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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Aug 26. 2023

김대중, 한국 최후의 진정한 리버럴 정치가

대한민국 정치인-4

https://youtu.be/oIRT3VfWVZ0?si=7gmkMwIskHuwr-vf

김대중, 누군가에게는 빨갱이일 것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대단한 사람이지만 그래도 노무현, 문재인보다는 관심이 없는 정치인으로만 인식될 것이다. 현재 국민의힘, 민주당 모두에 김대중의 영입으로 정계에 들어온 정치인이 상당한 편이고 대표적인 인물만 해도 민주당의 이낙연, 이해찬, 설훈, 윤호중 등과 국민의힘 및 범 친윤 진영의 김영환, 김동철, 박주선, 김한길, 장성민 등이 있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김대중은 죽은지 10년이 넘게 지났음에도 여전히 그의 영향을 받은 정치인들이 거물급으로 있는 상황이다.


의 정치성향은 김대중과 꽤 차이가 있는 편이고 몇몇 정책들에서만큼은 상당히 비판적인 스탠스로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그래도 인정하는 부분이라면 김대중은 한국 정치사에서 마지막 자유주의 정치가라 할 만큼 신념 만큼은 확고했으며 그의 사후에는 이러한 스타일의 정치인이 아직까지도 나오지 못하고 있다. 노태우에 이어 김대중을 두번째로 내가 다루는 대통령으로 선정한 것은 대한민국의 사회 갈등이 전반적으로 극에 치닫고 상황이 점점 악화되는 상황 속에서 비록 나와는 성향이 다르지만 어쨌든 진정한 정치가라 할 만했던 대통령이기에 그의 의의와 한계 모두 다뤄보고 싶었다.

사상가로서의 김대중


한국 정치사에서 사상적으로 깊이가 있었던 대통령은 잘 없었다. 그나마 보수 진영에서는 <국가와 혁명과 나>를 저술한 박정희가 사상적인 면모가 있었던 정치가였다. 박정희는 이 책에서 먹고 사는 문제를 최우선으로 두면서도 전통 문화와 진보 사이의 조화를 추구했으며 해외 혁명의 사례들인 메이지유신, 신해혁명, 나세르 혁명, 아타튀르크 혁명, 남미 혁명들을 분석해 이것들의 명암을 얘기하며 수용할 부분과 걸러야 할 부분을 제시했다. 더 나아가 박정희는 서구식 사회계약론에 기반한 자유주의적 사고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듯한 발언들을 하면서 "한국식 민주주의"라는 유신주의, 국가주의적 국가관을 제시한다. 유신헌법 또한 그러한 논리의 바탕에서 나온 것이고. 어쨌든 박정희는 전두환보다 훨씬 사상적인 논리를 앞세웠던 지도자였다.


민주당계 대부 김대중도 박정희의 한국식 민주주의에 맞서는 과정에서 사상적인 면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박정희 시대 때부터 민주적 시장경제 노선에 입각한 대중경제론을 내세워 권위주의 근대화 노선에 대안을 제시했으며 3단계 통일론으로 평화공존적 통일을 제시 당대 민주화 세력의 정치철학의 근간을 만들었다. 4대국 안전보장론은 냉전 당시였던 상황에서 상당히 급진적인 안으로써 반공주의 논리에 대한 대안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박정희 정부 초기까지 말 그대로 2공 시절에 달라진게 없이 무조건 대안 없이 정권 반대만 하던 야당들이 논리적 기반을 마련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김대중이었다.


김대중의 주장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발전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김대중은 미국이 한국 경제 개발을 지원해 공산주의를 막으려 한다는 것을 이용해 군사정권의 경제 발전은 한계에 이르었기에 민주적 시장경제로 전환할 수 밖에 없다며 그들을 설득했다. 그 근거는 과거 독재 하에 있었던 서독과 일본이 민주주의를 받아들인 이후 세계 3위, 4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한국인 뿐만 아니라 미국에게도 민주화 세력이 독재에 대해 비판을 위한 비판만 하는게 아닌 더 바람직하고 유능한 대안이 있음을 어필하려 했다.


