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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Sep 09. 2023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정치 변화의 분기점

관료가 아닌 정치인이 주도한 정책

https://youtu.be/W84JUTLVedg?si=mNlFeEk4oxb_rFkN

고이즈미 준이치로에 대한 한국에서의 인식은 좋지 못한 편이다. 집권 기간 중에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거나 역사수정주의적 행보를 보이는 등 극우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이유 때문인데 이로인해 그의 집권 기간 중 최악의 외국 지도자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하였다. 게다가 고이즈미 집권기에 한국 대통령은 노무현이었고 독도 문제로도 한일 양국 지도자들이 아주 크게 부딪혔었는지라 한국에서 고이즈미에 대한 인식은 더더욱 바닥으로 내려갈 수 밖에 없었다. 지금도 고이즈미하면 떠오르는 인식의 대부분이 아베 이전의 극우 총리 1이었던 사람일 뿐이고.


그러나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적어도 일본 정치에 있어서는 대격변의 분기점이었다. 그는 1990년대 말 위기에 봉착한 자민당과 일본 경제의 원동력을 되살렸으며 일본 총리치고는 긴 5년 5개월을 재임하며 전후 최장기 재임기록 4위를 달성했다. 내각제 국가인 일본에서 연임을 하는 것이란 쉽지가 않은데다가 동시기 대통령이었던 노무현보다도 더 오랫동안 재임하였기에 이는 그만큼 고이즈미가 능력적으로 뛰어난 사람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욱이 고이즈미는 정권 말 53%의 지지를 받으며 퇴임할 정도로 당대 일본인들에게 있어서는 평가가 매우 좋은 정치인이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2001년 자민당 총재선에서 상당히 불리한 조건으로 시작했다. 전임자 모리 요시로는 잦은 실언으로 안 그래도 떨어지는 자민당 지지율을 박살냈으며 경쟁자 하시모토 류타로는 당내 최대 파벌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게다가 고이즈미는 신자유주의 성향과 작은 정부론을 앞세웠기에 자민당 주류의 정치성향과 일치를 보지 못했으며 더 나아가 아예 자신을 개혁가로 포장하며 자민당 주류를 구태로 프레이밍 씌웠다.


그럼에도 고이즈미가 자신이 속한 모리파를 이탈하면서까지 탈파벌 정치를 외쳐서 자민당 정치 방식에 도전하는 모습에 대다수의 국민들은 그를 지지하기 시작했으며 더욱이 농촌 중심의 정책이 아닌 도시 중심의 구조개혁을 주장하는 면모는 자민당 전통적 지지층 외의 사람들에게도 먹혀들었다. 고이즈미가 집중 공략한 것은 도시 지역의 무당파들이었으며 이는 나눠먹기식 정치를 통해 집표 조직과 연계하던 다른 자민당 정치인들과는 분명 다른 방식이었다. 이어서 그는 "자민당을 깨부순다"라는 식의 표현을 과감하게 하며 미디어 여론전에서 완전히 승기를 잡게 되었고 그 결과 과반수가 넘는 표를 획득해 총리 자리에 올랐다.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총리가 되었을 때 일본의 상황은 좋지 못했다. 1991년에 국내총생산의 58.6%에 불과하던 정부의 장기 채무액이 2000년 125%로 급증하였으며 1998년부터 2000년까지 GDP 성장률은 -2.0~-0.8%에 그쳤다. 특히 실업률은 1990년대까지 3%였던게 2000년에 이르어 4.7%까지 올랐을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다. 이 상황에서 전임자인 오부치 게이조 총리와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는 경기 부양책을 통해 어떻게든 끌어올려 보고자 하였으나 경기 회복의 효과는 없었고 부채만 급증할 뿐이었다. 즉 당시 일본 경제는 만성적인 재정적자에다 디플레이션에 따른 투자위축, 공적 자금에도 되살아나지 않는 개인소비 등 사실상 성장 동력은 멈춰섰었던 상태였던 것.


