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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Aug 31. 2023

홍범도는 과연 자유시에서 독립군을 학살했나

홍범도에 대한 논쟁 거리를 파헤쳐보자

https://youtu.be/VxR_BYPG7v4?si=YdyzDrYgBGhrVMiC

서론


최근 육군사관학교의 홍범도 흉상이 이전된다는 논란으로 발칵 뒤집힌 상태다. 홍범도 뿐만 아니라 이회영, 이범석, 지청천 등 다른 독립군 흉상들도 이전되기로 예정되어 있는데 이 중 국방부가 특히 홍범도 흉상을 철거하겠다고 밝힌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가 소련 공산당에서 활동했었던 전력 때문이다. 또 이걸 옹호하는 우파 인사들은 아예 홍범도가 공산주의자라는 근거를 들며 자유시 참변에서 몇천명의 독립군을 학살한 전범이라는 식으로 얘기한다.


그렇다면 홍범도는 과연 자유시 참변에서 소련의 밑에서 수천의 독립군의 목숨을 빼앗고 더 나아가 한국의 독립보다 소련의 공산당에 충성을 바치던 전형적인 국제 공산주의자였는가? 이 글에서는 여러가지 쟁점을 통해 홍범도를 둘러싼 여러 쟁점들을 다뤄볼 것이다.

쟁점 1: 왜 홍범도는 소비에트에 붙었는가?


일단 이것부터 말하고 시작하자면 당시로써는 그거 외에는 선택지가 없는 상황이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벌어지고 적백내전이 발발한 이래 반공 세력인 백군은 일본군과 손을 잡은 상태였으며 당연히 백군 세력은 자신들의 후원자인 일본군과 결탁해 현지의 한국 독립운동 세력들을 강경히 억압하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만주 지역의 실세인 장쭤린의 봉천군벌 세력들은 1920년대에 미쓰야 협정을 맺고 독립군을 탄압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시베리아, 극동의 한국 독립운동 세력들은 참 난감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는데 이때 마침 레닌이 피지배 국가의 민족해방론을 꺼내며 코민테른을 창설했으니 한국 독립운동가들 입장에서는 꽤 끌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실제로 당시에는 식민지배를 받는 지역이나 서구 열강의 침탈 위협을 받는 지역에서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소련과 손잡는 일이 의외로 많았다. 터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아타튀르크 케말이 국내적으로는 공산당을 탄압하면서 외부적으로 소련과 보조를 맞췄었던 케이스이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최대 후원자가 되는 중국 국민당이나 훗날 그곳의 지도자가 되어 "반공대륙"을 주장하는 장제스도 국공합작을 맺으면서까지 소련과 친선관계를 유지해 지원을 받아 북벌전쟁을 펼쳤었다. 그러니 즉 단순히 소련과 손은 잡은 것만으로는 비난하기 어렵다는 얘기.


홍범도가 좌익 계열의 한인사회당에 몸담기 시작했었던 것은 케렌스키 임시정부가 독일과의 전쟁을 지속하기로 결정했을 때였다. 만약 독일과 러시아가 전쟁을 지속한다면 케렌스키가 일본하고 손잡을 수 밖에 없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1917년 한인사회당 대표자 대회에서 소비에트 및 볼셰비키에 대한 지지를 하게 된 것이었고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선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 1918년 6월 말 마침내 한인사회당 적위군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여기에는 홍범도의 무장부대도 합세해 백군으로부터 하바롭스크를 지키기 위해 방어전을 치르기도 하였다.


적백내전 시기 소비에트 적군의 편에 서서 일본군과 싸웠던 이들은 대부분 귀화하지 않은 한인들이었다. 러시아 지역 한인빨치산 부대는 연해주 지역의 비귀화 한인들과 간도와 한반도에서 건너온 조선인들이었다. 물론 러시아 지역 내 한인들은 1차세계대전 당시 제정 러시아군으로 참전하는 등 군사적 경험이 있었다만 한인 빨치산부대에는 큰 영향을 못줬다. 오히려 한인 빨치산 조직 운영에 영향을 준 것은 일본이나 중국에서 군사 교육을 받고 건너온 한인 청년들이었다.