리콴유와의 토론에서 드러난 바로는 김대중은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에 저항하면서도 서구 문명이 만든 가치 자체는 적극 수용, 아시아와 서양이 서로의 가치를 수용할 수 있게 하는 사상적 지평을 만들고자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리콴유가 "아시아적 가치"를 주장하며 동양 철학의 근본을 권위와 전통에 기반해있다고 하자 김대중은 리콴유의 주장을 반박하며 동양의 유교 이념과 서양의 민주주의는 공존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대해선 난 갸우뚱한 입장이긴 하지만 어쨌든 김대중이라는 정치인이 분명한 신념 체계와 이념적 토대가 있었음을 잘 보여주는 증표라고 생각한다.


김대중이 그래도 진정한 자유주의 정치가라고 할 지점이 있다면 무조건 서양의 문화만이 옳다고 하는 사대주의자가 아니었다는 것에 있다. 보통 세계에서 민주화 운동가들은 자국의 독재 정권에 대한 반감으로 외국에 대한 찬양으로 흑화하는 경우가 많은데 김대중은 서구 대 동양 이분법 구분 속에서 서구 문명만이 민주주의를 할 수 있다는 것은 틀린 시각이라 평했다. 오히려 그는 아시아와 한국의 전통 및 문화에서 민주주의의 근원을 찾고자 했으며 이는 타국의 민주화 운동가들보다 훨씬 진보된 방법론이었다.


김대중의 정치철학은 옳고 그름이나 주관적인 평가를 떠나 박정희의 라이벌이라 할 만큼 체계적이었으며 아마 내가 보기에는 한국 대통령 중에서는 박정희 다음으로 사상적인 기반이 확고했었던 정치인이라 평가할 수 있다고 본다.

DJ의 가장 큰 업적은 햇볕정책보다는 경제


김대중의 가장 큰 업적은 경제였다. DJ하면 대부분이 햇볕정책에 초점이 맞춰지는데 김대중 정부의 가장 평가 기준이 될 만한 요소는 경제일 수 밖에 없다. 왜냐면 정권 들어섰을 때 한국 경제가 파탄 상태였기 때문이다. 경제성장률은 -6.7%를 기록했고 실업률은 6.8%, 설비투자는 1997년 대비 -38.8%, 민간소비는 작년 대비 -11.7% 수준으로 뒤떨어졌다. 한마디로 국가 부도 직전의 상황이었으며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할 정도였다.


구조개혁은 과감했다. 대기업이 연쇄도산하고 부실 채권이 GDP의 28% 비중인 112조 원이 되는 상황에서 구조개혁은 불가피했기 때문. 따라서 1998년 2월 구조조정 관련 10개 법률을 개정하였는데 기업회계 기준이 바뀌었으며 기존 채무보증을 2000년까지 해소시키게 했다. 동시에 부실기업 중 부채를 전액 상환하지는 못해도 존속 가치가 청산 가치가 끈 기업은 살리면서 반대 기업은 정리시켰고 은행, 증권사, 투신사 등 금융기관과는 기업구조조정협약을 체결해 워크아웃을 했다. 이로써 부실 금융기관을 정리하고 공적자금 투입을 투입을 통해 금융 기능 정상화 추진 및 기업의 과다 채무 구조를 개선시켰다.


구조개혁 성과는 결과적으로 성공이었다. IMF와 약속한 2004년보다 3년 빠른 2001년에 차입급을 완전 상환하며 "졸업"했고 1998년 -6.7%였던 GDP 성장률은 1999년 10.9%, 2000년 9.3%, 2001년 3.8%, 2002년 7.0%로 안정세로 접어들었다. 경상수지도 1997년 81.7억 달러의 적자에서 1998년 403.7억 달러의 흑자로 돌아섰으며 외국인 투자 유치는 김대중 집권 5년 동안 604.7억 달러를 벌어들이는 수준이었다. 또 외환보유고도 2002년 1,214억 1,300만 달러로 증가하여 2008년 금융위기에서 버틸 발판이 마련되었다.