무엇보다 하시모토 내각이 운이 없었던 것은 재정, 교육, 사회보장, 경제, 금융, 행정 분야 구조 개혁으로 대표되는 소위 "6개 개혁"을 한 게 실패하여 대침체하는 상황 속에서 1997년 아시아 통화위기가 벌어졌던 것 때문이다. 한 나라에서 시작된 외국 자본의 유출은 다른 나라로 불똥이 튀어 결과적으로 아시아 국가의 통화가 크게 하락했으며 이에 따라 강한 인플레이션과 경제 혼란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면서 일본은 경기 하강 국면이 가속화되어 1997년 후반부터 수출 감소 충격을 그대로 받았고 1996년 말 19,000엔 선에서 소강 상태였던 닛케이 지수의 주가 변동 또한 1997년 말 15,000엔 선, 1998년 말 13,000엔 선으로 크게 하락해버리게 된 것이었다.

우선 고이즈미는 정부산하 법인 163개 가운데 136개를 폐지하거나 민영화나 독립법인화를 시행했고 그 결과 4년간 1조 5000억엔의 재정지출을 줄이는 효과를 거뒀다. 동시에 규제 완화 및 철폐 정책을 실시하여 재임 기간 동안 1,500건의 규제를 없애기도 하였다. 2002년 합병절차를 간소화해 구조조정을 촉진시키기 위한 ‘주식보유총액제한제’ 폐지와 창업을 활성화시킨 최저자본금 특례제가 실시되었고 덕분에 회사 설립률은 2년 동안 해마다 10% 증가하여 고이즈미 집권기 동안 신생 기업들의 등장이 거세었다.


불량 채권 처리도 그의 성과였다. 1990년대 말 금융기관들의 파산으로 불량 채권들이 급증하였고 이에 일본 정부는 1997~1998년 사이에 공적 자금을 1조 8억 엔 어치를 투입하였으나 경기는 회복되지 못했다. 고이즈미 내각은 "금융재생프로그램"을 도입하려 했지만 자민당 간부들의 반발로 "종합디플레대책"으로 후퇴되었다. 그래도 개혁은 이어졌으며 결과적으로 주요 은행들의 불량채권비율이 크게 감소하여 2002년 당시의 8.4%에서 2004년 4.7%로 크게 줄어들었다. 이는 기업 부실이 금융기관의 부실로 이어지지 않기 위한 조치였으며 어쨌든 일시적으로나마 민간 기업들의 자생력을 향상시킨 부분은 없진 않았다.

또한 고이즈미는 재정을 분권화하는데 앞장섰고 2004년부터 2006년까지 지방에 대한 국가보조금과 지방교부세의 축소 및 세원의 지방으로의 이전으로 대표되는 개혁안을 내놓는다. 이는 구조개혁 정책의 일환이었으며 중앙정부의 재정 건전화를 목표로 하여 지방자치단체의 재정 자립도를 높이고자 했다. 긍정적인 측면으로 보자면 국가재정 건전화가 성공하였고 지방의 비효율적인 공공사업의 지출이 감소했지만 문제는 이 때문에 대도시를 중심으로 한 부유한 지방자치단체와 농촌지역의 재정격차가 크게 벌어지고 공공서비스마저 격차가 매우 커지게 되는 단점도 분명했다.


고이즈미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정책인 우정민영화도 사실 당내에서 엄청난 반발에 휩싸였었다. 우정민영화는 규제 개혁과 재정 건전화의 필수 요소라고 고이즈미 총리는 내다보았지만 정작 법안이 자민당 내 반대 파벌에 의해 부결되어 버린다. 따라서 고이즈미는 정치적 승부수로 중의원 해산을 내던졌다. 우정민영화의 배경에는 정부자금의 불투명한 융자로 인한 재정문제와 그 때문에 안정적 예금을 선호하는 일본인들이 가계의 여유자금을 민간은행보다 우편 저축이나 보험에 몰리는 문제가 있었다. 그렇기에 사실 필요했던 부분도 있지만 자민당 의원들과의 이권 문제도 엮여있어서 내부 갈등이 컸다.