소련 공산당 가입 문제는 소련에서 거주하기 시작한 이상 거기서 살아남을려면 안할 수가 없다. 소련은 공산주의 국가라 국가보다 당이 먼저인 나라이고 홍범도는 현지 한인들의 지도자였던 만큼 가입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거기다가 홍범도는 1937년 한인 강제 이주로 중앙아시아에 강제로 끌려갔었던 사람인데다가 무엇보다 북한 정권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다. 1943년에 사망하였으며 김일성은 커녕 고려 공산당 이후에 등장한 조선 공산당의 박헌영이나 이강국, 리승엽 등과도 아무런 접점도 없었다. 참고로 조선 공산당 활동가들 중 박헌영 같이 북한 정권 가담자였던 이들은 당연히 복권이 어렵다만 그래도 이재유 같이 해방 이전에 죽었던 사람들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고 있다.


김원봉이나 박헌영 같이 6.25나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한 혐의가 있는 사람들은 솔직히 한국 정부 차원에서 독립유공자라며 보상해주는 걸 꺼리는 심정은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아무리 독립운동 업적이 커도 북한과 연계되어 있으면 분단 상황 속에서 민감한 문제가 될 수 있으니까. 마찬가지로 최근에 논란인 정율성 기념공원에 대해서도 난 상당히 부정적인 편이며 단순히 중국 건국에 기여한 걸 넘어 6.25 때 문화재 약탈한 중국인을 굳이 우리가 나서서 추모해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홍범도는? 도대체 홍범도가 북한 정권에 참여하기를 했나, 아니면 6.25 남침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나, 살아생전에 김일성을 찬양하기를 했나? 그저 공산당과 연관된 활동을 했을 뿐이지 우리나라 체제에 위협이 되는 짓은 한게 뭐가 있나?


무엇보다 홍범도에게 처음으로 건국훈장을 1962년에 수여한 것은 다름 아닌 박정희였다. 이동휘, 여운형. 이재유, 그리고 추서가 논의되었으나 논란으로 사실상 물건너간 김원봉까지 한국에서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재조명은 최소 민주화 이후부터야 논의되던 사안이었다. 그렇기에 군사정권 시기에는 냉전 논리에 따라 공산주의와 연관된 독립운동가들을 재조명하는 분위기가 금기시되었는데 그 와중에도 홍범도 만큼은 냉전 논리에 휘말리지 않고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그래도 그가 한국 정부가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의 극좌 사상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는 걸 보여주는 증표이다.


"그래도 공산당과 손잡는 거는 아니지!"라고 생각할 사람들이 있을텐데 당시 상황을 알면 절대 그런 소리 못한다. 일단 그 시점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에 도움을 줄 만한 국가는 거의 없었다. 중국?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 국민당에게 본격적으로 후원받기 시작한 것은 적어도 그들이 북벌전쟁을 끝내고 최대 위협이었던 동북군벌이 "동북역치"를 통해 명목적으로나마 자신들의 밑으로 들어왔던 시기(그마저도 만주사변으로 동북군은 크게 약화된다) 이후인 1930년대 홍커우 의거 때부터로 그 전까진 기껏해야 황포군관학교에 조선인들이 입학하는 수준이었다. 미국 등에서는 외교독립론자들이 투쟁을 벌였지만 솔직히 그것도 큰 효과는 없었다. 결과론적으로 소련이 어떤 나라였는지를 떠나 당시의 기준으로 보자면 그런 상황 속에서 소련이 들고 나온 민족해방론은 솔직히 구미가 안땡길 수가 없는 것이었다.

쟁점 2: 자유시 참변에서 박살난 사할린 부대와 진압 측의 깔란다리쉬빌리


자유시 참변이 물론 비극적인 일인 건 사실이고 이 일 때문에 한국 독립운동 세력이 크게 약화된 것도 사실이다. 홍범도에게 자유시 참변의 책임을 덤탱이 씌우는 이들은 이 사건에서 무고한 독립군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잔인하고 냉혈한 공산주의자들과 적군 계열의 전쟁범죄자였던 깔란다리쉬빌리에 의해 학살당했다는 식으로 얘기하는데 이때 해체당하고 진압된 상해파 조직인 사할린 의용대 만큼은 딱히 깨끗한 조직이라고 보기가 어렵다. 그건 자유시 참변 이전에 있었던 니콜라옙스크 사건(일명 "니항사건")의 주범이기 때문.