실물경제에 있어서도 1998년에는 전년 대비 38.8%나 감소한 설비투자가 1999년에는 36.3%, 2000년에는 35.3% 상승하였고 민간 소비 역시 1998년 11.7% 감소에서 1999년 11.0% 상승, 2000년 7.9% 상승으로 이어졌다. 실업률은 IMF 여파로 1998년 6.8%로까지 올랐다가 1999년 6.3%, 2000년 4.1%, 2001년 3.7%, 2002년 3.1%로 이어지며 안정화되었다. 국제신용등급도 사태 당시 투자부적격이었던게 2002년 A-로 오르며 한국 경제의 국제 신뢰를 정상화시켰다.


또 김대중이 잘한 것이라면 IT 산업을 제대로 키웠다는 것이다. 1999년도 예산부터 정보화 예산을 증액해 1조 2,346억원을 기록했고 2002년에 1조 6,114억으로 올랐다. 전체 재정 비율에서는 1998년 1.05%에서 2002년 1.47%로 대폭 상승했고. 거기다가 정보통신 인프라 구축을 하여 초고속국가망 구축을 2000년에 달성, PC 보급을 적극적으로 늘려 인터넷을 확대했다. 중소기업과 벤처기업 창업 지원에도 적극적이었는데 김대중 정부는 1998년부터 총 5년 동안 1조 9,200억 원을 8,000여 개 기업에 지원했다. 그 결과 벤처기업 수는 1998년 2,042개에서 2002년 6월 말 1만 182개로 급증했다. 이는 곧 2002년 중반까지 총 53만 명의 일자리 창출로도 이어졌고.


다만 비판도 있었는데 먼저 구조조정이 원활하게 진행되지 못했고 수많은 노동자들이 실업에 처하게 만들었으며 방만한 경영도 완전히 근절되지 못한 등 전체적으로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당시 전국민의 76%, 호남 거주하는 국민들도 3분의 2가 김대중 정부의 경제팀을 신뢰하지 못할 정도였으며 대기업들도 부채 200%가 넘는 계열사는 경영실적을 개선하거나 회사를 정리하거나의 양자택일 상황을 강요받게 될 정도로 김대중 정부가 취한 외과수술적 처방은 상당히 가혹했었다. 그래도 성공은 했으니 다행이지만...


이처럼 김대중 정부의 경제적 성과가 사실 예상 외로 한국 정치에서 고평가받지 못하는 것은 진영 논리보다도 저때 IMF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흘린 피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김대중 정부 5년은 2002년 한일 월드컵 정도를 제외하면 우리에게 있어서 아름답고 행복했던 시절로 기억되기 보단 일자리 잃고 길바닥에 나앉던 시절로 인식될 수 밖에 없었던 시대였다. 그럼에도 다른 건 몰라도 김대중 정부가 IMF라는 최악의 위기를 극복한 것만큼은 정치 성향을 떠나 인정해줄 필요가 있다.

노태우와 함께 한국 복지제도의 선구자가 된 DJ


전에 글에서 노태우가 오늘날까지 이어져오는 한국 복지 제도의 상당수의 기틀을 다졌다고 했는데 김대중도 이걸 이어서 더욱 확장했던 정치가였다. 김대중이 물론 1997년 대선을 기점으로 상당히 신자유주의적인 기조의 공약들을 들고 나오긴 했지만 대중경제론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기본적으로 복지 강화에 적극 동의했었던 인물이다. 물론 IMF 상황에서 복지 제도를 무턱대고 확대할 수야 없는 여건이지만 그래도 김대중은 본인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으로 한국 복지제도를 손 본 정치인이었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설 당시 한국의 복지제도는 여전히 빈약했다. 박정희 정부 시기 제정된 '생활보호법'에 따르면, 18세 이상 64세 이하인 경우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아무리 빈곤해도 현금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일할 능력이 있다는 이유에서인데 이 때문에 실업자들은 복지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김대중 정부는 이에 "생산적 복지"를 내걸고 시장경제의 부작용, 폐해를 시정하고 보완하는 장치로써 자선이 아닌 인권 차원에서의 복지를 시행하기로 했다.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보장하는 한편, 시장 실패를 시정해서 창의성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2000년부터 국민기초생활보장법으로 시행되었다. 이 제도는 생활이 어려운 자에게 필요한 급여를 행하여 최저 생활을 보장하는 정책으로 수혜자가 보험료를 내야 지급되는 보험이 아니다. 문자 그대로 '생활이 어려운 자'에게 제공되는 공공부조다. 연령과 일할 능력의 유무에 관계없이 소득인정액이 최저생계비보다 적으면 자활공동체 사업 등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국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데 대신 부양의무자 기준을 부여함으로써 부양할 가족이 있는 경우에는 지원 대상에서 제외, 이를 통해 생산적 복지라는 기조를 유지했다.