끝내 고이즈미는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고 우정민영화 법안은 통과가 된다. 고이즈미의 이러한 구조개혁 정책은 정부의 조직 체계를 뼈를 깎는 수술을 성공시켰고 잃어버린 10년 동안 극심한 침체에 빠졌었던 일본 경제를 다시 회복시켰다. 실업률은 취임 초기 5%에서 2002년 5.5%까지 상승했다가 2006년 9월 퇴임 때 3.9%까지 떨어졌고 경제성장률도 취임 초기 0.2%에서 퇴임 때 2.2%를 기록하였다. 2012년에 재집권한 아베 신조 2기 내각 이전까지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아마 일본 내 대중들 사이에서 가장 경제를 잘한다고 평가받던 총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고이즈미 내각의 경기 회복에는 이면도 있었다. 고이즈미 총리는 국채 30조엔 이하를 강조했지만 목표가 달성된 적은 2001년과 2006년 뿐이었으며 공공사업 관계비를 거의 매년 삭감하고 사회보장 관계비를 유지하여 세출을 억제하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2000년대 전반에는 불량채권 처리 정책에 의한 경기 악하로 세수가 줄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2006년의 경우에 간신히 억누르는 것에 성공했던 이유는 지방교부세 교부금을 큰 폭으로 삭감하는 등의 무리수를 뒀었는지라 가능했던 것이다.


또 불량채권 처리 촉진은 2002년 설비 투자의 큰 폭으로의 하락을 불러와 민간 수요 부진으로 이어졌고 이는 곧 경기가 회복세인데도 GDP 실질성장률이 0.1%에 그치는 원인이 되었다. 그래서 2003년부터야 GDP의 실질성장률이 올라가며 그때부터 성장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해외 경기 호황에 힘입어 수출이 늘어나서 살아났던 것이었고 반면 공적 수요의 경제성장에서의 기여도는 마이너스 수치로 떨어지며 수출만 살고 내수는 죽는 등의 이면도 있었다.

여기까지 보았을 때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일본 경제에 끼친 큰 영향 중 하나는 국가통제주의에 가까웠던 일본 경제 구조가 시장주의, 신자유주의적으로 재편 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물론 고이즈미 이전에도 나카소네가 나름 신자유주의적 면모를 보이긴 했으나 보수 본류식 경제 노선이 몰락하고 수정자본주의 경제를 지향하던 일본이 보다 좀 더 작은 정부적 방향성을 지향하게 된 것에는 그 어느 총리보다도 고이즈미의 역할이 클 것이다. 게다가 고이즈미 이후로 다른 총리들 중에서 그보다 확실하게 신자유주의 개혁 노선을 추구하는 정치가가 사실상 없기 때문에 독보적인 위치이긴 하다.


그러나 내가 일본 정치에서 고이즈미의 가장 큰 역할로 보는 건 경제가 아니다. 바로 정치 구조의 변화이다. 비주류 출신으로 출발한 고이즈미는 집권 과정에서 자민당을 부숴버리겠다고 할 정도로 원한을 토로했었고 실제로 집권한 후에 자민당의 구습을 타파하는데 앞장섰다. 우선 종전의 파벌에 의해 배분되던 인사 관례를 거부했고 자기만의 파격적인 인사로 내각을 구성하며 55년 체제 이래 지속되어오던 자민당의 파벌 정치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고이즈미의 정치 방식은 "극장 정치"였다. 정당이 아닌 국민에게 직접 호소해서 정치를 이끌어가는 방식인데 의외로 파괴력이 컸다. 국민들은 보통 복잡하고 어려운 걸 싫어하는지라 알기 쉽고 임팩트가 강한 말들을 쏟아내는 고이즈미에게 환호했고 그도 이런 방식을 적절히 활용해 국민적 관심과 인기를 모아서 여론을 주도해갈 줄 아는 정치가였다. 그러면서도 퇴임할 때 자민당 내 반대 파벌에 대항할 일종의 보험으로 차남에게 자신의 지역구를 물려줘서 세습하게 하여 영향력을 유지하는 술수도 보였다.


