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라 다카시는 "평민 재상"이라고 불리던 총리이자 정당 내각의 아버지로 평가받는 정치가다. 그 전까지 번벌에 의해 주도되던 정치 구조 속에서 제1당의 대표로써 수상에 취임한 사례는 하라 다카시가 처음이었다. 그동안 제국 일본의 정치에서는 메이지 유신의 원로들인 번벌 집단의 강한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따라서 원로들이 군인 출신 인사들을 수상으로 임명(사실상 지명)하였는데 1916년에 출범한 조선 총독 출신인 데라우치 마사타케 내각이 대표 사례였다. 국민들의 뜻은 번벌 정치에 염증이 느꼈지만 일본 제국은 메이지 유신의 원로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데라우치 내각 때 쯤이면 원로들의 상당수는 사망한 후였다. 헌법 제정에 적극 기여한 이토 히로부미마저 안중근에게 저격 당해 사망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 시점에 실질적으로 남은 원로들은 사쓰마 번 출신의 마쓰카타 마사요시, 공가 출신의 사이온지 긴모치, 그리고 조슈 번 유신지사 출신이자 일본 제국군 육군의 아버지인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전부였다. 특히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군부의 아버지였던 만큼 이토 히로부미 사후에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번벌 원로였는데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러일전쟁 당시의 총리 가쓰라 다로, 훗날 육군 실세가 되는 우카키 가즈시게 등 수많은 인사들이 그의 손을 거쳐 성장했던 걸 보면 답이 나온다.
그런 번벌이 귀족원-추밀원-관료 기관-군부 모두를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 도전장을 내민 이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하라 다카시였다. 그는 작위를 받지 않는 중의원 출신으로써 최초로 총리가 된 남자였던 만큼 머리를 아주 잘 쓰던 사람이었고 다나카 기이치라는 야마가타의 조슈 벌 유력 인사를 입헌정우회에 영입했으며 추밀원에게서 정당과 번벌 사이의 싸움에서 중립을 지킬 걸 보장받는다. 동시에 보통선거운동의 열기를 이용하면서 지금은 시기상조라고 아슬아슬하게 선을 그으면서도 번벌 세력을 협박해 자신에게 유리한 선거법 개정안을 받아들이게끔 협박하는데 성공해 전체 의석의 60%를 총선에서 확보, 권력 기반을 강화했다.
결정적으로 하라는 1918년 쌀 소동을 아주 잘 이용하여 집권할 수 있다. 당시 농촌에서 도시로 인구가 유입되는 상황 속 쌀 수급의 균형이 무너지고 투기 수요까지 겹쳐 쌀의 매점매석 현상이 벌어지며 쌀값이 크게 폭등하게 된다. 그리하여 쌀값 인하를 요구하는 폭동이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고 정부는 10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해 진압하려 했다. 언론의 집중적인 공격으로 데라우치 내각은 결국 물러나게 되었으며 때마침 원로 중 하나인 사이온지 긴모치가 자신과 친한 하라 다카시를 총리로 임명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는데 야마가타도 사태의 심각성을 보고 결국 불가피하게 수용하게 되며 평민 재상 내각이 들어섰던 것이다.
<일본 열도 개조론>의 주창자이자 <록히드 사건>의 피의자 다나카 가쿠에이
그리고 이와 비견될 만한 인물이 바로 전후 쇼와 시대의 총리였던 다나카 가쿠에이였다. 고작 최종 학력 중졸이라는 신분으로 도쿄대와 와세다를 나온 초엘리트들이 지배하던 일본 정치판에 들어온 다나카는 정치 기술이 가히 다이쇼 시대 번벌과 싸우던 하라 다카시를 떠올리게 할 정도였다. 록히드 사건으로 불미스럽게 퇴임을 한 상황에서 다나카 가쿠에이는 독점금지법 문제를 역이용해 후임자인 미키 다케오를 흔들어대서 내려오게 만들었고 후쿠다 타케오가 총리가 되었을 때는 오히라 마사요시 및 그의 파벌과 손을 잡고 연합전선을 펴서 후쿠다를 고립시켜 오히라를 총리로 세웠다.