김대중은 더 나아가 4대 보험을 전부 전국민적 사회안전망으로 범위를 넓혔다. 그동안 산재보험과 의료보험은 박정희 정부, 국민연금은 노태우 정부, 고용보험은 김영삼 정부 때 시행했지만 노태우 때 의료보험이 전국민으로 확대된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 3개 사회보험은 전국민으로 확대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김대중은 고용보험은 1998년 10월, 산재보험은 2000년 7월부터 1인 이상 모든 사업장으로 확대시켰다. 의료보험 역시 분산되어 있었던 것을 한국노총까지 반대하는 상황 속에서 통합시킨 것은 김대중이었고 이로써 지금의 건강보험제도가 완전히 기틀이 잡히게 되었다.


물론 김대중은 1970년대 시기 대중경제론을 집필할 당시 기준에 비하면 집권 이후로 상당한 수준으로 신자유주의 노선으로 이동한 부분은 크다. 왜냐면 대중경제론은 <해방전후사의 인식>의 저자 중 하나이자 마르크스 경제학자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을 기반으로 했기에 그래도 좌파적 색채가 좀 강할 수 밖에 없었지만 1980년대와 1990년대 정계를 잠시 떠나있는 동안 외국에서 마가렛 대처나 앤서니 기든스류의 제3의 길 등을 연구하며 보다 우경화된 경제관을 가졌기 때문. 하지만 부시 정권과 레이건의 규제 완화 및 감세 정책을 비판한다거나 낙수효과만 믿지 말고 돈을 적극적으로 풀어야 한다고 하는 등 신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은 이후로도 복지 확대에는 여전히 적극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정치보복을 안한 대통령


한국 정치사의 역사는 "정치보복" 이 한마디로 정리된다. 물론 잘못한 것은 어느정도 책임져야 하겠지만 한국은 그 정도가 너무 과하다. 김영삼은 전두환, 노태우 외에도 정주영, 김종필, 박철언, 김대중을 상대로 치졸한 정치보복을 해왔으며 이명박은 노무현을 모욕주기식으로 수사하여 같은 당 홍준표 당시 원내대표마저 비판할 정도였다. 반대로 문재인은 이명박과 박근혜를 감옥으로 집어넣고 적폐청산이라는 이름으로 야당을 공격하며 뒤끝있게 이명박근혜 9년에 복수의 정점을 찍었다. 이러한 한국 정치사에서의 정권 잡는 쪽이 전임자에게 보복하는 역사는 뿌리가 오래되었다.


그런데 그걸 안한 대통령이 바로 김대중이었다. 전두환과 노태우의 사면에 큰 역할을 하였으며 박정희대통령 기념관 건립도 지원했었다. 그러면서 제주 4.3 사건 피해자 명예회복이나 민주화 운동 기념 사업 등 다양한 방면에서의 사회 통합을 추진했다. 김대중 시기 여당이었던 새정치국민회의에는 군사정권의 직계 후손들인 민정당 출신들이나 공화당 출신 정치인들도 상당했으며 국무총리이자 DJP 공동 정부의 수반 중 하나였던 김종필은 아예 박정희 최측근 겸 골수 보수 정당 인사였다. 저런 부분에서는 김영삼보다 오히려 김대중이 더 포용력이 있었던 정치가였던 것.


