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그것의 진짜 의미
광복절이 되서 쓰는 그냥 아무 의미 없는 넋두리 사변
- 일각에서는 말한다. 우리나라는 스스로 독립을 쟁취해낸 것이 아니라 미국이 떨어뜨린 원자폭탄 두 방에 의해 광복을 맞은 것이라고. 리틀보이와 팻맨이 한국의 가장 큰 독립운동가이며 임팔 작전을 말아먹은 무다구치 렌야가 진정한 한국 광복군 총사령관이라는 밈 역시 한국 독립에는 미국의 공로와 일본군의 자폭이 자초한 부분이 크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함축하고 있다. 이런 말들이 나오는 건 건국 이래 한국을 지배하던 내셔널리즘 이데올로기가 상당 부분 해체된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 반면 북한은 아예 한반도 이북 지역을 해방시킨 걸 김일성과 항일 유격대의 업적이라고 칭하고 있다. 만주와 북한 지역에 항일 유격대가 진군했다는 것인데 애초부터 김일성이 소속되어 있는 88여단은 만주 전략 공세 작전에 참가하지 않았기에 실질적으로 북한으로 진주한 것은 치스차코프 대장이 이끄는 소련군 제25군이었다. 국내 NL 진영에서는 김일성이 이끈 인민혁명군이 웅기·나진·청진지구 전투에서 활약했다고 주장하나 이는 간단하게 김일성이 소련 제25군 정치위원 레베데프에게 자신들이 일본군과의 전투에 참전한 것으로 서술해달라고 간청한 것이나 김일성이 평양에서 처음 연설한게 10월 14일이었다는 사료만으로도 반박이 가능한 헛소리에 불과하다.
- 다시 국내 독립운동의 얘기로 돌아와 냉정히 말하자면 가시적인 성과가 많지 않기는 했다. 윤봉길의 홍커우 의거에 장제스는 임정을 지원해줬지만 광복군은 중국 국민당군의 통제 하에 있었으며 독립군이 가장 세가 컸었던 시절에조차 수천명 단위였지, 만명으로 확대되진 못했다는 점에서 수백만 단위의 군대를 중국 대륙 및 태평양 지역에서 굴리던 일본군에게 상처 하나낼 수 없었다. 거기에 더해 독립운동 내부의 분열로 이승만과 임정이 결별하거나 김립 피살 사건, 자유시 참변이 벌어지는 등의 문제들이 벌어지며 제대로 규합이 안되었다. 한마디로 저 상황에서 일본한테 타격을 주기란 쉽지 않았다.
- 그렇지만 독립운동은 분명 위대했다고 난 말할 수 있다. 방금 전까지 까놓고서 뭔 소리하냐고 생각할텐데 내가 독립운동을 고평가하는 건 물질적인 성과가 아니다. 우리에게 독립운동이란 그 과정에서 근대적 개념으로써의 '국민'이 한반도에 탄생한게 가장 중요한 포인트였다. 에르네스트 르낭은 <민족이란 무엇인가>에서 "승리의 역사보단 패배, 억압, 고통의 기억을 공유할 때 민족성이 생겨난다"고 말했다. 또 장 자크 루소는 인간은 자연적으로 태어났지만 그것은 그저 인간일 뿐이며(Natio), 인간은 여러 가지 과정을 통해 국민(Nation)으로 "만들어진다"라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국민주의란 통치 수단이 아니라 그것이 국민들에게 승인되고 직접적으로 다가와야 비로소 국민에게 습득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 체험은 일제시대와 그 시기에 있었던 독립운동이었다.
- 그렇게 독립운동은 홍경래의 난과 동학농민운동을 넘어서 전국 각지에서의 민족 의식을 함양하고 이를 통해 국민 국가에 도달하게 하는 것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 전까지는 마을 공동체나 종교 공동체에 머물러 있었던 봉기가 이제는 국가라는 대의로 발전하였고 이에 따라 전근대 시절 군주를 보호하기 위해 들고 일어났던 수동적인 국가관이 모든 계층이 함께 국가를 되찾는다는 능동적인 국민 국가 중심의 가치관으로 변화하였다. 여기까지 오게 된 경험은 3.1 운동과 항일 무장투쟁이었으며 이걸 통해 한국인들은 전근대 왕조의 수동적인 백성에서 근대 국가의 역동적인 국민으로 성장하였고 이 정신은 4.19, 5.18, 6월 항쟁 같은 국민적 저항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성과는 겉으로 보기엔 보잘 것 없고 특히 북한이 자신들을 정당화할 목적으로 악용하고 있기에 다소 주저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군사적인 성과에서 우리나라 독립운동은 스스로 일제를 파멸시키고 주권을 되찾는 것으로 이어지지 못한 건 나도 인정한다. 그 부분은 독립전쟁으로 해방을 얻은 아일랜드나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프랑스를 몰아낸 베트남에 비하면 초라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생각을 달리 하자면 우리는 독립운동을 통해 같은 의식을 공유하는 "국민"이라는 개념을 형성했고 이를 기반으로 지금까지 왔기에 오히려 무력으로 저항해 권리를 되찾은 국가들보다도 더욱 성공할 수 있었던게 아닐까?
- 그리고 실제로 일본의 패전일은 8월 15일이 아니다. 그날은 옥음방송으로 천황 히로히토가 포츠담 선언을 수용하며 연합국에게 무조건적으로 항복하겠다고 의사를 밝힌 날이다. 실제로 일본이 항복 문서에 서명한 날은 9월 2일이고 이때 서명한 사람은 시게미쓰 마모루 외무대신과 우메즈 요시지로 육군 참모총장이었다. 시게미쓰는 이 날 의족을 착용한 채 쩔뚝거리며 등장했는데 이유는 과거 윤봉길의 홍커우 의거에서 당시 상하이 총영사 자격으로 행사에 참여했다가 폭발에 휘말렸기 때문이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 어쨌든 8월 15일도 중요하지만 9월 2일도 나름대로 큰 의미를 갖는 날이다.
- 일제시대의 가장 큰 경험은 식민지 근대화라는 자칫 식민사관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유산(?)도 아니고 수탈을 받음으로써 생겨난 반일 감정에 입각한 적개심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경험은 외세의 지배라는 고통의 기억을 공유하던 시간 속에 독립운동이라는 저항, 특히나 3.1 운동이라는 전 민중적인 저항을 통해 우리를 정벌해야 한다고 얘기한 제국주의 지식인 후쿠자와 유키치가 말했던 동아시아에는 국가의 역사는 있지만 국민의 역사는 없었다는 말을 정면으로 부정할 수 있었음을 보여줬다. 그리고 일제시대 동안의 우리의 저항은 조국 광복이라는 투쟁을 넘어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근간을 형성한, 일종의 국민 혁명으로 작용했다. 이는 훗날의 6.25 전쟁과 민주화 운동으로도 이어지는 모든 계층의 국민들이 움직여 국가를 되찾고 지킨다는 능동적이며 근대 국가 지향적인 국가관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자리잡게 한 중대한 전환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