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슬로바키아, 여기서 체코슬로바키아는 공산 정권기의 체코가 아닌 그 이전 전간기 시절의 공화국을 의미한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의 화합이라는 어려워보이는 과제를 뚫고 탄생한 국가이고 또 당대 체코의 정치세력 대부분이 슬라브주의자였던 구조 속에서 친서구주의를 띠는 민주주의 국가가 나온 상당히 독특한 사례였다. 폴란드 제2공화국의 피우수트스키, 루마니아의 카롤 2세,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알렉산다르 1세, 헝가리의 호르티 제독 섭정 등 동유럽 대부분의 국가가 독재정이었던 시절 속 체코슬로바키아는 나름 돋보이는 국가였다고도 볼 수 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그런 호전적인 동유럽 독재 국가들에게 둘러쌓인 상황에서 나름의 대책이 필요했었다. 당장 폴란드부터 헝가리까지 일부 동유럽 국가들은 체코슬로바키아에 적개심을 품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체코슬로바키아는 독일 다음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군대 구성원 중에는 주데텐란트의 독일인 병사들의 수가 무시못할 수준으로 많았는데다가 소국이었기에 총력전에서 오래 버틸 역량은 부족했다. 그러니 군사력만 믿고 팽창적으로 나오기엔 다소 무리인 조건들이 있었던 셈이고 초대 대통령 토마시 마사리크부터가 외교론자였기에 전간기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력 사업은 바로 외교였다.
프라하로 귀환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애초에 체코슬로바키아라는 나라의 근본부터가 외교로 탄생한 나라였다. 원래 1차세계대전 당시 협상국들은 전쟁 초기에 체코의 독립을 지지하지 않았다. 영국 총리 로이드 조지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영토 분할 의도가 전혀 없다고 밝혔으며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제시한 윌슨조차도 1918년 1월 미국의 기본적인 관심은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 것이며 이를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존속시켜 볼셰비키 혁명을 막아내는 완충지 역할을 맡기는 것이라 했다. 실제로 미국은 독일에 선전 포고한지 8개월 이후에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나 미국의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교섭 시도는 클레망소 프랑스 총리의 비난과 독일이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압박하여 독자적인 종전 협정을 맺지 못하게 만들어버림으로써 실패했다. 그 상황에서 미국의 입장이 사뀌었고 때마침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 적백내전에 개입하며 미국의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관심이 커진다. 마사리크는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러시아 문제 개입을 반대했지만 군단의 내전 개입은 미국의 체코 문제에서의 관심을 이끌어냈으며 결국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패망과 함께 체코슬로바키아가 당초 독립에는 부정적이던 협상국 수뇌부의 마음을 돌려 지지를 얻어내는데 성공해 마침내 독립국으로서의 체코슬로바카아 공화국이 탄생한 것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국부 토마스 마사리크. 그는 구미위원부 시절 이승만과도 친분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게 탄생한 체코슬로바키아는 초대 대통령이자 외교론자 토마시 마사리크의 지도 하에 외교라는 수단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된다. 마사리크는 1915년 이래 지속적으로 중부유럽 국가들이 독일과 러시아의 중간에서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제시한 중부유럽론은 체코슬로바키아가 약소국이라는 측면을 인식해 국가의 전략적, 안보적 위치를 현실적으로 평가해 지역 협력으로 안전을 보장받는 한편 비민주적이고 독재적인 동유럽 국가들에 맞서 민주주의 모범 국가 체코슬로바키아가 주변국으로 민주주의를 확산시켜야 한다는 일종의 메시아주의적 면모도 공존했다.
다만 다소 불안정하게 시작한 부분이라면 다민족 국가로 출발한 부분이었다. 파리 평화회담에서 체코슬로바키아 대표단은 주데텐 지역을 비롯해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 이외의 민족들이 거주하는 다른 지역도 역사적으로 자신들의 터전이라 주장하며 요구해왔고 그 결과 저지-카르파티아 루테니아를 비롯해 발티체, 비토라즈, 흘루친, 테신 남서부 지역을 얻고 라베 강과 오데르 강에 대한 99년 동안의 공동 관리도 인정받았다. 더 나아가 독일 함부르크 항구 사용권을 얻어 내륙국이지만해상 교통을 이용하게 되었다.
이렇게 확장하면서 다민족 국가가 되었지만 정작 민족 갈등은 매우 극심했다. 독일과 슬로바키아인들은 연립정부에 참여하지 않고 국가에 대한 충성을 거부했다. 1921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체코슬로바카인이 65.5%, 독일인이 23.4%, 헝가리인이 5.6%, 우크라이나인과 루테니아인이 3.4%, 유대인이 3%, 폴란드인이 0.6%였는데 여기서 체코슬로바키아 단일민족 사상에 따라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을 분리하지 않았고 훗날 1930년대로 가면 독일인과 슬로바카아인들은 각각 주데텐독일당, 슬로바키아 인민당을 창당 및 민족주의적인 행보를 보이며 국가 해체에 동조한다.