한나라당 당시 의원이자 자신을 죽이려 했었던 박정희의 딸 박근혜와의 화해에도 적극적이었고 노태우 정권의 실세이자 5공 시절 국보위의 인사였던 민정계 박철언은 아예 김종필과 김대중을 중재해 이회창에 맞서는 DJP 연합 창설을 주도하기도 했었다. 심지어 5.16의 참가자이자 포항제철의 사장이었던 박태준은 김종필 후임자로써 국무총리가 되었고 5공 시절 전두환 밑에서 민정당 창당 및 5.17 내란 사태의 책임자 중 하나였던 사람이자 2023년 현재 광복회장을 맡고 있는 이종찬은 김대중 정부 밑에서 국정원장을 했었다.


물론 보수 인사들과 김대중과의 연합은 햇볕정책 등에서 이견을 보이는 등 다소 군열은 있었지만 성과도 컸다. 일단 소수 여당이었던 새정치국민회의가 한나라당의 독식 구조 속에서도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자민련과 김종필 덕택이었으며 군사정권을 아예 부정하던 김영삼과는 달리 어느정도 공을 인정하며 그쪽 인사들과도 가깝게 지냈기에 사회 갈등이 극심하진 않았었다. 김대중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전두환은 아예 DJ 정권 동안 청와대에 초청되어 국정 운영 조언까지 해줬으며 2000년대 초반 한광옥 새천년민주당 대표가 예방했을 때는  "요즘 자꾸 몇몇 사람들이 김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비판하고 그러는데 그 사람들은 달빛정책이라도 내놓으면서 떠들어야한다"며 김대중을 옹호해주기도 했을 정도.

주변국과도 외교 잘함 ㅇㅇ


김대중 하면 보수 진영에서 빨갱이 이미지가 강해서 반미 반일 대통령일 거다 생각하는 사람들이 좀 있는데 정 반대였다. 김대중 정부가 햇볕정책을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외교적 바탕은 미국의 지지 때문이었다. 당시 미국은 빌 클린턴 정권이었고 그들은 김대중이 햇볕정책을 믿고 지지해줬다. 당시까지 한국은 한미동맹 이래 쭉 친미 기조를 유지해온 국가였고 동북아 정세가 그리 나쁘진 않았기에 미국도 한번 북한과의 대화든 뭐든 해보라며 전폭적으로 지지해줬기에 김대중도 미국과의 관계 손상 없이 햇볕정책을 했던 거다. 그 반대로 노무현과 조지 부시의 관계는 김대중과 클린턴 때 만큼 좋지 못했지만.


김대중은 정권 말인 2002년 12월 미국에 관한 입장을 청외대에서 열린 초청회를 통해 밝힌 적이 있었다. 거기서 의정부 여중생 사망사건이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문제로 비약돼 ‘미군 나가라’고 하는 것은 안된다고 확실하게 말하며 당시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 사건으로 반미 감정이 대대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비판했다. 또 그는 미국은 우방으로서 국가 이익에 꼭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주한미군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자세를 보였다. 이는 김대중이 민주화 운동가이긴 해도 운동권과는 성향상 차이가 컸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일본과의 외교, 아마 내가 이게 김대중 정부의 가장 큰 유산이라고 본다. 대표적인 치적이 바로 김대중-오부치 선언인데 아마 이것이 한일관계가 전두환-나카소네 이후로 가장 크게 진전되었던 부분이었다.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반성도 이 선언 당시가 가장 적극적이었으며 실제로 오부치 총리는 당시에 구두 약속이 아닌 문서화로 남게 하며 일제의 식민지배에 대해 사죄했다. 이 선언과 함께 시작된게 바로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었는데 이로써 일본의 영화, 게임, 노래, 애니메이션 등의 문화산업이 해적판 그런 걸로 살 필요 없이 직수입을 통해 자유롭게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김대중-오부치 선언이 이어지지 못한게 아쉬운 부분이라면 그들이 물러난 이후 한일관계가 쭉 악화되는 방향으로 갔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반일 감정을 정치적으로 활용한 한국 정부의 문제도 있는 편이고 반대로 혐한 정서를 지지율에 활용하는 일부 일본 우익 정치가들의 문제도 있는 부분도 있다. 김대중과 오부치 이후 반일 정치인 노무현과 반한 정치인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지도자가 되면서 한일관계는 악화되는 방향으로 갔으며 양국 관계가 개선을 향해가고 있는 현 시점에서도 양국 국민 감정 사이의 골은 도저히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는 김대중의 한일관계 리더쉽을 본받아야 한다.