1920년 니콜라옙스크 전투 당시 이 지역을 포위한 적군 빨치산은 야코프 트랴피친이 이끄는 부대였다. 이때 트랴피친은 주변 한인들을 포섭하였고 그 결과 참모장으로 박 일리야가 취임했다. 박 일리야는 이동휘가 이끄는 고려 공산당 상해파의 지원을 받아 니항부대를 조직하였고 4개 중대로 총합 400명 가량으로 구성, 또 피복과 장비는 트랴피친으로부터 직통으로 받는 상당한 수준의 빨치산 부대였다. 니콜라옙스크를 점령한 빨치산들은 일본 거류민들을 닥치는대로 학살했고 철수하기 전 마을을 다 불태워버렸다. 얼음이 녹고 일본군이 올 만한 루트가 생긴 후에는 트랴피친이 빨치산 부대에게 명령을 내려 남은 주민들을 전부 다 살육하고 도시를 완전히 파괴해버린다. 이렇게 죽은 사람만 몇백 명인데 여기에는 한국인들로 구성된 니항부대가 트랴피친의 돌격대 노릇을 했다.


그러나 트랴피친은 지나친 학살극을 벌인 나머지 빨치산 내부 쿠데타로 인해 축출되어 사형되었고 이때 한인부대 사령관 사쏘프도 같이 처형당한다. 강가의 마을을 비롯해 트랴피친 빨치산 부대가 지나가는 지역마다 시체가 한둘씩은 보였을 정도로 잔인했었는지라 내부에서 악행에 대해 질릴대로 질린 사람들이 많았었다. 이후 상해파는 트랴피친과 함께 니항 사건을 벌였던 박 일리야의 사할린 의용대를 그대로 지지하였고 반면 이르쿠츠크파는 자유대대를 밀었다. 이러면서 한인 공산주의 운동은 갈라지게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합하기 위한 노력이 벌어지고 한인사회당의 주도로 간도로 이동해온 독립군 부대를 아무르 주 자유시에 집결하여 통합하고자 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점은 상해파 부대 중에는 상당히 지저분한 이력이 있던 세력들도 다수 존재한다는 것이다. 반면 반대편에서 사할린 의용대를 학살한 깔란다리쉬빌리 역시 애초에 공산주의자보다도 아나키스트에 가까운 사람이었으며 그렇기에 전략적으로 사고하는 것보다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편이었다. 극동의 나폴레옹을 꿈꾸던 깔란다리쉬빌리는 더 나아가 슈먀츠키와 이르쿠츠크파 빨치산부대장 오하묵, 최고려 등과 함께 한국 국내에서 무장투쟁을 벌이려 하는 등 그래도 우리나라 독립전쟁에는 보다 적극적이었지만 적백내전 시기에는 백군 병사들의 목을 걸어놓고 다니는 등 굉장히 잔인한 전쟁범죄 행위를 일삼기도 하던 이면도 어느정도 존재했다.