체코 경전차 LT 38 마사리크는 국제연맹 중심의 활동을 지향했다. 베네쉬 외무장관은 1920년대 중반 독일의 국제연맹 가입에 힘을 실어주거나 1934년 소련의 가입을 도와주며 양국 사이에서 중간 균형자 스탠스를 취했다. 그러나 문제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엘리트들이 서방 강대국들이 베르사유 체제를 보장할 것이라는 전제를 기반으로 중부유럽 협력을 추진했다는 점이며 따라서 그들은 강대국들이 베르사유를 얼마든지 부정할 수 있다는 부분을 무시한 채 근본적인 전제를 무조건적으로 맹신했다는 것이다.
가령 체코슬로바키아가 처음 기대를 건 국가는 프랑스였는데 정작 프랑스는 1919년 테신 실레지아를 둘러싼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의 분쟁에서 난감해하며 애매모한 태도를 취했고 이는 체코슬로바키아 뿐만 아니라 폴란드도 프랑스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전간기 내내 체코슬로바키아는 폴란드의 분쟁을 해결하지 못했으며 그래서 영국한테도 발을 걸치게 되었다. 하지만 영국은 전통적으로 중부유럽에 관심이 없었기에 결국 다시 프랑스한테로 발길을 돌리게 되었다.
미국은 1919년 이후 다시 고립주의로 돌아서면서 체코슬로바키아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고 이탈리아와의 관계 개선 시도도 있었지만 문제가 이탈리아가 유고슬라비아 왕국에 대해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개선은 물 건너갔다. 그 뿐인가? 무솔리니가 정권을 잡으면서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민주주의 체코슬로바키아는 물과 기름과 같은 사이가 덤으로 되어버렸다. 이 와중에도 체코슬로바키아는 국제연맹을 집단안보체제로 개편하겠다는 포부를 가지며 제네바 의정서를 주도했지만 영국의 집권 세력인 보수당이 고립주의로 가면서 반대 의사를 표명하는 바람에 또 다시 무산되었다.
결정적으로 1925년 맺어진 로카르노 조약은 벨기에의 안전보장을 약속하면서도 독일 동부 국경의 불변성이 재확인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선택한게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와의 동맹이었다. 삼국협정이라 불린 세 국가의 관계는 그래도 중부유럽 국가의 협력이라는 목표에는 부합했지만 호르티 제독이 집권 중이던 헝가리에게 노골적인 적대를 받았으며 그 이유는 헝가리의 실지회복을 위한 행동을 막기 위해 세워졌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딱히 공통된 이해관계도 반(反) 헝가리를 제외하면 없었고 폴란드 같이 중부유럽의 중요한 국가들의 협력도 없었는지라 실질적으로 무언가 행동에 나서기도 애매했다.
그리고 1933년 집권한 히틀러는 로카르노의 결정을 따르면서 동부로 방향으로 돌려 먼저 1934년 폴란드와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폴란드는 원래 전간기의 대표적인 친프랑스 국가였지만 로카르노 조약 이후 피우수트스키가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하고 독일, 소련과 협상하여 균형을 유지하는 쪽으로 가면서 국제연맹 중심의 질서에서 이탈하려 하였는데 이 불가침 조약을 계기로 완전히 집단안보를 포기한 것이었다. 따라서 히틀러의 가장 주된 타깃은 유럽 세력권 분할에 방해될 요소이자 유럽의 가장 친유대주의적 국가인 체코슬로바키아가 되었다.
1938년 당시 뮌헨 협정 이런 상황에서 체코슬로바키아는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와의 동맹 강화를 시도했고 국가연합 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첫타자는 1934년의 경제협정 체결이었으며 국가연합 결성 시기에 대해 1940년까지를 목표로 하며 스타트를 끊었다. 문제는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가 체코슬로바키아의 제안에 시큰둥했다는 것인데 그래서인지 둘은 체코슬로바키아보다는 그리스, 터키와의 관계에 더욱 집중했다. 한 가지 재밌는 점은 당시 유고슬라비아는 카라조르제비치 왕조의 전제군주제 국가였으며 루마니아도 카롤 2세가 폭주하기 시작한 무렵부터는 독재정이 된다는 사실.
그래서 최후의 카드로 체코슬로바키아가 꺼내든 것은 프랑스, 소련, 삼국협정을 하나로 묶어 국제연맹을 되살리려는 방안이었다. 그래서 체코슬로바키아는 프랑스, 소련과도 삼각 협정을 맺지만...프랑스가 체임벌린의 유화정책의 편에 붙어버리고 소련 역시 리벤트로프-몰로토프 협정이 체결되며 독일에 더 가까운 듯한 행보를 보이기 시작함에 따라 체코슬로바키아는 더더욱 고립되게 되었다. 그 상황에서 주데텐 지역의 독일인들은 본국과 영국의 묵인 하에 히틀러 지지운동을 벌이며 체코슬로바키아의 해체를 요구하고 있었기에 내부적으로부터 문제가 심각한 상태였다.