물론 다나카 가쿠에이의 행보에 대한 반발이 없던 것은 아니다. 록히드 사건 처리에 불만을 품은 고노 요헤이를 비롯한 6명의 자민당 의원들은 1976년 6월 당을 탈당해 신자유클럽을 결성하여 금권정치와의 결별을 내세웠다. 그리고 직후 12월 치러진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249석을 획득해 과반수에 7석이 모자라는 아쉬운 결과를 내었고 자민당 탈당파인 신자유클럽은 17명을 당선시켰다. 그러나 다나카는 수사를 받으며 2선으로 물러나 있는 중에도 미키파, 후쿠다파, 나카소네파 등 당내 반대 세력들의 의원을 돈이나 자리로 매수하며 미키, 후쿠다 모두 끌어내리는데 성공할 정도의 정치력을 보여줬다. "정치는 수이고 수는 힘, 힘은 돈이다"는 본인의 어록을 제대로 실천한 셈이다.
다나카 가쿠에이와 하라 다카시가 비슷한 점의 한 가지는 뛰어난 정치력도 있지만 출신 성분 문제도 있다. 우선 하라 다카시의 집안은 분명 난부 번에서 다이묘 일족에 버금가는 가문이었고 이는 메이지 유신 이전에 아시가루라는 최하급 무사여서 조슈 번 내에서 각계계층이 전부 참여할 수 있는 기병대에 들어갔던 야마가타 아리토모보다도 출신이 좋았다는 얘기다. 하지만 난부 번은 1868년 보신전쟁에서 삿초동맹이 주축인 메이지 신정부에 대적했다가 조정의 적, 즉 조적이 되어버려 이후에도 난부 번 출신자들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 와중에도 하라 다카시는 기자 생활과 외무성을 거쳐 무쓰 무네미쓰의 신임을 얻어서 출세하였고 정우회 창당에서 실무적인 역할을 하며 능력을 인정받게 되어 유력 인사 위치에 오른 것이었다.
한편 다나카 가쿠에이는 니가타 현 출신으로 고작 중졸이라는 학벌로 건설회사를 통해 인생 승리를 이뤘고 정치권에 들어오며 서민적인 총리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엄청 받았다. 하필이면 경쟁자가 후쿠다 다케오라는 도쿄제국대 법대를 졸업해서 고등문관시험을 보고 대장성에서 매번 출세를 거듭하던 정석 그 자체인 엘리트 정치인이었는지라 더더욱 비교가 되었고 그래서 다나카는 "자신의 피에 흐르는 서민성"이라는 걸 노골적으로 강조할 수 있었다. 이런 걸 보면 하라 다카시나 다나카 가쿠에이나 전국시대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자수성가에 성공해 통일의 주역이 된 인물과 인생사에 공통점이 있긴 한 것 같다.
다나카 가쿠에이는 <일본열도 개조론>을 제시하였는데 이를 통해 다른 후보들과 차별화하고자 했다. 그는 고도성장 둔화에 따른 문제점을 해소하고 내수 확대를 통해 성장을 지속하고자 하였는데 산업구조의 지식산업으로 이행하기 위한 대도시로부터 새로 구축할 지방 내륙형 공업도시 이전, 소재형 거대 산업도시 조성을 통한 중화학공업 성장 도모, 대도시부터 내륙 공업 도시를 거쳐 거대 산업 단지를 연결하는 고속도로, 신칸센, 석유 파이프라인 건설이 바로 <일본열도 개조론>의 주된 핵심 내용이었다.
다나카는 이러한 토건 국가화를 통해 대도시에 집중된 경제성장의 혜택을 지방으로 분산해 내수를 확대하고 동시에 도시와 지방 간 생활 격차를 해소해 고도성장 혜택에서 벗어나 있는 저소득층을 끌어안는 시도를 하려 했다. 한마디로 경제적 이익의 횡적 분산과 국토 및 인구의 균형 발전을 동시에 잡으려 한 것이다. 이처럼 다나카의 <일본열도 개조론>은 이케다, 사토가 확립한 시장경제를 바탕에 두면서도 평등과 재배분을 강조하는 사민주의적 요소를 도입해 경제 대국 성장을 놓치지 않기 위해 재분배를 같이 하는, 발전된 보수 본류의 경제적 방향성이었다.