쟁점 3: 일각에서 외면하고 있는 자유시 참변의 전말과 홍범도의 선택


자유시에 집결한 독립군의 주도권을 쥔 것은 니콜라옙스크 사건 당시 트랴피친의 밑에서 복무했던 박 일리야였다. 1920년 1월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내 한인 부대들을 모아 재조직하기로 하였고 이 부대는 "특립사할린빨치산부대", 속칭 사할린 부대라는 이름을 얻었다. 박창은은 박 일리야를 군정위원으로 임명하고 자유대대를 자신의 밑으로 집어넣었으며 그 결과 7개 중대 3개 대대로 구성된 빨치산 부대가 완편되었다. 동시에 멀리 떨어져 있었던 한인 빨치산 부대들을 극동공화국의 허가 아래 계속 모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1921년 3월경에 열린 전한의병대회에서 자유대대가 무시당하자 간도에서 온 독립군 부대들과의 분열이 시작되었고 이들은 최고려 등과 손잡고 치타로 가서 극동공화국 정부와 직접 교섭하고 특별한인군사협의회를 개최했다. 이 협의회는 결론적으로 실패하면서 특립사할린빨치산부대를 극동보병민족혁명연대로 탈바꿈하는 건 무위로 돌아갔고 당연히 부대장 김 인노겐치, 군정위원 박 일리야를 해임 및 연대장에 오하묵, 군정위원에 최성우를 세우는 것 또한 물거품이 되었다. 이후 협의회에 참석한 최광윤, 김 표도르, 오하묵 등은 코민테른 극동비서부가 조직한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에 가담하여 전한군사위원회로부터 주도권을 빼앗기 위한 싸움에 돌입했다.


3월 이후 러시아 공산당과 코민테른은 칼란다리쉬빌리를 파견해 그를 총사령관으로, 김하석과 최고려를 위원으로, 오하묵을 부사령관으로 하는 고려혁명군정의회를 조직했다. 여기에는 5군단 캅카스 기병 600명과 한인부대 600명이 부속되었으며 오하묵을 앞세워 자유시로 출병했다. 이렇게 하여 자유시에는 고려혁명군정의회가 마자노프에는 전한군사위원회가 동시에 있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 상황에서 깔란다리쉬빌리가 자유시에 직접 와서 정식고려혁명군정의회가 출범했으며 이로써 통합의 주도권은 군정의회가 쥐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홍범도는 통합의 주도권을 쥔 세력으로 군정의회를 인정했으며 사할린 부대를 부정했다. 이건 소련 공산당 밑으로 들어가겠다고 한게 아니라 이르쿠츠크파 주도의 통합을 지지하겠다고 한 것이었다. 홍범도 뿐만 아니라 간도에서 온 독립군 부대의 상당수가 군정의회를 지지했는데 무장부대 통합, 소련에 대한 지지를 통한 지원, 무기와 식량의 안정적인 수급이라는 현실적인 과제 때문이었다. 특히 군정의회는 카자크 기병 600명과 한인병사 600명을 보유하고 있기에 이들이 더 현실적으로 독립전쟁에 있어서 한 축을 맡게 될 가능성이 높았었다. 6월 19일, 모든 무장부대 통합을 위한 한인 무장부대 전체 간부 회의가 열렸는데 여기서 사할린 부대에 대한 사면을 조건으로 고려혁명군정의회 중심으로 통합하겠다는 결론이 났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 외무인민위원 치체린은 1921년 6월 9일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앞으로 보낸 서한에서 ‘한인 빨치산들을 비밀리에 반드시 지원해야 하고, 지금은 공공연한 적대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6월 10일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는 ‘한인부대들은 러시아 영토에 머물면서 적극 행동에 나서기 위해 적절한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는 치체린의 제안을 채택했다. 그러나 깔란다리쉬빌리는 이러한 입장을 사실상 듣지도 않은 채 독단적으로 사할린 부대를 무장해제 시키려 들었고 이 일 이후로 고려 공산당 상해파, 이르쿠츠크파 모두 와해되어 소련이 한국 공산주의자들의 내분으로 자멸하는 모습에 크게 실망하는 계기도 되었다.


깔란다리쉬빌리는 먼저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소속 자유시 수비대에 사할린부대를 무장해제시킬 것을 요청했다. 최후통첩을 받은 사할린부대 책임자들은 무장해제하지 않고 버티다가 결국 오후 2시 20분 인민혁명군 병력 1,000명과 칼란드라시빌리 사령부에 속한 한인 병사 300명들이 공격을 시작하면서 비극이 벌어졌다. 이 사건 속 사상자가 몇명이냐를 가지고 논란인데 몇백명까지는 꽤 오바한 것 같고 아마 몇십명 단위의 사상자가 아닐까 생각한다. 실제로 권희영 교수나 한국 근현대사 전문가들도 그 정도로 보고 있으니.


