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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Sep 05. 2023

일본 사회주의 운동의 두 갈래: 강좌파와 노농파

일본 자본주의 논쟁사와 공산당, 사회당의 기원

https://youtu.be/ap5dLxuxj0g?si=9S0yKpFZ10wbjXxZ

1980년대 한국 운동권에서는 사회구성체 논쟁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를 기점으로 한국 운동권은 민족해방 계열의 NL과 민중민주 계열의 PD로 갈라졌고 지금까지 한국 진보정당의 양대 축인 정의당은 PD, 진보당은 NL 쪽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1920년대 일본에서도 비슷한 논쟁이 있었다는 것. 바로 "자본주의 논쟁"이라는 것인데 이 논쟁을 기점으로 일본 사회주의 진영은 강좌파 혹은 노농파로 분열되어 지금까지 일본 내 좌파 운동의 흐름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봐도 된다.


일본 자본주의 논쟁과 강좌파, 노농파로의 분열은 일본이 근대국가로 변모하고 자본주의를 확립하는 과정을 좌익 계열이 어떻게 이론적으로 이해하려 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는 사회적 폐단과 소외를 낳았지만 한편으로는 근대적 제도와 민주주의를 가져왔다고 지적했는데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회주의 혁명에 앞서 봉건적 계급에서 부르주아 계급으로 권력이 이양되는 혁명이 벌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이런 맥락에서 1920년대 일본의 사회주의자들도 자국의 사회구성체를 두고 자본주의냐, 봉건제냐를 논쟁하여 향후 어떠한 방향으로 변혁 운동을 할 것인지 서로 주장하게 된 것이었다.

일본 자본주의 논쟁의 발단


1922년 코민테른의 지도 하에 일본 공산당 강령 초안이 완성되었다. 이 초안은 일본 정치와 경제에 걸쳐 봉건적 관계가 강하게 잔존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고 일본의 국가권력이 대지주와 상공 부르주아지의 특정 부분이 형성한 블록의 손에 쥐어져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를 끌여들여 당면한 과제인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완성하여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나아갈 서막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1926년 재건된 일본 공산당에도 이어져서 전략의 기본임무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달성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런데 1927년 후반부터 여기에 대립하는 의견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일본 자본주의가 이제 상향적으로 발전하고 있고 경제와 정치의 봉건적 요소는 사라지고 있으며 권력의 실체가 제국주의적 부르주아지에게 옮겨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1927년 12월 창간된 기관지 <노농>은 일본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러시아 11월 혁명의 전야와 똑같은 과제에 직면해 있고 따라서 주요 임무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부차적으로 포함하는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하는 것이라 주장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기관지 <노농>의 이름딴 "노농파"가 등장한다.


이러한 전략적 대립이 드러나던 시점에 공교롭게도 가타야마 센, 도쿠타 큐이치, 와타나베 마사노스케 등 일본 공산당 지도자들의 참가 하에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서 혁명운동의 새로운 방침이 정해졌다. 이것이 "27년 테제"라 불리는 "일본 문제에 관한 결의"이다. 이 테제는 일본 자본주의는 유럽 국가와는 달리 상향적으로 발전하고 있고 당면한 혁명은 국가권력의 구조에 걸쳐 남아있는 봉건제나 소작제 문제 등을 볼 때 사회주의 혁명보단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들의 입장은 곧 강좌파로 이어진다.


조직적으로 공산당과 대립하던 노농파는 이론투쟁을 벌이기 시작했고 그들은 정치와 경제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전략 이론을 세웠다. 반면 강좌파들을 비롯한 일본 공산당의 이론가들을 27년 테제를 옹호하며 노농파들이 농업혁명을 과소평가했다고 비판했다.  나아가 당시 강좌파는 코민테른 지도하에 전위정당으로서의 공산당을 건설하고 이를 통해 사회운동을 이끌고자 했지만 반면 노농파는 공산당 건설 시도에서 이탈한 후 대중적인 무산자 정당을 합법적으로 건설하고자 한 것도 논쟁에 불을 붙이는데 일조했다.

