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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Sep 16. 2023

일본인들의 메이지, 다이쇼 긍정 사관에 대한 고찰

"메이지 예찬론"과 "다이쇼 로망"의 현실

https://youtu.be/K_xTet06SUo?si=CaOOnXARW8E3Y6mV

시바 료타로는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국민 소설가다. <료마가 간다>를 저술하여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 조슈 번 유신지사들이나 사이고 다카모리 같은 사쓰마 번 인사에 밀려나 있던 사카모토 료마라는 삿초동맹 창설의 숨겨진 공신을 발굴한 것은 그였으며 <세키가하라>라는 작품에서는 이 전투의 승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아닌 이시다 미츠나리라는 패자를 재조명하기도 할 만큼 일본 역사관의 재평가를 주도했다. 특히 <언덕 위의 구름>이라는 러일전쟁 당시 육해군 장교로 참전한 아키야마 형제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은 시바 특유의 "(쇼와 제외) 밝은 제국 시대"를 상징하는 작품으로써 이게 일본인들이 여전히 메이지 시대에 대해서 환상을 가지는 것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이는 아베 신조 및 자민당 내 보수 방류 인사들의 역사 인식과도 상관이 크다. 아베 신조는 2015년 "아베 담화"라고 불린 전후 70주년 기념 담화에서 "일러전쟁은 식민지 지배 하에 있던 많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인들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물론 그 후에 뒤에서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들에게 가늠할 수 없는 손해와 고통을 우리나라가 안겨 준 사실, 역사란 실로 돌이킬 수 없는 가혹한 것입니다"라며 고노 담화 이래 역대 일본 정부의 입장 자체는 계승하겠다고 하긴 했지만 여기에는 일본인들이 과거 일본 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잘 드러나고 있는 부분이다. 쉽게 요약하자면 일본인들은 제국 말기 15년의 전쟁(중일전쟁 이후)에 대해서는 빼도 박도 못할 악행인 건 부정하지 않지만 적어도 그 이전의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그리고 다이쇼 시대까지는 밝았던 시대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단 이 글에서는 한국인의 관점에서 일본 근대사를 논하진 않을 것이다. 어차피 우리나라에서 초등학교라도 다녔던 사람이라면 한국사의 기본적인 흐름은 배웠을 것이고 당연히 일제가 국권 강탈하고 조선 사람들을 이등신민으로 부려먹은 건 모를 수가 없다. 한국인들의 관점에서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사를 비판하는 것이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도덕적인 접근법만으로 저 놈 나빠요 라며 감정적으로 욕하는 것보다는 가해 측 입장에서 그런 행위를 함으로써 얻게 되는 마이너스 요소 같은 이면을 파고 드는 것을 더 선호하는 편이다. 또 우리 입장을 넘어서 일본이라는 나라의 입장에서도 바라봄으로써 더 이해가 빨라지는 부분도 있고.

우선 일본도 조선 못지 않게 백성에 대한 착취가 심한 나라였다. 그래도 조선은 중앙 집권 국가이긴 했지만 일본은 에도 막부 때까지 봉건제 국가였고 당연히 세금 수취율은 매우 높아서 기본적으로 생산량의 60%를 다이묘에게 빼앗겼다. 봉건제 국가 특성상 다이묘들이 이것저것을 명분으로 세금 삥 뜯기 더 좋은 환경이었던 것은 물론이고 오죽하면 메이지 이전까지 육류 섭취 금지령이 있었기도 했다.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세금 수취율이 높았고 육류까지 제한당해 식량이 극도로 제한되는 상황 속에서 일본인들은 훗날 "마비키"라고 불리는 영아 살해 악습으로 자발적으로 인구를 제한하였고 궁핍한 사정 덕분에 에도 막부 시기 동안 수천 건의 "잇키"라 불리는 농민 반란이 전국 각지에서 벌어졌다.


다만 1차세계대전 중에 일본 경제가 호황 국면에 접어들게 되면서 농촌 경제도 성장세에 들어서긴 했다. 도시 팽창으로 농작물 수요가 급증하고 농산물 가격이 큰 폭으로 올랐으니 말이다. 뿐만 아니라 상공업의 발전과 인력 부족은 농가로 하여금 부업이 가능한 기회를 제공했다. 또한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그동안 넘쳐났던 농촌 인구가 조절이 됨에 따라 농촌 경제는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농촌과 도시 생활 수준이 격차가 심해진다거나 1920년 1석에 48.56엔 하던 쌀 값이 훗날 1931년에 가서는 18.46엔으로 급락하기도 했다.