결국 결과는 알다시피 체코슬로바키아는 뮌헨협정으로 주데텐란트 지역을 독일에게 할양해야 했으며 슬로바키아 지역에서도 요제프 티소를 중심으로 한 독일 위성국이 들어서면서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 해야 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 체코슬로바키아는 다른 동유럽 국가들보다도 예외적으로 저항 없이 순조롭게, 물론 소련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지만 총선에서 공산당이 제1당을 차지하며 공산 정권이 들어섰으며 벨벳 혁명으로 비 공산 세력이 집권한 이후에도 한동안 이어지다가 1993년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분리되면서 체코슬로바키아라는 실험적 국가 모델도 사실상 끝나게 되었다.
이러한 전간기 체코슬로바키아의 사례는 교훈을 준다. 결국 강대국이 보장해주지 않는 중립이라는 것은 매우 힘든 처지이며 한국도 마찬가지라는 것. 체코슬로바키아나 한국이나 강대국에게 중요한 지역이 "나 중립이요" 한다고 해서 제대로 받아들여진 사례가 없다. 가령 체코슬로바키아는 중부유럽 협력을 강조했지만 독일이나 폴란드 제2공화국은 이를 무시한 채 뮌헨 협정을 맺어 영토를 강탈하였고 이 과정에서 그동안 강대국에게 확실한 안전보장을 받지 못했던 체코슬로바키아는 영국이나 프랑스, 하물며 한참 후에 끌여들이려 했었던 소련에게마저 외면받으며 독일의 침탈 앞에 고립무원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생각했을 때도 강대국 다 X까고 중립 선언하는게 얼마나 미련한 짓인지 답이 나온다.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한반도를 손아귀에 넣고자 하였고 이 때문에 조공관계를 강요했으며 마찬가지로 일본도 마찬가지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정벌하러 출병시키기도 하였다. 근대로 넘어가도 한반도는 영국과 러시아 사이의 "그레이트 게임"에 휘말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치뤘으며 이 과정에서 조선 조정은 중립을 선포했지만 정작 영국은 영일동맹으로,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일본에게 조선을 넘기는 것을 동의하였다.
사실 그래서 난 한국을 기준으로 잡아보자면 외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특정 강대국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는게 우선순위고 그 다음이 군사력이며 양쪽 모두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중립을 선언하는 건 위험하다고 본다. 우리가 햇볕정책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미국 뿐 아니라 중국, 러시아, 일본 같은 주변 강국으로부터의 지지를 받았었기 때문이었으며 2012년 한일관계 갈등에서 한국 정부가 밀리지 않았던 것 또한 일본 민주당 정권이 스스로 자폭한 것도 있었지만 반대로 보자면 한국이 미일관계 악화를 틈 타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이자 한일관계에서의 중재자 포지션인 미국에게 가까워지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기 때문인 부분이 크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지정학적으로 미중 사이에 끼어있는 우리나라의 특성상 주변 어느 한 강대국으로부터 확실하게 보장을 받아 그쪽 편에 서있으면서도 다른 주변국과도 최대한 불필요한 갈등은 자제하여 투트랙적으로 이익적 관계를 구축하는게 맞다. 너무 지나치게 특정 강대국에게 간 쓸개 다 내주는 건 그 국가가 우리에게 불리한 정책을 하거나 불필요하다 느껴져서 내쳤을 시 위기를 불러올 요소로 작용할 것이고 그렇다고 앞서 얘기한 대책 없는 "우리민족끼리"식 중립 정책은 어느 한쪽으로부터도 보장을 못받아 유사시에 고립무원에 처하는 상황으로 이끌 것이다. 전간기 체코슬로바키아의 실패를 교훈 삼아서 앞으로의 미래 비전을 짜나가되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라는 말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참고 문헌:
라디슬라프 차바다, <체코와 국제정치>,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문화원(HUINE), 2013
김학은, <이승만과 마사리크>, 북앤피플, 2013
김장수, <체코의 역사>, 이담북스, 2013
권재일, <체코슬로바키아사>,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2015
김장수,<토마시 개리그 마사리크 (Tomáš Garrigue Masaryk)의 정치활동 -1890년대부터 체코슬로바키아 독립국가 등장 이후까지를 중심으로->, 한국서양사학회, 서양사론 (111), 2011
김지영,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이후 동유럽 민족 국가의 성립>, 한국세계문화사학회, 세계 역사와 문화 연구 (52),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