놀랍게도 하라 다카시도 비록 사민주의적 요소는 없었지만 지방의 사회간접자본을 확대시켜 지방 이익을 정교하게 배양해 균형발전스러운 정책을 하기도 했다. 물론 이건 철도, 도로 등 교통 인프라 정비가 우선이긴 했지만. 이것의 목적은 이익유도를 통한 지지층 확보인데 실제로 정우회의 당세 확장에 크게 도움되긴 했다. 또 지방 표심에도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철도 노선이 자기네 지역구에 마구잡이로 부설하면서 엉망이 되었고 도쿄 시의혹사건, 만철 회계 부정 사건 등 정우회와 연관된 부패 사건이 터지는데도 하라의 통제가 불가능할 지경이 되었다. 하라 본인은 청렴결백한 정치인이었고 리더쉽이 뛰어났으나 세력을 너무 급격히 키우는 바람에 자신도 손쓸 수 없게 되었고 결국 본인까지 부패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다나카도 급격히 세력을 확장하던 정치인이었다. 따라서 최대한 같은 편을 늘리기 위해서라도 정치자금을 뿌리는 건 관례처럼 막 했으며 오히라 이후에도 스즈키 젠코를 거쳐 나카소네 내각 성립 때까지 막후에서 관여할 정도였다. 이미 총리직에서 내려온지 한참 되었지만 1980년 말 중의원이 56명이던 다나카파는 1981년에 62명이 되었으며 스즈키 내각 말기에는 중의원 65명, 참의원 43명 등 총 108명의 인원을 거느릴 정도가 되었고 특히 다나카는 자민당 외에도 관료, 경단련과 유착해 전국토를 공사장으로 만들고 이 과정에서 엄청난 이권을 미끼로 지역토호들을 모조리 자민당의 지역조직으로 끌어들였는지라 하라 다카시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세력이 너무 비대했다. 어찌보면 오늘날 일본 정치에서 자민-관료-경단련이라는 카르텔이 너무 뿌리 깊게 자리잡은 건 다나카의 탓도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하라 다카시가 암살당한 것처럼 다나카 가쿠에이도 마지막이 좋지 못했는데 1983년 10월 록히드 사건 1심 판결에서 징역 4년, 추징금 5억 엔을 선고받고 나카소네 총리가 다나카의 정치적 영향력을 배제한다는 총재 성명을 발표한 것이 발단이었다. 다나카가 실형으로 차기 총리의 꿈이 물건너간 상황에서 측근이었던 다케시타 노보루가 소수 인원을 모아 비밀 회동을 가지고 창정회를 창설, 통수를 치며 다나카파를 이탈한다. 다나카는 그 상황에서 뇌경색으로 쓰러지고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며 측근인 다케시타 노보루가 자신의 세력을 흡수한 걸 바탕으로 경세회를 이끌어가게 된다.하라 다카시나 다나카 가쿠에이나 비상한 재주를 가지고 그 시대의 정치판을 뒤흔들었던 거물이었지만 말로는 둘다 좋지 않았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예나 지금이나 엘리트 정치가들이 정치를 주도하는 나라이다. 세이케이 대학을 나온 아베 신조가 2류 대학을 나온 학벌이 부족한 정치가인 상황을 보면 일본 정치계에는 고학벌들이 차고 넘쳐있다. 아베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는 도쿄제대 법학부 졸업자이며 후쿠다 타케오도 마찬가지였다. "펀쿨섹" 같은 한일 양국에서 개그캐로만 소비되는 고이즈미 신지로도 전직 총리를 아버지로 두고 있으며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딸 만큼 기본적으로 스펙과 집안 자체가 꿇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렇듯 일본 정치판 자체가 뭐 한국도 마찬가지다만 기본적으로 첫 제국 의회 선거가 실시되는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철저한 엘리트 정치다.
그런 만큼 하라 다카시와 다나카 가쿠에이라는독특한 캐릭터는 다른 나라는 물론이고 일본에서도 나오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또 그들은 악착같이 살아온 인생 만큼이나 자신이 속한 정치 집단 내부에서도 상당히 과격하지만 급진적인 방향성을 선보였고 동시에 단순히 이상만 앞선게 아닌 현실적으로 목표를 쟁취할 수 있는 수단을 끊임 없이 강구하였다. 물론 최종적으로 너무 감당 불가능할 정도로 세력이 비대해지며 부패하긴 했지만 그래도 하라와 다나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자면 그 꽉막힌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게임판에서 획기적인 대안을 주장하였고 이상과 현실을 적절히 조화할 줄 아는 정치가 다운 정치가였다는 것이다.
p.s. 사실 이 브런치에 2021년도에 썼던"일본 역대 최악의 총리 TOP 5"에서는 다나카 가쿠에이도 순위에 있었지만 지금 와서는 조금 생각이 바뀌었다. 관료, 경제계와 해먹은 것도 많기에 부패한 건 사실이고 또 자민당 특유의 밀실 정치를 고착화시킨 사람이긴 하지만 <일본열도 개조론> 같은 정책 방향성 만큼은 혁신적이었다고 볼 만한 여지가 크다. 뭣보다 인간적으로 호탕한 매력도 있었고 엘리트 주도 정치판에 도전장을 내민 몇 안되는 평민 정치인이었다는 점에서 예전보다는 재평가를 하는 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