 회사가 서로의 주식을 인수하거나 취득하는 것을 금지시켜 상호출자를 통한 기업지배력 교환을 막았다. 출자총액제한은 간접적 순환출자방식을 포함해 대규모 기업집단이 확장하는 것을 막았으며 출자한도는 순자산의 40%였다. 부당내부거래 행위규제도 이때 시행되어 계열기업과 독립기업 간의 공정경쟁기회 박탈을 막게 하였다. 여기에 더 나아가 금융 보험회사의 의결권까지도 제한했으며 채무보증제한제도도 시행되었다. 한술 더 떠서 노태우 정부의 경제수석 김종인은 5.8조치를 단행했다. 재벌기업의 비업무용 부동산을 강제로 매각하고 신규취득을 금지하도록 하는게 골자인데 이 때문에 대기업으로부터 김종인은 빨갱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복지에 있어서는 오늘날에 실시되는 사회 보장 제도의 대부분이 노태우 정부 시기를 거쳐서 제대로 정착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당시 노조 조직률이 18.6%로 정점에 이르는 상황이었을 정도로 노사 간의 갈등이 심각했었다. 물론 노태우는 겉으로 보자면 노동계를 강하게 탄압했고 야당들이 발의하는 노동 관련법들에 종종 거부권을 행사하기도 했었다. 애초에 오늘날 민주노총의 뿌리인 전노협부터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계기로 형성된 노조이며 노동 세력과 연계하던 운동권들에게 노태우는 그저 "미제의 주구 전두환의 후예 파쇼 정권"일 뿐이었다. 그러니 양측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심상정, 노회찬, 김문수, 단병호, 이재오 등 훗날 정치권에 입성하는 주요 정치인들도 이 시기에 반(反) 노태우 전선에 있었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노태우 정부는 노동정책에서 나름 신경을 쓰기는 했다. 대표적인게 최저임금제다. 1986년에 법이 제정되었지만 시행은 노태우 취임 후인 1988년부터였다. 하여튼 이러한 최저임금제 시행은 당시 생산직 인력부족의 상황과도 연관되어 있으며 그 속에서 저직능근로자의 소득을 높여서 노동시장 참여를 촉진하고 근로조건을 향상시킨다는 목표를 두고 있었다. 1988년부터 연차적으로 적용 범위를 확대한 최저임금제는 1990년 전체 근로자의 63%로 적용범위가 포괄되어 1987년 9.3% 수준이었던 상대빈곤율이 1992년 7.7%로 하락하게 된다.


의료보험제도와 국민연금제도도 상당히 중요하다. 1977년 박정희 정부가 도입한 의료보험은 500인 이상 사업장에만 적용되다가 전두환 집권 이후 100인 이상으로 확대되었는데 노태우는 이를 5인 이상으로 확대하고 전국민 대상으로 범위를 넓힌다. 이를 통해 저렴한 가격으로의 의료서비스 이용이 가능해졌으며 소득재분배 효과도 나타났다. 지금까지도 한국 건강보험은 다른 국가와 비교해도 우수한 편이다. 다만 국민연금제도의 경우에는 시행 후 모든 가입자가 납부한 연금보험료의 원금과 예상수익의 합계보다 많은 급여를 받아가도록 설계되었기에 차세대에게 부담이 늘어나고 연금개혁이 불가피해지는 등의 여러모로 조금 보완이 필요했다는 생각이 드는 아쉬운 점들이 있는 상황이다.


결정적으로 노태우의 소득분배 정책에서의 성과는 진보 진영 학자들도 일부 인정하는 사안이다. 손호철 교수는 역대 대통령 중 노태우가 가장 좌파적인 경제 정책을 펼쳤다고 했으며 당시 정권에서 정책을 주도한 라인인 조순, 김종인은 강경한 케인스주의자 혹은 경제민주화론자라 평가받는 사람들이다. 같은 노씨이자 가장 진보적이었을거라 평가받는 대통령인 노무현이 "왼쪽 깜빡이 켜고 우회전한다"는 말로 대표되는 우파적 색채가 은근 있었음과는 대비되는 면모. 어떻게 보자면 노태우 정부의 경제관 및 복지관은 소득주도성장이 성공했을 경우의 모습을 아주 잘 보여주는 사례로써 이후 정권들이 민자당, 민주당할 것 없이 쭉 신자유주의 정책을 했기에 나름 독보적인 위치라고 볼 수 있다.