여기서 홍범도의 부대가 자유시 참변에 가담했다는 기록은 일각의 주장과는 달리 전혀 없다. 참변 당시 홍범도는 휘하 장교들과 인근 솔밭에 모여 땅을 치며 통곡했다는 증언도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홍범도는 사건이 벌어질 시점에서 참변 현장에 없었다는게 기록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며 그는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양쪽 중간에 섰던 사람이기에 니콜라옙스크 사건의 가해자인 박 일리야 쪽과도, 반대로 깔란다리쉬빌리 쪽과도 크게 상관이 없었다. 홍범도는 한인사회당 등 이동휘 계열 쪽과 같은 행보를 보인 적이 있었지만 후에는 이르쿠츠크파에도 어느정도 동조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기도 했으며 애초에 상해파가 소련 본국과 더 가까웠던 것으로 보아 깔란다리쉬빌리와 결탁한 이르쿠츠크파가 소련 지시로 학살한 사건은 전혀 아니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홍범도를 자유시 참변 문제로 까대는 측은 애초에 당사자 사할린부대가 군정의회의 명령에 따라 자유시에서 약 3킬로미터 떨어진 소도시 수라세프까로 이동해서 거기서 사건이 벌어지고 반대로 홍범도, 지청천 등의 간도 독립군 부대들이 마자노프를 떠나 자유시에 있었을 무렵이었던게 당일의 상황이었다는 걸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는 얘기다. 실제로 자유시 참변이 벌어진 장은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자유시가 아니라 인근의 수라세프까라는 지역이었다. 이들의 행태는 적극적으로 싸움이나 편가르기에 가담하지도 않았던 애먼 사람만 욕해대면서 정작 트랴피친 같은 극좌 모험주의자들과 같이 싸운 것도 모자라 실제로 전쟁범죄 행위를 저지른 측인 사할린 의용대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독립군이었다며 띄워주고 있는 셈.

쟁점 4: 홍범도만 옮기는게 아니라서 더 문제


북한 정권 세우기도 한참 전인 1943년에 죽은 홍범도한테 빨갱이 딱지 씌워서 어떻게든 흉상 끌어내리려고 하는 것도 웃긴데 그래 설령 홍범도가 소련에서 활동했으니까 빨갱이라 치고 넘어간다 해도 왜 다른 사람들은 이전하려고 하는데? 이회영, 이범석, 김좌진, 지청천은 공산주의와는 사상적으로 아무런 상관이 없던 사람이고 지청천, 이범석은 아예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했던 사람이다. 그 둘은 그것도 이승만 정부 밑에서 각각 장관과 국무총리를 했었는데 이게 공산당과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다.


이회영, 물론 아나키스트긴 했다. 근데 동시에 신흥무관학교라는 육군사관학교의 모체를 설립한 사람이기도 하다. 또 해방 이전에 죽었기에 같은 아나키스트였던 김원봉과는 달리 북한 정권과도 상관이 없다. 이회영이 아나키스트니까 흔적을 지워야 한다는 논리면 같은 기준으로 <조선혁명선언>을 쓴 신채호부터 싸그리 한국 내에서 흔적을 지워야 할 것이다. 거기다가 이회영의 손자인 이종찬은 5공화국 시절  5.17 내란에 참여했었던 국보위 인사였는데다가 노태우 정부에서 장관직까지 지냈던 사람이다.


김좌진, 역시 아나키스트였다. 그러나 알다시피 김좌진의 최후는 공산주의자에게 암살당하는 것이었다. 최근에 신민부 시절에 벌인 빈주 사건 등으로 인식이 조금 떨어졌긴 한데 그것과 별개로 독립운동에서 남긴 족적은 청산리 전투만 봐도 크다고 볼 수 있다. 평생을 반공주의자로 살아오며 공산주의자와는 절대 타협하지 않는 성격이었으며 이 때문에 독립운동 진영 내부에서도 호불호가 많이 갈렸었다. 아들 김두한은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보듯이 백색테러의 주도자였으며 손녀 김을동은 새누리당에서 국회의원을 하기도 했었다.