결국 1차세계대전 종료 후 공장들이 줄줄이 도산하면서 해고된 노동자들이 귀농하는 바람에 노동력이 다시 넘쳐나게 되었는데 1925년 이후 귀농자 수는 해마다 25만에서 30만에 달해 잉여 농업인구가 농촌의 자기착취라는 악조건을 만들었다. 또 농촌 인구의 부업 수입 감소까지 이어지면서 농가의 부채총액은 1930년 기준 40억 엔을 넘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전성기였던 1917년에는 소작쟁의가 85건이었던 반면 정당 내각이 몰락할 시점, 즉 만주사변과 5.15 사건과 비슷한 시기인 1933년에는 4,000건이 넘어섰다. 최종적으로 쇼와 시대 초입부에 도호쿠 대기근이 발생하고 농민의 고통은 더욱 커졌으며 이때부터 식량을 해결하기 위해 각 가정은 딸을 유곽에 팔아넘겼고 결식하는 아동이 속출했는데 이게 일본 군국주의 폭주의 원인 중 하나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막장인 농촌 상황은 1920년대가 되어도 나아지지 않아서 1930년에는 기어코 수입이 적자를 기록하기에 이른다. 게다가 1920년대 이후 정부가 조선 쌀을 거의 꽁으로 일본 본토에 들여왔고 당연히 소비량은 변함이 없는 것에 비해 공급량이 2배 가량으로 너무 많아져서 쌀값이 폭등했다. 이것이 우리에게도 익숙한 산미 증식 계획이었으며 쌀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농민들은 빈곤층으로 내려앉고 심지어 중소지주들마저 몰락해 결국 그들도 소작농이 되어버린다. 1941년 정부의 조사에는 전체 농민의 71%가 소작농이라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또 하나 재미있는 점은 일본 제국은 근대 국가를 표방했지만 천황제라는 왕권신수설과 함께 소작제라는 봉건적 잔재가 유지되고 있었다는 부분은 결국 반(半) 봉건 국가임을 입증하는 근거라고 볼 수 있다.

<언덕 위의 구름>의 시바 료타로와 "아베 담화"의 아베 신조가 일방적으로 찬양한 메이지뽕의 정수 러일전쟁도 사실 이를 계기로 식민지배까지 이어지게 된 한국 뿐만 아니라 일본인의 입장에서도 어두운 면들은 꽤나 많았었다. 청일전쟁의 시모노세키 조약과는 달리 포츠머스 조약은 배상금 한 푼도 받지 못한 채 끝났고 전시에 막 발행했던 전시 국채는 재정에 매우 커다란 부담이었다. 더욱이 러시아를 꺾고 일본이 제국주의 열강에 끼어들면서 군비증강, 재정정리, 기업개혁, 식민지 경영, 대륙 이권기업 확대 등 과다한 투자를 소요하면서 안 그래도 아직 허약했던 일본 경제를 박살내어 1차세계대전 이전까지 외채에 의존하는 신세로 전락시켰다. 즉 국제수지가 악화되면서 외채의 원리금 상환을 위해 또 다시 외채를 끌어오는 악순환 고리가 거듭되면서 불황이 만성화되어 파탄 직전에 몰렸다가 때마침 유럽에서 1차세계대전이 벌어지면서 다시 부흥한 게 "다이쇼 로망"의 진짜 모습이었다.


게다가 메이지 말~다이쇼 초기까지 일본의 재정 구조는 굉장히 군국주의적이었다. 러일전쟁 당시 가쓰라 내각은 비상시 특별세법에 따라 1억 2,500만 엔의 증세를 단행하고 이듬해 연말까지 폐지하기로 약속했지만 전후 첫 의회에서 이 약조문을 삭제하고 항구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국가재정 지출은 1907년의  경우 6억 3,600만 엔이었는데 3분의 1이 군비 및 다른 3분의 1이 전시공채였고 행정, 교육, 교통, 생산 사업 등 내정적인 국정 운영에 관한 경비는 고작 나머지 3분의 1이었다. 참고로 1907년 당시 국민소득에 대한 세출 부담률은 21%였는데 이건 다른 제국주의 열강들보다도 높았다. 러일전쟁 승리 이후부터 강화 반대 운동인 히비야 폭동을 시작으로 1908년 악세반대운동 등 정부의 가혹한 수취 제도에 맞선 반정부 운동들이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며 파탄 직전인 경제 뿐만 아니라 정치 자체도 엉망이 되어버렸다.