강좌파의 대표적인 후신, 일본 공산당

강좌파 - 일본은 반(半) 봉건적 체제다


강좌파는 제국 일본이 근대 자본주의 체제라는 논리에 대해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20세기 초 일본의 생산양식이 기본적으로 기생적 지주의 농촌 지배에 기반하고 있으며 일본 내에서 발달한 자본주의 체제 역시 철저하게 지주의 헤게모니와 전근대적 군주제로서의 천황제 하에 육성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 근거는 대표적인 것만 예시로 들자면 메이지유신의 "사민평등" 기조와는 상반되는 제도인 화족제와 도저히 근대식 토지 제도라고는 볼 수 없는 지주 시스템에 기반한 소작제였다.


소작료 논쟁에서 강좌파파 진영은 일본 농업의 봉건성을 입증하기 위해 지주의 토지몰수권과 산림 및 원야 등 대토지 소유, 현물 소작료 징수 등을 제시하였다. 특히 노농파의 이노마타가 발표한 논문에서 자본주의가 상향적으로 발전한다면 장기적으로 대중의 생활 수준을 향상할 수 있다는 논리를 전제로 하는 사회민주주의적 견해를 내놓자 강좌파 측은 이는 마르크스주의의 카우츠키적 해석에 불과하다고 하며 적극적으로 비판했다. 결국 요약하자면 강좌파 측의 비판의 요지는 마르크스와 레닌에 의해 확인된 자본축적 및 붕괴의 일반법칙을 위배했다고 주장한 것에 있다.


그들은 생산력 대 시장의 모순에 기본모순이 있는게 아니라 다수 인민과 농업과 경공업의 희생을 통한 대자본의 독점 발전이 전후 일본의 자본주의 특성이며 이 독점적 발전 아래 공업과 농업이 빠르게 불균등 발전해간다는 점이 치명적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동시에 쇼와 공황에 대해서 노농파는 인플레이션이 디플레이션으로 전환되어 과잉생산 공황이 강화되고 있다고 규정한 반면 강좌파 측은 일본적인 것으로서의 공항이라 주장했다. 여기서 일본적인 공항이란 중국 내란, 조선과 대만 폭동에서 나타나는 식민지 대 반식민지의 위기, 그리고 기생지주적 토지 소유제에 기인한 농업공황으로 대공황이 일본에서는 일본 특성에 맞게 발현되고 있다는 얘기다.


또한 노동자의 저임금 문제를 고찰하는데 있어서 강좌파 인사들은 근대적 노동시장에서 임금이 결정되었다는 노농파와 여타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그들은 반봉건적 농촌과 자본화된 도시 공업지대 사이의 상호의존성을 위주로 파악했다. 그렇게 해서 기생적 지주제 및 소작제에서 그동안 살아오며 도시로 유입된 이들은 봉건적 전근대적 형태의 착취, 봉건적 형태의 관습과 규율이 있는 봉건적 노동통제에 익숙하기에 당연히 일본 내에서 근대적인 임금 노동이라는 개념은 도저히 자리잡을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일본 강좌파 진영은 실책도 있었다. 그들의 이론적 전통은 자국의 반봉건성을 강조하면서 자본주의의 빠른 성장을 발견하지 못했는데 이를테면 전쟁 이전 강좌파 이론가들은 때로는 지주제의 지배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느라 향후 군국주의의 주된 지지층이 되는 자작농의 성장 경향을 애써 무시해버리며 놓치고 말았다. 그렇지만 자본주의가 비서구성과 전근대성의 요소들과 어떠한 관계를 맺는지에 대해 나름대로 해답을 제시하며 방향성을 마련한 부분 만큼은 그들의 커다란 성과라고 볼 수 있다.

노농파의 대표적인 후신, 일본 사회당

노농파 - 제국주의적 부르주아에 맞선 사회주의 혁명


노농파 집단은 잡지 <노농>의 이름에서 기원한 세력으로서 사카이 도시히코와 야마카와 히토시 등의 인사들이 주도하던 조직이었다. 어디까지나 네트워크 성격에 가까웠는지라 커다란 구심점을 가지고 움직이는 조직은 아니었다. 어쨌든 이들이 내리는 결론은 강좌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인데 바로 일본이 메이지 유신으로 어느정도 부르주아 계급 사회 단계에 이르었다는 요지다. 물론 노농파 세력들도 근대 일본이 대단히 민주주의와 의회정치가 잘 자리잡은 사회라고 인식했었던 것은 아니지만 독점자본이 등장하여 부르주아의 헤게모니가 작동하고 있는 등의 상황은 일본이 부르주아 단계에 접어들었으니 바로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행해도 된다는 판단으로 이어졌다.