맺음말: "보통 사람의 위대한 시대"


"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그럼에도 부족한 점 및 저의 과오들에 대해 깊은 용서를 바란다. 주어진 운명을 겸허하게 그대로 받아들여, 위대한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해 봉사할 수 있어서 참으로 감사하고 영광스러웠다. 생애에 이루지 못한 남북한 평화통일이 다음 세대들에 의해 꼭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

- 노태우의 유언 -


누군가에게는 노태우가 전두환처럼 빨갱이들을 때려잡지 못한 유약한 "물태우"일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군사정권 후예에 불과한 타도 대상일 뿐인 또 다른 독재자일 것이다. 아마 이 양분된 시각이 한국 사회에서 노태우를 바라보는 대표 시각 두 가지일텐데 두 개 모두 정치적인 진영 논리에 불과하다. 노태우를 대표하는 진짜 리더쉽은 박정희와 같은 카리스마형 독재자도 아니고 김대중 같은 민주주의 시대에 걸맞는 리더쉽도 아닌  전환기라는 시대적 상황에 입각한 당시 배경에 딱 적합했던 그러한 것이었다.


노태우가 대통령에 취임할 당시 상황은 민주화 직후였다. 또한, 민주화로 인해 그동안 독재정권이 막았던 요구가 폭발적으로 터지던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박정희처럼 강력한 리더쉽으로 정치를 통제하고 반대파를 누르며 독재를 계속 이어가는 것은 이제 막 시작된 한국의 민주주의 체제에 득이 되긴 커녕 오히려 해가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6월 민주 항쟁 직후에는 그러한 권위주의적인 리더쉽을 국민들이 원하지 않았다. 리더쉽은 특정 리더의 성격이 아니라 그 리더가 이끌던 시대의 요구와 그에 잘 부응했는지를 잘 살펴보고 평가해야 하는 것이다.


시대에 따라 국민들의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문제 해결을 위한 리더쉽의 특성도 시대마다 달라질 수 밖에 없다. 때로는 권위적이고 강력한 리더쉽을 국민들이 선호하지만 시대의 상황이 달라지면 부드럽고 편안한 리더쉽을 선호하는 방향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1945년 영국 총선이다. 2차세계대전 중 영국은 윈스턴 처칠을 수상으로 하는 보수당 - 노동당 전시연립정부를 수립하였다. 당시 연립정부에서 처칠과 보수당 인사들은 대부분이 국방과 외교를 맡았지만 반면 노동당 인사들은 경제, 복지, 재건 등의 국내 문제를 맡았다. 1945년 7월, 전쟁이 끝난 이후 총선이 실시되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보수당이 압승할거라고 예상했지만 영국 국민들은 클레멘트 애틀리가 이끌던 노동당을 선택했다. 당시 영국인들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강한 리더쉽보다는 전후재건과 개혁, 복지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새로운 리더쉽을 원했던 것이었으며 국민이 원하는 리더쉽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다는 걸 의미한다.