그나마 1차세계대전이라는 천운 중에서도 천운 때문에 일본 경제는 전쟁 특수로 잠시 호황을 누렸지만 그마저도 전쟁이 끝나고 연합국으로부터 전쟁 물자 주문이 중단된 것도 모자라 대전 중 독일로부터 빼앗은 산둥성 이권 및 21개조 요구 문제로 중국 대륙에서 반일 운동이 곳곳에서 벌어지면서 성장일로의 수출이 꺾이기 시작했다. 1920년에는 벌써부터 주식 시장과 상품 시장이 박살나버렸고 1923년 관동 대지진은 13만 3,000명의 인명 피해와 65억 엔의 재산 피해를 내며 불황 중에 더 경기를 악화시켰다. 결과적으로 다이쇼에서 쇼와로 연호가 바뀐지 약 1년 만인 1927년에 대규모 금융공황이 발생하여 37개의 은행이 줄이어 휴업에 들어가버렸다.

종합하자면 메이지 시대 말기부터 다이쇼 시대, 더 나아가 쇼와 시대 초기까지로 이어지던 일본 제국이 표면적으로 잘 나가던 시점으로 평가받던 때에조차 딱히 평범한 일본 소시민의 관점에서 다른 열강들보다 살기 좋은 나라는 아니었다는 얘기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래 제국주의 열강으로 급부상했지만 1인당 소득은 1913년 기준 여타 제국주의 열강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했으며 경제규모는 인구에 비해 딸리는 수치인 9위에 안착한 상태였다. 물론 이것도 긍정적으로 보자면 다른 아시아 지역, 특히 인도 같은 낙후된 식민지 지역에 비하면 2배 이상은 일본인들이 더 부유했던 것은 사실이긴 한데 그래도 오늘날 GDP 3위의 경제대국 일본에 비하면 제국 시절 일본의 평균 생활수준은 한참 모자란 편인 건 사실이었다. 그런 부분에서 일본 제국을 정확하게 평가하자면 어디까지나 아시아에서 가장 근대화된 국가였지, 다른 제국주의 열강보다 더 특별히 앞서가던 국가는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일본인들의 근대사 인식대로 러일전쟁으로 인한 변화가 나비효과로 이어져 곧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원류가 되었느냐, 하는 부분인데 일리가 있는 말이긴 하고 어느정도 사실인 부분이 없잖아 있다고 본다. 강화반대운동을 기점으로 반정부 운동이 활성화되었고 요시노 사쿠조 같은 민본주의를 제창하는 사상가들이 전면에 등장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러일전쟁은 메이지뽕인 시바 료타로도 인정할 정도로 일본이 맛탱이가 간 계기가 되었다는 이면도 공존한다. 일단 정치와 밀접한 군사학적 측면에서 보자면 러일전쟁 당시의 백병 돌격 경험이 1909년 <보병조전>을 시작으로 1910년 <야포병조전>, <치중병조전>, 1912년 <기병조전>이 만들어지면서 황국 독특 군사학, 즉 백병주의 전술이 자리잡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게 나중에 <통수강령>, <전투강요>라는 장비가 열악하고 수가 적은 군대라도 필승의 정신력만 있으면 된다는 일명 "옥쇄론"으로 이어지게 되기 때문.


또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원류다 이것도 지극히 결과론적인 얘기지, 러일전쟁이 일본 민주정치에 직접적인 영향을 줬는가라고 묻는다면 당장의 연결고리는 크지 않다. 물론 가쓰라 다로 이후 사이온지 긴모치 내각이 들어서면서 상대적이지만 자유주의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던 것은 사실이다만 그조차도 얼마 못가 1910년 대역사건이 벌어지며 대대적인 공안정국이 형성, 사실상 파토난다. 이때 고토쿠 슈스이를 포함해 수백 명의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이 천황을 암살하려 했다는 이유로 체포당했으며 그 중 24명이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렇기에 원로인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중심으로 사회주의 정당은 커녕 정당 내각조차 제한당하던게 당대 일본의 현실이었고 1918년이 되서야 러시아 혁명이 벌어져 사회주의에 대한 공포가 생겨나고 쌀 소동까지 벌어진 후에 드디어 하라 다카시를 중심으로 첫 정당 내각이 생기게 된 것이다. 러일전쟁이 1905년에 끝났으니 1918년까지 약 13년이 흐른 후에야 민주정치가 본격적으로 개시된 것.