노농파에게 천황제는 부르주아 군주제라는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 보여졌다. 따라서 노농파가 투쟁해야 할 대상은 금융자본-독점자본을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적 부르주아 계급으로 혁명의 성격 또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아닌 사회주의 혁명이었다. 코민테른과 소련을 무지성으로 추종한 강좌파와는 달리 노농파는 소련의 레닌주의 체제는 러시아라는 지역에 맞춰서 형성된 것이며 마르크스주의의 유일한 발전상이 아니라 규정했다. 그래서 이들의 지향점이란 베른슈타인 이후 인터내셔널로부터 이탈해버린 독일의 사회민주당 노선도, 러시아의 레닌주의 혁명론도 아닌 일본의 현실에 맞는 사회주의 운동이었다.


또 강좌파는 부르주아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이행되어야 한다는 2단계 혁명노선을 취했지만 노농파는 이와는 반대로 일본공산당의 노선에 반대하여 1단계 혁명노선을 내세웠다. 어차피 자본주의 단계이고 부르주아 계급 및 독점 자본이 출현한 마당에 사회주의 혁명을 못할게 뭐가 있냐는 것이다. 노농파가 일본을 자본주의 사회로써 설명하는 논거는 고율의 소작료도 좁은 경지에 많은 소작농이 북적거린다는 상품 경제적인 수급관계에 있으며 훗날 전후 일본의 마르크스 경제학의 대부가 되는 우노 고조도 노농파로 분류되어 체포당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일반 대중에게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는 당면 문제가 되지 못하기에 부르주아 계급에 대립하는 모든 계층을 결집하는 대중적 합법정당을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정당의 성격은 공동전선을 표방하는 단일무산정당인 것이며 여기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적극적인 역할을 하며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논지다. 노조 문제에 있어서도 정당의 대치물이 아니기에 조합운동 역시 통일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노농파의 이러한 정당론, 조합론이 전후에 맺어낸 결실이 바로 일본 사회당과 총평이었다. 즉 일본 공산당이 강좌파의 실질적인 후신이라면, 일본 사회당은 노농파의 후신이라는 말이다.

강좌파와 노농파의 후신 - 일본 공산당과 사회당


강좌파와 노농파는 일본이 알다시피 군국주의화 되어 좌익 세력들이 강하게 탄압받자 크게 몰락하였으며 유일한 제도권 내 좌익 정당인 사회대중당은 아사누마 이네지로 등의 주도 하에 친군부 노선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끝무렵에는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의 신체제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대정익찬회의 한 축이 되어버리며 변절해버렸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부터 1945년 태평양전쟁이 종료되기 전까지 일본에서 좌익 세력들은 고개조차 들고 다니지 못했으며 대정익찬회에 참여한 사회주의자들도 고노에 총리의 사임 이후 익찬회 자체가 독립된 단일 정당이 아닌 군부의 어용 기관으로 전락해버림에 따라 정책적으로 쓸모가 있던 혁신관료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대부분 버려졌다.


전쟁이 끝난 후 강좌파 세력들은 다시 일본 공산당을 재건하며 뭉쳤다. 그들은 반봉건성을 강조하면서 천황제에 대항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노선을 앞세웠다. 그러면서 패전 이후 자국을 미국에 종속된 사실상의 식민지로 보며 "미제 점령군에 맞서는 민족해방과 독립을 위한 투쟁"을 외쳤다. 일본 공산당은 전후 마오쩌둥식 유격전술을 받아들여 폭력투쟁을 벌이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도시의 중핵자위대는 관공서에 화염병을 던지고 농촌의 공작대는 인민유격대 결성을 목표로 산발적인 게릴라식 투쟁을 벌이며 파괴활동 방지법 제정에 명분을 준다. 그러나 이 같은 행보는 선거에서 국민들의 외면을 받는 결과로 이어졌고 결국 공산당은 무장투쟁 노선을 포기하였으며 1956년 헝가리 반소 봉기 진압 사태를 기점으로 스탈린주의와 개인 숭배 노선을 비판하며 탈 전위정당화 한다.