한국의 민주화는 노태우의 6.29 선언에서 알 수 있듯이 김대중과 김영삼을 중심으로 한 민주화 세력과 군부 독재 정권의 타협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한 세력이 다른 세력을 완전히 굴복시킬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부적으로는 전혀 다른 정치적 성향과 이해관계를 가진 세력들이 여전히 정치권에 같이 있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런 정국이기에 국정을 강하게 밀고 나가고 전두환처럼 강력하고 권위주의적인 리더쉽으로 다른 세력을 누르는 것은 국민들도 원하지 않으며 이로 인해 민주주의 체제가 흔들릴 수 있다. 한편으로는 이건 그의 태생적 한계이기도 한데 군사정권의 후예이자 하나회의 2인자였던 노태우는 결코 김영삼이나 김대중과 같은 과감한 민주화 조치를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노태우는 취임사에서 "보통사람의 위대한 시대"를 선언했다. 실제로 그는 여론에 귀를 기울이는 유형의 지도자답게 시대의 흐름에 맞게 통제를 점진적으로 완화하고 반대세력의 도전에 긴급조치나 계엄령같은 권위적 방법을 사용하진 않았다. 물론 3당 합당이라는 행위 자체가 민주화의 시대적 흐름을 역행하는 행위이자 권력획득 중심으로 정당정치를 변질시켜 퇴보하게 만든 사건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애초에 민정당과 공화당은 내각제 개헌을 해서 5공, 3공이라는 군사정권의 두 후계 세력이 권력을 독식하는 목적도 3당 합당의 이유 둥 하나긴 했다. 그러나 노태우는 임기 동안 3당 합당으로 결성한 민주자유당이라는 거대 여당을 거느리고 있었음에도 그 권력을 최대한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노태우 전 대통령은 비록 군부 출신이지만 민주화 이후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통해 당선된 민주적 정통성을 가진 대통령으로서 새로운 정치 질서를 마련하기 위해 군부 세력들과 연을 끊었다. 당시 새로운 민주주의 체제를 거부하는 군부 강경파들은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과 용산 미군 기지 이전, 국보법 개정 등의 문제에 대해 반발하였다. 신군부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자신의 독자적 지지기반을 확대하고 여소야대 정국에서 벗어나 자신의 리더쉽으로 정국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노태우는 김영삼, 김종필과 3당 합당을 감행한다. 특히 3당 합당으로 노태우는 민주화운동의 핵심 인물이었던 김영삼과 손을 잡으면서 전두환의 후예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 민주화된 정치환경에 적합한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노태우의 리더쉽은 결코 유약한게 아니다. 노태우는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환경에 맞는 변화를 이끌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신군부 출신이라 김영삼, 김대중처럼 과감한 개혁은 할 수 없었던 한계는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의 전진을 향한다는 뚜렷한 방향성을 지녔다. 노태우 정부는 전환기라는 시대적 상황에 맞춰 민주화와 과거청산에 나서서 군부독재 시대의 정치세력들이 새로운 질서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변화를 거부하는 자들의 반발도 있었으나 성공적으로 새로운 질서를 재편하는 것을 이뤄냈다.

또한, 노태우 전 대통령은 신군부 출신으로 12.12 쿠데타 당시 전두환과 함께 쿠데타를 주도했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노태우 정부는 5년 임기 내에 탈권위주의와 안정적인 민주주의 체제 구축 등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였다. 따라서 민주화된 사회로의 체제전환기를 이끈 노태우 전 대통령은 유약해보였지만 당시의 불안정한 체제를 안정시키고 권위주의 청산과 민주주의 체제로 진입이라는 새로운 질서를 향한 방향의 설정을 해냈다. 이러한 개혁적인 정책을 추진하는 것은 자신의 지지기반(신군부 세력 및 민정당)의 약화를 감안해야 하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이러한 지지층과 신군부 출신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한 성과를 이뤄냈다. 그런 점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의 리더쉽에 대한 낮은 평가를 옳다고 볼 수 있는가?

올바르게 리더쉽을 판단하려면 그 당시의 정치환경 속에서 시대적 흐름에 맞춰 정책을 잘 추진했는지에 대한 것이 지도자의 리더쉽의 평가의 기준이어야 한다. 짧은 임기와 신군부라는 태생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인 경제 정책과 남북 화해, 획기적인 복지 정책, 구 공산권 국가들과의 수교를 이뤄내고 민주주의로 가는 발판을 마련한 노태우 전 대통령, 그의 리더쉽에 대한 제대로 된 재조명이 필요하지 않을까?


p.s. 아마 다음 글은 김대중 이야기가 될 듯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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