중국, 러시아하고도 별 탈 없이 잘 지냈었다. 그는 중국, 러시아한테서도 햇볕정책의 지지를 받아내어 4대 강국으로부터 통일 지지를 이끌어냈는데 이는 보수 진영에서 가장 외교의 귀재였던 이승만과 견줄 정도였다. 부시가 들어서고 햇볕정책에 압력을 넣을 때는 일본과 협력해 대응하는 창조적인 외교력을 보였다. 햇볕정책을 얻기 위해 국제사회에서 김대중은 전방위적인 노력을 하며 동남아시아 국가들로도 외교를 확대했다. 이걸 볼 때 김대중은 단순히 민족주의적 감정에만 의거해서 "우리민족끼리"를 외치며 북한과 대화한게 아니라 국제사회 속 각국의 지지를 다 확보해놓고 한 것이었다.

햇볕정책과 여성가족부라는 비판점 논란?


햇볕정책은 김대중의 최악의 실책 중 하나로 꼽힌다. 특히 보수 진영에서는 김대중이 쌀을 보내는 연금술로 북한 핵개발을 도왔다는 얘기를 하기도 한다. 물론 지금에 와서 보면 햇볕정책은 실패한 정책이고 당시에는 도저히 예상 못한 문제점들이 터져나오긴 했었다. 김대중 이후로 민주당이 386 운동권들이 주도권을 잡게 되면서 햇볕정책을 단순히 북한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기브 앤 테이크가 아닌 무조건 도우려는데만 쓰려 했던 것도 햇볕정책의 평가가 깎이는데 일조했다. 햇볕정책을 굳이 이어갈거면 시대에 따라 유도리 있게 했어야 하는데 김대중 이후 민주당은 그러지 못했다.


다만 햇볕정책은 성과와는 별개로 당시로서는 충분히 해볼 만한 정책이었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인식과는 달리 김대중이 우방들을 적대하면서까지 우리민족끼리라는 관점에 입각해서 무지성으로 북한을 돕기만 한 것도 아니었고 그 일본의 우익인 고이즈미 준이치로도 일북정상회담을 했기에 단순히 대화했다고 욕먹을 일은 아니다. 국민의힘 소속 국회의원이자 탈북자인 태영호조차도 북한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거나 지원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조건 하에서는 인도적 대북 지원은 나쁘지 않다고 평하기도 했었다. 거기다가 앞서 말한대로 미국이 당시에 한국의 대북정책을 지지하던 상황이었으니 현실적인 상황 고려 없이 이상으로만 하던 정책도 아니었던 셈.


그러나 어쨌든 결과론에서 실패한 정책이라는 의견에는 틀렸다고는 못하겠다. 물론 북핵 문제는 이건 김대중 한 사람만의 책임이 아니라 민주화 이후 역대 대통령들의 책임이긴 하나 어쨌든 그 중에서는 보수 정권의 대북제재론 뿐만 아니라 DJ-노무현의 햇볕정책도 북핵이 완성 단계에 이르고 더 이상 비핵화가 불가능해진 상황에 책임이 없다고 볼 수는 없다. 즉 쉽게 말하자면 당시로써는 해볼 만한 정책이었던 것은 사실이고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어느정도 정부가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하면서 추진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햇볕정책은 2010년 천안함 사건 그 하나만으로도 시효가 다했고 지금 똑같이 그대로 적용하기엔 무리가 있는 정책이라고 볼 수 있다.


https://inews.ewha.ac.kr/news/articleView.html?idxno=4936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04310720?sid=103

여성가족부 창설은 김대중 잘못이냐 아니냐로 논쟁이 많은데 일단 여성부 만든 건 김대중이 맞다. 이건 팩트니까 부정할 수도 없는 사실인거고. 그러나 한나라당 역시 대선 당시 여성부 창설을 공약했고 기사를 보면 알겠지만 아예 여성부총리 창설 드립을 치고 있다. 그리고 김대중 정부는 집권 이후로는 여성특별위원회만 두면서 정작 여성부 창설에 상당히 소극적이었는데 그러다가 정부조직개편안 문제로 한나라당과 타협해서 만든게 여성부, 오늘날 여성가족부라 불리는 조직이었다. 이 여성부가 여성가족부로 바뀐 것은 참여정부였으며 그때 가장 많이 예산이 올랐었다.