일본인들에게는 어두웠고 자신들의 악행이 절정에 달했던 전전 쇼와 시대에 대해서는 의외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렇게 대놓고 부정하진 않는다. 그 고이즈미 준이치로도 2005년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하여 반성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었고 아베 신조조차도 은근슬쩍 어물쩍 넘어가려고 해서 문제인거지, 일본이 과거에 가늠할 수도 없는 고통과 손해를 주변국에게 안겨주었다는 사실 자체는 인정하던게 2015년 아베 담화의 내용이었다. 일례로 일본인들에게 여론조사를 해도 제국주의 시절에 대한 평가는 굉장히 좋지 않게 나오며 그때보다 전후의 민주일본이 훨씬 낫다고 평가하는게 과반수다. 따라서 일본의 평화헌법 개정과 재무장도 전전 시대의 군국주의의 부활보다는 현실적인 안보 문제가 원인에 더 가깝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메이지, 다이쇼 시대에 대해서는 그 시절로 되돌아가길 원하진 않으면서도 묘하게 쉴드치는 듯한 모습이 공존한다. 사실 이건 일본의 역사적 정통성 문제와도 상관이 있는게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첫 근대 정부는 일본 제국이었기 때문이다. 독일이야 나치 독일이나 빌헬름 2세 치하의 독일 제국을 부정하더라도 비스마르크라는 이들보다 훨씬 정통성이 뛰어난 국부가 존재하기에 나치 청산에 더더욱 열을 올릴 수 있던 탓도 있었다. 반면 일본에게 일본 제국 자체를 부정한다면 남는 것은 근대 국가 형성 이전 에도 막부 밖에 안남는데다가 일단 일본 국기인 일장기가 일본 제국에서 물려받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들이 무조건 일본 제국의 모든 시대를 부정하기란 힘들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그래도 평가가 덜 나쁘고 덜 폭주하던 메이지, 다이쇼 시대를 좋게 평가하는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건 분명히 해야 할 점이 일본 제국이라는 나라는 소수의 화족들이나 특권층을 제외한 나머지 국민들에게는 비참함을 안겨다 주었던 체제였으며 근대화 해줄거라고 약속했던 외지인은 커녕 내지인의 권리조차도 제대로 신경써서 챙겨주지 못하는 나라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대도시의 일부만 문명개화를 누리고 풍족하게 살았다는 얘기이며 주권은 국민도 하물며 국가도 아닌 "현인신" 천황에게 있었고 번벌에서 정당 내각을 거쳐 군부로 이어지는 역대 정부들도 민생 개선보다는 오로지 영토 확장과 대외 팽창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이것이 일본 제국이라는 나라가 근본적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던 이유였으며 "메이지 예찬론", "다이쇼 로망"으로 대표되던 환상은 대부분의 국민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여담으로 이 시기에 대한 환상의 실상을 보다 그냥 겉핥기로라도 보고 싶으면 다이쇼 시대 다룬 작품인 만화 <귀멸의 칼날>에서 주역 인물들이 과거에 어떠한 삶을 살다가 귀살대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보면 조금 이해가 갈 수도 있을 것 같다.


참고 문헌:


마쓰오 다카요시, <다이쇼 데모크라시>, 소명출판, 2012

나리타 류이치, <다이쇼 데모크라시: 데모크라시가 제국 일본을 동요시켰다>, 어문학사, 2012

한상일, <제국의 시선: 일본의 자유주의 지식인 요시노 사쿠조와 조선문제>, 새물결, 2004

한상일, <쇼와 유신>, 까치, 2018

미쿠리야 다카시, <일본의 정당정치는 왜 무너졌을까>, 소명출판, 2023

와다 하루키, <러일전쟁 1,2>, 한길사, 2019

나카츠카 아키라, <시바 료타로의 역사관>, 모시는사람들, 2014

김종식, <1920년대 일본의 정당정치>, 제이앤씨, 2007


p.s. 아베 담화 전문 궁금한 사람 위해서 링크도 하나 걸어두겠음.


https://www.kr.emb-japan.go.jp/what/news_2015081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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