지청천, 이범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출신이자 해방 이후에는 정부 수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사람이다. 지청천은 병역법을 제정한 사람이었으며 이범석은 족청이라는 조직을 운영하고 안호상, 양우정을 통해 일민주의라는 유사 파시즘 사상을 체계화시키며 미군정으로부터도 위험한 네오나치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공산주의와는 영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게다가 이범석은 대한민국의 초대 국무총리까지 올랐었던 사람으로 어찌보면 우파 진영에서 그렇게나 강조하던 건국의 주역임과 동시에 확고한 우익 인사였던 사람이다.


결국 이 다섯 명의 흉상을 철거한다는 것은 아무런 명분도 없고 오히려 스스로 욕해달라고 하며 욕받이를 자처하는 꼴이 되겠다는 것에 불과하다. 게다가 대응하는 꼬라지가 더욱 어처구니 없는 것은 빨갱이 몰이 논리 가져와서 이미 죽은지도 한참된 홍범도를 무덤에서 꺼내와 부관참시짓 하는건데 내가 그들에게 묻고 싶은 건 "어떻게 독립운동가를 푸대접하느냐"가 아니라 "홍범도가 그렇게까지 싫어해야 할 이유가 있는건가" 쪽이다.

쟁점 5: 홍범도를 파헤치면 그 다음은 누군데?


2020년 백선엽이 사망했을 때 국립묘지 안장 논란을 두고 한국 사회에서는 한 차례 분열이 크게 벌어졌다. 어떤 이들은 일제의 주구가 감히 국립묘지에 들어가는 것은 허용할 수 없다며 반드시 파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또 누군가는 과오가 있지만 그래도 6.25 전쟁에서 북한의 적화를 막아냈다는 공 만큼은 확실한 인물이니 그걸 감안하여 국립묘지에 두어야 한다고 했었다. 거의 양쪽 모두 토착왜구 혹은 빨갱이라는 말들로 서로 정치적인 논쟁을 이어갔었다.


그때 나는 의외일지도 모르지만 백선엽의 안장을 동의했다. 백선엽의 친일 경력이라는 과오를 부정해서도 아니고, 그의 행적을 필요 이상으로 숭상해서도 아니다. 그저 백선엽이 진짜로 파묘된다면 다음은 누가 역사재판의 대상이 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한국 현대사를 살아온 이들 중에는 워낙 격변의 시대였던 만큼 100% 깨끗한 사람이 없었다. 이승만은 말할 것도 없고 김구조차도 국제 공산당 자금 사건이나 해방 정국에 각종 테러들을 벌이며 백의사라는 조직과 연관되어 있다는 의혹이 있으며 이범석은 히틀러를 좋아하는 파시스트에, 안중근은 러일전쟁을 지지한 적이 있었다.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이야 워낙 한국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인식이 안좋기 짝이 없으니 뺐고.


그렇기에 일제시대와 해방 정국을 살아온 이들은 저마다의 공과 과오가 있는지라 만약 홍범도가 이번에 끌여내려지면 다음에는 누가 정치적인 논리에 따라 역사 재판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 시대의 기준이 아닌 오늘날 정치적인 기준으로 재단하여 누군가는 친일 경력이 있었다는 이유로, 또 누군가는 좌익 경력이나 소련에서 활동했었다는 이유로 매장당하게끔 될 것이다. 백선엽이 파묘된다면 또 다른 이도 공이 큼에도 친일 경력이 있었다는 이유로 똑같은 꼴을 당할 것이고 홍범도가 좌익 경력이 있다는 이유로 끌여내려지고 그저 소련에 부역한 한낱 빨갱이로 취급당한다면 다른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도 북한과 연관성이 없음에도 매도당하게 될 게 뻔하다.