무엇보다 한국에서 젠더 갈등이 최소한 나름 떠들만한 이슈로 부상된 것은 성재기가 활동하던 당시도 아니고 2016년 강남역 시위 사건과 그해에 있었던 정의당 메갈리아 옹호 논란 때였다. 그 전에 김대중은 이미 죽은지 한참 되었었고. 굳이 근원적으로 누가 잘잘못 했는지 따지겠다면야 뭐 김대중이 아예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솔직히 오늘날에 벌어지는 젠더 갈등의 "핵심적" 책임을 김대중한테 묻고 있는 것을 보면 경복궁 무너지는 상황이 생기면 흥선대원군 책임 찾겠다는 논리와 뭐가 다른건지 모르겠다.

맺음말: 최후의 리버럴 대통령


민주화 이후 대통령들은 저마다의 의의가 있었다. 가령 노태우는 저번 글에서 얘기한대로 군사정권과 민주화 시대 사이의 과도기에서 딱 맞는 유연한 리더쉽을 보였으며 김영삼은 하나회를 척결하고 문민 대통령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그리고 김대중의 집권은 한국이 과도기를 지나 완전한 민주화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중대한 사건이었으며 또 그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최대한 갈등이 발생하는 것을 자제했었던 대통령이었다.


그러는 동시에 최후의 "리버럴" 대통령이었던 정치인이 바로 김대중이었다. 난 자유주의라는 이념에는 다소 비판적인 편이지만 김대중은 어쨌든 그에 대한 신념 만큼은 확고했었던 사람이고 또 다른 의견 자체에 귀를 틀어막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때가 아마 한국에서 가장 본래 의미로써의 자유주의에 부합하는 정책들이 가장 많이 시행되었던 시기였으며 자유주의에 비판적인 내가 보기에도 생각보다 상당한 성과를 거뒀었던 정권이었다. 그런 점에서 김대중의 사례는 한국에서 가장 성공적인 리버럴 대통령인 동시에 마지막 리버럴 대통령이었다.


오늘날 한국에서 정치 및 사회와 각종 분야에서 갈등들이 심각해지는 상황 속에서 6공 이래 김대중이라는 대통령은 민주화 이후 대통령 중 노태우와 함께 가장 뛰어나고 안정적인 리더쉽을 보였었던 사례로써 지금 한국 정치와 사회 갈등에 충분한 시사점이 될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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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면 좋은 글)


참고 문헌:


김대중, <김대중 자서전 2>, 삼인, 2011

김대중, <대중 참여 경제론>, 산하, 1997

김택근, <새벽: 김대중 평전>, 사계절, 2012

유성엽 외, <DJ에게 배워라>, 새빛, 2020

박철희, <한일관계 50년 비교사적 이해>, 대한민국역사박물관, 2016

장신기,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 김대중 재평가>, 시대의창, 2021

이동형, <김대중 VS 김영삼>, 왕의서재, 2011

이장규, <대한민국 대통령들의 한국경제 이야기 2: 노태우 대통령부터 이명박 대통령까지 민주화 25년>, 살림, 2014

강준식, <대한민국의 대통령들>, 김영사, 2017

최은미,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20주년 의의와 한일관계 -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쉽>, 국립연구원 외교안보연구소, 2018

박철희, <한 · 미 · 일 안보협력 제고방안>, 한국전략문제연구소, 2017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5249

http://www.ikbn.news/mobile/article.html?no=143498

http://www.goodkyung.com/news/articleView.html?idxno=11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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