고이즈미의 극장 정치의 결과 자민당 내 파벌 정치는 급속도로 영향력을 잃었으며 지금도 파벌은 존재하지만 구심력이나 위상은 예전 60, 70년대에 비하면 현저히 쇠퇴한 상태다. 고이즈미를 기점으로 예전에 파벌 정치가 영수인 유력 정치가들에 의해 중요 사안들이 결정되었던 부분들이 힘을 크게 잃었던 것에는 소선거구제가 도입되어 파벌이 아닌 당 중심의 선거와 정치자금이 운용되었던 것도 있다. 이러한 조건들과 고이즈미 준이치로라는 괴짜 정치인이 맞물렸기에 자민당 내 인사권을 비롯한 관행들이 타파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관저 주도형 정치의 정착도 고이즈미가 이끈 변화 중 하나이다. 자민당 내 보수 본류 세력들은 관료를 적극 활용해서 상향식 의사 결정을 하여 관료 계층이 모든 정책 결정 과정에 영향을 끼치게 하였는데 고이즈미는 그와는 반대로 총리보좌관을 늘리고 특명 담당 대신의 활용, 또 정책 결정의 기본 골격에 해당하는 자료를 각 성청이나 당과의 사전 협의 없이 총리가 주재하는 회의에 제출하고 그것을 그대로 공표하며 오랜 관행인 여당의 사전 심사 제도를 정면으로 거부했다. 일본식 내각제 안에서는 당과 내각은 통일되어 있지만 고이즈미는 당과 내각은 다르다며 선을 그었던 것이고 대통령제 요소를 가미한 내각제의 운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원래 자민당에서는 당내 파벌 간 균형 인사, 연공서열에 입각한 보상, 관료를 활용한 예산과 법안 작성, 법안과 예산안에 대한 당내 사전 협의 등 권력 분권화 및 조정으로 내각과 당을 운영했었다. 그러나 고이즈미는 분권화된 제도적 관행을 중앙집권적으로 재구조하였고 관료들에 대한 통제와 지휘권을 강화하여 상명 하달식 정책 결정 구조를 만들어갔다. 아울러 여당과의 관계를 "필수적" 협의제로루터 "선택적" 협의제로 이행시켜 권력 행사의 재량을 확보하였고 어쨌든 이게 아베 대로 이어져오는 관저중심 인사 및 정책 결정 구조의 집권화의 발판이 된다.

한편으로는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성공은 보수 방류 세력이 자민당의 아젠다를 사실상 주도하게 되는 결정적인 분기점이기도 했다. 기시다 후미오 이전 마지막 본류 총리였던 오부치 게이조가 사퇴하고 모리 요시로가 되었다가 얼마 후에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총리가 된 것이었는데 그 후부터 스가 요시히데 때까지 일본 자민당 총리들은 보수 방류 혹은 그와 연계된 인사들이었다. 일본의 우경화를 주도하는 정치가라고 평가받는 아베 신조와 고이케 유리코 모두 고이즈미 준이치로 밑에서 정치적으로 성장한 사람들이었으며 "새역모"로 대표되는 역사수정주의 문제도 나카소네 이래 굉장히 심해진 건 바로 고이즈미 때였다.


사실 나카소네 당시부터의 경향이긴 했지만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대미 의존외교와 아시아 외교 부재는 보수 방류 세력도 세월을 거치며 군사 대국 일본의 복원보다는 자유진영에서 미국의 확고한 전진기지로의 자리매김을 하는 차원에서 국제국가 외교를 펼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소련과 수교한 하토야마 이치로, 동남아시아 한국 및 대만으로의 전방위 외교를 펼친 기시 노부스케라는 보수 방류의 아버지들과는 달리 고이즈미는 미일동맹을 강화하여 일본의 존재감을 높이면서도 야스쿠니를 참배해 주변국과 관계를 악화시키고 또 북한과의 납북 피해자 문제를 제대로 교섭을 타결시키지 못해 흐지부지 되면서 독자적으로 외교를 하지 못하였다.