그래서 내 생각은 홍범도의 좌익 경력이 백번 양보해서 설령 흠이라고 할지라도 어느정도 감안하여 넘어가줄 필요가 있다. 이제는 친일파 몰이던 빨갱이 몰이던 역사 속에서 살아왔던 누군가를 무덤에서 굳이 끄집어내어 현세의 사람들이, 현세의 정치적인 기준으로 역사재판을 하며 자기 진영에 맞게 선택적으로 부관참시하는 것도 질린다. 그렇게 아무나 부관참시하고 나면 대한민국에 영웅 혹은 애국지사라 할 만한 사람은 한 명도 남지 않을 뿐더러 우리나라의 정통성만 스스로 박살내는 지름길일 뿐이다. 그러니 역사 속의 인물은 그 시대의 기준으로 보면서 공과를 둘다 파악해야지, 저 놈은 악마고 저 분은 민족의 영웅이고 이런 식으로 보는 건 저급한 진영 논리에 불과하다.

맺음말: 죽은 사람 부관참시 좀 작작하자


지금 육군사관학교가 하고 있는 짓은 북한의 선전선동에 오히려 떡밥을 던져주고 있는 짓거리다. 북한이 항상 하는 소리가 대한민국은 친일파가 미국의 도움을 받아 세운 식민지적인 괴뢰국이라는건데 저렇게 있는 독립운동가 흉상마저 철거하려 들면은 그거는 북한한테 공격받을 거리나 더 제공해주는 행위인 것이다. 그것도 북한 정권과 상관이 1도 없는 독립운동가들의 흉상마저 철거한다는 것은 사실 명분조차도 없는 행태임과 더불어 안 그래도 오염수 문제로 욕먹고 있는 정부 입장에서는 더더욱 친일 프레임이 먹히게끔 유도하는 자폭에 불과하다.


이런 걸 보면 내가 조금 회의가 드는 지점이 동상이 오히려 이미 죽은 고인에 대한 모욕이 되고 있다는 부분이다. 한국에서 항상 누구 동상 세운다 철거한다로 싸우는게 좌우할 것 없이 일상인데 그러는 과정에 양쪽 모두 얻는 것이라고는 이미 죽은 고인을 무덤에서 끄집어내어 부관참시해 전시시켜놓는 것 말고는 없다. 뭐 그것도 실익적인 측면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는 짓일 뿐이지만. 어떨 때는 가끔 이럴 바에 아예 처음부터 세우지 않는게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할 정도인데 아마 중요한 건 동상으로 죽은 이를 기억하기 보다는 서적이나 연구를 통해 널리 알리는게 더 확실하지 않을까라는 고민도 있다.


아무튼 지금 정부가 독립운동가들 흉상 철거하는 짓을 하는 건 내가 보기엔 순전히 부관참시용 말고는 뭘 더하겠나 싶기도 한다. 국방부 대변인이라는 작자는 홍범도가 한인 빨치산이었던 걸 가지고 빨갱이 드립치는데 진짜 빨치산이라는 사전적 용어에 대한 이해도 없는 거 같다. 심지어 홍범도는 손원일급 잠수함의 공식적인 함명으로 사용되는데도. 홍범도 철거한 자리에다가 백선엽이나 맥아더 흉상 세운다는 얘기도 있는데 친일 경력 탓에 논란이 더 심하게 날 만한 사람인 백선엽은 되고 홍범도는 왜 안된다는건지 모르겠고 맥아더는 도대체 외국 장군을 왜 한국 육군사관학교에다가 세우는건지 납득이 안간다.


이미 죽은 고인을 능멸하기 위한 도구로써 동상 이전 추진을 한다는 발상 자체도 어처구니 없을 뿐더러 북한 정권과도 상관 없는 사람들까지도 한데 묶어서 빨갱이로 취급하는 생각 자체가 그저 한심하기 짝이 이를 때가 없을 뿐이다.


참고 문헌: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 1918-1922>,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윤상원, <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사변>, 한국사연구회, 한국사연구 (178), 2017

권희영, <자유시 사변 연구, 한인 사회주의 운동연구>, 국학자료원, 1999

이지택, <니항 사변과 독립군>, 新東亞, 통권 제45호, 1968

조한나, <7차 교육과정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의 자유시 참변 서술 연구>, 성신여자대학교 교육대학 석사학위논문, 2007

신주백, <독립전쟁과 1921년 6월의 자유시 참변>, 지식의 지평, 지식의 지평 제31호, 2021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90807029010

https://m.hankookilbo.com/News/Read/A2023082914540000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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