한편 노농파는 사회주의 협회를 앞세워 사회당 좌파를 구성하는 세력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사회당 좌파는 독점자본의 급속한 성장과 제국주의의 부활을 주된 모순으로 인식했고 이에 따라 1960년 안보투쟁을 계기로 삼아 사회주의적 계급운동과 국제주의 실천을 결합하는 전략을 공식적으로 제기했다. 이들은 사회당 우파와는 달리 사회민주주의 노선에 부정적인 입장이었으며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해 일본식 평화혁명론을 만들어 <길>이라는 강령집을 통해 사회당 내부의 좌경화를 주도했다. 총평과 사회당 간의 관계를 주도하던 것도 노농파 중심의 싱크탱크인 사회주의 협회였으며 그들의 이러한 행보에 반발한 사회당 우파들은 결국 민사당을 창당해버리며 탈당한다.


이렇듯 강좌파는 일본 공산당, 노농파는 일본 사회당으로 이어졌다고 봐도 되는 지점은 많은 편이다. 물론 이게 완벽한 구분법은 아니기에 딱 맞아떨어지진 못하지만 어쨌든 전전 시대의 두 세력이 두 정당의 전후 노선에 큰 영향을 끼친 건 사실이다. 한 가지 재밌는 부분은 전전 시대 강좌파가 스탈린주의적인 교조적인 모습이 강하다고 비판을 많이 받았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노농파를 계승한 사회당 좌파도 레닌주의적 도그마에 빠져버렸다는 점이다. 사회당 좌파는 55년 체제 동안 <길>을 만들고 당내에서 구조개혁론을 얘기하던 에다 사부로를 몰아세우는 등 일본 공산당이 과거 1955년 무장투쟁 노선 포기 전까지 보였었던 교조주의를 그대로 답습하며 친소, 친중, 친북 및 계급정당론과 민주집중제라는 늪에 빠져 못나오게 되었다.

맺음말: 일본판 NL, PD 논쟁


일본 자본주의 논쟁이 강좌파, 노농파라는 일본 좌파 운동의 두 가지 갈래를 만들어낸 것은 한국의 NL, PD 논쟁과 유사한 양상이다. NL, PD 논쟁도 NL 관점을 따르는 이들은 한국을 미국 식민지로 보면서 계급투쟁보다 민족해방론에 입각한 남북통일을 우선시했고 반면 PD 관점 쪽은 독점자본이라는 방향에서 바라보며 민중민주주의 혁명을 주장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 정의당과 진보당, 노동당이라는 한국 대표 진보정당으로 이어지며 여전히 아직까지 그들의 노선은 갈등이 있는 셈이다.


실제로 우리나라 사회구성체 논쟁에서 NL과 PD가 분화되는 것에 있어서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것은 일본과 남미였다. 남미의 종속이론도 영향이 컸었지만 일본은 특히나 한국과 같은 동아시아 국가였고 두 국가 모두 봉건적 잔재로 인한 영향을 1945년 이전까지 겪었으며 또 동시에 고도경제성장으로 자본주의의 황금기를 보냈었기에 일본 내 자본주의 논쟁은 한국 진보진영의 연구자들에게 있어서 앞으로의 진로와 방향성을 정하는데 귀중한 참고자료가 쓰일 가치가 있었다. 따라서 한국 진보정당 운동사를 파악해보는데 있어서도 사전 배경지식으로 일본 자본주의 논쟁사를 알아둔다면 나쁠 건 없고 반대로 봐도 일본 좌파 세력의 계보가 궁금한 입장에서도 당연히 알 필요가 있는 역사다.


어쨌든 이러한 강좌파, 노농파의 논쟁과 대립은 역사적으로 일본 좌파의 뿌리깊은 이론을 알 수 있는 사례 중 하나다. 어쩌면 현시점에서 제대로 일본 정치 내에서 그나마 영향력이 있다고 볼 만한 세력이 강좌파의 후계자 일본 공산당 밖에 없긴 하지만 일본 공산당은 살아남고 왜 일본 사회당은 실패했는지 알 수 있을 만한 사례로써 일본 자본주의 논쟁과 강좌파, 노농파는 상당히 흥미롭긴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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