그래도 이건 확실한 부분이라면 고이즈미가 파벌 정치 관행을 박살내어버리고 관료 주도에서 관저 주도로 개편하며 역사수정주의와 국제국가 노선을 본격화 시키면서 오늘날 자민당 보수 방류 세력의 우위 구도와 일본 우경화의 흐름이 더욱 가속화되었다는 것. 사실상 보수 방류 세력이 지금까지 일본 정치에서 주도권을 잡으며 개헌 및 재무장을 주장할 만한 역량을 다진 건 고이즈미 내각 때부터 였다. 뭐 더 깊게는 재무장 담론의 원조인 오자와 이치로가 있긴 하지만.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아베가 내세웠던 "미일동맹 하의 보통국가화"라는 개념은 기원을 거슬러가자면 고이즈미 시기의 영향도 있다는 얘기다.


우리에게 있어서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일본의 대(對) 한 정책의 기조가 바뀌게 되는 전환점이었다. 이때가 한국과 일본의 경제적 격차가 크게 줄어들고 또 한국이 민주화되면서 군사정권 동안 수직적, 호혜적 관계였던 한일관계에 변화가 오던 시점이었다. 더 이상 한국을 경제적으로 성장시켜 공산권의 방파제로 삼을 이유가 사라졌고 우리가 일본의 전후 처리를 문제 삼을 만큼의 발언력도 생겨나게 되면서 이때부터 일본의 역사수정주의를 두고 한일 양국의 갈등이 심해지기 시작한다. 아베 시기에는 이게 절정에 이르어 무역분쟁까지 하게 되었으며 이는 수직적 구조에서 상대적이지만 엇 비슷해졌기에 관계에 있어서 자꾸 불협화음이 발생하는거다.

결론적으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시기의 변화가 오늘날의 일본에 주는 의의는 상당하다. 그가 내건 "성역 없는 구조개혁"은 이익 배분에 기반한 온정적 보수주의라는 소득배증계획 이래 오랫동안 자민당을 지배해온 고리와 토건국가 체질을 부수고 당내 부회, 정무조사회, 총무회 등 이권과 연결된 다원적 정책 결정 구조나 관료들과 유착된 족의원들을 꽤 많이 내치는데 성공했다. 그런 점에서 보았을 때 아베 신조가 장기집권을 하며 관저 주도의 정책결정구조 하에 관료가 아닌 정치가가 주도한 정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고이즈미가 당 내부 구조를 개혁했던 탓도 있을 거다.


그러나 문제점도 확실하게 많았던 정치가가 바로 고이즈미의 어두운 부분이었다. 지역 경제 기반이 약하고 재정 자립도가 취약한데다가 세금을 내는 인구가 적은 농촌은 정부의 구조개혁으로 중앙의 재정투자에 의존하고 있던 주민들의 삶의 기반이 위협받게 되었다. 1970년대 다나카 가쿠에이가 일본열도 개조계획을 외친 이래 자민당은 지역공동체를 중심으로 농촌 지역의 높은 지지를 받았지만 이 때문에 농촌이 어려워진 것은 물론 자민당 지지기반도 떨어졌다. 그리고 외교적으로는 미일동맹 강화로 국제국가화에는 성공했지만 정작 아시아 외교와 독자 외교가 부재한 수동적인 태도만 보였기에 고이즈미의 정치적 파트너인 가토 고이치나 야마자키 타쿠에게마저 비판을 받고 특히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관방장관 후쿠다 야스오까지 제동을 걸었을 정도였다.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여러모로 복합적인 정권이었다. 수정자본주의 노선이었던 일본에서 흔치 않는 신자유주의자였는데다가 복지를 축소하여 양극화에 기여한 부분도 컸지만 비효율적인 구조의 극치라 야당도 비판할 정도인 우정국을 어쨌든 손을 봤었으며 한국에서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 탓에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은데 침략전쟁과 식민통치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사죄를 해오던 총리였기도 했다. 그런 부분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이면도 많았지만 한국에서는 너무 과소평가 받고 있는게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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